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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보다 150년 앞선 백과전서

淸潭 2007. 4. 14. 12:21

서양보다 150년 앞선 백과전서

 

3. 한국의 전통과 근대 ⑤ 이수광 ‘지봉유설’
이수광의 친필 서신.
디 드로, 달랑베르. 이름쯤은 한 번 들어보았을 것이다. ‘백과전서’를 편찬하여 계몽사상을 집대성하고 그것의 보급에 공헌한 사람으로 기록된 18세기 프랑스 학자들이다. 학창시절 서양에서는 중세의 억압에서 벗어나 근대로 변신하는데 공헌한 학자들이 많은데, 우리는 뭐지? 라고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150년이나 앞선 시대에 출현한 학자 이수광을 떠올리면 흐뭇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 조선에는 이미 17세기에 근대적 지성의 출현을 알리는 문화백과사전 ‘지봉유설’이 쓰여 졌다.

선조에서 인조에 이르는 17세기 조선은 정치적, 사회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닥쳐오는 시기였다. 안으로는 성리학 중심의 폐쇄적인 국가로 치닫고 있었고, 밖으로는 임진왜란과 북방 여진족의 흥기로 국제적인 세력판도가 재편되고 있었다. 이수광(1563~1628)은 이런 시대에 태어나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중흥을 위한 사회·경제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스스로 무실(務實)의 학문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이수광은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런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지봉유설’에서 우선 돋보이는 것은 외국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이다. 중국으로의 사행 경험은 뛰어난 국제적 안목을 갖추게 했다. ‘외국’조에는 안남에서 시작하여 유구·섬라·일본·대마도·진랍국(캄보디아) 등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역사, 문화, 종교에 대한 정보들과 함께 아라비아(회회국·回回國) 및 불랑기국(佛浪機國·포루투갈), 남번국(南番國·네덜란드), 영결리국(永結利國·영국) 등 유럽에 대한 정보까지 소개되고 있다. 이들 국가에 대해서는 자연환경, 경제상황, 역사, 문화, 종교 등을 가능한 객관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지봉유설’의 저술 동기 중 보다 우선된 것은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서문에서 이수광은 ‘우리 동방의 나라는 예의로써 중국에 알려지고 박아(博雅)한 선비가 뒤를 이어 나타났으되 전기가 없음이 많고 문헌이 찾을만한 것이 적으니 어찌 섭섭한 일이 아니랴. 내가 보잘 것 없는 지식을 가지고 한두 가지씩을 적었다’고 하였다. 뛰어난 인재와 역사적 전통이 있었던 나라, 그러나 그 흔적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현실에서 이수광은 법고창신(法古創新·옛 것을 모범삼아 새 것을 창출함)을 다짐했다. ‘지봉유설’에는 시종일관 ‘법고창신’의 정신이 관통한다. 우리나라가 군자국이라는 점과 동방은 전통적으로 착한 품성을 가진 곳임을 강조하고, 우리의 역사·지리·전통·문화·인물의 뛰어난 점들을 부각시켰다. 성리학 이외에 도가나 불교 등 이단사상의 필요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으며, ‘문장부’에서는 승려·천민·여성들의 행적까지 소개하였다.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들어와 ‘천주실의’를 소개한 사실을 기록한 부분은 대외적인 개방성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신병주
‘지봉유설’은 당대까지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총합된 문화백과사전이었다. 세계문화 수용에 진취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전통의 중요성을 결코 놓치지 않은 고전이기도 하다. ‘지봉유설’을 이어 출현한 ‘반계수록’, ‘성호사설’, ‘오주연문장전사고’ 등 백과사전적 저술은 이수광의 선구적인 모습에 화답을 하면서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조선의 지적 역량을 보여줬다. 전통문화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세계에 대해 열린 시각이라는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지봉유설’이 현시점에서도 큰 의미로 다가서는 것은, ‘국제화’의 화두에만 사로잡혀 선조들이 쌓아 온 전통이나 역사를 우리 스스로가 무너뜨리고 있는 현실과 대비되기 때문은 아닐까?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