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물상들은 사실 지구의 전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겉모습만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 왔을 뿐 실제로는 50억 년 전에 이 지구와 함께 태어났을 겁니다. “강가의 돌 하나에도 우주의 전 과정이 새겨져 있다”(11쪽)는 말을 부인할 도리가 없는 것이지요. 오랜만에 묵직한 소설책 한 권을 권해드립니다. 오쿠이즈미 히카루스(奧泉光)의 ‘돌의 내력’(문학동네)이란 작품입니다. 1993년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이 소설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진 삶의 비극성,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우주적 호흡과 리듬의 역사에 대해 말하려는 듯 합니다.
주인공은 암석 수집벽을 가진 서점 주인입니다. 그는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서 어느덧 지질학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전문가가 돼 갑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군인이었는데 남양군도의 레이테 섬에 있는 동굴에 갇힌 채 지옥 같은 생활을 한 체험을 갖고 있습니다. 마나세가 암석 채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동굴에서 만났던 어느 상등병의 얘기에서 비롯됐습니다. 그 상등병은 죽기 전에 “암석이란 지구의 역사를 응축해 놓은 것”이란 말을 마나세에게 들려줍니다.
마나세의 어린 아들 히로아키 역시 돌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합니다. 아버지 마나세는 이런 아들의 모습이 대견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아들은 어느 날 동굴 탐사를 갔다가 온몸이 난자 당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살인범에게 당한 것입니다. 이후 마나세의 아내는 정신분열에 가까운 파탄 증세를 보이다 알코올에 빠져들고 급기야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됩니다. 아내는 남편을 증오합니다. 그들에게는 이 소설의 작은 주제처럼 ‘고독한 증오’와 ‘어두운 분노’가 따라다닙니다.
이 소설의 묘미는 암석을 채집하는 과정과, 채집된 암석을 다시 얇게 자르고 문지르고 광택을 내서 현미경 관찰이 가능한 결정체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입니다. 과학적 탐사에 대한 흥미진진한 서술들, 독자의 평범한 감각으로부터 동떨어지지 않으려고 쉽게 쓴 문장들, 이와 함께 앙드레 말로의 ‘왕도의 길’을 느끼게 하는 탐미적 동선들이 흥미로운 공감을 자아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 요즘 일본 소설이 참 많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한 달에 50종 가까이 번역 출간되는 해외 소설책 가운데 절반 정도가 일본 소설입니다. ‘돌의 내력’으로 다소 무거워지셨다면 그 해소용으로 마이조 오타로(舞城王太郞)의 장편 ‘아수라 걸’(황금가지)을 권해드립니다. 2003년 미시마 유키오 상을 받은 이 작품은 왜 한국 독자들이 일본의 현대 소설에 푹 빠져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을 만큼 전형적인 일류(日流)의 플롯과 문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래서 한번 해 봤는데, 닳아 버렸다. 내 자존심이.’(9쪽)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아이코라는 여고생이 주인공입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동급생과 섹스를 나눈 뒤 자기혐오에 빠진 아이코는 진정 자신에게 맞는 남자는 누굴까 고민에 휩싸입니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의 범죄와 폭동, 저승 판타지 같은 요소가 주인공의 의식을 파고들어 한데 얽힙니다. 책 뒷장에는 ‘백만 볼트의 충격과 속도감’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요즘 소설을 고를 때는 매우 무겁거나, 아주 가볍거나 둘 중 하나로 내몰릴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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