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책 속의 향기

대변인은 ‘굶주린 사자 떼’의 밥

淸潭 2007. 1. 20. 11:22
대변인은 ‘굶주린 사자 떼’의 밥
 
대변인

애리 플라이셔 지음|이승봉 옮김|커뮤니케이션북스|544쪽|1만9000원

미국 연방정부 기관이 밀집한 워싱턴에서 제일 흥미진진한 말싸움을 보려면 백악관 기자실로 가면 된다. 곳곳에서 정례 브리핑과 기자회견과 토론회가 열리지만, 단연 돋보이는 곳이 백악관에서 매일 열리는 정례 언론브리핑이다. 특히 뭔가 심각한 사건이 있을 때 브리핑 룸의 열기와 야성은 누구도 못따라간다. 어떻게 하든 정부가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사실을 캐내려고 달려드는 기자들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사가 될 만한 이야기는 노출하지 않고 싶은 대변인과의 머리싸움이 벌어진다. 백악관에서 대통령 다음으로 어려운 자리가 대변인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미국 언론계에서 제일 거칠고 똑똑하다는 백악관 출입기자들과 상대해야 하는 직업이니 오죽하랴. 대변인들은 매일 ‘굶주린 사자 떼’의 밥이 될 각오로 브리핑 장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봐, 애리!” “애리!” “애리!” 조지 W 부시 대통령 1기 때 브리핑룸에서는 기자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애리 플라이셔 대변인을 부르곤 했다. 대변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매일 오전 백악관 참모회의에서 정한 지침에 따라 대통령의 입장을 설명한다. 그래서 은퇴 후에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느라 책을 쓰는 모양이다.
플라이셔는 ‘똘똘한 능청꾸러기’였다. 아까 했던 말과 똑같은 내용을 마치 새로운 이야기인 것처럼 진지하게 반복하는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 의회에서 의원들의 언론담당 보좌관으로 잔뼈가 굵었다. 쉽게 흥분하는 성격도 아니다. 웬만해서는 기자들이 쳐놓은 질문의 덫에 빠지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기자들이 “도움이 안된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2001년 3월 비 내리는 어느 날 부시 대통령이 애리 플라이셔 당시 백악관 대변인의 머리를 가려 주고 있다. /사진=커뮤니케이션북스 제공

늘 여유있고 자신만만해 보였던 플라이셔도 억울하고 서운한 점이 많았던 모양이다. 부시 대통령의 종합적인 에너지 정책이 발표됐을 때 백악관 기자들은 단기대책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의료보장제도 관련 계획이 발표됐을 때는 ‘일회용 반창고’ 같은 미봉책이라고 몰아붙였다. 장기대책 발표하면 단기대응이 왜 없냐고 따지고 단기대책 발표하면 장기적인 큰 그림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 언론이다.

플라이셔의 눈에 미 언론은 대통령이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한다고 두들기고, 안하면 안한다고 문제삼는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좋은 뉴스는 하루짜리 이벤트로 취급하는 반면 나쁜 뉴스는 몇날 며칠, 아니 몇주 동안 계속 보도하는 ‘이상한’ 기관이었다.

플라이셔는 백악관 출입기자들의 임무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백악관 인사들과 친분을 쌓으라고’ 월급을 받는 게 아니었다. 뉴스를 커버하는 것이 책임이었다.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든 기자들은 정부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 일부러 반대입장에 서기도 하면서 정부를 견제하는 일을 한다. 플라이셔는 그래도 언론들이 “왜 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라고 한탄한다.

플라이셔가 대변인으로 일한 시기는 ‘전시(戰時)’였다. 부시 취임 반년 만에 9·11 테러가 발생하고 미국은 위기에 빠졌다. 냉전 후 처음으로 안보불안에 시달리게 됐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사실 백악관은 만성적인 위기상태였다. 플라이셔는 “대통령직이 갖는 중요성, 그리고 미국언론의 집요함 때문에 백악관의 하루는 항상 위기상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9·11 직후 대통령과 함께 뉴욕과 워싱턴의 테러현장을 방문할 때만 해도 플라이셔는 자신이 위기상황에 단련돼 감정까지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몇 달 뒤 휴가 중에 혼자 대성통곡을 했다. 쉬고 있으려니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뉴욕과 테러 희생자들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플라이셔는 “정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백악관 출입기자들은 이와는 반대입장을 취한다”고 했다. 그는 백악관 기자들을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 일했지만 믿지는 않았다. 기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부 권력과 언론은 서로 믿지 않는다. 서로 믿지 않기 때문에 건강한 긴장관계가 생기고 국민들의 알 권리가 지켜지는 것이다.

강인선 논설위원 , insu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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