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수덕사 스님들의 법맥

淸潭 2006. 11. 12. 16:54
 

수덕사 스님들의 법맥

▶수덕사

 

수덕사는 5대 총림의 하나일 뿐 아니라 근세 불교의 선맥을 다시 이은

경허스님과 그 제자 만공스님이 주석했던 `선지종찰(禪之宗刹)`로

우리나라 근세 선불교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경허의 선풍(禪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불교가

다시 명맥을 이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수덕사 위쪽에 있는 암자인 금선대는 경허스님과 세 달로 불리는 제자인

만공·수월·혜월 스님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있다.

전국 어느 사찰보다 활달하고 걸림없는 가풍을 지닌 덕숭총림 수덕사는

경허와 만공의 법맥을 잇는 덕숭문중을 이루며 범어문중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양대 맥을 형성하고 있는 당당한 선의 종가이다.

 

 

▲경허(鏡虛)스님(1849~1912)



억불정책을 실시하던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지던 선맥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고려시대에는 엘리트 계층이던 스님들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성 출입도 금지될 정도로 하찮은 대접을 받아야 했다.

스님들은 사찰에서 스스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했기 때문에,

직접 농사를 짓고 집을 짓는 기술을 익혀 품을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1856 년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한양 인근 청계사(淸溪寺)의

주지 계허스님에게 맡겨진 동욱(東旭)의 나이는 겨우 여덟살이었다.

어머니는 형 동석을 마곡사에서 출가시킨 후 막내마저 출가시키려고 청계사로 온 것이다.

스승 계허스님만이 살고 있는 청계사에서 어린 동욱은 밥값을 하기 위해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채마밭을 가꾸면서 5년을 보냈다.

스승 계허는 문자를 전혀 모르는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경이나 외고 복이나 빌어주면서 겨우 연명을 했다.

그러던 중 박처사라는 선비가 청계사에 머물면서 동욱은 훗날의

 `대선사 경허`가 되는 인연의 끈을 잡게 된 것이다.

박처사로부터 글을 배우게 된 동욱은 환속하려는 스승 계허의 소개로

당대의 강백인 동학사 만화화상의 제자가 된다.

그 밑에서 정진하던 경허는 10년 뒤 다른 제자들을 물리치고 동학사 강원을 물려받는다.

훗날 근세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스님이 강백,

즉 교학(敎學)으로 일찍이 일가를 이루었던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치던 경허스님은 17년 만에 스승 계허의 소식을 듣는다.

인편으로 온 소식은 `목수일을 하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크게 다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가던 중 경허스님은 전염병이 돌아

아수라장이 된 어느 마을에서 하루를 묵는다.

연신 사람이 죽어나가는 그 생지옥에서 경허스님은 문자공부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크게 느끼고 그 길로 다시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을 철폐하고 깨달음을 구하기에 이른다.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사미승의 말에 확철대오한 후

오도송을 읊는 순간 한국의 선불교는 재 속에서 다시 불씨가 되어 살아난다.

 

`문득 사람들이 콧구멍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

즉시 삼천세계가 나의 집임을 알았네/

6월 연암산 아래 길에서/

야인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스님은 춤을 추며 오도송을 읊었다.



이듬해 형과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서산 연암사 천장암에서

보림(깨우친 후 그 깨우침을 연마함)에 들어간다.

앞은 바다이고 뒤는 산인 천장암은 보림지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먹고 용변을 보는 일 외에는 하루 온종일 잠도 자지 않고

천장암 쪽방에 앉아서 깨우침을 연마하던 경허스님의

몸에는 이가 들끓었지만 스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경허스님은 일체의 걸림이 없는 선기 어린 행동과 법문으로

전국의 선방에 선풍을 일으킨다.

술과 고기를 즐기고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종종 보인 경허스님은

1882년 이후 20여년간 개심사·문수사·부석사(서산)·수덕사·정혜사를 비롯한

숱한 호서지방의 사찰을 돌며 선풍을 일으켰고,

1899년에는 해인사 조실로 추대되어 영남지방의 사찰에도 선기를 불어넣는다.



2003 년 눈이 소복이 쌓인 서산 도비산 부석사에는 100여년전 경허스님이 쓴

현판 `목룡장(牧龍莊)` `심검당(尋劍堂)`과 함께 훗날 칠십이 된 만공스님이 썼다는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 있었다.

수덕사의 말사인 부석사 주지 주경(宙耕)스님은

"만공스님이 경허스님의 시봉을 한 때가 그리 길지 않았는데,

부석사 시절은 젊은 만공스님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밥을 지으며

가장 엄격한 시봉을 들었던 기간일 것"이라고 말했다.

부석사에서 5분 거리의 도비산 중턱에는 경허와 만공이 수행을 했다는 굴이

아직도 남아있어 두 스님의 치열했던 수행과정을 엿보게 한다.



어머니와 형이 있는 천장암에서 보림을 끝내고 어머니를 위한 법문을 하던 날의 일화는

경허스님의 그릇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깨우친 아들을 자랑스러워한 어머니 박씨를 비롯해 구름처럼 몰려든 불자들 앞에서

경허스님은 법상에 올랐다.

좌중을 둘러본 스님은 갑자기 승복을 훌훌 벗어버렸다.

질색을 하는 어머니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경허스님은

"자 보십시오"라고 한 뒤 주장자를 세번 내리치고 법상을 내려왔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 뒤에 가려진 법신(法身)을 보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스님의 걸림없는 무애행(無碍行) 중에는 천장암에 머물던 30대 후반,

속가의 김씨 처자와 사랑에 빠져 1년여간 결혼한 김씨처자를 찾아

그녀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던 일이 전해져온다.

중생의 어리석은 집착 중 하나인 애욕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 무간지옥의 고통을 몸소 느껴 보았던 것으로 후세인들은 짐작할 뿐이다.

 

▲경허스님의 세 제자

경허스님의 제자는 흔히 `세 달(三月)과 말없는 학`이라고 불리는

수월·혜월·만공 스님과 말년의 제자 한암스님이다.

수월스님(水月, 1855~1928)은 1883년 천장암으로 경허스님을 찾아가

허드렛일을 하면서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짚신 삼는 걸 즐겼던 경허스님으로부터 그 기술을 배워

훗날 북간도로 떠나 북녘을 밝히는 경허의 상현달로 일컬어진다.

수월은 백두산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짚신을 삼아 오가는 나그네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짚신을 주어 보내는 무주상보시를 한 것으로 유명한데,

송광사 조실이 된 효봉스님은 한때 수월스님을 찾아가

함께 짚신을 신고 밥을 하면서 약 1년간 말없는 가르침을 전해받았다.



`남녘의 하현달` 혜월 스님은 크게 깨닫고 법인가를 받기 위해 해미

개심사에 주석하고 있던 경허스님을 찾아갔다.

법인가를 받은 후 혜월은 주로 남쪽인 통도사·내원사·범어사·선암사에 주석하면서

아이같은 `천진불`로 불리며 크게 선풍을 떨쳤다.

`중천의 보름달` 만공은 주로 수덕사에,

말없는 학 한암은 주로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며

경허의 선풍을 전국에 펼쳐 나갔다.



만공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초청된 경허스님을 모시고 있을 당시의 일이다.

눈보라가 치던 어느날 밤 경허스님은 한 여인이 눈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조실방인 해행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몇날 며칠을 방에서 나오지 않는 스승을 걱정하던 만공은

조용히 해행당으로 들어가 보고 너무나 놀랐다.

눈 코 입이 모두 썩어 문드러지고 손발이 제대로 없는 나병환자인 여인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훗날 경허스님은 심한 피부병으로 열반 때까지 고생을 했는데,

이 때의 일이 원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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