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공 스님
수덕사 스님들의 법맥
수덕사는 5대 총림의 하나일 뿐 아니라 근세 불교의 선맥을 다시 이은 경허스님과 그 제자 만공스님이 주석했던 `선지종찰(禪之宗刹)`로 우리나라 근세 선불교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경허의 선풍(禪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불교가 다시 명맥을 이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수덕사 위쪽에 있는 암자인 금선대는 경허스님과 세 달로 불리는 제자인 만공·수월·혜월 스님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있다. 전국 어느 사찰보다 활달하고 걸림없는 가풍을 지닌 덕숭총림 수덕사는 경허와 만공의 법맥을 잇는 덕숭문중을 이루며 범어문중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양대 맥을 형성하고 있는 당당한 선의 종가이다.
1.경허(鏡虛)스님(1849~1912)
억불정책을 실시하던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지던 선맥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고려시대에는 엘리트 계층이던 스님들은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성 출입도 금지될 정도로 하찮은 대접을 받아야 했다. 스님들은 사찰에서 스스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했기 때문에, 직접 농사를 짓고 집을 짓는 기술을 익혀 품을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1856 년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한양 인근 청계사(淸溪寺)의 주지 계허스님에게 맡겨진 동욱(東旭)의 나이는 겨우 여덟살이었다. 어머니는 형 동석을 마곡사에서 출가시킨 후 막내마저 출가시키려고 청계사로 온 것이다. 스승 계허스님만이 살고 있는 청계사에서 어린 동욱은 밥값을 하기 위해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채마밭을 가꾸면서 5년을 보냈다. 스승 계허는 문자를 전혀 모르는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 경이나 외고 복이나 빌어주면서 겨우 연명을 했다. 그러던 중 박처사라는 선비가 청계사에 머물면서 동욱은 훗날의 '대선사 경허'가 되는 인연의 끈을 잡게 된 것이다. 박처사로부터 글을 배우게 된 동욱은 환속하려는 스승 계허의 소개로 당대의 강백인 동학사 만화화상의 제자가 된다. 그 밑에서 정진하던 경허는 10년 뒤 다른 제자들을 물리치고 동학사 강원을 물려받는다. 훗날 근세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스님이 강백, 즉 교학(敎學)으로 일찍이 일가를 이루었던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대강백으로 이름을 떨치던 경허스님은 17년 만에 스승 계허의 소식을 듣는다. 인편으로 온 소식은 '목수일을 하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크게 다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가던 중 경허스님은 전염병이 돌아 아수라장이 된 어느 마을에서 하루를 묵는다. 연신 사람이 죽어나가는 그 생지옥에서 경허스님은 문자공부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크게 느끼고 그 길로 다시 동학사로 돌아와 강원을 철폐하고 깨달음을 구하기에 이른다.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사미승의 말에 확철대오한 후 오도송을 읊는 순간 한국의 선불교는 재 속에서 다시 불씨가 되어 살아난다. '문득 사람들이 콧구멍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즉시 삼천세계가 나의 집임을 알았네/6월 연암산 아래 길에서/야인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스님은 춤을 추며 오도송을 읊었다.
이듬해 형과 어머니가 머물고 있는 서산 연암사 천장암에서 보림(깨우친 후 그 깨우침을 연마함)에 들어간다. 앞은 바다이고 뒤는 산인 천장암은 보림지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먹고 용변을 보는 일 외에는 하루 온종일 잠도 자지 않고 천장암 쪽방에 앉아서 깨우침을 연마하던 경허스님의 몸에는 이가 들끓었지만 스님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경허스님은 일체의 걸림이 없는 선기 어린 행동과 법문으로 전국의 선방에 선풍을 일으킨다. 술과 고기를 즐기고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종종 보인 경허스님은 1882년 이후 20여년간 개심사·문수사·부석사(서산)·수덕사·정혜사를 비롯한 숱한 호서지방의 사찰을 돌며 선풍을 일으켰고, 1899년에는 해인사 조실로 추대되어 영남지방의 사찰에도 선기를 불어넣는다.
2003 년 눈이 소복이 쌓인 서산 도비산 부석사에는 100여년전 경허스님이 쓴 현판 '목룡장(牧龍莊)' '심검당(尋劍堂)'과 함께 훗날 칠십이 된 만공스님이 썼다는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 있었다. 수덕사의 말사인 부석사 주지 주경(宙耕)스님은 "만공스님이 경허스님의 시봉을 한 때가 그리 길지 않았는데, 부석사 시절은 젊은 만공스님이 산에서 나무를 하고 밥을 지으며 가장 엄격한 시봉을 들었던 기간일 것"이라고 말했다. 부석사에서 5분 거리의 도비산 중턱에는 경허와 만공이 수행을 했다는 굴이 아직도 남아있어 두 스님의 치열했던 수행과정을 엿보게 한다.
어머니와 형이 있는 천장암에서 보림을 끝내고 어머니를 위한 법문을 하던 날의 일화는 경허스님의 그릇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깨우친 아들을 자랑스러워한 어머니 박씨를 비롯해 구름처럼 몰려든 불자들 앞에서 경허스님은 법상에 올랐다. 좌중을 둘러본 스님은 갑자기 승복을 훌훌 벗어버렸다. 질색을 하는 어머니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경허스님은 "자 보십시오"라고 한 뒤 주장자를 세번 내리치고 법상을 내려왔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 뒤에 가려진 법신(法身)을 보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스님의 걸림없는 무애행(無碍行) 중에는 천장암에 머물던 30대 후반, 속가의 김씨 처자와 사랑에 빠져 1년여간 결혼한 김씨처자를 찾아 그녀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던 일이 전해져온다. 중생의 어리석은 집착 중 하나인 애욕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 무간지옥의 고통을 몸소 느껴 보았던 것으로 후세인들은 짐작할 뿐이다.
2.경허스님의 세 제자
▲경허스님의 세 제자
경허스님의 제자는 흔히 `세 달(三月)과 말없는 학`이라고 불리는 수월·혜월·만공 스님과 말년의 제자 한암스님이다. 수월스님(水月, 1855~1928)은 1883년 천장암으로 경허스님을 찾아가 허드렛일을 하면서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짚신 삼는 걸 즐겼던 경허스님으로부터 그 기술을 배워 훗날 북간도로 떠나 북녘을 밝히는 경허의 상현달로 일컬어진다. 수월은 백두산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짚신을 삼아 오가는 나그네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짚신을 주어 보내는 무주상보시를 한 것으로 유명한데, 송광사 조실이 된 효봉스님은 한때 수월스님을 찾아가 함께 짚신을 신고 밥을 하면서 약 1년간 말없는 가르침을 전해받았다.
`남녘의 하현달` 혜월 스님은 크게 깨닫고 법인가를 받기 위해 해미 개심사에 주석하고 있던 경허스님을 찾아갔다. 법인가를 받은 후 혜월은 주로 남쪽인 통도사·내원사·범어사·선암사에 주석하면서 아이같은 `천진불`로 불리며 크게 선풍을 떨쳤다. `중천의 보름달` 만공은 주로 수덕사에, 말없는 학 한암은 주로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며 경허의 선풍을 전국에 펼쳐 나갔다.
만공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초청된 경허스님을 모시고 있을 당시의 일이다. 눈보라가 치던 어느날 밤 경허스님은 한 여인이 눈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조실방인 해행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몇날 며칠을 방에서 나오지 않는 스승을 걱정하던 만공은 조용히 해행당으로 들어가 보고 너무나 놀랐다. 눈 코 입이 모두 썩어 문드러지고 손발이 제대로 없는 나병환자인 여인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훗날 경허스님은 심한 피부병으로 열반 때까지 고생을 했는데, 이 때의 일이 원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3.만공 스님
13세에 어머니와 금산사에 다녀온 바우(만공스님의 속명)소년은 미륵부처가 업어주는 꿈을 꾸고 나서 식구들 몰래 출가의 꿈을 키운다. 14세에 공주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해 진암(眞巖)스님 밑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다니러 온 경허스님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경허를 따라가라는 진암스님의 말에 처음엔 "싫다"고 거부하지만, 경허의 법문을 듣고난 후 그 자리에서 마음을 바꿔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경허스님은 그의 형 태허스님과 어머니가 머물던 천장암에 바우소년을 데리고 가 월면(月面)이라는 법명을 준다.
바로 이때가 경허의 세 '달'이 모두 함께 천장암에 거하던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훗날 백두산에서 나그네들에게 짚신을 삼아주던 무주상보시로 유명했던 '북녘의 상현달' 수월(水月)스님은 땔나무를 해오는 소임인 부목을 맡고 있었고, 아이같은 천진불로 유명했던 남녘의 하현달 혜월(慧月)스님은 이곳에서 경허스님에게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수월은 30세, 혜월은 23세, 만공월면은 14세였다.
걸림없는 무애행으로 유명한 경허스님과 제자 만공의 일화는 많다. 어느날 무거운 시주 바랑을 짊어진 월면이 경허스님에게 "너무 무거워 쉬었다 가자"고 하자 경허스님은 "무겁지 않게 해주겠다"면서 지나가던 여인의 입을 맞춘다. 여인의 비명소리를 듣고 동네사람이 나와 두 사람을 쫓자 만공은 정신없이 산속 절까지 뛰어갔던 것이다. 경허스님은 빙긋 웃으며 "아직도 그 바랑이 무겁더냐?"고 물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대체 그 한가지 돌아가는 곳이 어디냐)를 화두로 참선에 들어간 스님은 25세에 온양 봉곡사에서 새벽종을 치며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남긴다. '빈산의 이치와 기운은 예와 지금의 밖에 있는데/흰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 왔는가/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엔 해가 뜨네'
이후 스님은 공주 마곡사 토굴에서 수도했으나 경허스님으로부터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지 못했다"는 점검을 받고 더욱 정진한다. 경허스님을 모시고 서산 부석사와 부산 범어사 계명암에서 수도하고 해인사 조실로 초청받은 스승을 시봉한다. 1901년 경허스님과 헤어진 만공스님은 양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재차 깨달음을 얻었다. 1904년 금강산을 거쳐 삼수갑산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하러 떠나는 경허스님께 마지막으로 법인가를 받고 '만공(滿空)'이란 법호를 받는다. 이때 만공은 스승 경허의 헌 담배쌈지와 담뱃대가 맘에 걸려 새것으로 선물했는데, 경허스님은 아이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훗날 글방선생 '박난주'로 임종을 맞을 때 경허는 이 두가지를 꼭 무덤에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아마도 이것이 자신임을 증명할 신표가 될 것임을 내다봤기 때문일 것이다.
1905 년 이후 주로 덕숭산 수덕사에서 주석한 만공스님은 1931년 금강산 유점산 금강선원 조실, 1933~35년 마하연 조실, 1936년 마곡사 주지를 잠깐 맡았을 뿐이다. 만공스님이 마곡사 주지로 있었던 1937년 3월, 총독부는 전국 31본산 주지와 도지사를 모아 미나미 총독의 주재로 '불교진흥책 마련'이란 미명하에 한·일 불교 합병을 획책하는 회의를 주최했다. 이 자리에서 미나미가 "전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자, 만공스님은 벌떡 일어나 "데라우치는 조선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처럼 파계하도록 했으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분연히 소리 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미나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이날 밤 만공스님의 둘도 없던 친구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찾아와 "잘했다"면서 "이왕이면 주장자로 저 쥐새끼같은 놈들을 한방씩 갈겨 주지그랬나"라고 하자, 만공스님은 "미련한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큰 사자는 원래 할(喝, 깨달음을 주기 위해 크게 소리침)을 하는 법"이라고 응수했다. 이때만큼은 한용운도 잠시 말을 잊었다.
만공스님의 시봉이었던 원담스님(덕숭총림 방장)은 "만해 한용운 스님과 김좌진 장군은 자주 수덕사로 놀러 오시곤 했다"면서 "만공스님은 한용운을 가리켜 '내 애인'이라고 종종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만공스님은 거구에 육척장신으로 힘이 장사여서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이길 때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만공스님 주위에는 항상 글쓰고 그림 그리고 소리하는 예인들이 많았다. 남농 허건, 허백련 등 화가들을 비롯해 소리 잘하는 풍류객들도 종종 만공을 찾았다. 만공스님은 그럴 때면 늘 옆에 끼고 있던 '공민왕 거문고'를 타며 함께 풍류를 즐겼다. 스님의 거처였던 덕숭산 소림초당 앞의 작은 다리 갱진교(更進橋)는 달빛을 벗삼아 만공스님이 거문고를 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거문고는 의친왕 이강 공에게 신표로 받은 것으로, 공민왕이 직접 만들어 탄 이후, 대대로 조선왕조에 전해온 왕가의 가보였다. 현재는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거문고의 뒤판에는 만공스님이 지었다는 '거문고 법문'이 씌어있다. '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체(體)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일구(一句)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현현한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돌장승 마음 가운데 겁 밖의 노래로다./아차!'
이 거문고와 함께 성보박물관에는 스님이 일본의 패망을 전해듣고 기뻐하며 무궁화 꽃봉오리를 붓삼아 썼다는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편액도 걸려있다.
만공스님은 말년에 덕숭산에 전월사를 짓고 지내다가 1946년 10월20일 나이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입적하던 봄, 스님은 시봉하던 원담스님을 불러 "더 살면 험악한 꼴을 볼 것이니 올해 시월 스무날쯤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침 목욕 후 거울을 들여다 보며 "자네 나와 이별할 때가 되었네 그려" 하더니 춘성스님에게 법상을 맡긴 후 열반에 들었다.
만공스님의 제자로는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古峰) 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스님, 비구니로는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스님을 들 수 있다.
4.혜암현문(慧庵玄門) 스님
▲혜암현문(慧庵玄門) 스님(1884~1985)
황해도 백천에서 강릉최씨 집안의 독자로 태어난 스님은 11세때 부친상을 당한 후 출가하게 된다. 양주 수락산 흥국사로 출가해 16세에 사미계를, 27세에 구족계를 받은 뒤 이후 만공 혜월 용성 스님을 비롯한 전국의 이름있는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용맹정진했다. 이렇게 운수행각을 벌인 지 6년째 되던 해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나에게 묻는다면 침묵도,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여의고/한마디 이르라면 곧 깨진 그릇은 저절로 맞추지 못하리라 하리라'
제자들의 깨달음을 인가하는 데 있어서 무척이나 엄격했던 만공스님은 1929년 전법게를 내린다. '구름과 산은 같고 다름도 없고/대가의 가풍도 또한 없어라/이와 같은 글자의 인을/혜암, 너에게 주노라'
1943 년 만공스님과 혜암스님이 지금은 육지가 된 서산 간월도로 가는 배위에서 나눈 법담은 유명하다. 만공스님이 혜암스님에게 "저 산이 가는가, 이 배가 가는 것인가?" 묻자 혜암스님은 "산이 가는 것도 아니고 배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그러면 무엇이 가는가?"라고 재차 물음을 던지자 혜암스님은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자네 살림살이가 언제 이렇게까지 되었는가"라며 혜암스님의 경지를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혜암스님은 1956년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었고 30여년간 제자들을 길러냈다. 1984년 100세의 나이로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석하며 해외포교에도 힘을 쏟던 스님은 덕숭총림 초대방장으로 추대됐다. 그 몇달 후 수덕사 방장실로 사용되는 염화실에서 101세로 열반에 들었다.
5.벽초경선(碧超鏡禪) 스님(1899~1986
▲벽초경선(碧超鏡禪) 스님(1899~1986)
경허-만공의 선풍을 계승한 스님은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13세때 탁발나온 만공스님에게 감화받아 부친과 함께 수덕사로 출가했다. 만공스님의 법맥을 그대로 물려받은 벽초스님은 1940년부터 30년간 수덕사 주지를 지내면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선농일여(禪農一如)`의 가풍을 진작했다. 또한 항상 겸손한 태도로 하심하면서 3배의 절을 용납하지 않고 1배이상의 절을 사양했다.
수덕사 포교국장 정암스님은 "벽초스님은 또한 어찌나 만공스님을 철저하게 섬겼던지, 만공스님이 덕숭산에 올라 절벽을 가리키며 `저기 조그만 초가를 지으면 참 좋겠다`고 하자 그길로 연장을 들고 절벽을 다듬어 나가 그림같은 초가를 지어 올렸다"고 말했다. 그 초가가 바로 수덕사에서 10분쯤 올라가면 나타나는 소담한 `소림초당`이다.
또한 수덕사에서 덕숭산 정상 가까이 있는 정혜사까지 1,080개의 돌계단을 손수 쌓았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한 스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공부"라며 말보다는 항상 실천이 앞서는 모습을 보였다. 벽초스님은 사찰의 일뿐 아니라 사하촌의 일에도 항상 앞장서 신자들의 든든한 힘이 되었는데, 동네의 큰 잔치가 있을 때는 그 모든 일을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또한 언제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면서 평생 법상(法床)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았다. 스님은 방장에 취임한 이듬해인 1986년 "장례를 간단히 치르라"는 당부를 하고 수덕사에서 입적했다.
6.원담진성(圓潭眞性) 스님
▲원담진성(圓潭眞性)스님(1926~)
현재(2005년)의 수덕사 방장인 '천진불' 원담스님은 수덕사 옆 견성암 비구니였던 이모를 따라 아홉살에 출가했다. 어려서부터 만공스님 옆에서 시봉을 하며 행자로 지내던 원담스님은 16세에 벽초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출가한 원담스님을 특히 귀여워했던 만공스님이 어린 원담스님의 머리를 주장자로 때리며 깨달음을 주고자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원담스님은 "'만공스님은 내가 맞을 때마다 '아야!' 하고 소리치면 '그 아야 하는 놈을 찾으라'고 하시고는 내가 한참을 그렇게 맞은 후 '그놈이 바로 마음인 것 같다'고 하자 크게 칭찬하며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1970 년대 초반까지 인삼밭에서 농사를 지은 스님은 "신도의 시주에 의지하는 것은 무위도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직접 농사짓는 것을 솔선수범했다. 어려서부터 덕숭산 꼭대기의 전월사로 쌀과 물을 지어 나르던 스님은 "그 무거운 걸 짊어지고 다녀서 그런지 키가 크지 않았다"고 종종 농담처럼 말한다.
원담스님은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는 선지종가(禪之宗家)인 수덕사의 방장답게 누구 앞에서나 거리낌없이 천진한 도인의 모습을 보인다. 60년대 서슬 퍼렇던 계엄시절, 송요찬 장군이 수덕사를 방문했을 때 원담스님은 수덕사의 총무일을 보고 있었다. 그때 송장군의 수행원들이 앞마당에서 "송장군이 오셨는데 내다보는 중도 없느냐?"고 소리치자 원담스님은 "너네 장군이지 우리 장군이냐? 절에 왔으면 부처님께 먼저 인사를 해야지"하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송장군은 슬며시 돌아갔다가 한달 뒤 다시 찾아왔고 그 후로 수덕사의 신도가 되어 범종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을 보시했다.
'도필'로 소문난 원담스님의 글씨는 특히 유명하다. 1986년 일본의 산케이 신문 주최 국제 서예전에서 대상을 받은 적이 있는 원담스님의 글씨를 받아가려고 멀리 전국에서 찾아올 정도였다. 수덕사 스님들은 "한때는 '인근 경찰서에서 원담스님 글씨를 얻기 위해 스님들이 운행하는 차를 국도에서 집중단속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소개했다.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아 글씨를 예전처럼 쓰기가 힘들다고 한다. 방장실인 염화실에는 스님이 직접 쓴 금강경 병풍이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