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뵌 큰스님
원담스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자기 육신이 선방임을 알자”
자신 믿고 참나 찾기 부처님 닮아가는 가장 빠른 방편
항상 웃음 머금은 모습 제자와도 격의 없지만 공부시킬땐 엄격
독학으로 서예공부 틈틈히 묵향 어울림 글씨마다 禪機 서려
◇원담 스님은 오전 10시와 저녁공양 전후 하루 3번 포행하신다.
포행길에서 만난 행자들에게 자상한 가르침을 주시는 원담스님.
◇서예를 수행의 한방편으로 삼고 있는 원담 스님은
빼어나면서도 선기가 서려있는 글씨로도 유명하다.
가야산, 오서산, 용봉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심부에 우뚝 서 있는
예산 덕숭산.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고 낮은 구릉과 평탄한 들녘이
서로 이어지며, 계곡이 골마다 흘러내리는 이곳은 옛부터
소금강이라 일컬어지는 명산이다.
바로 이곳에 선원의 체계를 확립하는 등 조선말기 침체되어 가던 불교계에
선풍을 크게 일으킨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 성우(1849~1912) 스님,
금선대를 짓고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을 제접하며
선풍을 크게 떨친 만공 월면(1871~1946) 스님,
전국의 고승들을 찾아다니다가 조실로 추대되면서 30여 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한 혜암 현문(1884~1985) 스님,
평생 법상에 올라 법문 한번 하지 않고 오직 행으로써 후학들을 가르친
벽초 경선(1899~1986) 스님 등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경허-만공-혜암-벽초 스님 등 덕숭산문의 르네상스를 일궈낸
선사들의 선지(禪旨)를 이어 현대의 선풍을 새롭게 진작하고 있는
선장이 바로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
원담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수덕사로 가는 날(2일), 한 여름의
무더위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유난히 더웠다.
따가운 햇볕이 살갗을 파고들고, 땀이 속옷까지 적셨지만,
이 시대의 선지식을 친견하러 간다는 기쁨에 더위가 더위로 느껴지지 않았다.
“만공스님에게 수학한 원담 스님은 어떤 분일까” 등을 곰곰이 생각하며
일주문을 거쳐 황하정루를 지나니 높은 계단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웅장한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적 곡선을 잘 보여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건축물 대웅전(국보 49호)을
보는 순간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염화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웅전 왼쪽 산기슭에 위치한 염화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묵향이 먼저 코끝을 스친다. 시자 스님과 함께 글을 쓰고 계시던 원담 스님은
“어디서 온 누구요?”라며 반갑게 맞으신다.
삼배를 마치자 스님께서는 마치 친 할아버지처럼 가깝게 와 앉으라고 하시며
밝게 웃으신다. 활짝 웃으시는 스님의 얼굴이 얼마나 온화하던지 방장 스님을
취재한다는 기자의 어려웠던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 내렸다.
스님은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그렇게 친근하고
격의 없는 웃음으로 먼저 맞이한다.
시자 법보 스님은 “공부를 가르칠 때는 굉장히 엄하시지만 이곳을 찾는
사부대중 누구에게나 항상 밝은 웃음으로 맞이하시는 분이 방장스님”
이라며 “그래서 염화실에서는 늘 웃음이 그칠 날이 없을 정도”라고 귀띔한다.
법보 스님이 들려주는 일화 한 토막. 스님과 24시간을 함께하는
시자 스님은 자주 꿀밤을 맞는다고 한다. 경전을 보고 있다가
꾸벅 꾸벅 졸면 어느 새 스님이 다가와 “이놈아, 무슨 망상을 그렇게 하느냐”
고 꿀밤을 주시며 손자를 깨우는 할아버지처럼 장난을 거신다.
시자 로서는 방장 스님이 까마득히 높고 어렵지만 원담 스님은 이러한
장난(?)스러운 행으로 무언의 가르침을 주신다는 것. 이렇게 스님은
걸림이 없이 시자 스님에게 장난을 걸고, 또한 시자들의 장난을 받아
주며 늘 격의 없이 지내신다. 주위에서 원담 스님을 ‘천진불(天眞佛)’
이라고 칭하는 까닭도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하고 환한 웃음과
따뜻한 정 그리고 격의없고 자상하신 베품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을
지도할 때는 엄격하다. “공부할 때는 ‘극악극독심(極惡極毒心)’을 내야 한다.
그래야 8만4천의 번뇌마를 부술 수 있다”며 원담 스님은 혹독하게 다그치신다.
원담 스님은 젊은 시절 무섭게 정진하신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별명이
‘말뚝 수좌’. 잠도 못자고 공양도 제대로 못해 몸 가누기 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삶과 죽음을 끊는다(生死勇斷)’는 공부가 가능한지를
시험해 본다며 무섭게 정진했다. 이 용맹정진을 통해 스님은 참선을
부지런히 하여 통달하면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생사를 뚫는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으신다는 스님은,
먼저 믿음부터 강조한다. “믿음은 부처를 찾아가는 발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교회에서 신을 믿는 것처럼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믿어 ‘참나’를 찾는 것이다. 참나는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라며 “나를 찾는 그 놈을 찾아야 한다”
고 강조한다. 12살 때 속가 이모인 견성암 도명 스님을 따라 왔다가
만공 스님을 친견하고 환희심이 생겨 출가했다는 스님에게
만공스님과 생활할 때의 이야기를 청했다.
“만공 스님을 전월사에서 시봉한 적이 있어요. 그 중에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천장사에서 행자생활을 할 때였어요.
어느 날 한 스님이 큰 스님을 찾아와 법거량을 하는 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하더군요. 부엌에서 일을 하다 이 소리를
듣고 방문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지요. 만공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옛 날 한 중이 조주 화상에게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럼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라고 물으니,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는 묻지 않겠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스님이 돌아간 후 스님 방에 들어
“저도 참선을 하고 싶습니다”하니 “그럼 한번 해 보거라”하며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전월사에서 벽초 스님을 은사로,
만공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은 원담 스님은 만공 스님께서 주신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란 화두를 짊어지고 가행정진했다.
한 때는 만공스님과 함께 전국을 다니는 만행도 했다.
스님에게 그 때 수행담을 여쭈자 “한 세상을 우스개 소리하고
지내는 중이요. 똑바로 정신 차리고 보면 아무 할 얘기가 없다”
고 짤막하게 말씀하신다. 이어 스님은 “나를 찾는 게 중요하다”
며 주먹을 들어 보이며 “이것이 무엇인고”라고 일갈하신다.
원담 스님은 평생 참구한 화두에서 엿볼 수 있듯이 평생 자신의
본래면목을 참구하였고, 여러 납자들에게 이를 설했다. 하지만
스님의 설법 방편은 한번도 같지 않고 미리 준비하신 적도 없다고 한다.
심지어 하루 2~3곳에서 법문할 때도 있었지만 그 법문내용에서
똑같은 대목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법문도 게송도 모두
즉석에서 하신다. 특히 <부모은중경> 법문은 대중들 모두가
눈물을 쏟게 할 만큼 명설법이었다고 수덕사 스님들은 입을 모은다.
스님은 누구나 나를 찾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신다.
‘나’를 찾는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깊은 산 속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방에 상주하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간단없이 정진할 수 있지만,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덕사 주지 법장 스님은
“방장스님은 항상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으라고 설하셨다”
며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었지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고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원담 스님은 납자들의 제접을 받는 자리에서 ‘나 자신이 나를 깨닫는 법’
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만공 스님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님이 지난 68년 누구나 자기의 본래면목을 밝히려는 이들에게
거울이 되며, 자기 마음의 고향을 찾는 이에게 나침반이 되며,
자기완성의 피안을 향하는 이에게 쾌속정이 되게 하기 위해
만공어록>를 펴냈다고 밝힌 점에서 알 수 있다.
원담 스님이 행자시절 만공스님이 설한 법어를 정리한 이 어록
가운데 참선법에 대해 적은 내용을 살펴보자.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다. 대답이 끊어진 참구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백년의 연구가 일분간의
무념처(無念處)에서 얻은 이것만 같지 못하다.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원담
스님은 만공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아 덕숭선맥을 오롯이 잇고 있다.
원담 스님은 선대스님들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람수호에도 남다른 노력을 해 오셨다. 수덕사를 덕숭총림으로
설립한 것도 스님의 공이 크다. 지난 60년대 스님은 화엄사 주지를
그만두고 “한국 근세 선불교사의 거목인 경허ㆍ만공 스님의
수행도량인 수덕사가 먼저 총림이 돼야 한다”며 기초를 닦기
작해 83년 드디어 덕숭총림을 설립했다. ‘원담 스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서도(書道)이다. 스님은 한 때 여러
사찰의 현판을 쓸 정도로 글씨가 뛰어나 승속을 막론하고 스님의
글씨를 소장하고자 원한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글을 쓰지 않으시다
최근 다시 붓을 잡았다. 예전처럼 힘찬 기상은 줄었지만 한자 한자
심혈을 기울여 쓴 글씨에는 선승 특유의 선기(禪機)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조용한 시간을 이용해 글을 쓰신다는 스님은 요즘 “세간과 더불어
청산 어느 것이 옳으냐, 봄빛 이르는 곳마다 꽃이 피더라.
대지산하 이 것이 나의 집이거늘 다시 어느 곳에서 고향을 찾는고”
란 뜻의 ‘世與靑山何者是(세여청산하자시)
春光無處不開花(춘광무처불개화)
大地山下是我家(대지산하시아가)
更於何處覓鄕土(갱어하처멱향토)’를 즐겨 쓰신다.
언제부터 어느 분에게 서예를 배우셨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글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스님이 처음
붓을 쥔 것은 문인들이 즐겨 찾았던 서울 인사동 운당여관에서 일할 때이다.
그 당시 스님은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 글자가 손에 익을 때까지
밤새 쓰고 또 썼다고 한다. 이러한 끈질긴 독학을 통해 터득한
스님의 서체는 일본 산케이 신문사 주최 국제서도전에서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독특하다. 스님이 현재 주석하고 계신
염화실 현판도 직접 쓰신 것이다. 원담 스님의 하루는 선정에
드는 일과 묵향과 만나는 일 등 평범하다. 2일 저녁 포행에는
그 동안 여러 선원에서 수행하다 수덕사에 머물고 있는 상좌 법찬
스님이 은사를 모셨다. 법찬 스님이 “스님, 요즘 공부가 잘 안됩니다”
라고 하자, 원담 스님은 “공부가 잘된다고 느낄 때 공부와는 벌써
어긋나는 것이야”라고 단도직입적으로 가르침을 주신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보다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간절하고도
결정적인 신심부터 내야 한다는 것이다. 법보ㆍ법찬 두 제자와
경내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눈 스님은 다시 염화실로 향한다.
대웅전 앞을 지날 무렵 저녁 예불에 참석하기 위해 사찰에 온
노부부가 스님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올렸다. 스님은 특유의
천진불 미소로 반갑게 답례 하신다.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은
입을 열지 않고도 그 모습 자체만으로 무언의 가르침을 주시는 바로 그런 선사이다.
김중근 기자 gamja@buddhapia.com
원담스님은? 덕숭총림 설립…평생 가행정진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은 1926년 전남 옥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꿈에 신승이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여 ‘몽술(夢述)’
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울지 않던 아이가 화주하러 온 스님의
목탁과 염불 소리를 듣고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12살 되던 1937년 이모를 따라 수덕사를 찾은 스님은 정진하는
스님들의 청정한 모습에 환희심을 느껴 출가했다. 천장사와
전월사 등에서 만공 스님을 시봉하며 5년 여 동안 행자생활을
한 스님은 16세 되던 1941년 벽초 스님을 은사로 만공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스님의 은사 벽초 스님은 평생 수행을
한 농선도인(農禪道人). 일평생을 남을 위해 살다간 도인이었지만
스님은 한번도 “무엇을 했다”고 상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원담 스님은 이러한 벽초 스님의 가풍을 계승하여 현대의
선농일여란 새로운 가풍을 진작시키기도 했다.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후 가행정진하다
1970년 수덕사 주지로 취임 덕숭총림의 기초를 닦기 시작해
1983년 덕숭총림을 설립했다. 이후 스님은 <만공법어집>
을 발간하는 등 덕숭선맥의 선풍을 계승하기 위한 수행에 힘써오다
지난 86년부터 혜암ㆍ벽초 스님에 이어 덕숭총림 3대 방장에 취임했다.
현재 스님은 염화실에 주석하며 많은 수좌들을 제접하지만
대부분 1700 공안만 달달 외울 뿐 진정으로 공부한
수행자가 없음을 걱정하고 계시다. ‘도인’이라는 헛껍데기
이름에 만족하지 말고 진실한 수행자가 돼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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