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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적이 아닌 희망은 없나? 실망 스럽다.

淸潭 2019. 7. 28. 14:31

허문명이 만난 사람

작가 이문열 “이대로는 정권교체 가능성 없어 보인다.

절망적이다”


보수 재건은 왕정 복고 아냐”
● “참담한 몰락 이끈 과거 끊어야”
● “요즘 주체사상 연구하고 있다”
● “나라 거덜 내면서 계속 집권할 듯”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신동아=허문명 기자) 경기도 서이천 IC를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부악문원’을 찾은 7월 4일은 아침부터 땡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는 이문열 선생은 피곤해 보였지만 취재진을 반갑게 맞았다. 

선생이 이곳에 뿌리내린 지도 어언 30여 년.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진하게 풍겨오는 책 냄새가 고서 박물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주인처럼 오랫동안 그대로 자리를 지켜온 소파와 책상, 테이블은 정갈했다. 웬만해서는 잘 바꾸지 않는, 새것에 연연하지 않는 집주인의 일관된 심성이 느껴졌다. 

- 한동안 근황이 궁금했는데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만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습니다. 

“(껄껄 웃으며) ‘이문열이 아직 살아 있나’ 이렇게 묻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디다. 나름 바빠요.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불쑥 연락해 와 무슨 사업계획서도 들고 오고 앞길이 안 보인다고 한마디 해달라는 사람들도 있고.”


“‘좋아요’ 많이 모으면 집단지성이냐”

“주로 누가 찾아오느냐” 묻자 그는 불쑥 나이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우선 별로 아는 게 없는 데다 이 일흔둘이란 나이가 좀 이상해요. 뭘 새로 시작하기엔 늦었고 그렇다고 뒷방에 물러앉아 훈수나 두기엔 좀 턱없는…. 그래도 온다는 사람 막을 수 있나. 어차피 모르기는 저나 나나 마찬가진데.” 

표정에서 웃음기가 번졌다. 그동안 공식 비공식 자리에서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장시간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마자 “요즘 제일 난세가 언론 바닥인 거 같다”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말(言)이 이상하게 망가져 있어 큰일입니다. 신문 같은 활자매체는 그래도 조금 나아요. 아무래도 기록으로 남으니까. 문제는 방송이죠. 게다가 인터넷에 맡겨진 말들은 완전히 망가진 거 같고.” 

- 말이 망가졌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도구나 방식 때문에 소통이 왜곡되는 거지요. 말이라는 건 내가 먼저 한마디 하고 상대가 생각해서 대답하고 그런 건데. 지금 우리는 생각과 숙고, 숙려를 오래 해서 내놓아야 할 말들을 마구 던져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들인데 대꾸하는 사람도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즉문즉답이라. ‘오케이. 좋아요’ 눌러버리면 끝이야. 여론 형성이란 게 몇 초 안 걸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그 모든 문제를 어찌 다 알 수 있나. 말 자체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 이른바 프레임에 갇혀가지고 거기에 맞으면 옳고 아니면 틀리다는 식이죠.” 

밝았던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좋아요’ 많이 모은다고 집단지성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숙려와 숙고가 쌓일 때 집단지성이지. 지금은 그 옛날 그리스 민주주의가 끝장을 보이기 직전이나 로마 공화정이 말기에 보여준 대면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같아. 빵 많이 나눠주는 놈들에게 몰려가 옳소, 옳소 하며 얻어먹고 앉아 있다가 그놈아를 황제로 떠받들어버리기도 하지. 

옛날 아테네에는 패각추방(貝殼追放)이란 것도 있었잖아요. 조개껍데기(패각·貝殼)에 정치인 이름을 적어서 그 수가 많이 나오면 폴리스에서 추방해버리는 거지. 참주(僭主·스스로 왕이라 칭하는 사람) 출현을 예방하기 위한 제도지. 겉으로는 민주주의 수호 장치 같지만 때로는 아까운 인재를 터무니없이 소모하는 제도로 전락하기도 했어요. 

아테네가 망할 때 똑똑한 사람들이 희생돼 외국을 떠돌다가 나중에는 조국 아테네를 배반하고 적국인 스파르타 편이 되거나 페르시아 제국에 빌붙어 조국에 앙갚음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제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몇 보이죠. 지금 우리 사회를 보고 있으면 똑똑한 사람들을 리더 그룹에서 배제하는 방식이 패각추방 같은 걸 떠올리게 해. 별 근거도 없는, 혹은 뻔한 진영 논리로 끌어모은 인터넷 도편이나 패각을 들이밀며 하루아침에 여지없이 쫓아내버리는 거지.”


“천불이 나지만 시대가 변했다며?”

동서고금을 넘나들던 그의 비유가 현 정부를 향했다. 

“왜 모든 걸 청와대가 다 하지요? 각 분야 전문가들이 있고 절차와 과정이란 게 있는데 저희끼리 모여 앉아 끌어모은 인터넷 사금파리나 조개껍데기로 참견 안 하는 게 없어. ‘맞지, 맞지’ 맞장구치면 멀쩡한 정당도 해산청구할 수 있고, 수사도 안 끝났는데 사형선고 내리라고 재판 강요까지 안 하나. 그런 집단청원이 무슨 집단지성이야. 인민재판 청구지. 그런 걸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속에서 천불이 나지. 하지만 어쩌겠소. 그게 옳다는 데야, 그래야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데야. 시대가 변했다며? 모든 게 말(言)이 망해버린 시대의 한 단면 같아.” 

이른바 보수 우파 원로로 알려진 그가 요즘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천불이 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들렸지만, ‘시대가 변했다며?’라고 되묻는 것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 이슈로 화제를 돌렸다.


“주사파도 여러 갈래”

인터뷰하고 있는 이문열 작가. 6시간에 걸친 장시간의 만남이었지만 그는 질문 하나하나에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실어 성실하게 답했다. [박해윤 기자]

인터뷰하고 있는 이문열 작가. 6시간에 걸친 장시간의 만남이었지만 그는 질문 하나하나에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실어 성실하게 답했다. [박해윤 기자]

- 지금으로서는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곳까지 찾아와 선생께 길을 묻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그런 갈급함을 보여주는 거 아닐까요. 

“뭘 물을지 대충 짐작이 가고 나도 이렇다 할 대안이 없어서 웬만하면 안 만나는데 굳이 오겠다고 하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미리 말합니다.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준비되거나 내놓을 만한 낙관적 전망도 없다는 걸 내가 먼저 실토하죠(웃음), 그래도 오겠다고 하면 와서 함께 얘기해보자 하죠.” 

- 주로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이겠죠. 

“그렇지도 않아요. 평소에 입장도 다르고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만나자고 해서 놀라요. 엉뚱한 제안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크게 외치고 싶은 게 많은데 확성기가 마땅찮은 사람들도 와요. 누구건 어디서 왔건 듣다 보면 내가 가보지 못한 현장 이야기가 많으니까 사실 내가 배우는 게 많지요. (갑자기 한숨을 쉬며) 근데 요즘은 정말 방향이나 기준이 완전히 다 무너진 것 같아.” 

-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공동으로 추구하는 가치 또는 지향이 뭔지 확실하지 않은 것 같다 말이지. 정치권만 봐도 얼마 전까지 자유한국당 내 분열이란 게 기껏 대립적 요소가 있다면 친이(親李), 친박(親朴) 정도였지 않나? 서로 개별적인 친소관계나 이합집산의 논리는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그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는데, 요즘은 아니 저 사람들이 같은 당 사람들 맞나 싶을 정도로 엉뚱한 소리들을 해대니까 듣다 보면 당혹스러워. 여권(與圈)도 마찬가지야. 북한 문제나 개헌(改憲)을 쉽게 하기 위한 선거구 조정 같은 문제는 한목소리를 내는 것 같지만 다른 문제들은 정연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 내가 요즘 새삼스럽긴 하지만, 주체사상을 좀 뒤져보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기자가 말을 끊으며 “주체사상이요?”라고 묻자 그는 “그래요”라고 짧게 답한 뒤 말을 이었다. 

“기준이 무너졌다는 점에서 주사파도 옛날 풍문으로 듣던 것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더군요. 1980년대 말 언더(지하)로 있을 때보다 다양하게 변했다는 거지요. 겉으론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한의 주사파는 적어도 네 갈래 흐름이 있는 것 같아.” 

- 예를 들면요? 

“제일 왼쪽 통진당(통합진보당) 쪽하고 지금 여당과 청와대 주류에 포진한 386 운동권 주사파가 다르고 1990년대에 전향했다고 과장되게(?) 알려진 일파의 주체사상과 황장엽 선생이 남한에 내려와 완성했다는 주체사상이 또 달라요. 북한판 끝판왕인 수령론을 아직 신봉하는 주사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황장엽 선생만 해도 한국 와서 주체사상을 다듬으면서 수령론은 거의 부정한 걸로 알고 있어요. 주사파조차 하나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다는 거야. 

주사파에 대한 인식 자체도 달라졌어요. 옛날엔 으스스하고 놀라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놀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용인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주사파면 어때! 이런 분위기인 거지.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뒤 대통령 지지율이 2%가 올랐다던데 그사이 무슨 변화가 있었나요? 이상한 사람(트럼프를 지칭) 왔다간 거밖에 없다고.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지지율이 올라. 이해가 되지 않는데 우리 아들이 이러더군. ‘아버지는 혹시 대통령 지지율 높게 나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믿고 싶은 거 아니냐. 죄송하지만 그런 게 아닐걸요.’ 내 아들까지 그런 말 할 줄 몰랐어요(웃음). 이렇게 되면 막을 수 없는 거 아닌가.”


“정신 못 차린 왕당파의 반동”

다시 자유한국당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는 “구경하기 정말 피곤하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치적 목표나 이념적 지향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위치도 어딘지 분명하지 않은 데가 많아요. 며칠 전 어떤 자유한국당 의원이 방송에 나와 결기 섞어 떠들어대는데, ‘박근혜 구하기’에 적극적이 아니라며 황교안 대표 지지를 철회한다더구먼. 얼마 전에는 공천 파동을 주도한 계파 중진의원들이 아직 구치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박 전 대통령을 총재로 모시고 새 당을 만들어 우파 복원을 하겠다면서 기세등등하게 뛰쳐나갔지. 그런데 어째 자유한국당에서는 따끔한 논평 한마디 나오지 않는가 말이오. 

박 전 대통령을 감옥에서 꺼내는 게 어떻게 지금 한국 보수의 당면과제나 우선해야 할 가치가 될 수 있죠? 언필칭 개혁을 말하려면 이 참담한 몰락을 이끈 과거를 끊어야 한다는 정도는 합의를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보수의 회복이 정신 못 차린 왕당파의 반동이고 왕정 복고이고 앙시앙레짐(구체제)의 부활이라도 된단 말인가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상식 아닌가요. 우파가 시대에 맞게 진화하지 못해 이 지경이 났는데. 그렇게 폭삭 망하고 2년이나 지나 겨우 꾸려낸 것이 황교안 체제인데 이러고들 있으니…내 참.” 

- 정치란 게 본질적으로 세력싸움이니 하나라도 세를 더 불려야지, 뺄셈 논리에 휘몰려서도 안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 측면이 있지요. 어떤 면에서 내가 이야기하는 건 ‘그래도 이런 건 아니다’ 싶어 불러보는 늙은 군인의 노래인지도 모르지(웃음). 그렇다 해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기준이란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 어지러운 것 같아서 말이죠. 지금 우리 체제가 제대로 된 양당정치 체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미국의 보수인 공화당을 보면 참고할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어요. 

거기 지지 세력에도 이상한 갈래가 많다고. KKK 같은 백인우월주의자도 있고. 낙태반대론자. 기독교 근본주의자, 이민반대론자 모두 지지 기반이 됐지만 당에서 대놓고 그들을 반대하거나 부인하지 않아요. 

하지만 간판으로 나서서 떠드는 것까지 용인하지는 않지. 지금 우리 우파도 그런 과거의 유산이 많은데, 문제는 그들이 자숙하거나 적어도 깊이 잠복해야 될 엄정한 시점에 떠들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뻔뻔스레 마구 떠들어대. 변화와 개혁이 시대의 요구인데도 그런 걸 묵인하며 넘어가고 있으니 무슨 개혁을 하겠어요. 개혁은 뭘 잘못했다 하는 반성부터 하고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그런 거 아닌가요.”


“빨리 알아차리고 스스로 책임져야”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 얼마 전 보수 우파를 향해 ‘죽어야 산다’는 표현을 썼던데 같은 맥락입니까.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상징적 표현이지요. 무엇보다 공천 난맥을 주도한 주력이 ‘친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요 사람들 중심으로 해서 책임질 것은 책임을 져야지. 죽으라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 배제하자는 건 아니에요. 다 몰아내라, 이런 건 아니지. 탄핵과정에서도 찬반을 둘러싸고 복잡했잖아요. 

다들 나름대로 고심도 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우왕좌왕하면서 자기 이익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간에 이런 것들에 대한 구분, 정의, 정리 없이 환골탈태니 뭐니 새로 태어난다고 아무리 말해도 국민이 받아들일 리도 없고요. 책임질 사람 빨리 알아차리고 스스로 책임져라. 그게 사는 길이다 그런 말이죠. 상징적인 죽음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서 부활하기도 쉽습니다. 적당한 때에 세월이 맞으면 새로 태어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이것저것 살피지 않고 한꺼번에 싸말아서 배제하면 안 된다는 정도의 의미였어요.” 

순간, 그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어. 어제 우리가 이야기한 미국의 양당정치 말이야. 헤어지고 난 뒤 곰곰이 생각하다가 궁금한 게 생겨서 전화했었지. 내가 지금 인터뷰 중이니 다시 전화함세.” 

그가 다시 기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친구가 대단한 독서가예요. 중국하고 미국에서 큰 회사 전문 경영인으로 오래 사업을 해서 두 나라 사정에도 밝고. 요즘 미·중 무역전쟁이 한창이잖아요. 어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가 밤사이 또 궁금한 게 생겨서.”


“경박한 태도결정자들”

- 그야말로 국제질서 자체가 혼동입니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도 하고요. 

“징그러울 정도로 만날 똑같은 소리들…. 나도 잘 모르겠어요. 내 짧은 식견으로 볼 땐 이렇습니다. 중국이 뜬 게 일시적인 게 아니라 원래 가진 힘이 있었던 나라니까 힘을 찾으면 더 커질 겁니다. 그래서 미국한테만 붙어서 산다고 하면 어려울 게 틀림없는데, 역사도 관성이 있으니까. 미국이 세계를 주도하며 거의 뭐 100년 가까이 거의 무적(無敵)으로 살았는데. 하지만 그 기세 하나만 보고 미국 밑으로 쏙 들어가 숨자는 것도 영 안 맞아 보이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신중해야 할 거 같은데 우리는 경박한 태도결정자가 많아요. 자기가 뭔 소리하는지도 모르고. 친중, 친미, 고래고래 외고 다니는 엉터리들이 너무 많아.”
 
그가 혀를 끌끌 찼다.


“황 대표의 말에 울컥 치미는 게…”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소설가 이문열이 6월 8일 오전 경기도 이천 설봉산 자락에 위치한 이 작가의 문학사숙 부악문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소설가 이문열이 6월 8일 오전 경기도 이천 설봉산 자락에 위치한 이 작가의 문학사숙 부악문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 지난번 황교안 대표와는 어떻게 만나게 됐습니까. 

“원래 비공개로 예정됐어요. 오랜 내 친구가 황 대표 가까이 있는데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해서 시작된 일이오. 마침 이 지역에 행사가 있어 들른 길에 차나 한잔 하자고 해서 서울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렀죠. 한 70분 정도 이야기했나. 신문에는 내가 지난 정권 블랙리스트에 비판적으로 말했다는 기사만 실렸더군. 원래 그걸 화제로 삼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황 대표가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융성 정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 말에 내가 울컥 치미는 게 있어서 이런저런 소회를 말하다 보니 그 문제에 대해 한마디 하게 됐어요.” 

- 울컥 치미는 것? 

“내 생각이지만, 박 대통령의 몰락은 바로 그 문화융성 정책에서 시작했다고 봐요. 그 무리한 추진 과정 그리고 정유라 부정입학. 삼성의 말(馬) 구입 사건도 따지고 보면 문화융성 정책과 무관하지 않고, 무슨 미르재단이니 K재단이니 하는 것도 그렇고. 

이제 이야기하지만 대통령 취임식 첫 축하 공연부터 나는 느낌이 불길했어요. 그 행사 총감독을 뮤지컬 ‘명성황후’를 연출한 윤호진 교수가 했잖아요. 나하고 동갑이고 40년 지기죠. 그날 내가 TV로 공연을 보는데 갑자기 오방주머니인지 뭔지가 턱 튀어나오는 거야. 억, 저건 뭐야. 오방주머니는 민속적인 요소도 있지만 다분히 무속적인 느낌도 주잖아요. 공연 끝나자마자 윤 감독에게 어떻게 된 거냐 물으니 자기도 모른대. 전날 갑자기 들어온 거래. 아, 이건 느낌이 좋지 않다 싶더라고. 공연 총감독도 모르게 이래라저래라 그것도 바로 전날 마음대로 끼워 넣는 실력자가 있다는 이야긴데, 내가 며칠간 나름대로 알음알음 물어도 누군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 

내가 문학하는 사람이기도 해서 MB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까지 특히 문화부 장관이 누구인지 관심이 많았죠. 기울어진 운동장, 곧 문화 헤게모니 전투의 기동전 본부일 수도 있는 문화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MB 정부가 들어섰을 때 문화부는 10년 좌파 정부를 견뎌낸(?) 부처였습니다. DJ 때 신참으로 들어온 행정관들이 노무현 정권을 지나면서 고참 부장, 국장급이 돼 있는 문화 헤게모니 진지전의 대본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아니겠어요. 

MB 정권은 그런 진지 본부에 사령관만 하나 떨어뜨려놓고 진지를 탈환했다고 믿었고, 그걸 뒤이은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는 출범 첫날부터 전혀 출처와 근거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으니 답답할 수밖에. 그런 마당에 황교안 대표가 그 시절의 문화융성 정책에 점수를 주는 듯한 말씀을 하시니 나도 모르게 그만 울컥….”


“쓸데없는 리스트 만들어 훈장만 달아줘”

그가 화를 참으려는 듯 침을 삼켰다. 이어 블랙리스트 이야기를 꺼냈다. 

“그 무렵 내가 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을 해봐서 잘 아는데, 지난번 청문회 때 TV를 보니 무려 9400명이 리스트에 올랐다고 해. 복지재단에 예술인으로 등록된 사람이 20만 명 가까이 되던 걸로 기억하는데 실제 블랙리스트 대상자가 될 만한 직군이 그리 많지 않아요. 대부분 문학에 집중돼 있고, 영화나 미술 연극 음악분과에는 리스트에 넣을 대상이 몇 안 되죠. 후보군을 잡는다면 많아야 2만 명이 되려나. 그런데 발표된 블랙리스트 명단을 보니 적어도 후보군 절반이 오른 셈이라 어이가 없더군. 아니나 다를까, 리스트에 올린 이유가 문재인 지지 성명을 내거나 혹은 서명했다는 것, 세월호 추모 집회 참가, 이런 것들이더라고요. 그렇게 쓸데없는 리스트 만들어 별 볼일 없는 좌파 부스러기들에게 ‘개념 있는 예술가’란 훈장만 달아주고. 여든 가까운 무슨 대원군(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일컫는 듯)이나 곱고 조신한 장관님(조윤선 전 장관을 칭하는 듯)은 속된 말로 ‘배터지게’ 징역 구형이나 받게 하고.” 

- 황교안 대표도 그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고 봐야겠네요. 

“공안검사도 지냈으니 전혀 모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문화적으로 얼마나 좌파가 집요하게 진지전을 구축해 우리 사회를 깊이 잠식했는지 하는 그런 섬세하고 예민한 이데올로기적 고려보다는 법의 틀 안에서 논리적으로만 생각했겠죠.”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거 아닌가?”

-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요. 이를테면 보수 혁신이나 자유한국당 개혁 같은…. 

“애초에 안 묻기로 했죠. 그런 이야기 나오면 나만 괴로워져요. 뜨거운 감자를 맨손으로 집어내야 할지도 모르니까(웃음). 자칫하면 나까지 황 대표 멘토니 참모 같은 식으로 위치 지어질 수도 있고.” 

이 대목에서 “야당 지지자들 중에 ‘황교안 갖고 되겠나’ ‘어차피 차악(次惡)을 뽑는 건데 등판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로 의견이 갈린다”고 기자가 말하자 그는 즉답 대신 “‘(황 대표가) 맹탕은 아니다’라는 말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는 말로 대신했다. 

“황 대표에 대해 샌님 같다, 너무 모범생 같다는 말들이 있잖아요. 막상 만나 보니 순발력도 있고 돌파력도 있어 보입디다. 만남 후 어떤 기자가 묻기에 그렇게 말한 뒤 말끝에 ‘맹탕은 아닙디다’라고 덧붙였는데, 신문에는 거두절미하고 그것만 제목으로 확 뽑혀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말도 마소(웃음). ‘이문열이 무슨 자격으로 전직 총리, 현직 야당 대표에게 그런 막말을 하느냐’ 법조계 점잖은 사람들도 ‘우리를 평소에 얼마나 맹물로 봤느냐’며 화를 많이 냅디다.” 

- 거두절미하고 여쭙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정권 교체가 될 수 있을까요. 

“뉘가 알리오(웃음). 나는 절망적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가능성 없어 보입니다. 경제라든지 외교에도 참상이 많죠. 이런 것들이 더 쌓이면 정권교체가 가능하다 기대(?)들을 하는데, 난 오히려 현 정권의 무능이 더 드러날수록 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언뜻 이해하기 힘드네요. 

“경제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 자체로는 정권 교체 요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중남미에서 좌파 정부가 곧 무너질 듯하면서 10년 넘게 간 이유가 뭡니까. 지금 베네수엘라를 보세요. 정권만 유지할 수 있다면 나라가 거덜 나건 말건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 세금 풀고 공짜 퍼붓는 거죠. 무상배급카드 확 뿌려놓으면, 다수 국민 입장에서는 가만 앉아 있어도 내일 아침 빵이 나오는데 뭐 그리 급할 게 있겠어요. 정권이 바뀌어 공짜가 없어지느니 현상유지가 우선이지. 포퓰리즘이란 게 그래서 무서운 거 아니겠어요?”


“세금으로 막든지 돈 찍어 인플레로 처리하든지”

- 소득주도성장이니, 52시간 근로제니 해서 자영업자 서민이 힘들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도 지난 2년 동안 많은 사람이 길들었을 걸요. 안 되면 이상한 자리 만들거나 세금 뿌려서 살게 해주고 있잖아요. 태양광 사업 수혜자들도 그렇고. ‘살기 괜찮은데 왜 그래?’ 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날 겁니다. 일자리 없다고 화난 거 같지만 일자리 없어도 먹고살 수 있다면 그렇게 화내지 않을 겁니다. 경제 어려워지면 세금으로 막든지 돈을 찍어서 인플레로 처리하든지, 뭐로 할지는 모르겠지만 중남미 사례로 봐서는 (방법이) 있는 거 같습니다. 

패스트 트랙도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현 집권세력의 실수가 너무 자주 반복돼 정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자체내에서 커지면 호랑이 등에서 내리고 싶어도 내리지 못하게 돼 나라를 더 거덜 내는 그런 상황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쯤이면 적당히 돌아보고 물러설 건 물러서고 양보할 건 양보해도 충분히 될 거 같은데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아요.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가 거덜 나는 거지. 개인적인 패배의식이거나 체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그들(현 정부)에게 물어야 할 때 묻지 않았고, 묻지 않았지만 마치 답을 들은 것처럼 일이 진행되고, 그래서 지금 정부 사람들도 ‘그때 우리가 이미 다 답했어’라는 확신을 가질 정도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거 아닌가. 당하는 사람들도 ‘이제 와서 뭘 어쩔 거야?’ 하는 이상한 체념 같은 거….”


“이상한 짐 잔뜩 실은 고물 배”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 보수우파가 이렇게 약했나요. 

“원래 그랬어요. 배(船)는 큰데 이상한 짐을 잔뜩 실은 고물 배라고 할까. 대표적인 게 친일파 같은 짐이죠. 광복 후 제대로 청산이 안 됐잖아요. 그리고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 세력. 아무리 우리가 미국과 동맹하고 있다고 하지만 맹목적 친미가 또 판을 바꿔버렸어요.” 

- 보수우파가 가진 게 많다 보니 잃을 까봐 침묵하는 건 아닐까요. 

“그것보다는 절박하고 직접적인 두려움이 있다고 봅니다.” 

- 그게 뭐죠? 

“공권력에 대한 공포죠. 재벌 총수들이 왜 권력 앞에서 당당하지 못할까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말을 갈아탄 기업들도 보이지 않습니까. 언제 저 사람들이 저쪽이었지 하는 게 보이잖아요. 물론 기업 입장에선 새로운 투자, 더 큰 거를 얻기 위한 방식일 수도 있지만 말이죠.” 

오전 11시부터 시작한 인터뷰가 세 시간여를 넘기고 있었다. 집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요기한 뒤 근처 카페로 옮겨 대화를 이어나갔다. 

- 요즘 개혁보수라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바꿔야죠. 하지만 뭘 채워 넣을지 하는 것보다 지난 시대에 놓쳤던 걸 챙겨가지고 보완하는 게 중요합니다. 완전성에 대한 믿음이랄까, 우리는 잘해왔다. 안주, 자만 다 버려야 할 거요. 우리가 그렇게 잘해온 것도 아니었고 완전한 것도 아니었고. 상대가 잘하는 것도 인정해주고. 배울 건 배우고 말이죠. 우파는 ‘치명적 안일함’이 있었어요. 가령 박 전 대통령은 감옥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 지금도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이미 바둑판은 기울어져 승패는 끝나고 흑백알 서로 줄 것 줬고 받을 것 다 받았는데 다시 판을 원상태로 뒤집겠다는 그런 억지로는 개혁보수니 뭐니 백날 해봐야 안 됩니다.”


“이러니 잠이 오겠습니까?”

- 천하에 이문열 선생도 혼돈스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웃음)

“나부터 정리해야 되겠다 싶은 생각이 요즘 들어요. 대동지환(大同之患)이라고 여러 사람이 다 같이 당하는 환란은 환란이 아니라는 말도 있죠. 다 같이 당할 바에야 화를 걱정하지 말자고 나를 설득하고 있어요. 하지만 설득이 잘 안 되죠. 이런 상황을 피할 방법이 과연 없을까…. 이러니 내가 잠이 오겠습니까.” 

6시간 대화 내내 그로부터 희망의 메시지는 들을 수 없었다. “패배의식” “체념” 같은 단어들도 귓전에 오래 남았다. 하지만 질문 하나하나마다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실어 답하는 모습에서 나라의 앞날을 진심으로 고뇌하는 원로의 책임감과 진정성이 느껴졌다. 대한민국의 새살은 그런 에너지들이 모여 다시 돋아나리라는 생각을 하며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