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조계종

종정예하 진제법원 대종사 정유년 동안거 결제 법어

淸潭 2017. 12. 1. 21:00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예하 진제법원 대종사 정유년 동안거 결제 법어

 

全機大用不思議(전기대용부사의)라
三世佛祖倒三千(삼세불조도삼천)이로다.
有意氣時添意氣(유의기시첨의기)하고
不風流處也風流(불풍류처야풍류)로다.
온전한 기틀과 큰 용(用)은 생각하고 의논하지 못하는지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도 삼천 리 밖에 거꾸러짐이로다.
뜻 기운이 있는 때에 뜻 기운을 더하고
풍류가 없는 곳에 또한 풍류가 있게 함이로다.

 

금일은 정유년 동안거(冬安居) 결제일이라.
결제에 임하는 사부대중들은 시간의 신속(迅速)함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
구름이 허공중에 두둥실 떠 있다가 바람이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인생도 이와 같이 이 사바세계에 잠시 머물렀다가 구름처럼 가뭇없이 사라짐이라.

사람이 사대육신(四大六身)의 형상을 이루고 있지만 숨을 들이 쉬었다가 내쉬지 못하면 바로 내생(來生)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일은 나고 죽는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
내생이 목전(目前)에 곧 닥쳐오는 데 이 귀중한 시간을 시비장단(是非長短)에 허비해 버린다면 또 다시 윤회(輪廻)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니 모든 시비는 다 놓아 버리고 오직 자기의 본분사(本分事)를 밝히는 이 일을 해야 한 생(生)을 허비하지 않고 값지게 사는 것이다.
인생백년이 길다고 해도 참선수행의 한나절 한가로움에 미치지 못함이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날 수 있느냐?
먼저 불법(佛法)의 정안(正眼)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올바른 참선지도를 받아 그대로 온전히 실천해야한다.

화두(話頭)가 있는 이는 각자의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 이 화두를 일상생활 가운데에 앉으나 서나 가나 오나 일체처일체시(一切處一切時)에 챙기고 의심해야 할 것이다.

화두를 챙길 때는 아주 분명히 또렷또렷하게 화두를 챙기고 의심을 짓고, 챙기고 의심을 지어가야만 가지가지의 생각이 침범하지 못하고 혼침(昏沈)도 달아나게 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생각이 있거나 게으른 마음이 있으면 화두는 벌써 십만 팔 천리 밖으로 달아나 버리고 과거의 습기(習氣)로 인한 다른 생각이 마음 가운데 자리 잡고서 주인노릇을 하고 있게 된다.
참학인(參學人)들이 10년, 20년 동안을 참구(參究)해도 진리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까닭은, 보고 듣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간절한 한 생각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반연(攀緣)은 끊고 시비장단(是非長短)은 모두 내려놓고 견성하고 말겠다는 확고한 대신심(大信心)과 불타는 대용맹심(大勇猛心)을 내어 간절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각자의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고 챙기고 의심하여 번뇌와 망상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혼신의 노력을 쏟아야 함이로다. 한 번을 챙겨도 뼈골에 사무치는 화두를 챙겨야만 공부에 진취(進取)가 있고 소득이 있는 법이다.

그렇게 정성껏 잡도리하다 보면, 화두가 익어져서 밤낮으로 흐르고 흐르다가 문득 참의심이 발동하게 된다. 그때는 보는 것도 잊어버리고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있어도 밤이 지나가는지 낮이 지나가는지 며칠이 지나가는지 몇 달이 지나가는지 모르게 되니, 이것이 일념삼매(一念三昧)인 것이다.

이처럼 일념삼매가 시냇물이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것처럼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지속될 때, 홀연히 보는 찰나에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나게 되고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지은 업(業)이 빙소와해(氷消瓦解)되어 몰록 광대무변한 진리의 세계가 그대로 목전(目前)에 드러나게 되리니, 그러면 모든 땅덩어리가 변해서 황금이 되고. 넓은 바닷물이 변해서 감로(甘露)의 제호(醍醐)가 되리라.

이 금덩어리는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고 감로의 제호는 한 번 들이킴으로 인해서 많은 생에 지어온 업장이 당하(當下)에 소멸되니 만 냥의 황금을 허리에 차고서 목마(木馬)를 거꾸로 타고 해금강을 산책하며 인간과 천상의 지도자가 되고 모든 불조(佛祖)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리라.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로 가장 위대한 도인이라면 중국의 마조 도일(馬祖道一) 선사를 꼽을 수 있는데, 그 분의 탁월한 안목(眼目)은 감히 어느 누구도 능가할 사람이 없다 하리니, 달마 대사의 스승이신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께서 예언 하시기를 “네 밑으로 7대(代)의 아손(兒孫)에 이르러 한 망아지가 출현하여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일 것이다?했는데, 그 예언이 전해 내려와서 육조 혜능(六祖慧能) 선사에 이르렀다.

어느 날 육조께서 제자인 남악 회양(南嶽懷讓) 스님에게 은밀하게 부촉(付囑) 하셨다.
“그대 밑에 천하 사람을 밟아버릴 만한 한 망아지가 출현할 것이네. 그리하여 그 밑에 수많은 도인 제자가 나와서 불법이 크게 흥성(興盛)하리라고 반야다라 존자께서 예언하셨으니, 그대만 알고 잘 지도하게.”

남악 회양 선사께서 회상(會上)을 열어 법을 펴시니, 마(馬)씨 성(姓)을 가진 한 수좌가 와서 신심(信心)을 내어 불철주야 공부를 지어갔다. 그런데 이 수좌는 항상 좌선(坐禪)하는 것만을 고집하여 자리를 뜨는 법이 없었다.

남악 회양 선사께서 하루는, 앉는 데 국집(局執)하는 그 병통을 고쳐 줘야겠다고 생각하시고, 좌선중인 마조(馬祖) 스님에게 말을 건네셨다.
“수좌는 좌선하여 무엇 하려는고?”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자 회양 선사께서는 암자 앞에서 벽돌을 하나 집어와서 마조 스님 옆에서 묵묵히 가시기 시작했다. 마조 스님이 한참 정진을 하다가 그것을 보고는 여쭈었다.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고자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할진대,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소를 수레에 매서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마조 스님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회양 선사께서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는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배운다고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선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앉은 부처를 배운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어느 하나의 법이 아니니 자네가 부처님을 잘못 알고 있음이네. 무주법(無住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림이 없어야 하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선(禪)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네.”

마조 스님은 여기에서 크게 뉘우치는 바가 있어서 좌선만을 고집하던 생각을 버리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서 일여(一如)하게 화두를 참구하여 순일(純一)을 이루어서 마침내 크게 깨쳤다.
그 후 남악회양 선사를 모시고 10여 년 동안 시봉하면서 탁마(琢磨)받아 마침내 천하 도인의 기봉(機鋒)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훌륭한 안목(眼目)을 갖추어 출세(出世)하시니 승속을 막론하고 참학인(參學人)들이 무수히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마조 선사의 지도하에 84인의 도인 제자가 나왔으니 충분히 수기(授記)를 받을 만한 분이라 하겠다.

마조 선사께서 어느 달 밝은 밤에, 세 제자를 데리고 도량(道場)을 거닐면서 이르셨다.
“그대들이 이제까지 수행한 바를 저 밝은 달을 가리켜 한마디씩 일러 보게.”
그러자 서당 지장(西堂智藏) 스님이
“바로 공양(供養)하는 때입니다.”
라고 답했고, 백장 회해(百丈懷海) 스님은
“바로 수행(修行)하는 때입니다.”
라고 답했다.
그런데 남전 보원(南泉普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양팔을 흔들면서 그냥 가버렸다.
마조 선사께서 세 제자의 답처(答處)를 점검하여 이르시기를 “경(經)은 지장(智藏)에게 돌아가고, 선(禪)은 백장(百丈)에게 돌아가는데, 남전(南泉)만이 홀로 형상 밖으로 뛰어났구나”하고 남전 스님을 칭찬하셨다.

이 도인 문중에서는 진리의 물음에 한 마디 답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그 답처를 꿰뚫어 상대방의 살림살이를 점검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남전 스님이 양팔을 흔들면서 그냥 가버린 뜻은 어디에 있는가?
만약 시회대중(時會大衆) 가운데 이 뜻을 아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산승(山僧)이 이 주장자를 두 손으로 전하리라.

세월이 흐른 후, 마조 선사께서 법상(法床)에 앉아 계시던 차제에 백장 스님이 들어오니, 선사께서 법상 모서리에 걸어 놓은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셨다.
그러자 백장 스님이 여쭙기를 “이를 바로 씁니까, 이를 여의고 씁니까?”하니, 마조 선사께서 그 불자를 원래 걸려 있던 자리에다 도로 걸어 두셨다.
한동안 백장 스님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니 마조 선사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장차 대중을 위해서 어떻게 법을 설하려는고?”
그러자 이번에는 백장 스님이 걸려 있던 불자를 들어 보이니, 마조 선사께서 다시 물으셨다.
“이를 바로 씀인가, 여의고 씀인가?”
백장 스님이 아무 말 없이 불자를 도로 제자리에 걸자, 마조 선사께서 “억!”하고 벽력 같은 ‘할’을 한 번 하셨다. 이 ‘할’에 백장 스님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가 깨어나서 마조 선사께서 ‘할’하신 뜻을 깨달았다.
백장 선사는 여기에서 마조 선사의 법(法)을 받아서, 분가(分家)하여 다른 곳에 주(住)하며 법을 펴셨다.

몇 년 세월이 흐른 후에, 황벽(黃檗) 스님이 백장 선사를 방문하여 친견하고 며칠 머물다가 하직인사를 하였다.
“어디로 가려는가?”
“강서(江西)에 마조 선사를 친견하러 가고자 합니다.”
“마조 선사께서는 이미 천화(遷化)하셨네.”
“저는 인연이 없어서 그 위대한 마조 선사를 한 번도 친견하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래도록 마조 선사를 모시고 지도 받으셨으니 저에게 마조 선사의 고준한 법문을 한 마디 설해 주십시오.”

그러자 백장 선사께서는 두 번째 마조 선사를 참예(參詣)하였을 때 불자(拂子)를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시고는 말씀을 덧 붙이셨다.
“내가 그 때 마조 선사께서 ‘할(喝)’하신 소리에 사흘 동안 귀가 먹었었네.”
황벽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는 결에 혀를 쑥 내밀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조 선사의 ‘일할(一喝)’에 두 분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벽 선사는 백장 선사의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되어 법을 이으셨다.
그러면 마조 선사의 이 ‘일할(一喝)’이 얼마나 위대하길래, 두 분 선사께서 그 아래에서 몰록 깨치셨을까?
이 ‘일할’ 가운데는 비춤[照]도 있고, 씀[用]도 있고, 줌[與]도 있고, 뺏음[奪]도 있고, 죽임[殺]도 있고, 살림[活]도 있다.
마조 선사의 이 ‘일할’을 좇아서 후손들이 ‘방(棒)․ 할(喝)’을 썼으니, 새로운 종풍(宗風)을 일으킨 위대한 분은 바로 마조 선사이다.

일러라. 마조 선사의 이 ‘일할(一喝)’의 낙처(落處)가 어디에 있느냐?
(대중이 아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이르시기를)
蒼天後更添怨苦(창천후갱첨원고)
곡(哭)을 한 후에 다시 원한의 괴로움을 더함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하좌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