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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립엄천(以笠掩天)

淸潭 2016. 11. 13. 11:22

이립엄천(以笠掩天)
[요약] (: 써 이, : 갓 립, : 가릴 엄, : 하늘 천)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뜻으로, 부끄러운 일을 피하는 행동을 이름. 김삿갓에게서 유래한 말.


[문헌] 한국해학소설집(韓國諧謔小說集)

[내용] 김삿갓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다시 한 번 읽어 보는 것도 좋을듯하여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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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고, 호는 난고(蘭皐)이며, 경기도 양주(楊州)출신이다.
  그는 죽장(竹杖. 대나무 지팡이)에 죽립(竹笠. 대나무로 만든 삿갓)을 쓰고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세상을 풍자하며 삼천리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방랑 시인이었다.
  그의 조부 익순(益淳)은 순조(純祖) 11(1811), 홍경래난(洪景來亂) 때 선천(宣川)부사로 있었으나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되려 홍경래에게 항복하여 무릎을 꿇은 죄로 사형을 당했고, 나머지 가족들도 멸족시키라는 훈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여섯 살의 어린 김병연은 형 병하(炳河)와 함께 하인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사면을 받아 강원도 영월로 내려와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

  병연은 나이가 들자 과거를 보기 위해 글공부에 힘썼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해, 영월에서 열리는 백일장(白日場)에 참가했다. 니라에서 치르는 대과(大科)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지방 백일장도 입상을 하면 지방의 관리로 등용되기에 응시자들이 많았다.
  그날의 시제(詩題)는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충절과 선천부사 김익순의 행적에 대해서 논하라는 것이었다.
  홍경래가 반군을 이끌고 먼저 가산에 들이닥치자 가산군수 정시는 팔이 잘려나가면서도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끝내 순절했으나, 선천부사 김익순은 전날 과음하여 잠에 골아 떨어져 있다가 홍경래에게 생포되자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항복해 버린 사실에 대해서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병연은 충신을 흠모하는 마음과 너무 쉽게 항복해 버린 죄인을 경멸하는 의분으로 그동안 갈고닦은 글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김익순은 죽은 혼백이라도 지하에 계신 선왕들에게 사죄하라. 신하가 임금을 잊는 것은 자식이 어버이를 잊는 것과 같으니, 이는 한 번 죽음이 아니라 만 번 죽어 마땅하다. 어이하여 활과 창을 지니고도 임금 앞에서나 꿇어야 할 무릎을 역적 홍경래 앞에서 꿇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임금을 배반함과 동시에 선영을 저버린 망동이이 치욕의 역사에 길이길이 전해지리라.’
  붓을 놓고 난 병연은 의분에 못 이겨 긴 한숨을 토해내고는 권지(卷紙)를 시관에게 제출했다.
  그리하여 당당히 장원을 차지한 병연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어머니. 제가 장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병연이 백일장에서 김익순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뻐하기는커녕 깊은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병연아! 김익순 그 어른은 바로 네 할아버지란다.”
  병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했다.
  “아니, 내가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욕한 그분이 내 할아버지라니, 이럴 수가……. 이토록 얄궂은 운명이 어디 있단 말인가? 기껏 배운 글재주로 내 조상을 욕하는데 써먹다니…….”
  병연은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인생에 깊은 회의를 느낀 병연은 그때부터 집을 떠나 전국 방방곡곡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조상을 욕한 불효자로서 하늘을 바로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큼직한 삿갓을 써서 하늘을 가린 후, 대나무 지팡이에 괴나리봇짐을 지고 어머니와 처자식을 떼어 놓은 채 산천경개를 구경하며 마음을 달랬다.

  병연은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구절양장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태백산 구경을 마치고 금강산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초입의 작은 정자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스님과 선비를 만났다. 오랫동안 말벗이 없어 입에서 군내가 날 정도가 된 병연이 슬그머니 선비 편을 들어 훈수를 했다. 그러자 스님이 초라한 병연의 행색을 보고는 핀잔을 주었다.
  “여보슈! 가던 길이나 가지. 웬 훈수요?”
  불쾌해진 병연이 한마디 했다.
  “산은 명산인데 중은 어질지를 못하구나.”
  그러자 스님도 지지 않고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삿갓 쓴 되지못한 선비는 아름다운 산의 바위에 앉는 것조차 아깝다.”
  그러자 병연이 뒤틀린 심사를 시로 읊었다.
 
         번들거리는 중대가리는 땀 찬 말 불알 같고
         선비 머리통 상투는 개좆처럼 보이는구나.
         목소리는 구리방울이 구리솥 속에서 부딪치는 것 같고
         눈동자는 검은 콩이 흰죽 위에 떨어진 것 같네!

 

  모욕을 당한 중과 선비는 팔을 걷어붙이며 덤벼들었다.
  “뭐라구. ? 말 불알? 이 빌어먹을 놈아, 게 섰거라.”
  잽싸게 도망쳐 나온 병연이 산마루에 올라 발밑을 내려다보니 장관이었다. 시 한 수가 절로 나왔다.
 
         뽀족뽀족 올라선 기암괴석 참으로 기이하도다.
         사람인가 신선인가, 신령인가 부처인가, 놀랍기만 하구나.
         평생 언제 금강산을 읊어볼까 벼르고 별렸건만
         막상 대하고 보니 시는 쓰지 못하고 감탄만 나오네.

 

  병연은 스님과 입씨름을 하고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다 보니 배가 출출했다. 그래서 마을로 내려오니 어느 솟을대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높은 담장 너머로 갈비 굽는 냄새와 술 냄새가 그의 주린 배를 괴롭혔다. ‘, 잔치를 벌이는 모양이니 속 좀 풀 수 있겠구나.’

병연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집사(執事)로 보이는 늙은이가 눈을 부라렸다.
  “이봐! 여기가 어디라고 걸인이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당장 나가지 못할까?”
  배알이 뒤틀린 병연은 주인이 앉아있는 대청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사람 집에 왔거늘 사람대접 안 하니
       높은 대문 안의 주인 또한 사람답지 못하도다.

 

  병연은 박대를 당하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 역시 사람인지라 속이 편할 리 없었다. 그래서 돌아서 나오다가 마침 길가 오두막집 창가에서 재재거리는 새를 보고 읊조렸다.
  
       묻노니 들창 앞에 와서 우는 새야,
       너는 어느 산에서 자고 왔느냐?
       넌 산 소식을 잘 알겠지,
       지금 산엔 진달래꽃이 피었더냐?

 

  이튿날, 다시 발걸음을 옮겨 명천 땅에 들었으나 인심은 매한가지여서 반겨주는 이가 없었다.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명천 명천 부르지만 사람들은 현명치 못하고
       어전 어전 자랑하지만 밥상엔 북어 꽁댕이 하나 없구나!
 
  인심은 사는 형편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산천초목뿐이었다.
  병연은 한 조각 구름처럼 정처없이 발길을 옮기며 또 시 한 수를 읊었다.


       산은 강을 거느리고 강 어구에 서 있고,
       물은 돌을 뚫으려고 돌머리를 도는구나!

 

  산 좋고 물 좋은 금강산과 산간벽촌을 돌던 병연의 발걸음이 어느덧 한양으로 향하여 인왕산 봉우리에 올라 성안의 빽빽한 기와지붕들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여 다시 시 한 수를 읊었다.
 
       청춘이 기생을 안고 노니 천금도 검불 같고
       백일하에 술잔을 드니 만사가 구름 같구나,
       기러기 먼 하늘을 날 때 물길을 찾기 쉽고
       나비는 청산을 지날 때 꽃을 보고 피하기 어렵네.
 
  병연은 복잡한 한양의 저잣거리 인심이 시골 인심보다 사나운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어렵사리 쉰밥 한 술을 얻어먹고 되지못한 인심을 뒤틀린 배알로 읊조렸다.
 
       스무 나무 아래 낯설은 나그네가
       망할 마을에서 쉰밥을 먹게 됐네.
       인간으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꼬.
       차라리 하늘을 가리고 고향 집에 돌아가
       서러운 눈물의 밥을 먹느니만 못하구나.

 

  병연은 오랜 세월 떠돌다 보니 구경도 좋고 유랑도 좋지만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처자식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해질 무렵 두서너 집 문을 두드렸으나
       모두 손을 흔들어 나를 내쫓는데
       두견새만이 박정한 인심을 아는지
       나를 위로하여 집으로 가라고 구슬피 울어 주는 구나!

 

  병연은 조상을 욕한 죄 때문에 삿갓을 써서 얼굴을 가렸지만 돌이켜보면 자신의 한 많은 생이 스스로 서럽기도 했다. 그래서 설움에 북받쳐 또 시를 읊었다.

 

       어디로 갔소, 어디로 갔소,
       삼생에 맺힌 인연 다 뿌리치고 어디로 갔소,
       뉘라서 알리오, 뉘라서 알리오.
       옻칠 같은 캄캄한 밤중에 내 홀로 우는 것을…….

 

  병연은 하염없는 눈물을 안으로 삼키면서 점점 자기의 삶에 그늘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산에 사는 새도, 들에 사는 짐승도 집이 있는데
       나는 한평생을 쓸쓸히 떠돌았네.
       미투리와 대지팡이로 천 리 길을 돌아 걸어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도니 천하가 다 내 집이었네.
       사람을 탓하랴, 하늘을 원망하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내 마음만 고달프네.

 

  병연은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가 한때 방심한 탓으로 기구한 팔자가 되어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고 삿갓을 눌러쓴 채 풍자와 해학의 시를 읊으며 한 시대를 비운의 그늘에 가려져 살아야 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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