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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談] 실패한 선과 성공한 악의 교훈

淸潭 2016. 1. 4. 11:49

실패한 선과 성공한 악의 교훈

 

 

죽산(竹山)의 탄현(炭峴)에는 이씨(李氏)들이 살고 있었는데 가문이 매우 번창하였다. 무신역란(戊申逆亂) 때 탄현은 역도들이 서울로 북상하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이씨 일족이 모여 밤에 술을 마시며 이튿날 아침에 피난을 가기로 약속하였는데, 몇몇 젊은이가 분개하며 말하였다.

“역적들이 사방에 퍼져 있으니, 피난을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들은 토적(土賊)이라 겁낼 것도 없습니다. 우리 집안에는 장정(壯丁)이 10여 명이고 그중에 반은 활도 잘 쏩니다. 여기다가 여러 집안의 노복들까지 모은다면 충분히 적군 한 부대를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깃발을 세워 군사들을 모집하면 향리에서도 반드시 응하는 자가 있을 것이요, 만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몇 사람만 처형하면 병사들은 반드시 모여들 것입니다. 대장부가 국가에 보답하고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지금입니다.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지고 천금(千金)의 상을 받는 것이 우리 손아귀에 있습니다.”

그러자 노인들이 심사숙고하고 말하였다.

“이번 일은 명망 높은 분에게 의지하여야 하니, 어떻게 하면 토벌군 원수(元帥)의 명을 받아 받들 수 있겠나?”

이때 양지(陽智) 수령과 잘 아는 젊은이가 말하기를,

“양지 수령이 원수의 진영에 있으니 우리가 가서 뵙고 영기(令旗) 하나를 얻으면 한 지방을 호령할 수 있습니다.”

하자 모두 좋다고 하였고, 부녀자들도 모두 호응하였다.
새벽이 되어 양지 수령을 보러 가려 하였으나 군복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흰 무명옷을 겹소매를 잘라 버린 뒤 입고 화살을 차고 활을 메고는 떼 지어 원수의 진영 뒤편으로 달려가서는 헤매며 두리번거리니, 그 모습이 마치 정탐하는 자들 같았다. 척후병이 이들을 붙잡자 큰 소리로

“우리는 의병이다.”

하였다. 그런데 당시 역도들이 자칭 의병이라 하였고 옷도 이들과 같은 백색이었으므로 관군은 마침내 이들을 적으로 오인하고 모두 베어 죽였다. 수령을 잘 아는 자만은 이 소리를 들은 양지 수령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이씨 집안은 망하고 말았다.

 

역적 박필현(朴弼顯)이 일찍이 상주(尙州)에 살았는데, 박동형(朴東亨)이 노복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잘 섬겼다. 관상을 잘 보던 박필현은 항상 말하기를,

“박동형은 반드시 귀하게 될 상이다.”

하였다.
무신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박필현은 태인(泰仁) 땅을 근거지로 반란하려 하면서, 박동형을 불러서는 고을에서 거둔 세금의 절반을 주며 말했다.

“내가 대사를 일으킬 터인데, 일이 성공하면 너를 곧바로 태인 현감에 제수할 것이요, 성공하지 못하면 네 집에 숨을 것이다. 그때 너는 이 돈으로 나를 먹여 살려라.”

박동형은 이것을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반란이 실패하자 박필현은 박동형에게 달려갔다. 박동형은 그를 꾀어 깊이 숨게 하고는 주(州)로 달려가서 고발하였다. 주에서 박필현을 잡아 죽이고 박동형의 공로를 국가에 상주하니, 국가에서는 그에게 군(君)을 봉해 주고 또 박필현의 재물을 상으로 주었다. 박필현은 박동형이 반드시 귀하게 될 줄은 알았으나 자기 때문에 귀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은 다만 남을 귀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씨는 의리에 분발하였는데도 망하였고, 박동형은 역적에 가담하였는데도 군(君)에 봉해졌다. 그러므로 일이 아무리 좋더라도 잘못 거행하면 실패하고, 마음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시기에 맞으면 성공하는 것이다.

[주D-001]무신역란(戊申逆亂) : 1728년(영조 4) 3월 소인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자 일으킨 반란으로, 이인좌(李麟佐)가 거병하였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인좌는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 청주성을 점령하고 서울을 향해 북상하여 목천, 창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에 이르렀다.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관군과 싸워 안성에서 패한 그는 죽산으로 도피하였으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대역죄로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주D-002]박필현(朴弼顯) : 1680 ~ 1728.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추종하였고, 1726년 이인좌(李鱗佐)가 상주(尙州)로 이주하였을 때 그와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었다.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부임하자 곧 반란을 꾀하고는 태인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금구(金溝)를 거쳐 전주(全州)에 도착하였으나, 반란 계획이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모두 도주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아들 사제(師濟)와 함께 상주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 제3권 > 성언(醒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