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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몇 년 전 모처럼 수경·연관·도법(사진 왼쪽부터) 스님이 자리를 같이했다. 세 스님이 같이 앉은 사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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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지리산 실상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의 최초 가람이자 우리시대의 귀농·대안교육·공동체·생명평화 운동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왔다. 나 또한 이러한 시절 인연으로 실상사의 지혜방에 2년간 머물며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해우소를 들락거렸다.
지리산에 입산한 지 3년 정도는 그야말로 한 마리 산짐승처럼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섬진강변의 용두리마을과 피아골의 조동마을의 빈집에 들어가 살면서 주먹맙을 싸들고 지리산의 골짜기와 능선을 넘나들며 하루해를 보내고는 했다. 좀더 멋진 말로는 ‘자발적 가난’과 ‘무위’와 ‘독거’의 날들이었다. 내 생애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해방과 자유와 일탈의 날들이었다. 한 달에 5만 원 정도, 많게는 20만 원 미만으로 버텨보았다. 돈 없이도 살 수 있고, 돈 없는 만큼 더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엿보며 즐기며, 그러나 그 고통과 외로움과 멸시와 절망마저 친구로 삼았다. 내 일생일대의 결단을 스스로 치하하고 축하하며 한철 잘 놀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뒷집 할머니와 노총각을 알게 되고, 토지면의 우리식당 할머니와 지리산에 먼저 입산한 이들과 어울리고, 서울의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오는 바람에 조금씩 나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 소문이 섬진강변 지리산을 넘어 남원의 실상사까지 흘러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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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할 때 길 위에 앉아 있는 수경·도법 스님과 이원규 시인(사진 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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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혹은 20대 초반에 동진 출가
2000년 가을 무렵이었다. 당시 지리산과 실상사에는 새로운 기운과 위기가 동시에 몰아치고 있었다. 도법(道法) 스님과 양재성 목사 등이 의기투합해 시작한 ‘지리산을 사랑하는 열린 연대’라는 모임이 막 걸음마를 뗄 때였고, 또 한편으로는 함양군 마천의 ‘지리산댐 계획’으로 용유담과 천년고찰 실상사가 수몰될 위협에 처해 있었다. 도법 스님의 설득으로 30년간 선방 수행만 하던 수경 스님 등이 의기투합,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일꾼이 필요했던 것이다. 도법 스님이 인편과 전화로 연락을 해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 세상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짐짓 모른 체 지나치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수경 스님이 꼭 만나고 싶다”는 전언이 몇 번이나 왔다. 도법 스님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수경’(收耕)은 법명도 처음 들었거니와 비구니 스님인 줄 알았다. ‘여승이 무슨 일로 나를 보자는 것인가’ 하며 의아해했다. 그런데 3년 만에 서울 갈 일이 있었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통신두절로 살던 내게도 휴대폰이 막 생길 무렵이었다. “서울에 간 것을 다 아니 조계사 사무실에서 꼭 수경 스님을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처음 수경 스님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비구니 스님이 아닌 데다 굵직한 목소리와 두꺼운 돋보기안경 속의 눈빛도 만만찮았다. 다짜고짜 수경 스님이 “차나 한잔 합시다”며 잿빛 바랑을 풀더니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물 두 컵을 달라고 부탁하더니 발효차 비슷한 것들을 쏟아 부었다. “좋은 찹니다. 한번 마셔 보슈” 하며 스님이 먼저 주욱 들이켰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들이마시려는데 두 모금도 채 못 마셔 ‘켁’ 하고 멈췄다. 무언가 가는 모래 같은 이물질이 혀에 맺히고 맛은 텁텁했다. “스님, 이게 뭡니까?”하고 물었더니, 스님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아니, 이 사람이 지리산에서 3년을 살았다면서 지리산 흙맛도 몰라! 내가 당신 주려고 지리산 깊은 곳에서 이 귀한 흙을 퍼왔소” 하는 것이었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아, 예…” 하며 머뭇거리는데, “저랑 일 좀 같이 합시다” 하며 ‘선방’을 날렸다. 나는 얼떨결에 “예” 하고 대답했다. 그게 다였다. 스님은 곧바로 실상사 종무실에 전화를 걸어 “이원규 시인이 내일 들어가니 방 하나 비워두라”고 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아, 무참하게도 선승의 일격에 그만 기선제압을 당한 것이다. 나 또한 그 순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여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곧 바로 지리산으로 내려와 다음날 옷가지만 챙긴 채 실상사 지혜방으로 가서 2년간을 사는 화답을 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흙탕물 한 모금의 대가는 2년이 아니라 내 인생의 10년간을 좌우했다. 실상사로 가자마자 낙동강 1,300리를 걷고, 지리산 바깥으로 빙 돌아 세 번을 걷고, 생명평화 탁발순례 1만 리 길과 4대강 3,000리 길과 새만금 삼보일배며 오체투지 등 그 모든 일에 나서서 노숙자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여파로 지난해에는 결국 내 몸의 면역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얻은 결핵성 늑막염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9개월 동안 독한 약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시절 인연으로 실상사에 살면서 도법 스님과 수경 스님, 그리고 언제나 뒷방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학승’ 연관(然觀) 스님을 조금 더 가까이서 알게 됐다. 이 세 스님들은 10대 혹은 20대 초반에 동진 출가한 뒤부터 참으로 오래 도반생활을 해왔다. 나 또한 지리산 초기의 3년 정도를 빼고는 줄곧 이 세 스님과 연을 이어왔지만, 장장 40여 년간 도반의 길을 함께 걸어온 세 스님의 끈끈한 속정을 어찌 미루어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그들의 경책성 화법이나 몸짓 또한 어찌 다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
오랫동안 폐사지처럼 한가했던 지리산 실상사가 그동안 우리 시대 ‘생명평화의 베이스캠프’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도법 스님의 부단한 열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언제나 연관·수경 스님이 있었다. 그리하여 혹자들은 세 스님을 일컬어 ‘실상사의 삼두마차’라 불렀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도법 스님은 전북 금산사로 출가했으며, 수경 스님은 수덕사, 연관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해 세 스님은 서로 문중이 다르다. 각 문중에서도 이제는 중진을 넘어 원로 대접을 받을 법랍인데 참으로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것이다.
그동안 나는 도법 스님과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1년간 함께했으며, 수경 스님과는 탁발순례와 더불어 낙동강 1,300리와 지리산 850리를 걷고, ‘새만금 삼보일배’와 ‘오체투지’ 등을 하며 총괄팀장의 이름으로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자 했다. 연관 스님과는 그의 ‘백두대간 종주’를 지원하기도 했지만, 이 세 스님과 개신교와 천주교, 원불교 등의 종교인들과 4대강 3,000리를 103일 동안 걷기도 했다. 특히 연관 스님과는 주로 수월암이나 지리산 곳곳에서 차를 마시며 해박하면서도 소박한 스님의 풍모에 이끌려 스님은 가르친 바 없지만 나 스스로 색다른 문학 수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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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수경 스님이 머물던 실상사 극락전. 지금은 도법 스님의 처소다. / 2 연관 스님의 처소 수월암. 파초가 연관 스님의 기품을 닮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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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상 시상식장 연관 스님은 끝내 안 나타나
그런데 그동안 지켜본 바에 따르면 세 스님의 스타일은 확연히 다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도법 스님은 합리적이면서도 근본주의자인 ‘깐깐한 지장(智將)’이요, 수경 스님은 선객다우면서도 ‘섬세한 용장(勇將)’이요, 연관 스님은 선비나 학자다우면서도 큰 덩치에 비해 ‘여린 풀꽃의 덕장(德將)’이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면, ‘지리산 댐 문제’가 불거지자 도법 스님은 선객인 수경 스님을 ‘진속불이’의 관점으로 끝까지 설득해 산문 밖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수경 스님 또한 그 화답으로 도보순례뿐 아니라 ‘삼보일배’에 이르기까지 내친 김에 온몸으로 나섰다. 그러나 연관 스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의 ‘목석’이었다. 학승의 자세를 잃지 않고 언제나 그늘과 배후를 자처해 왔다.
12년 전 제6회 풀꽃상 시상식 날의 풍경이 떠오른다. 세 스님이 지리산 물봉선과 함께 수상을 하게 되었는데, 연관 스님은 이른 아침 산에 오른 뒤 끝내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7대 종단과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한 ‘지리산 위령제’를 전후해 도법 스님이 스스로 산문 밖 출입을 삼가며 3년 기도에 들어가자 수경 스님은 이를 대신해 사회 전면에 나서고, 연관 스님은 조용히 목숨을 걸고 한겨울 ‘백두대간 1,500리 종주’로 화답했다.
‘해인사 청동대불 사건’ 때는 오히려 연관 스님이 앞장을 섰으며, 생명평화탁발순례길에는 도법 스님이 단장을 맡아 일선에 서자 수경 스님은 도감을 맡으며 묵언하는 등 ‘따로 또 같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계종 특별수도원인 봉암사에서의 동안거에서도 수경 스님은 ‘조식취모’의 공양주를 맡고, 연관 스님은 ‘당시역사’의 불목하니를 맡으며 수행을 했으며, 그 와중에도 수경 스님은 ‘지율 스님과 새만금 문제’에, 연관 스님은 ‘황교수 사태’에 눈길을 접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도법 스님은 여여히 생명평화의 길을 걷고 걸었으니 깊이 들여다보면 이들의 길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서로 만나면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서로 다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주변에서는 이구동성으로 ‘전생의 부부’였을 거라며 키득거렸다.
제주 4·3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도법 스님은 1965년 출가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도법 스님은 두 스님과 의기투합해 1995년부터 실상사 주지 소임을 맡으며 지리산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한국 불교개혁의 최선봉역을 맡으며 조계종 화쟁위원회,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종교평화위원회를 합친 기구인 자성과쇄신결사본부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안으로는 스님들의 대학원 격인 강원 화림원을 만들어 후학교육에도 매진하는 한편 바깥으로는 화엄경의 가르침과 인도의 간디사상 등을 접목한 생명평화운동과 불교계의 쇄신을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있다.
“불교의 핵심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딱 두 마디예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세상에 나의 존재가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뜻이고,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온 세상 생명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내가 최선을 다해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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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 10주년 기념잔치에 많은 학생들이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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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스님, 도법 스님에게 직격탄 날리기도
도법 스님은 때로 논리적이면서도 장황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 또한 이처럼 어려운 것을 현실적으로 단순명쾌하게 정리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해 덩치가 큰 연관 스님은 과묵하다 못해 때로는 석장승처럼 씨익 웃기만 한다. 20대 초반에 해인사로 출가한 스님은 우봉 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다. 그 뒤로 10여 년 동안 봉암사·상원사·해인사 등의 전국의 내로라하는 선원에서 수행하다가 김천 직지사의 관응 큰스님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경전 공부를 시작한 학승이 되었다. <해인지>의 ‘호계삼소’에 따르면, 탄허·운허 큰스님과 함께 손꼽히던 ‘대강백’ 관응 스님이 20년 가까이 직지사에서 상주하면서 ‘글 잘하는’ 스님들을 모아 경과 논을 가르쳤는데, 연관 스님은 그 첫 번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칭 ‘문학도’였던 연관 스님을 관응 큰스님이 마치 친자식처럼 아껴 외국에 나갈 때도 수행하게 했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연관 스님은 절대로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사진 찍히거나 행사에 참석하거나 인터뷰를 절대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유명한 스테디셀러 <죽창수필> 등과 경전 등을 번역해 펴내는 일, 해마다 하안거와 동안거 등 선방에 드는 그 외의 시간에는 실상사 바로 뒤 수월암에서 홀로 밥을 끓여 먹는다. “그냥 혼자 살아요. 내 한 몸 누구한테 또 업을 짓겠어요. 사실 공양주도 귀찮고, 상좌도 귀찮고. 아직 몸 성한데 중이 뭐 독거살이 해야죠.” 늘 이런 식이다.
그러고 보면 연관 스님은 한 번도 주지 소임을 맡아 본 적이 없다. 소임을 맡은 게 있다면 실상사 화림원의 초대학장이나 그를 역경의 길로 이끈 관응 스님이 주석하던 직지사, 문경의 김룡사, 태안반도의 흥주사 등지에서 강백을 한 것이 전부다. 상좌가 여럿 있지만 ‘따로 내세우거나 챙기지 않고’ 역경에만 몰두해 왔다. 말하자면 불교계 내부의 ‘세 불리기’ 등 이런 것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 불교계 안팎에서 “역경에 있어 성실하고도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연관 스님의 대표적인 책으로는 <왕생집>, <죽창수필>, <선문단련설>, <금강경간정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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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관 스님은 산에 오를 때면 언제나 승복 위에 등산복을 입고 감쪽같이 신분을 감추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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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번은 역경과 선방수행에만 몰두하던 연관 스님이 느닷없이 도법 스님에게 죽비를 든 일이 있었다. 이른바 ‘황우석 교수 사건’ 때의 일이다. 도법 스님이 몇 군데의 언론에 ‘불교계의 황우석 지지에 대한 비판’ 등의 인터뷰와 기고를 하자, ‘우석선생 친근기’를 쓴 바 있는 연관 스님이 불교신문을 통해 장장 40여 년간의 도반에게 공개적으로 ‘도법 스님, 이젠 그만 두시라’는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이를 두고 어떤 언론은 ‘불교계의 내분’ 운운하는가 하면, 불교계 안팎과 네티즌들은 무슨 큰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저마다 아전인수격으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관 스님은 그동안 언론 등에 한 번도 기고한 적이 없었다. 도법 스님 또한 느닷없이 공개적으로 뺨을 맞은 격이니 일단은 참으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세 스님과의 오랜 인연으로 그 논쟁을 수습하는 어쭙잖은 화해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또 한 수를 배웠다. 두 스님이 휘두르는 다소 감정적인 시퍼런 칼날이 베고자 하는 것 또한 미망과 전도몽상이니 사실은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더구나 일방적이긴 하지만 불가의 아름다운 가풍인 도반 간 ‘경책’과 ‘탁마’의 실전을 몸소 보여주고 있으니 이 어찌 부럽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결별의 기운이 감돌던 이 사건을 보며 새삼스럽게 느낀 흥미로운 사실은 세 스님의 평상시 풍모가 뒤바뀌어 있었다는 점이다. 전혀 다른 향이 풍기니 참으로 기이한 양상이 아닐 수 없었다. 연관 스님은 잠시 덕장이기를 포기(?)한 ‘깐깐한 지장’을 표방한 듯하고, 수경 스님은 두 스님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며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여린 풀꽃의 덕장’이 되었으며, 묵묵부답인 도법 스님은 ‘대범한 용장’이 되었다. 이렇게 뒤섞이고 보니 ‘그것 참, 이 또한 오래 살다 보니 서로 한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정수리로 흘러들었다. 부창부수요, 전생의 부부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한편, 속세에 널리 알려진 수경 스님은 선방의 선객에서 저잣거리로 나오자마자 활화산 같은 열정을 보였다.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 상임대표,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화계사 주지 등을 맡으며 한국사에 있어서 투쟁이 아니라 고행을 통한 자기성찰의 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삼보일배와 오체투지였다. 실로 자신의 온몸을 던져 아스팔트를 기어가는 한 마리 자벌레가 되었다. 내게는 아버지 같고 큰형님 같은 분이었다. 10여 년간 길 위의 천막살이를 했으니 눈빛만 봐도 척척 알아들었다.
그런 수경 스님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떠나기 1년 전부터 나는 수경 스님으로부터 삼각산 화계사에서 처음 환계(還戒)라는 말을 들었다. 스님은 이미 저잣거리를 떠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부처님께 조계종단의 계율마저 돌려주고, 법복을 벗고 산중의 농사꾼 촌로로 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담담하고도 차분한 말투로 “내가 속세에서 할 일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내 몸도 마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부처님께 계율마저 돌려주고 산중 촌로로 돌아가 배추농사를 짓겠다. 그때까지만 함께하자”고 했다. 오체투지를 앞둔 설날 아침에 스님이 던진 화두 ‘환계’란 말은 실로 두려웠고, 무서웠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속으로는 설마설마 했다. 아수라지옥 같은 저잣거리에서 가장 낮은 자세인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를 하며 병든 몸과 지친 마음을 다잡기 위한 ‘신심의 발로’ 정도로 생각했다. 선방 수좌로만 살다가 저잣거리에 나온 뒤 처음으로 화계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도 마치 행자승처럼 늘 그렇게 ‘댓돌 위의 신발부터 똑바로 놓으라’는 조고각하의 첫 마음으로 살아왔었다. 그동안 무릎관절은 다 문드러지고 안 좋은 눈은 더욱 나빠지는 등 온몸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말 그대로 “세상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당대의 유마 거사이자 환경보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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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체투지. 지리산 노고단에서 임진각까지 이렇게 자벌레처럼 기어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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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 스님 홀연히 자취 감춰
그런 수경 스님이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미움도 원망도 다 받아들이겠다”며 솔직 대범한 발로참회의 글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생사 해탈의 관문을 넘어서지 못한 채 얘기하는 것은 자기 위선”이라며 “죽음이 두렵다”, “대접 받는 것도 싫다”는 스님의 처절한 고백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천막생활의 도보순례 중에도 이른 새벽에 먼저 일어나 주변 공중화장실의 누런 소변기와 대변기를 남몰래 맨손으로 깨끗이 닦아내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은 한 달에 한 번도 잘 씻지 않던 스님이었다. 1주일 동안 빨지 않은 양말을 햇볕에 말려가며 신다 보니 던지면 꼿꼿하게 설 지경이 되어 “스님, 더러워 죽겠어요. 제발 좀 씻으세요” 핀잔을 주면 “야, 향싼 종이에 향기 나듯이 내 몸에는 향기가 나, 맡아봐” 하며 허허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사실 처음으로 지리산둘레길에 대한 고민과 제안을 한 사람도 수경 스님이었다. 2000년 낙동강 1,300리와 2001년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를 할 때, 내가 사전답사를 했는데 도저히 사람이 걸을 만한 길이 없었다. 그 모든 길들이 차량 위주로 바뀌었으니 목숨을 걸고 순례해야 했다. 지리산 순례 때 수경 스님이 “최대한 비포장길과 고갯길 등을 찾아보라”고 해서 몇 번의 사전답사를 더해야 했다. 그 고민이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 때 도법 스님과 걸으며 공유하게 되고, 건교부 장관을 몇 번 만나면서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문광부에서 논의되다 다시 산림청으로 이관돼 애초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지금의 어정쩡한 지리산둘레길이 탄생한 것이다. 이에 대한 안타까운 소회는 다음에 또 얘기할 것이다.
어찌됐든, 속세에 널리 알려진 수경 스님은 사라졌다. 그러나 한마디로 잘 있다. 어디에 있는지는 밝힐 수 없지만, 수염이 거뭇거뭇 자라고 눈빛 더욱 형형해진 스님은 충청도의 어느 산중에서 텃밭을 가꾸며 아픈 다리 절면서도 날마다 포행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비로소 덕숭문중의 맏상좌답게 산중의 ‘사자’가 되어 수행자다운 독거살이를 하고 있다. 그동안 법복을 벗어놓고 전국의 폐사지를 홀로 돌아보고, 인도의 아쉬람 등지에 몸을 숨기며 살아오다 마침내 정착했다. 더 큰 수경 스님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서 있다.
현재 세 스님은 지난 15년과는 서로 다른 길 위에 있다. 도법 스님은 세상 깊숙이 나아가고, 연관 스님은 선방과 역경에 몰두하고, 수경 스님은 은산철벽의 경계를 넘어 홀로 수행하고 있다. 얼핏 보면 지리산 실상사의 삼두마차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그랬었다. 우리 사회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경책과 탁마의 삼인행’ 혹은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화이부동의 삼인행’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하여 ‘실상사 삼두마차’의 현 상황은 ‘따로 또 같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또 다른 절정이 아닐 수 없다. 시절이 하수상한 시절에 다만 그것이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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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하면서 눈보라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