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스님들 소식

수경스님을 보내며..

淸潭 2014. 12. 14. 10:13

수경스님을 보내며..

따뜻한 겨울 어느 바위 옆이 아닐 지라도.. 
 
언론은 ‘잠적’ 이라고 했지만, 나는 수경(收耕) 스님이 불연(佛緣)과 속연(俗緣)을 모두 끊어버리고 홀연히 사라진 일을 또 다른 구도를 위한 수행정진에 나선 것으로 보았다.
 
그의 돌연한 출가에 대한 의미를 두고 우리 사회 일각에서 벌어진 입씨름은 기가 막히다. 가던 스님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참을 수 없는 갑갑함에 “모두 다 내 탓이로소이다”를 연발하며 가슴을 쳐야 했을 일이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의 의미를 축소하는 종단의 행태에 실망해서..”에 무게중심을 두는 언론이 있는가하면, <시민 단체 권력화 경종 울린 수경 수님 잠적>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잠적을 "환경운동 권력화에 대한 자책이며, 권력지향적 시민단체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라며 전혀 상반된 해석을 붙인 언론도 있었다.
 
해석이 어떻게 됐던 간에 언론은 수경 스님의 출가에 거창한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했지만 내게는 이 일이 지극히 개인적인 성찰로만 받아들여졌다. 그가 "문수스님의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말한 것은 이제까지 몸 바쳐 해 왔던 일들에 대한 목적 자체의 부정이라기 보단 방법론에 대한 회의와 한계를 고백한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난 것으로 보았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 환경문제, 종단 문제 등 사회문제들이 출가의 계기가 되었다곤 하지만 그가 이 길의 끝자락에서 기필코 부처를 만나고야 말 결심을 읽었다. 그러니 그의 출가와 관련한 세속의 얄팍한 왈가왈부가 다 부질없어 보일 뿐이다.
 
수경이 당장 가사 장삼을 벗어던졌다 해서 부처를 버린 것이 아니며, 스스로의 모습에 회의를 느낀다고 했다고 하여 정사(正邪)를 번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니, 훗날 이승에서의 마지막 자리가 그가 바라던 바대로 따뜻한 겨울 어느 바위 옆 자락이 아닐지라도 웃으며 부처를 만날 수 있으리라.
 
일찍이 신라 승려 원효가 스스로 파계함으로 더 큰 부처를 만났듯이, 지금 우리가 떠나보낸 수경스님이 더 큰 부처를 만나 우리 앞에 돌아올 수 있기를 그저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다시 길을 떠나며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

먼저 화계사 주지 자리부터 내려놓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남은 인생은

초심으로 돌아가 진솔하게 살고 싶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

초심 학인 시절, 어른 스님으로부터 늘 듣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그런 중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칠십, 팔십 노인분들로부터 절을 받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없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원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을 보면서 제 자신의 문제가 더욱 명료해졌습니다.

‘한 생각’에 몸을 던져 생멸을 아우르는 모습에서,

지금의 제 모습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제 자신의 생사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면 제 인생이 너무 불쌍할 것 같습니다.

대접받는 중노릇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위선적인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

번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

2010년 6월 14일

수경

가져온 곳 : 
블로그 >衆口難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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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라이|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