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안을 적과 동지로 나누는
모든 행동방식 정치적인 것
지배자들이 즐겨 사용해 온
억압과 통제의 교묘한 방법
한 사람 한 사람 부처될 때
분열과 대립 종식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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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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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인간 중심의 학문입니다. 인간 사이에 생긴 문제를 철저히 인간의 노력으로 풀어내는 것이 인문학의 정신입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신이 죽어야 인간이 역사를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죽이라’고 합니다. 부처를 넘어서야 내가 부처가 되고 아버지를 넘어서야 내가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불교에 민주적인 힘이 있다는 것은 각각의 ‘내’가 ‘석가모니’가 아닌 ‘부처’가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인문학의 전통입니다. 그래서 미래 종교에서 불교의 역할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카를 슈미트라는 정치철학자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오늘은 이 슈미트가 말한 적과 동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사회를 한번 보죠. 분단 이후 우리나라에는 하나의 공식이 있습니다. 민주적인 기운이 확산되거나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북한과의 대립이 완화됩니다. 반대로 보수적인 정권이 집권하거나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면 북한과의 긴장이 강화됩니다. 왜 그러냐? 민주주의는 억압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억압이 늘어나면 남북이 대립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 두 가지를 다 끌고 가야 하는 사회입니다. 이 개념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정치적인 것이란 판단의 범주가 적과 동지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칸트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칸트의 3대 비판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입니다. 이것은 진, 선, 미에 대응됩니다. 수학적인 판단에 따라 참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나눠본 것입니다. 예전에는 참이 선이고 곧 아름다운 것이라고 봤습니다. 거짓은 악한 것이고 추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칸트 이전의 인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진, 선, 미를 각각 다른 관점으로 나눠서 본 것입니다.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가 보셨나요. 맑은 날 해질녘에 보면 서울의 석양이 보라색으로 보입니다. 저는 그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보라색으로 보이는 것은 공기오염, 스모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보라색하늘을 보면서 공기 오염이 심각하다며 분노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하늘을 보면서 지금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얼마고, 먼지 농도가 얼마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칸트는 그렇게 다른 관점으로 나눠서 본 것입니다. 세 가지 안경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것은 이로우냐 해로우냐, 종교적인 것은 성과 속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칸트 이후에 이와 같은 범주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이 슈미트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것의 범주를 적과 동지로 봤습니다. 어떤 사안을 적과 동지로 구분하는 것이 정치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정치적인 행동을 합니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행동은 모두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적과 동지를 나눈다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100명을 통제하고 지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때 가장 쉬운 방법이 이 100명을 하나하나로 쪼개 놓는 것입니다. 여러 무리로 쪼개고 무리들 사이에 경쟁 시키고 이간질 시키면 통제하기가 쉬워집니다. 동시에 독재적인 지도자가 쪼개놓은 여러 무리를 내편으로 만드는 방법 또한 외부에 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외부에 적을 만들면 적이냐 동지냐라는 하나의 잣대로 무리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과 북이 대립으로 가면 남도 북도 모두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20세기 역사였고 이제는 남북대립의 연장선상에서 학연, 지연, 혈연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갖고 다퉜을 때 최고 권력자나 지배 세력들, 보수 세력들이 웃습니다. 남북이 대립으로 가면 우리 사회는 억압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억압에서 벗어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롭게 사는 것은 적과 동지로 나눠지지 않는 것, 적과 동지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통일과 민주화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적과 동지의 범주에 머무는 것은 인문주의에서 후퇴하는 것입니다. 적과 동지의 범주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적과 동지의 범주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권력과 싸우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사 이래 부당한 권력과 싸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적과 동지의 범주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 즉 로마를 사랑하라고 한 것도 이 적과 동지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 부당한 권력의 지배로부터 벗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부처가 자비를 이야기 했을 때 비불교도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면 적이 없습니다. 공자도 ‘어진 사람은 천하무적’이라고 했습니다. 하늘 아래 적이 없다. 그런 사람만이 춘추전국의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과 동지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길은 적을 없애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굉장히 정치적인 선언입니다. 처음 유태인들이 예수를 지지했던 이유는 로마라는 적에 맞서서 유태인들을 해방시켜주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라? 안되죠. 그러니까 유태 쪽에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공자의 ‘인자무적’도 정치적인 발언입니다. 인을 통해 적을 없애는 것입니다. 불교는 ‘자비’, 묵자는 ‘겸애’를 말했습니다.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모두 2000년 전 이야기입니다. 다만 오늘날까지도 실천을 못하고 있습니다.
적을 없애는 또 하나의 방법은 동지를 없애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가족을 떠나는 의미도 동지를 없애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홀로 있음으로써 동지를 없애고 곧 적을 없애는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복지국가로 나아가야하는 것은 맞지만 한 사회가 강력한 복지국가가 되면 동지의식이 강해지고 나머지를 배척해 적으로 간주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내가 내는 세금으로 복지국가를 만들었는데 외국인노동자들은 세금도 안내면서 혜택을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배척과 폭력이 발생합니다. 복지국가로 가는 과정에서 먼저 극복해야할 것이 바로 이 견고한 동지의식입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국가들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적과 동지를 나누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가 할 일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정신입니다. 자비를 통해 성불로 가는 길입니다. 누구에 대해 자비를 가져야 할까요. 적과 동지에 포획돼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자비를 가져야 합니다. 내 가족, 내 아이가 1등 해야 한다는 것부터 포기해야 합니다. 내 아이가 1등 하는 순간 다른 아이가 2등하고 내 아이가 대학갈 때 다른 아이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여러분의 숙제입니다.
우리는 수천 년의 역사동안 적과 동지를 나눠 싸워왔습니다. 우리 세대에, 당장의 시대에 그것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바꿔갈 수 있도록 후대에 전해야 합니다. 조금씩 바꿔가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빨리 되지도 않습니다. 싯다르타가 부처님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자비로 뒤덮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더러운 곳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각자는 그 더러운 세상이 썩지 않도록 하는 하나하나의 세포입니다. 세상이 갑자기 맑아지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노력으로 세상이 썩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많이 고민하시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강의는 대한불교진흥원 주최, 법보신문 후원으로 7월16일 열린 화요열린 강좌 ‘인문학으로 공감하고 힐링하기’에서 철학자 강신주 씨가 강연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강신주는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상상마당 등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출판기획사 문사철의 기획위원이다. 우리 삶의 핵심적인 사건과 철학적 주제를 연결시켜 포괄적으로 풀어낸 철학서를 다수 펴냈다. 저서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 삶을 만나다’,‘상처받지 않을 권리’,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VS 철학’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