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일은 새 결제 하는 날”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
해제가 됐다고 어떻게 방심(放心)을 할 수가 있겠느냐. 해제라고 하는 것은 생사영단(生死永斷)해야만 해제인데, 생사영단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있느냐 이 말이야.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할 것 같으면 해제한 것이 아니야. 해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생사영단해서 성불(成佛)할 경지에 올라가야 해제지.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제냐 말이야.
해제했다고 모두가 걸망 짊어지고 제 맘대로 방심을 한다고 하면 그건 해제가 아니야.
덕숭산 정진 대중들은 해제를 했다고 조금이라도 방심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해제하고서도 내가 참학(參學)하는 일을 마치지 못했다 할 것 같으면 여기에서 다시 발심을 해야 하고, 다시 제 결심을 해 가지고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지.
해제가 바로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날이다 이 말이야. 해제한다고 마음 놓지 말고 여기서 다시 마음을 동여매 가지고 다시 발심해서 새 결제를 해야 돼.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덕숭산의 기반처럼, 성불(成佛)의 기틀이 움직이지 않고 꾸준히 그대로 정진을 해야 된다 이 말이야, 내 일을 마치기 전까지는 조금이라도 방심을 해서는 안 됩니다.
桃花雨後零落下(도화우후령낙하)
染得一溪流水紅(염득일계류수홍)
복숭아꽃이 비 온 뒤에 떨어지는데
계곡 흐르는 물이 붉게 물들었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도화꽃이 언덕 위에 붉게 피었는데, 비가 와서 싸-악 떨어졌다 이 말이야. 도화꽃이 싸-악 떨어져서 개울이 가득 붉은 물결이 흘러가더라.
개울 가득하게 흐르는 물에 이 복사꽃이 빨갛게 물들어야만 해제더라 이 말이야!
법좌에서 내려오시다.
[불교신문 2403호/ 2월23일자]
“설산수도의 자세로 정진하길”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원명 스님
雪後始知松栢操(설후시지송백조)요
事難方見丈夫心(사난방견장부심)이로다
눈이 내린 뒤라야 송백의 지조를 알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해봐야 누가 장부인지 알 수 있다.
벌써 구십일의 안거가 지나 해제 날을 맞았습니다. 과연 무엇을 위해 결제를 하고 해제를 합니까? 진정으로 마음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대중들이 각자 한 입씩 생철을 씹었습니다. 얼마나 물러졌는지는 스스로가 잘 알 것입니다.
고인의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혹독한 추위를 지내봐야 어느 것이 군자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대중들은 분명 마음속에 설산수도의 자세로 정진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해제하는 대중들은 수행자의 지조를 지녔을 것입니다.
생철같은 공부가 조금 물러졌다고 쉬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순식간에 다시 단단하게 굳어져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일하게 하라는 말을 간곡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제니 해제니 하는 말은 지혜롭게 완급을 잘 조절하라는 뜻이지 놓아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고 분별력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그 밝은 눈앞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만 그것을 잡으려 하면 멀어져 버리는 그 신통한 물건이 무엇인지, 실체를 찾는 대중들은 각자 대력백우(大力白牛)가 되어서 허수아비에 속지 마십시오. 그 허수아비의 펄럭거림에 속아서 배고픔에 허덕이는 어리석음은 면해야 할 것입니다.
枯草弊衣化作人(고초폐의화작인)한데
野禽山獸總疑眞(야금산수총의진)이라
家牛有力兼明眼(가우유력겸명안)라니
直入田中喫偶身(직입전중끽우신)이로다.
마른풀 헤진 옷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었더니 들새 산짐승들이 모두 긴가민가 하네.
우리 집에 힘세고 눈 밝은 소가 한 마리 있나니 성큼성큼 밭으로 들어가 허수아비를 먹어버렸다.
해제하고 나서는 대중들은 당당하게 본분을 향해 나아갔다가 영축산으로 다시 돌아와 살찌고 맛난 향기로운 풀만 먹는다는 백우처럼 참 선지식이 되어 인천의 스승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柳暗花明千萬戶(유암화명천만호)에
叩門處處有人(고문처처유인응)이로다.
버들가지 우거지고 화사한 꽃핀 가가호호에 문을 두드리면 집주인이 예하고 대답하도다.
[불교신문 2403호/ 2월23일자]
“본참공안만 열심히 참구하시길”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
나는 오늘 해제법문(解制法門)으로 발심수행(發心修行)에 도움이 되는 이웃나라 일본의 대선지식이신 백은혜학선사(白隱慧鶴禪師)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백은선사는 눈 밝은 지도자를 못 만나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스승으로 삼고 열심히 공부해서 깨쳤으나 인가(認可)해 줄 스승이 없었다. 토굴(土窟)앞에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 내가 만일 바로 깨쳤으면 거꾸로 흘러가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을 보고 깨쳤다는 자신을 얻고 나서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법문을 설하고 다니다가 어떤 거사를 만났는데 거사가 하는 말이 스님이 정말 깨쳤거든 손 하나만 가지고 소리를 내보라고 하자 할 말이 없었다.
스님은 그 후 피나는 노력으로 다시 정진을 하던 중 처마 밑 아궁이에서 군불을 때게 되었는데 마침 비가 오자 처마 밑에 반신(半身)은 마르고 처마 밖에 반신은 비에 젖는 것을 보고 크게 깨쳤다. 그 후 스님은 척수포대(隻手布袋) 손 하나만 들고 있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을 많이 그려서 공부하는 이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半身乾兮半身濕(반신건혜반신습)하니 南山起雲北山雨(남산기운북산우)로다
若人一邊着心求(약인일변착심구)하면 猶如彫氷作佛像(유여조영작불상)이로다 雖然如是(수연여시)나
一朝氷消水又乾(일조빙소수우건)하니 頭頭向我話無生(두두향아화무생)이로다.
반신은 마르고 반신은 젖으니
남산에 구름 이는데 북산에 비가 오네
만일 한쪽만 집착해서 공부한다면
얼음으로 부처님 모습 새기는 것과 같네
비록 그러나
하루아침에 얼음이 녹고 물도 마르면
모든 물건이 나를 향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설해주리라.
금일대중(今日大衆)은 이 법문을 듣고 언하(言下)에 깨닫지 못했거든 분별심으로 헤아려 알고자 하지 말고 본참공안(本參公案)만 열심히 참구하라.
금생(今生)에 깨치지 못하면 나를 먹여주고 입혀준 시주(施主)의 은혜를 언제 갚겠는가.
야운조사(野雲祖師)께서 자경(自警)에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한 방울 물도 빚이 된다고 하지 안했던가.
무수원자상고지(無首猿子上枯枝)로다.
머리 없는 원숭이 새끼가 마른 나뭇가지로 올라가는구나.
[불교신문 2403호/ 2월23일자]
“대중에 묻노니 어떤 것이 본분사인가”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종 스님
달마(達磨)는 부래동토(不來東土)하고 이조(二祖)는 부왕서천(不往西天)이라. 인인벽립만인(人人壁立萬)이요, 개개상광현전(個個常光現前)이로다. 대중(大衆)은 환지락처마(還知落處)아 약야미지(若也未知)인댄 간취고인갈등(看取古人葛藤)하라.
거(擧) 취암 (翠巖)이 동말(冬末)에 시중운(示衆云) 일동이래(一冬以來)에 위형제설화(爲兄弟說話)하니 간취암미모재마(看翠巖眉毛在)아 보복운작적인심허(保福云作賊人心虛)니라 장경운(長慶云) 생야(生也)라 운문운(雲門云) 관(關)이라 하니 태허요곽만휘삼연(太虛寥廓萬彙森然)하고 정안동명직호부립(正眼洞明織毫不立)이라 고준처조사막근(孤峻處祖師莫近)하며 탄이처인천공지(坦夷處人天共知)로다.
양구 운(良久 云)
천성부전미묘결(千聖不傳微妙訣)하고 학봉고정유인행(鶴峯孤頂有人行)이로다.
초조 달마스님은 동토 중국에 오지 아니하고 이조 혜가는 서천 인도에 가지 아니하였다.
사람 사람이 우뚝한 벽 만길이요, 낱낱이 항상 광명을 현전하도다.
대중은 도리어 구경의 입장을 아는가? 만일 알지 못하면 고인의 갈등을 깨달으라.
드노니 취암스님이 동안거의 종말에 대중에게 말하기를 “한 겨울 동안 형제를 위하여 법문 하였으니, 보아라 취암의 눈썹이 있는가?”
보복스님이 말하기를 “도적의 마음은 거짓 속임수이니라.” 장경스님이 말하기를 “나왔다.”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꼭 가두었다” 하니, 허공은 텅 비었으나 만물이 죽 늘어 있고 바른 눈이 훤출히 밝으나 가는 털도 있지 아니하다.
고준한 곳은 조사도 가까이 하지 못하며 평탄한 곳은 사람과 하늘 사람이 다같이 앎이로다.
감히 대중에게 묻노니, 어떤 것이 본분사인고,
“천이나 되는 성인도 미묘한 비결을 전하지 아니하고 백학봉 우뚝한 꼭대기를 사람이 행하도다.”
[불교신문 2403호/ 2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