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건강,의학

범인은 너, 술이었구나

淸潭 2007. 1. 31. 14:01

내 머릿속의 지우개...범인은 너, 술이었구나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 레나드는 범인의 흉기에 머리를 맞은 뒤 기억력이 소실돼 모든 사항을 꼭 10분 밖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해야 할 일을 메모지 같은 곳에 기록하고 언제나 이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사람을 만나도 곧 잊어버리므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두고, 사진 밑에 그 사람에 대한 정보와 인상을 적는다.

예컨대 이 사람은 다정하게 대해야 할 사람, 주의해야 할 사람 등을 적어두고 다음 번에 만날 때는 적힌 대로 행동한다. 레나드의 행동은 일견 괴이해 보이지만, 우리의 뇌도 누군가를 만나면 그 인상을 뇌 회로에 기록해 둔다. 그리고 다음 번에 만나면 이에 따라 행동한다. 이런 점에서 레나드의 폴라로이드 사진은 우리 뇌의 기억회로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상황에 따라 기억을 만들어 내는 곳은 뇌의 ‘해마’라는 부위인데 이 사실은 1950 년대 미국 보스턴 하트포드 병원에서 시행된 한 건의 수술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병원 스코빌 박사는 평소 간질 발작을 앓고 있던 HM이란 청년을 치료하기 위해 간질의 진원지인 양쪽 해마 3분의 2를 제거하였다. 수술 뒤 간질 증세는 눈에 띄게 좋아졌지만 대신 기억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간호사가 다녀간 사실을 5분이 지나면 기억하지 못했고, 식사를 한 뒤에도 이 사실을 잊어버렸다.

얼마 뒤 그의 어머니가 사망했는데 그는 슬피 울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해 그 이후에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충격을 받고 슬피 울곤 했다.

그렇다면 해마의 신경세포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을 저장할까? 그 해답의 일부는 스코빌 박사가 HM을 수술할 당시 하버드 대학교 학생이었던 에릭 캔들에 의해 밝혀졌다. 원래 정신과 의사가 되려고 했던 캔들은 HM의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기억의 메카니즘을 연구하는 기초과학자로 진로를 바꾸었다.

캔들은 바다 달팽이에게 여러 가지 학습을 시킨 결과 해마의 신경회로에서 ‘글루타민’이라는 물질이 증가하는 것을 관찰했다. 글루타민은 뇌신경에서 분비되어 다른 신경으로 전달되는 신경전달물질인데 뇌 신경세포의 표면에는 글루타민과 결합하는 ‘글루타민 수용체’라는 것이 존재한다.

캔들은 달팽이가 여러 차례 학습을 하면서 수용체를 경유하는 작용이 단순해 지고 두 신경세포 간의 상호 연결이 돈독해 지는데, 이것이 기억형성의 근본 메카니즘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동물 실험에서 글루타민 수용체를 활성화 시키면 기억력이 좋아졌고, 손상시키면 기억 기능을 잃어버렸다.

 

 

글루타민 수용체를 손상시키는 대표적인 물질은 알코올이다. 술을 많이 마신 후 필름이 끊기는 현상은 과도한 알코올에 의해 해마의 기억 기능이 일시적으로 정지된 상태다. 미국 알버트 아인슈타인 대학 시르카 교수 팀은 실험 쥐에게 반복적으로 과도한 에탄올을 주었더니 어린 쥐는 신피질의 글루타민 수용체가, 어른 쥐는 해마의 수용체가 손상됨을 밝혔다. 실제로 사람에서도 오랫동안 반복된 과도한 음주는 성격장애나 치매의 원인이 된다.

물론 적당한 음주는 오히려 심장병이나 뇌졸중, 심지어 치매를 예방한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의 왕 교수팀은 치매 모델 쥐에게 소량의 적포도주를 주기적으로 주입했더니 같은 양의 물을 주입한 쥐에 비해 뇌 손상 정도가 감소하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에게도 그런 결과가 나타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하루에 남자는 두 잔, 여자는 한 잔 정도의 술을 마셔도 된다.

다만 우리나라처럼 ‘술 권하는’ 사회에선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 되다가 급기야 몇 병에 이르는 것이 문제다.

/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교수

  • 2007.01.30 16:03 입력 / 2007.01.30 16:04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