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수덕사 2대 방장 벽초 경선스님

淸潭 2006. 11. 11. 17:53
 

벽초 경선스님 (제2대 덕숭총림 방장)

 

벽초 경선(碧超 鏡禪, 1899~1986) 스님은

 수덕사를 중창하여 오늘날의 대사찰로 만들었다.

 1배 이상의 절을 사양하면서, 말로써 가르치지 않고

행行으로써 제자들을 가르쳐 보현보살의

 화신이라 칭송받았다. 성은 마씨馬氏이고,

 호는 벽초碧超 , 법명은 경선鏡禪이다.

 아버지는 정식正植이고 충청남도 청양에서 출생하였다.

 1908년 13세 때 탁발 나온 만공스님에게 감화를 받아 아버지와 함께 수덕사로 출가,

 만공선사께 삭발 수계 후 만공스님을 따라 금강산 유점사와 오대산 지리산 등의

명산을 다니면서 수도하였다. 그 뒤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어

1940년부터 30여년 간 수덕사 주지를 지내며 수행자들의 공부를 돌보기 위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였고,수덕사에서 정혜사까지 이르는 천팔십 돌계단을 쌓았다.

1985년에 덕숭총림 德崇叢林 2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선사께서는 잠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제자들에게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모두 공부라 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알 것을 강조했던 스님은

평생 법상法床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스님의 선농일여사상 禪 農一如思想은세간의 큰 귀감이 되고 있다.

1986년 5월2일 장례를 간단히 치르라는 당부를 남기고 수덕사에서 입적하였다.


벽초스님  (제2대 덕숭총림 방장)

(마곡사 토굴암 주지 일우스님의 회고)

 

벽초스님을 처음 친견했을 때 기억은 잊을 수 없습니다. 머리를 깎고 싶다는 제 말에

스님은 대뜸 “니 나무 아홉짐 하냐”고 물으셨습니다.

나는 그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었지 ‘나무꾼 처사’가 되려고 정혜사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벽초스님은 단지 내 마음을 떠보려고 했던 것이었죠.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수행에는 나무 아홉짐을 지고

산행을 하는 것 만큼이나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벽초스님은 ‘첫마디’에도

수행자가 평생 놓지 말아야 할 자세를 가르치셨던 참스승이십니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을 모신 불단이 있습니다.

나는 은사스님과 함께 두 스님을 영원한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70여년 동안 남북(南北)의 선방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불법은 절을 철거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불법이기 때문이다”는 만공스님의 가르침과 “내 마음이 깨끗하면

온 세계가 청정하다”는 벽초스님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어요.

 

만공스님의 영정을 자세히 보세요. 예사롭지 않죠. 이 영정을 친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초상화라고 설명하면 다들 놀래요.

이 초상화는 원래 서울 망월사에서 모셨던 것인데,

내가 그 절 주지 춘성스님에게 평생 받들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이곳으로 모셔온겁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서울의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고 합니다.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만공스님 영정 만큼은 결코 잃지 않을 겁니다.

만공스님을 처음 뵌 것은 오대산 상원사였습니다.

그곳에서 선 수련대회가 있었죠. 이날 만공스님은 ‘무상’을 주제로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하였고,

<열반경>에 이르기를 ‘모든 행위는 무상하다.

이것이 생명의 법칙이라’ 하셨으니 어찌 중생의 몸이 행업(行業)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와같은 자세를 버리고 잘못됨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그르칠 뿐이다.”

 

이날 만공스님은 젊은 스님들의 부족한 수행력을 크게 꾸짖었던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이 법문을 제외하곤 만공스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의 가르침은 내 수행의 근본이 됐습니다. 나는 지금 마곡사 토굴암에서

 아무것도 소유한 것 없는 노승에 불과하지만, 그저 평생동안 만공스님이 살아간 모습을

흉내냈다는 것으로도 만족할 따름입니다.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 장안사, 영은암, 표훈사, 유점사,보현사 선방과 오대산 상원사를 비롯

통도사, 화엄사, 동학사, 해인사 선방을 전전했던 것도 경허스님과 만공스님께서

그렇게하셨던 것처럼 선지식을 찾아서 무조건 걸어다녔기 때문입니다.

 

두 스님은 본래부터 선승이셨습니다.

그런데 두 분의 길을 되짚고 싶었다고 말하는 노승의 생각

한켠에는 사실 송구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습니다.

마음 공부를 제대로 하질 못한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