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禪匠을 찾아서
원담스님 <현 덕숭총림 방장>
“간화선의 핵심은 발심이야…”
“간화선이 제일 수승한 수행법이야. 발심(發心)을 해야 돼”
덕숭총림 방장 원담(圓潭)스님은 최근 일부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간화선 수행법에 대해 “발심을 얼마만큼
잘 했느냐가 그 사람의 수행정진을 좌우한다”면서 정진
을 당부했다. 올해 일흔일곱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강건한
법체를 보존하며, 후학과 불자들에게 법향(法香)을 훈습
(薰習)시키고 있는 원담스님을 친견했다. 지난 10일 새해
를 맞아 덕숭총림 수덕사를 찾았다. “추운데 어떻게 왔어”
라며 반갑게 맞이한 원담스님에게 이 시대 불교인의
자세와 수행에 대해 들었다.
며칠전 내린 폭설로 수덕사 가는 길이 쉽지 않다.
아스팔트길에는 추위에 얼어붙었던 눈들이 햇볕을 받으며 조금씩 해동(解凍)
하는 조짐을 보였지만, 응달에 남은 빙설(氷雪)이 가는 길을 더디게 했다.
“스님 건강해 보이십니다. 비결이 있으십니까” “나는 건강 비결 없어. 밥 갖다
주면 밥 먹고, 옷 갖다 주면 옷 입고, 물 갖다 주면 물 먹고, 졸리면 자고, 그것
밖에 없어” 스님은 돋보기 없이 신문을 읽고, 포행도 할 만큼 건강하다.
- 간화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간화선의 핵심은 ‘발심(發心)’이지. 발심. 발심. 발심을 얼마만큼 했느냐가 그
사람의 수행정진을 좌우하는 거야”
- 간화선을 공부하는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도 발심이지.”
원담스님의 답은 명료했다. 짧은 문답 속에 스님은 발심이라는 단어를 다섯
차례나 들 정도로 간화선 공부에 있어 발심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일부에서 간화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질문을 드렸다.
화두가 생명…생명처럼 지켜야
- 간화선이 문제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소리 못 들어 봤어.”
- 간화선이 제일 수승한 공부입니까.
“음. 그렇지. 그리고 공부하기가 제일 쉽지.”
- 간화선을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 어려운것 같습니다.
“제대로 발심을 안해서 그렇지. 발심이 됐으면 제일 쉬운거야.”
원담스님은 출가자뿐 아니라 재가불자들도 생활 속에서 간화선 공부를
하는 게 좋다고 권유했다. ‘이뭐꼬’ 화두를 들고 항상 화두를 참구하면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화두를 들면 좋은 점은 무엇인지”를
여쭈었다. 그러자 스님은 곧바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화두가 곧
생명이야. 생명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남. 생명을 지키는 겨. 자기의
생명이여. 화두가.”
- 생명처럼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화두를 잘 참구하지 못하는 것은 간화선이
어렵기 때문 아닙니까.
“아니, 발심이 철저하게 안돼서 그렇지.”
- 부처님도 저자거리로 나와 중생을 제도했는데, 수좌(首座)들도 사회로
나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생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면 언제 공부할 시간이 있간디.”
스님은 수행하는데 있어 먼저 ‘자기공부’가 철저해야 함을 강조했다.
스스로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데 신경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이다. 이어 원담스님은 “어묵동정(語默動靜)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공부하는 순간”이라면서 “따로 가르칠
것도 없다”고 말했다.
- 철마다 결제를 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몸뚱이는 머리가 있구, 다리도 있구, 귀도 있구, 입두 있구, 콧구멍도
있어. 그런데 뭘로 걸어 댕겨. 사람이 몸뚱이를 끌구 댕기려면 뭐가
필요하겠어.”
질문을 받은 스님이 다시 기자에게 생각을 물었다. 우답(愚答)임을 각오
하고 의견을 드러냈다. “일단 다리가 있어야 하고, 몸을 끌고 다니려면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그래서 그렇다 이 말일세.” 경허(鏡虛)
만공(滿空) 스님의 선풍을 계승하고 덕숭총림만의 어른이 아니라
한국불교계의 ‘어른’으로 후학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원담스님은 당신의
생애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스님은 평생 참선을 통해 용맹 정진했다.
경허·만공스님의 선풍이어
- 정진해오시면서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셨습니까.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많지. 졸음이 와서 어렵고, 망상이 많이
나와서 어렵고, 태타(怠惰)하고 싶은 생각을 잊느냐고 어렵고...
그런 생각이지.”
- 어려움을 어떻게 풀어 내셨는지요.
“가만 뒀어. 그러니 다 해결됐어.”
- 경전을 보는 것도 화두만큼 공부에 도움이 됩니까.
“아니지. 그건 망상이지.”
- 경전을 본 다음에 화두를 드는 것은 어떻습니까.
“경전보고 싶으면 (게으름 피지 말고 빠짐없이) 다 보고 (참선을)해야지.”
- 경전을 보면서 화두를 드는 것은 바른 공부인지요.
“그것도 옳은 방법이지”
의문이 들었다. 스님의 말씀이 경전을 보라는 것인지, 아닌지.
다시 원담스님께 질문을 드렸다.
- 방금 전에는 그릇된 방법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까는 아까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옳은 방법이지.”
기자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시자 법보스님이 이해를 도왔다. “방장스님께서는
처음부터 경전을 보면 망상을 피운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많
이 혼 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전을 보아도 뭐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수행자는 불자들의 정진을 경책하고, 바른 길로 인도(引導)하는 이 시대의
스승이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불자들은 어떤 길로
가야할지, 그리고 통일의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는 어디로 가야할지
를 물었다.
자가(自家)통일이 돼야 남북통일
- 불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이신지요.
“내가 이 말은 꼭하고 싶어. 뭐냐면 발심이여.” 부처님 법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하려면 무엇보다 발심이 중요하고 발심을 수행까지 연결하려면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게 원담스님의 뜻이다.
-민족 문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 남북통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통일은 남북통일도 있고 ‘자가(自家)통일’도 있는데, 자가통일이 돼야
남북통일이 돼.” 모든 사람들이 자기 공부에 충실할 때 비로소 남북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남북통일은 반드시 되니 너무 앞서지 말고, 스스로의
공부에 충실 하라는 것이다.
-올해 창간43주년을 맞아 주2회 발행에 들어간 불교신문에도 한 말씀 주
십시오
.
“불교신문이 할 일이 참으로 많아. 불교신문은 이 나라 국민의 태양이야.
어디에 비유할 수 없을 만큼 태양이야.”
염화실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더욱 따듯하게 느껴졌다. 눈도 제법 녹았다.
수행자의 삶은 안으로는 철저하게 엄격하면서도, 밖으로는 훈기(薰氣)를
주는 것이리라. 대웅전 처마에 달린 풍경이 겨울바람과 함께 소리를 낸다.
원담스님이 말하는
나의 은사 벽초스님
“그 놈을 데려와라”
“은사인 벽초(碧超·덕숭총림 2대 방장)스님은 평생 일만 하다가 몸을
마치셨지. 전국에서 우리스님 만큼 승속 간에 애써서 정진한 이가
없으리라 생각해. 참 철저했어. 뭘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철저했어.
존경할 만한 스님이였어. 그 스님을 보면 교훈이 따로 필요 없어.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다 교훈이었지.
언젠가는 한번 건넌방에 있는데 ‘이리와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
그래서 대답을 했지. ‘오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은사스님이 ‘내 말이
들리느냐’고 다시 말하시데. 또 대답을 했지. ‘들립니다.’ 그러자
우리스님이 뭐라고 하신지 알아. ‘그 놈을 데려와라’ 순간 어찌할 수
없었어. ‘그 놈’이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데려 가려면 데려 갈 놈이
없어. 갖다 바칠래야 바칠 것이 없어.
벽초스님이 다른 스님들과 함께 절 밭에 나가 운력을 하시는데, 점심공양
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오시지 않는 거야. 그래서 밭에 가보면 괭이 들고
그대로 서 계신거야. 정진삼매에 빠져 있더라고. 참 철저하게 수행하셨지.”
원담스님은…
만공스님께 전법게 받아
1
926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난 원담스님의 세속 이름은 김몽술(金夢述).
모친의 꿈속에서 스님이 나타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스님은 일곱
살 되던 1933년 벽초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불문(佛門)에 들었다.
만공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받은 후 덕숭총림의 지금이 있게 가람을
수호하고 산중화합에 앞장섰다. 현재는 덕숭총림 3대 방장과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있다. 상좌로 설정(전 중앙종회 의장)스님과 법장
(총무원장)스님 등이 있다.
* 스님이야기 출처: 불교신문의 <금주에 만난 우리스님>
원담스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누구나 행복하길 원하지만 자신이 만든다는 것 몰라요
세간과 청산 어느 것이 옳으냐,
봄빛 이르는 곳마다 꽃이 피더라.
산하대지가 나의 집이거늘,
다시 어디서 고향을 찾는가.
덕숭산 아래 한 길에 비추는 봄 광명에 또 다시 온갖 꽃이 만발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의 이치입니다.
봄볕은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차별이 없이 비춥니다.
들판의 꽃가지도 긴 것이나 짧은 것 할 것 없이 평등하게 물이 오르지요.
그러면 꽃가지는 크건 작건 제 나름의 꽃을 피워냅니다.
일체가 평안한 도리를 알려면 길고 짧은 것에 끄달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 옷은 짧지도 길지도, 작지도 크지도 않고 아무나 입을 수 있습니다.
법의는 마음만 내면 누구나 입을 수 있습니다. 중생과 수행자는 말할 것도 없고,
중생과 부처도 평등한 도리가 분명 있습니다.
하루빨리 깨달음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요즘 세계를 둘러보면 어디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이 공포심 분노심
불평등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가히 혼돈의 세상이라 할 수 있지요.
환경오염으로 인해 하늘과 땅, 바다에 사는 동식물까지 저마다
‘평화’를 외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북한산 천성산 금정산이
개발로 인해 환경이 파괴될 위기에 있습니다.
많은 스님네들이 전쟁을 막고, 환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미국인과 이라크인’
등이 모두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힘과 편의만 생각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자연도 파헤치려 하지만 그것은 종국엔 자신을 헤치는 것이고,
모두가 살 수 없는 길입니다. 서로 위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래야 다 잘 살 수 있습니다.
우주만유 유정물 무정물이 모두 한 뿌리라는 것을 알고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조국이 광복을 맞자 만공스님께서는 온 인류(人類)가 함께
실천해야 할 정신으로 ‘世界一花(세계일화)’를 일러주셨습니다.
‘세계는 한 송이 꽃이니,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해와 달, 공기와 물,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고 말입니다.
스님께서는 우리나라가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의 중심으로 나서기 위해서는
세계인의 마음을 정신적으로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이 자기 마음을 올곧게 지키고 있으면 이 세상에
평화의 꽃을 피우는 주역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가장 원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자신이 만든다는 것을 모릅니다.
어떤이가 행복을 찾아 집을 나섰지요. 많은 세월 행복을 찾아
세상을 헤매었지요. 행복을 찾지 못한 나그네는 지쳐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담 넘어 매화가지에서 꽃망울
터진 것을 보고 행복을 느꼈습니다.
이 나그네처럼 우리는 공기를 마시고 살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또 다른 곳에서 공기를 찾고 있는 셈입니다.
스스로 진리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서 밖에서 진리를
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만인이 귀착해야 할 깨달음은
멀리서 다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서 나
스스로 발견해야 합니다.
간혹 불자 중에는 불교를 '부처 믿는 종교'라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자기를 찾을 생각보다는 밖에서 무엇을 구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지요.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의 마음자리를 들여다보면 됩니다.
자신의 깨끗한 본래성품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으세요.
불교의 가르침은 스스로 자신의 불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속 말고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기 자신의 본성을 찾는 것만이 평화를 찾는 길이요,
고향을 찾는 길이요, 정법을 찾는 길입니다. 자기를 찾는 것이
곧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각자 마음속에 지닌 부처 뿌리를 발견하고자
정진을 게을리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문자를 세우지 않고 그 문자에서 가르치는 마음의 진리만을 전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이 곧 ‘선방’이라는 것이지요. 자신을 찾는 데는 별도의
장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있는 곳이 어디든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자신을 찾기 위해 정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이 영원할 것처럼 세속의 일, 물질위주의 삶에 너무
집착해 있습니다. 탐 진 치 삼독에 물들어 살면서도 자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불나비가 저 죽을 줄 모르고 불속에 뛰어 드는 것과 같고,
예리한 칼끝에 묻혀져 있는 꿀을 빨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집착하기 때문에 끝없는 방황과 착각과 고통에서 허덕입니다.
진실로 삶의 참된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놓으세요.
움켜쥐었던 손을 활짝 펴세요. 그 때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사바세계에 나타나신 것도 바로
인간 그대로가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는 그 이치를 가르쳐주기
위해 나투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것도 인간의 몸 그대로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당신께서 몸소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이 이치를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밥솥
안에 있으면서 밥을 찾지 못해 굶어죽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 안에서 부처를 찾다 죽는 이는 그나마 다행이고, 물질에 질질
끌려 다니다가 허망하게 인생을 마치는 이들이 대다수 입니다.
내 마음, 내 부처, 내 본래면목을 찾으십시요. 그것만 찾으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중생심은 저 멀리 사라지고 항상 안락하고 평화로운
세계가 바로 구현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처를 찾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참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수행법 중에서 자신을 찾는 가장 편하고 빠른 지름길이지요.
참선법은 연구나 공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선정진은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무념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사를 걸고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오늘은 비록 보존하나 내일은 보존하기 어렵다.
’고 하였으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금도 방일함이 없어야 합니다.
마음과 경계가 서로 부딪쳐서 섭나무에 불이 타는 것 같이 번잡스럽게
세월을 보내 버리면, 화두 드는 공부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업보만
더할 뿐입니다.
수행할 때는 나를 잊어버리세요. 잊어버렸다는 생각조차 버리세요.
상을 세워서도 안됩니다.
부처가 되어 나를 완성하면 자신을 살릴 수 있습니다.
참선하면 다른 사람의 목숨도 살릴 수 있습니다. 나를 찾으면
모든 불행과 번뇌 불화는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안심(安心)의 경지에 이르게 되지요.
어떤 일을 하다가도 난관에 도달하면 잠깐 시간을 내어 일념으로
참선에 들어 보세요. 참선하면 지혜가 나오고,
무슨일이든 해결되는 힘이 나옵니다.
요즘 세계가 뒤숭숭합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불안과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세계 인류의 평화는 나를 찾는데서 시작하여
자신을 찾는 사람만이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늘 자신을 겸허하게 반성하고 돌아보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개인이나 사회나 나아가 이 세상이 평화롭게 될 것입니다.
한 조각 비고 밝은 것 본래 둥글고 묘해
유심 무심으로는 능히 알 수 없네.
거울 가운데 형상 없는 이 마음은 곧
확연한 허공 같아 털끝만치도 걸리지 않네.
정리=김원우 기자 wwkim@buddhapia.com
사진=고영배 기자 ybgo@buddhapia.com
기자가 본 본 원담 스님
항상 해맑은 웃음…공부 미진땐 엄한 꾸중
선농일여 새 가풍 수립·덕숭총림 설립
‘수덕사의 농선도인(農禪道人)’ ‘늘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는 스님’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은 염화실에 사부대중이 찾아오면
웃음으로 화답한다. 그래서 염화실은 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하지만 스님이 내리시는 법문은 의외로 짧다.
“항상 초발심의 자세로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으라”며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성품을 지녔지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고 짧게 말씀한 뒤 웃음으로 마감하신다.
큰스님을 친견한 사부대중들은 해맑은 스님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환희심이 솟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납자들이 공부를 위해 찾아오면 굉장히 엄격하시다.
이치를 일러주는데도 못 알아들으면 곧바로 주먹이 나간다.
한대 두대 세대..., 스님은 ‘도인’이라는 헛 껍데기에 끄달려 1700
공안만 달달 외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저절로 법향이 우러나는
진실한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1926년 전북 옥구에서 태어난 원담스님은 1937년 출가,
5년간 천장사와 전월사 등에서 만공 스님을 시봉하며 행자생활을 했다.
스님은 16세가 되던 1941년 벽초 스님을 은사로
만공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스님의 은사인 벽초스님은 주지 소임을 살면서도 평생 법좌에
올라 법문한 적이 없었다. 백장 스님의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선농일치(禪農一致)사상에 입각하여 일평생
직접 농사를 지으며 열심히 정진했다. 이러한 벽초 스님의
농선도인(農禪道人)가풍을 그대로 계승한 원담 스님은 일하면서
참선을 게을리 않는, 선농일여(禪農一如)의 가풍을 진작시키기도 했다.
스님은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게를 받은 후 가행정진하다 1970년
수덕사 주지로 취임, 1983년 덕숭총림을 설립했다.
이후 <만공법어집>을 발간하는 등 덕숭선맥의 선풍을 계승하기 위한
수행에 힘써오다 지난 86년 덕숭총림 3대 방장에 취임했다.
현재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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