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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기원’(L‘Origine du monde )

淸潭 2024. 8. 10. 15:26

여성 성기 대놓고 그린 외설 작품에...“사실주의 새장 열었다”는 극찬, 왜?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2024. 8. 10. 10:51

[사색-77] “포르노인가, 예술인가.”

그림이 세상에 공개했을 때, 대중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성의 성기를 확대해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체모도 한올 한올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았지요. 마치 사진을 보는 듯한 세밀함. 예술이 아니라 저질 포르노의 캡처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놀랍게도 이 그림이 걸린 건, 근대 미술의 보고(寶庫)인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작품의 이름은 ‘세계의 기원’(L‘Origine du monde )이었습니다. 여성의 성기가 만물이 태동할 수 있는 근원이었다는 그럴듯한 설명이 붙었지요.

이 작품이 처음 공개된 건 1995년. 작품이 완성된 지 130년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음에도 첫 공개 당시 “포르노를 미술관에 걸었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야해도 너무 야했으니까요.

오르세 미술관에 걸린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
세간의 악평과 달리 예술가들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여성의 신체 묘사에 새로운 장을 연 작품”, “사실주의 예술의 경계를 확장했다”고 호평합니다. 오늘날에도 ‘세계의 기원’을 오마쥬(Homage·존중의 표시로 작품을 인용하는 것)한 작품이 끊이지 않는 배경입니다.

대중과 평단의 양극단을 오가는 ‘세계의 기원’을 그린 문제적 화가는 구스타브 쿠르베. 그가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그림을 그린 이유는 성 도착자여서는 아니었습니다. 쿠르베의 삶을 보면, 이 작품이 조금은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주의’의 대가 쿠르베의 발자국을 따라가 봅니다.

1850년 30대의 쿠르베.
혁명의 아이로 태어난 쿠르베
“프랑스 혁명은 위대한 성취다.‘

구스타브 쿠르베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한 마을에서 1819년 태어났습니다. 군주제를 타도한 프랑스 혁명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을 때였습니다. 부유한 지주 집안이었지만, ’보수적‘이진 않았습니다. 쿠르베의 외조부가 혁명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반군주제‘ 정서가 강한 집안이었지요.

화려한 귀족의 삶보다, 본인의 자리에서 땀 흘리는 시민들의 삶에 쿠르베가 더 동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부르고뉴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지내면서, 쿠르베는 누구와도 친구로 지냈습니다. 사냥꾼·어부·벌목꾼까지. 부자임에도 이를 거들먹거리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가 쿠르베였지요.

“아들아, 인간은 모두 평등하단다.” 아버지 레지 쿠르베. 구스타브의 작품.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었으니, 예술가로서 위대한 자질을 벌써 보유한 셈이었습니다. 12살부터 그는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지요. 부르고뉴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그의 캔버스에 구현됩니다. 부모는 그가 늠름한 군인으로 국가에 봉사하길 바랐지만, 그의 꿈은 칼 대신 붓을 쥐는 것이었습니다. 1839년 약 20살의 나이의 쿠르베가 수도 파리로 향한 이유였습니다.
“빠히로 가서 그림을 공부할래요.” 1845년 쿠르베의 자화상.
과거에 매몰된 미술에 환멸을 느낀 쿠르베
“이것이 정말 예술이란 것일까.”

파리는 예술의 수도였습니다. 루브르박물관에는 거장들의 작품으로 가득했지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 티치아노 베첼리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명작들이었습니다. 청년 쿠르베는 자신이 존경했던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드 수르바린의 작품을 반복해서 묘사하면서 화가로서 꿈을 키워갔습니다.

쿠르베의 마음속에서는 동시에 의문이 함께 싹텄습니다. 대가의 작품이 우리네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이나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유려하게 구현할 뿐, 사람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18세기 유럽은 고대 로마 시대 신화나 역사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는 신고전주의가 유행했다. 구스타브 쿠르베가 질색했던 길이다. 사진은 신고전주의의 대표작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 기원전 7세기 고대 로마의 일화를 담은 작품.
프랑스 왕가가 수백 년 동안 소장해온 컬렉션이 쿠르베에게는 마뜩잖았습니다. 당대 유럽 지성계를 휩쓸고 있던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사회주의에 빠져든 것도 반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예술의 인식을 넓힌 쿠르베
“네덜란드의 그림에서는 인간냄새가 나지 않나.”

1844년은 화가 쿠르베로서 전환점을 맞이한 시기였습니다. 네덜란드·벨기에를 여행하면서였습니다.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 등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작품들을 직접 목격한 것이었지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예술이 하늘을 보고 그림을 그릴 때,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땅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성경을 웅장하게 표현한 이탈리아 예술과 비교해 네덜란드 사람들은 민중의 땀과 웃음을 구현했지요.

“왜 저같은 천것을 그리세요?”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1658년 작품.
귀족풍이 확 느껴지는 프랑스·스페인의 그림들과 달리 이곳에서는 좀 더 목가적인 풍경이 두드러졌지요. 평범한 소시민들조차 그림의 주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도, 집시 소녀도, 술을 먹고 거나하게 취해버린 취객들까지. 쿠르베가 어린 시절부터 애정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쿠르베는 이때부터 고전주의 화가들을 답습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길을 나아갑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 자신이 보지 못하는 건 그리지 않겠다는 소신이었습니다.

‘봉쥬르 쿠르베’는 사실주의 화가인 쿠르베의 위트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우리네 소소한 현실 속에서 작품의 영감을 받기 때문이다.
리얼리즘 화가로 자신의 길을 선택한 쿠르베
자신이 비로소 자신이 될 때, 세상의 주목을 받는 법입니다. 쿠르베가 네덜란드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린 그림들이 프랑스 예술계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제목은 ‘돌을 깨는 사람들’. 비루한 행색의 두 사내가 힘겹게 돌에 망치질을 하는 장면입니다.

쿠르베가 생드니로 이동할 때, 이 장면을 목격한 뒤 이를 화폭으로 옮겨담은 것이지요. 그에게 힘겨운 민중의 삶은 언제나 예술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들의 비참함을 보자마자 머릿 속에 그림 한장이 그려졌다.”

쿠르베를 스타로 만든 ‘돌을 깨는 사람들’. 1849년 작품.
비슷한 시기에 함께 그린 ‘오르난스의 장례식’, ‘박람회의 귀환’도 사람 냄새가 풀풀나는 작품입니다. 1851년 살롱에 제출한 세 작품은 평단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 외젠 들라쿠라아의 인정을 받을 정도였지요. 사회주의 이론가 푸르동은 ‘돌을 깨는 사람들’을 두고 “최초의 사회주의적 작품”이라고 칭합니다. 쿠르베에게는 최고의 칭찬이었습니다.

쿠르베의 유명작품인 오르난스에서의 장례식. 1850년 작품. 쿠르베는 사실주의적 작품을 많이 그렸다.
쿠르베는 이제 세상에 당당히 외칩니다. “진실한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추한 것도 진실하면 아름답습니다. 사실주의자는 솔직한 진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 그에게 “사실주의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끔찍한 사회주의자이자 야만인”이라는 멸칭도 함께였습니다.
사실주의가 누드로 연결되다
“거짓된 아름다움을 걷어낸 남자”

명성을 얻은 쿠르베는 점점 더 도발적인 메시지로 사회를 향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당대 화가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거짓으로 점철된 것이 아닌지, 신화 속 여신으로 이상화된 누드가 과연 진실된 것인지를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1850년 이후부터 그가 도발적인 누드화를 그린 배경입니다.

Le sommeil(잠)은 외설논란에 휘말린 쿠르베의 작품 중 하나다.
1864년에 그린 ‘비너스와 푸쉬케’라는 작품 속에는 두 여성이 벌거벗고 서로를 탐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지금은 유실됐지만, 후속작품 격인 ‘잠’이 남아있습니다). 살롱 심사위원들이 그의 작품 출품을 거절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세간 비난이 쏟아졌지만 쿠르베는 그런 격렬한 반응을 즐기는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세느강의 젊은 여인들은 그의 유명 작품 중 하나다.
‘세계의 기원’을 그린 이유
“혹시 저에게도 도발적 그림을 그려줄 수 있겠소?‘

쿠르베에게 한 손님이 찾아옵니다. 파리에 거주하는 터키 외교관 칼릴 베이였습니다. 외설적 느낌의 그림의 애호가였던 그는 쿠르베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작품을 하나 부탁합니다. 그리고 1866년 완성된 그림, 바로 ’세계의 기원‘이었습니다.

여성의 성기만 떡하니 그려 놓은 ’논쟁적인 작품‘. 누드를 그리더라도 성기는 가려야했던 기존 화법을 완전히 파괴한 그림입니다.

“나에게도 야한 그림 하나 그려주시오.” 외교관 칼릴 베이.
쿠르베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조안나 히퍼넌을 모델로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미술사학계는 추정해왔습니다(다른 사람이라는 이론도 존재합니다). 히퍼넌은 당시 미국 화가 제임스 애벗 휘슬러와 연인관계였지요. 그녀가 쿠르베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한 휘슬러는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하기도 했습니다. 그림 자체도 그렇지만, 그림을 그리는 과정 역시 스캔들의 연속이었지요.
조안나 히퍼난은 ‘세계의 기원’의 모델로 추정되는 인물 중 하나다. 쿠르베와 불륜 관계였던 그녀는 이후 애인인 유명 화가 제임스 휘슬러와 헤어졌다.
그림을 받은 칼릴 베이도 이 그림이 가진 파괴력을 잘 알아서였는지 외부로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재정적으로 파산한 뒤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그림을 손에 넣게 됩니다. 1981년 라캉이 죽을 때, 그의 가족들이 이 작품을 오르세 미술관에 기증합니다. 상속세를 대신해서였습니다. ‘세계의 기원’이 대중에게까지 공개되는 데 130년이나 걸린 이유입니다.
흰 스타킹을 신은 여자. 1864년 작품. 쿠르베는 누드화의 조예가 깊었다.
화가에서 정치가로 나선 쿠르베
쿠르베의 삶을 다시 돌아볼 시간입니다. 1870년 프랑스는 정치적 공백기였습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은 희미해진 기억. 이제 프랑스 파리는 ’파리 코뮌‘이라는 이름의 혁명정부가 차지합니다. 이 일원 중 하나가 ‘이단아’ 쿠르베였습니다.
이단아 쿠르베를 풍자한 그림.
사회주의적 성향의 쿠르베는 여러 급진 정책을 제안합니다. 나폴레옹이 전쟁 승리를 기념해 만든 ‘방돔 기둥’을 철거하라고 요구한 것도 그였습니다. 과거 제국 왕조의 전쟁을 예찬하는 건 공화국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방돔 기둥은 실제로 철거되기에 이르렀지요.

열흘 붉은 꽃은 없고, 권력은 10년을 버티기 힘듭니다. 파리코뮌은 금세 무너지고, 제3공화국이 들어섭니다. 쿠르베에게 ‘정산서’가 도착합니다. 방돔 기둥을 재건하는 비용을 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쿠르베가 스위스로 망명을 떠나야 했던 계기였습니다. 스타 화가라도 천문학적인 돈을 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쿠르베가 무너뜨린 방돔 기둥을 소변기로 묘사한 신문.
말년의 쿠르베. 화가이자 사회주의자였다.
자유의 부재 속에 죽어간 자유인 쿠르베
스위스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스위스 정보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항상 자유를 꿈 꾸던 그에겐 최악의 형벌과 같았습니다. 술에 절어 살며 근근히 그림을 그리던 그는 1877년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나이 58세였습니다. 그의 옆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날라온 청구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내 처지가 미끼를 문 송어와 같구나. ” 1871년 말년의 쿠르베가 스위스에서 그린 그림. 자신의 상황을 대변하는 듯 한 작품이다.
사실을 지고의 가치로 삼은 쿠르베, 민중의 삶이 진실하고 아름답다고 여긴 쿠르베. 그저 ‘외설 화가’로 폄훼하기엔 그의 삶은 너무나 다채롭게 빛나고 있습니다. 생전에 그가 남긴 말은 이렇습니다. “내가 죽을 때,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기를 바랍니다. ‘그는 어떤 학교에도, 교회에도, 기관에도, 정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가 속한 곳은 ’자유‘, 단 하나였다. ”
자화상 혹은 절망적인 남자. 1843년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