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 못 찾겠어요” 18살 소녀 사형수 울컥…눈 가린채 울음 삼킨 사연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폴 들라로슈 편]
권력 욕망말고 학문 열망 품은 소녀
탐욕 많은 주변인에 희생 당한 일생
‘9일의 여왕’…끝내 사형장 이슬로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4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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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있어요?"
"뭘 말씀하십니까." "단두대요. 지금 눈이 가려져 있어 찾을 수 없어요. 제 얼굴을 댈 받침대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1554년, 2월 12일. 형장에 있는 모두가 제인 그레이의 이 말에 또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곧 죽을 제인은 그 순간에도 공손하고, 겸허했다. 그녀는 하얀 두 손을 더듬대며 자기 목을 올릴 곳을 찾고 있었다. 이를 본 몇몇은 울컥하는 마음을 재차 억눌러야 했다. "이쪽입니다. 여기 딱딱한 걸 만질 수 있지요? 이 위로 턱을 놓고, 그다음 엎드리시면…." "고맙습니다." 제인은 안내한 이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는 울음을 참는 게 분명했다. 목소리 또한 가늘게 떨렸지만, 이를 끝까지 억누르는 듯했다. 그녀는 그렇게 최후의 순간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제인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국 여왕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통치 기간은 고작 아홉 날뿐이었다. 이에 '9일의 여왕'이란 다소 치욕적인 별명을 얻은 그녀는, 지금은 반역죄를 뒤집어쓴 채 형장의 이슬이 될 상태였다.
제인은 차가운 목 받침대 위로 먼저 손가락부터 댔다.
처음에는 두 팔, 그리고 쇄골과 오금, 그다음은 어금니와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서늘함이 몰려왔다. 제인은 그제야 눈 앞까지 온 사신의 콧김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낯선 느낌은 굴복을 요구했다. 이제라도 그녀 다음으로 왕관을 쓴 여왕 메리 1세에게 죽기 싫다고 매달리면, 하다 못해 임신을 한 것 같다고 뒤늦게라도 억지를 쓰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을 가린 흰 천은 조금씩 젖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끝내 "억울하다"라느니, "내 잘못이 없다"라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때 그녀는 고작 열일곱에서 열여덟 사이였다.
이 일이 있고서 300년가량이 흐른 1833년, 프랑스의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가 당시 모습을 상상해 그렸다.
먼저 빨간 머리칼의 소녀가 보인다. 둘둘 묶인 천으로 눈을 가린, 약간은 색이 바랜 흰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손을 뻗어 목 받침대를 찾고 있다. 제인이다. 그녀의 흰 피부와 무방비한 자세, 연백색 복장은 주위에 널리고 깔린 검은색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그녀는 이렇게 후광이 내리쬐는 성녀처럼 그려져 더 결백하고, 더 무고해보인다. 제인의 최후를 차마 볼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시녀들은 고개를 돌린 채 슬퍼한다. 반역자라고 하기에는 한참 아랫사람에게까지 상냥했을 그녀의 행실을 짐작할 수 있다. 비극성이 더 짙어지는 이유다. 도끼를 든 사형 집행자의 얼굴도 침울해보인다. 그는 제인의 목을 희롱하지 않고 단박에 베면서 마지막 예를 다할 터였다.
아름다운 외모와 고귀한 혈통, 명석한 머리와 겸손한 태도 등 팔방미인이었던 제인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제인은 1536~1537년 사이 런던 혹은 레스터셔에서 태어났다.
제인의 아버지는 서퍽 공작인 헨리 그레이였다. 아버지가 한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이었다면 어머니는 한 나라의 얼굴 격인 왕족이었다. '노랭이 왕' 헨리 7세의 차녀이자 당장 위세를 떨치고 있는 '덩치 왕 헤리' 헨리 8세의 동생인 메리 튜더가 낳은 딸, 프랜시스 브랜든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난 제인은, 그런 어머니 덕에 모계(母系)에서 모계로 이어진 왕가의 피를 품을 수 있었다. 그녀 밑으로는 캐서린과 메리 등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외향적 성격의 부모는 사냥과 모임을 즐겼지만, 제인은 이와 반대로 공부와 독서만 좋아했다.
똑똑한 제인은 어릴 적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했다. 클수록 갸름한 얼굴에선 아름다움이 맺혔다. 곧게 뻗은 허리에선 기품이 묻어나왔다. 야심가인 부모는 그런 제인이 아까웠다. 공부만 하지 말고 사교계에도 나와 이름을 알리기를 바랐다. 이들은 허구한 날 제인에게 왕가의 구성원답게 권력 의지가 있어야한다고 구슬렸다. 언젠가부터는 책에 손만 대도 매질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제인은 대체로 순종적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천성만은 바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은 모진 부모가 군림하는 집과 비교하면 천국이었다.
제인은 갓 열 살이 된 1547년 2월, 그해 헨리 8세와 사별한 왕비 캐서린 파의 저택에서 짐을 풀었다. 제인은 너그러운 캐서린, 약간 의뭉스럽지만 겉으로는 친절한 그녀의 재혼남 토머스 시모어와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나마 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인을 거둔 캐서린은 교양 있는 여성이자, 신교도의 독실한 신자였다.
헨리 8세의 왕비였던 1545년 서른세 살께 그려진 캐서린 초상화를 보면, 먼저 진지한 표정과 절제된 자세에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외모는 나이치고는 노안에 속한다. 이는 헌신의 징표였다. 그녀는 병이 깊어질수록 까다로워졌던 헨리 8세에게 온몸을 바쳐 봉사했다. 그렇기에 주름살 또한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캐서린은 명석한 제인을 다 큰 친딸처럼 대했다. 제인 또한 캐서린을 친어머니보다 더 따랐다. 그녀를 따라 신교도의 충직한 일원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캐서린은 제인과 함께 있고서 1년 반가량 흐른 1548년 9월, 딸 메리를 낳고 숨지고 말았다. 사인은 산욕열이었다. 깊이 상심한 제인은 캐서린의 장례식에서 상주 역할을 맡았다. 마지막 추모를 끝으로 제인의 찰나 같은 봄날도 끝났다. 다시 부모 품으로 돌아가야 할 그녀 앞에는, 그새 덩치를 더 키운 불행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욕심 많은 제인의 부모는 딸을 그저 체스판 말처럼 볼 뿐이었다.
젊고, 예쁘고, 똑똑하면서도 특별한 혈통까지 품은 그녀를 앞세워 권력 틈을 비집고 들어갈 생각밖에 없었다. 사실 부모가 앞서 캐서린과 토머스에게 제인을 맡긴 데도 다 계획이 있었다. 이들은 헨리 8세에 이어 겨우 열 살 나이로 왕관을 쓴 에드워드 6세의 왕비 자리로 제인을 올리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토머스와 말을 맞춘 후 제인이 일종의 '신부 수업'을 받게끔 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게 모르게 제인의 과외 교사 역할을 한 캐서린이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얼마 되지 않아 토머스도 에드워드 6세 납치와 그의 강제 혼인을 꾀했다는 혐의 등으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기세등등했던 제인의 부모는 물거품이 된 계획 앞에서 덜덜 떠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대로 가면 자신들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딸을 서둘러 다른 사람과 혼인시키기로 했다.
점점 매서워지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모가 제인의 결혼 상대로 찍은 이는 길포드 더들리였다.에드워드 6세 시대에서 실세가 된 노섬벌랜드 공작, 그 시대 또 다른 야심가인 존 더들리의 아들이었다. 길포드가 제인에게 어울리는 지성을 갖췄으면 좋았겠지만, 외려 망나니라는 꼬리표가 따라오는 등 영 소문이 좋지 않은 자였다. 부모는 크게 한 번 데이고도 딸을 통한 권력 쟁취를 또다시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당사자인 제인은 길포드와의 가약을 한사코 거부했다. 또다시 학대 당한 제인은 가정 폭력을 피하기 위해 결국 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남편이 된 길포드는 곧장 제인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나섰기에, 역시나 신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진짜 불행은 이제 시작이었다.
제인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실세 귀족의 아내가 된 건 그렇다고 쳐도, 설마 자신이 왕비도 아닌 여왕 자리에 오를 줄은. 그건 너무 뜬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종종 우연과 광기를 동력으로 삼는다. 먼저 우연이 발생했다. '소년 왕' 에드워드 6세는 어린 나이치고는 키도 크고 풍채도 좋은 편이었다. 당시 궁정 화가 윌리엄 스크로츠(추정)가 13살 무렵의 에드워드 6세를 그렸다. 젊은 시절 부친을 떠올리게 하는 호남(好男)의 용모, 특히 아버지를 쏙 빼닮은 길쭉한 팔다리가 눈길을 끈다. 냉정한 표정, 허리춤에 찬 길쭉한 검도 왕의 위엄을 돋보이게 한다. 그런데, 그런 에드워드 6세가 1553년 1월께부터 갑자기 폐결핵 증상을 보였다. 곧 사경을 헤맬 만큼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했다.
이쯤 광기도 고개를 들었다.
여태껏 실세로 권력 놀음을 한 존, 이제는 제인의 시아버지가 된 그는 새 시대의 도래가 두려웠다. 신교도인 에드워드 6세가 죽고, 이후 서열상 메리 1세(에드워드 6세의 이복누나)가 즉위하면 그의 세상도 끝이라고 판단했다. 구교도인 메리 1세가 지금의 신교도 체제를 좋게 볼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존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에드워드 6세를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며느리 제인을 '조커'로 들이밀었다. 종교적 믿음이 다른 메리보다, 같은 신교도인 왕족 제인에게 직을 물려주는 게 맞다고 거듭 강조했다. 제인의 부모는 이런 전개를 흐뭇하게 바라봤을 것이다. 에드워드 6세는 병에 걸리고 6개월 후 허무하게 죽었다. 1553년 7월 6일, 열여섯 생일을 맞이하지도 못한 나이였다. 그의 유언장 앞줄에 쓰인 후계자의 이름은…메리 1세가 아닌 제인 그레이였다. 광기의 승리였다.
"그럴 리 없어요. 왕위는 제가 아닌 메리의 것이에요!"
제인은 왕관이 자기 몫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쓰러질 만큼 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제인은 한 번도 여왕이 될 뜻을 품은 적이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또다시 거듭되는 부모의 매질과 시댁의 강요로 울면서 왕좌에 올랐다는 후문이다. 즉위 일은 7월 10일, 에드워드 6세가 죽은 후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제인의 초상화에선 먼저 그녀의 크고 동그란 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순수한 눈에선 야심과 욕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몸에 딱 맞는 드레스, 반짝이는 보석보다 눈에 띄는 건 그녀가 든 책 한 권이다. 제인은 이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왕관을 쓴 후부터 외려 더 삶을 지옥처럼 여겼을 것이다. 이 와중에도 제인은 자기 또한 공동 왕으로 임명하라는 남편 길포드의 요청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서열대로라면 원래 왕위를 이어야 할 메리 1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안토니스 모르가 1554년께 그린 그림에서 짐작할 수 있듯 메리 1세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제인의 둥글둥글한 초상화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날카로운 분위기를 품고 있다. 한때 금발의 미소녀로 불린 메리 1세였지만, 그녀 또한 어릴 적부터 왕좌의 싸움에 휘말린 탓에 갖은 고생을 한 처지였다. 이 때문에 살은 쏙 빠져 깡마른 몸이 됐고, 지독한 근시와 신경질적으로 된 성격 탓에 늘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모든 순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메리 1세는 이미 런던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실세 존의 계략을 간파한 그녀는 이를 깨부술 병사를 모으고 있었다. 메리 1세에게는 권력욕이 있고, 무엇보다도 '내가 적법한 계승자'라는 명분도 뚜렷했다. 이 덕에 단기간에 군대를 꾸린 메리 1세는 런던으로 곧장 진격했다. 기대만큼 병력을 모으지 못한 존 일당은 허무하게 밀려났다. 제인은 메리 1세에게 순순히 왕관을 넘겼다. 이날이 7월 19일이었다. 통치 기간은 7월 10일부터 딱 아흐레였다. 제인이 훗날 '9일의 여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메리 1세는 모든 일의 주모자인 존부터 처형했다. 그렇다면 여왕 행세를 한 격이 된 제인에 대해선….
메리 1세는 제인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메리 1세는 제인을 불쌍하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린 제인이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통치 기간은 한순간이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여왕이었던 점 또한 그녀를 사형수로 몰기에 부담스러운 지점이었다. 메리 1세는 제인을 일단 런던탑에 가뒀다. 말은 감금이지만, 제인은 그곳에서 책을 읽으며 꽤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메리 1세는 스페인 왕세자였던 펠리페 2세와 결혼 후 자식을 낳으면 제인을 풀어줄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평생 제인을 괴롭히기만 한 아버지 헨리가 또 문제를 일으켰다. 메리 1세에 맞선 신교도의 반란에 가담하고 만 것이다. 메리 1세까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만큼 이들의 진격은 갑작스러웠다. 그래도 평생을 급박하게 살아온 그녀였기에, 이번 사태 또한 큰 탈 없이 진압할 수 있었다. 이쯤부터였다. 제인을 죽여야 한다는 말이 왕궁에서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제인은 존재 자체로 반역자이자 위험인물이 됐다고 말이었다. 왕족이자 신교도인 제인이 있는 한, 그녀를 상징으로 내건 반란이 언제든 생길 수 있다는 게 근거였다.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 최소한 사형 주장은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여왕 메리 1세의 제안입니다."
"이 땅에서 생명을 이어가겠다고 영원한 생명을 버릴 수는 없지요."
메리 1세는 그럼에도 제인을 형장에 보내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고민 끝에 신하를 시켜 제인의 개종을 권유했다. 하지만 제인은 이처럼 완강한 모습만 보였다. 제인은 기구한 삶 속에서 신앙만을 유일한 버팀목으로 삼았다. 이것만은 버릴 수 없었다. 반역자로 오해받을지언정, 변절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메리 1세는 더는 손을 쓴 방도가 없어 제인의 처형을 명령했다. 그러고도 그날이 오자 특별히 산파를 보내 제인의 임신 여부를 살펴봤다는 설이 있다. 당시에는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임신하면 집행 연기 혹은 사면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무고한 아이까지 죽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역시나 제인은 임신 상태가 아니었다. 미국의 역사 화가 조지 휘팅 플래그(George Whiting Flagg)가 형장에 들어서기 전 천으로 눈을 가리는 제인의 모습을 표현했다. 제인은 의연하다. 표정은 담담하고, 자세는 꼿꼿하다. 되레 그녀를 천으로 묶는 사내, 도끼를 든 채 그녀를 지켜보는 사형 집행자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제인은 처형대 위로 천천히 목을 올렸다.
제인은 떨리는 몸을 다잡기 위해 거듭 심호흡을 했다. 한 번 더, 한 번 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내뱉는 그때… 사형 집행자는 제인의 목을 깔끔하게 벴다. 소녀의 잘린 머리가 짚단 위에서 굴렀다. 소녀의 흰 드레스는 콸콸 쏟아지는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평생 질곡의 삶을 산 그녀의 최후에 모두가 얼굴을 감싼 채 신음했다. 남편 길포드는 같은 날 제인보다 앞서, 아버지 헨리는 제인이 죽고서 이틀 후인 2월 23일에 처형됐다. 다만 어머니 프랜시스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녀는 제인 처형 후 5년 뒤인 1559년에 사망했다. 제인의 삶을 망치는 데 동참했던 프랜시스는 끝까지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 첫째 딸을 아예 잊었다는 듯, 죽을 때까지 제인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적 어른들만 없었다면 제인은 책에 파묻혀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평범한 가정의 자애로운 어머니가 될지언정, 피로 얼룩진 '9일의 여왕'이 될 일 따위 없었을 것이다. 5세기가 흐른 지금도 그녀의 눈물겨운 생을 되짚으면 한숨만 내쉬어진다.
〈참고자료〉
헨리 8세의 후예들, 앨리슨 위어, 루비박스
명화로 읽는 영국 역사, 나카노 교코, 한경arte
Lady Jane Grey, Eric lves, Wiley-Blackwell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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