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명 스님 떠난 봉암사···그곳엔 불자도 '수장'도 없었다
봉암사 적명 스님의 영원한 행복
[출처: 중앙일보] 적명 스님 떠난 봉암사···그곳엔 불자도 '수장'도 없었다
[출처: 중앙일보] 적명 스님 떠난 봉암사···그곳엔 불자도 '수장'도 없었다
경북 문경의 봉암사는 각별한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단에서 37년 전에 ‘종립특별선원’으로 지정한 까닭이다. 이 때문에 일반 불교 신자들의 봉암사 출입은 철저하게 금지돼 있다. 오로지 수행하는 스님들의 참선을 위한 수도도량으로만 기능한다. 다만, 1년에 딱 하루 부처님오신날에만 산문을 열고 일반인의 출입을 허락한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47년 성철ㆍ청담ㆍ자운ㆍ월산ㆍ혜암ㆍ성수ㆍ법전 스님 등이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며 봉암사에서 결사를 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불과 2년 뒤였다. 식민지 시절 내내 왜색 불교의 확장으로 한국불교의 생명력이 시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이 봉암사 결사를 계기로 독신 출가승이 중심이 된 조계종단이 우뚝 서게 됐다. 그러니 봉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역사에서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린 ‘심장’역할을 한 수행처다.
실제 스님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봉암사에서 한 철(동안거 또는 하안거) 났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제대로 수행했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지금도 있다. 조계종단에서 봉암사는 그만큼 상징성이 큰 곳이다.
28일 봉암사에서는 적명 스님의 다비식이 열렸다. 적명 스님은 봉암사의 수좌다. 봉암사의 최고 지도자는 ‘조실’이다. 그런데 봉암사에는 조실이 없다. 11년 전에 봉암사 대중이 적명 스님을 조실로 추대했다. 그러나 적명 스님이 “나는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며 거절했다. 봉암사의 조실은 깨달음의 견처를 드러내며 수행자들을 이끌어야 하는 정신적 지도자의 자리다. 지금도 봉암사 조실 자리는 공석으로 비어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큰 용기’다. ‘부족한 이가 받는 반장 임명장’보다는 차라리 ‘비어 있는 반장 자리’가 봉암사의 수행 가풍을 더 철저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만약 조계종단에 ‘깨달음을 이룬 큰 스승’이 없다면 종정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둘 수 있을까. 그런 ‘빈자리’를 되새기며 모든 수행자가 절치부심하면서 수행할 수 있을까. 조계종단에 과연 그만큼의 ‘큰 용기’가 있을까. 아니면 법에 대한 안목보다 원로 스님들의 ‘투표’와 ‘밀어주기’로 수장의 자리를 뽑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적명 스님이 택한 ‘봉암사의 비어있는 조실 자리’가 불교계에 던지는 울림은 더욱 크다.
적명 스님의 입적은 급작스러웠다. 올해 80세, 법납은 60세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적명 스님은 후배 도반들과 함께 봉암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나고 있었다. 안거는 여름과 겨울 석 달씩 산문 출입을 하지 않고 선방에서 참선에만 매진하는 불교 수행을 일컫는다. 안거 중에 적명 스님은 수행자들에게 종종 짧은 법문도 했다. 지난 24일은 반결제일이었다. 90일 결제 중 꼭 반(半)이 되는 날이었다. 적명 스님은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선방에서 나와 산행에 나섰다. 봉암사를 뒤에서 받치고 있는 희양산에 올랐다.
해발 999m의 희양산은 부드러우면서도 곳곳에 암벽이 솟아있는 바위산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가로 지른다. 이쪽에서 보면 바위투성이, 저쪽에서 보면 나무가 많은 산이다. 그래서 가은 사람들은 “바위산”이라 부르고, 반대편에 사는 괴산 사람들은 “흙산”이라 부른다.
산길을 오를 때 한 스님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적명 스님은 활짝 웃고 있다. 장갑 낀 두 손으로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있다. 곁에 선 도반 스님들의 표정도 무척 밝다. 한 달 하고도 보름간 선방에서 파고들었을 각자의 화두를 잠시 내려놓고, 겨울산 속으로, 자연 속으로, 그렇게 우주 속으로 잦아드는 느긋한 시간이었다. 그때는 누가 알았을까. 이 사진이 적명 스님이 남기는 마지막 사진이 될 줄 말이다.
적명 스님은 평소 수행의 이유를 명쾌하게 말했다. “행복하자고, 영원히 행복하자고 수행한다.” 그랬다. 90일간 선방에 갇혀서 대중과 함께 50분 좌선하고 10분간 포행(걸으면서 하는 참선)하는 안거는 적명 스님에게 ‘행복을 좇아가는 행복한 일’이었다. 그것도 잠시 맛보고 사라지는 ‘소멸의 행복’이 아니라, 눈을 뜨도 서 있고 눈을 감아도 서 있는 ‘영원한 행복’말이다.
희양산에는 마애불이 있다. 흔히 ‘희양산 봉암사 마애불’이라 부른다. 암벽 계곡의 바위에 새겨진 고려 말 양식의 불상이다. 그날 적명 스님은 그 마애불 뒤에 있는 관음봉을 보고파 했다. 그래서 “천천히 가겠다. 먼저들 올라가시라” 하고선 홀로 관음봉 쪽으로 갔다. “오랜만에 가보고 싶은 곳을 간다”며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관음봉 방향은 중간중간 길이 험하다. 적명 스님은 높은 곳에서 발을 헛디뎌 실족사한 것으로 보인다. 봉암사는 점심 공양 때도 적명 스님이 오지 않자 119에 신고했다. 119 구조대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입적한 상태였다.
적명 스님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기꺼이 받아들임’을 강조했다. 그게 임제 선사가 설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를 가든지 주인이 되면 서있는 그곳이 진리가 되리라)’의 요지라고 했다. “삶이 죽도록 힘들다고 해서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그렇게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업장(業障, 우리가 지은 업으로 인한 장애) 때문에 결국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반복해야 한다.” 만약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이렇게 해보라며 처방전도 내놓았다. “상대가 지독한 악인이라 해도 소중한 인연으로 여겨보라. 따뜻한 말 한마디부터 해보라. 내가 착해지면 그도 착해진다.”
어땠을까. 적명 스님이 급작스레 닥쳐올 죽음을 알았다면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그렇게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기꺼이 주인으로 섰을까. 아쉽고, 또 안타까워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함은 뒤에 남은 우리들의 몫일까. 적명 스님의 입적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진다. 갑작스런 고통, 갑작스런 슬픔,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우리는 과연 ‘주인’으로 설 수 있을까. 만약 그 앞에서 주인으로 설 수 있다면,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상황 앞에서 우리는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주인으로 서지 못함은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런 거대한 고개 끄덕임이 없기 때문일까. 그걸 돌아보게 한다.
28일 오전 10시30분 봉암사에는 적명 스님의 영결식이 열렸다. 제방의 선승들이 이날 봉암사를 찾았다. 적명 스님의 법문 중에서 골수를 담은 대목이 소개됐다.
“중도는 사랑입니다.
깨달음은
일체가 자기 아님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남이 바로 자기자신이며
자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중생이 불행하면
자신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중도의 깨달음은 사랑.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어서 전국선원수좌회 대표 영진 스님이 ‘적명 대종사 행장’을 낭독했다. “26세에 토굴에서 보조국사 지눌의 『절요』를 읽다가 ‘수행을 하려면 모름지기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는 대목을 읽고 마음에 크게 느껴 무(無)자 화두를 들기 시작했다”는 내용과 “28세에 해인사로 가서 1967년 해인총림이 개설되자 50대 방장 성철 스님이 방장에 추대되어 선풍이 일기 시작하자 가행정진한 이래 평생 선방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 선지식인 전강, 경봉, 성철, 서옹, 향곡, 구산 스님 등 문하에서 법을 묻고 정진하였고, 능엄경 변마장의 내용이 낱낱이 사실임을 체험하고 화두선에 더욱 매진하였다”는 대목이 적명 스님 수행의 큰 줄기를 응축해서 보여주었다.
장의위원장을 맡은 대원 스님은 영결사에서 대중을 향해 이렇게 물음을 던졌다.
“부처님과 조사도 이와 같이 가셨고, 범부와 성인도 이와 같이 가셨으며
오늘 적명 대종사께서도 이와 같이 가셨습니다.
그러나 올 때도 온 바가 없고, 갈 때도 간 바가 없다고 하니
금일 대종사께서는 지금 목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삶과 죽음, 둘의 본질을 관통하면 오고 간 바가 없어진다. 그냥 그 자리일 뿐이다. 그렇게 대원 스님은 ‘적명의 자리’를 물었고, 적명을 빌어 대중에게 또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 봉암사 경내에는 바람이 불었고, 산새가 울었다. 어쩌면 거기에 ‘적명의 대답’이 있었을까.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의정 스님은 조사(弔詞)에서 “불꽃같이 치열했던 수좌 본연의 모습도 모자라, 마지막 탈신의 순간마저도 사무치게 ‘제행무상 생사대사(諸行無常 生事大事)’의 도리를 일깨워 주시니 이 경계가 경사(慶事)입니까, 조사(弔事)입니까”라며 추도했다. 그랬다. 적명 스님의 급작스러운 입적은 남아 있는 이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화두’를 다시 한 번 품게 한다.
봉암사에서 걸어서 20분쯤 내려간 자리에서 다비식이 열렸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장작더미에 불길이 확 타올랐다. 산 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출가자와 재가자 대중은 침묵했다. 그 위로 적명 스님이 평소에 던지던 법문이 불꽃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그야말로 불꽃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이었다.
글=백성호 종교전문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적명 스님 떠난 봉암사···그곳엔 불자도 '수장'도 없었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47년 성철ㆍ청담ㆍ자운ㆍ월산ㆍ혜암ㆍ성수ㆍ법전 스님 등이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며 봉암사에서 결사를 했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지 불과 2년 뒤였다. 식민지 시절 내내 왜색 불교의 확장으로 한국불교의 생명력이 시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이 봉암사 결사를 계기로 독신 출가승이 중심이 된 조계종단이 우뚝 서게 됐다. 그러니 봉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역사에서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린 ‘심장’역할을 한 수행처다.
실제 스님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봉암사에서 한 철(동안거 또는 하안거) 났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제대로 수행했음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지금도 있다. 조계종단에서 봉암사는 그만큼 상징성이 큰 곳이다.
28일 봉암사에서는 적명 스님의 다비식이 열렸다. 적명 스님은 봉암사의 수좌다. 봉암사의 최고 지도자는 ‘조실’이다. 그런데 봉암사에는 조실이 없다. 11년 전에 봉암사 대중이 적명 스님을 조실로 추대했다. 그러나 적명 스님이 “나는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며 거절했다. 봉암사의 조실은 깨달음의 견처를 드러내며 수행자들을 이끌어야 하는 정신적 지도자의 자리다. 지금도 봉암사 조실 자리는 공석으로 비어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큰 용기’다. ‘부족한 이가 받는 반장 임명장’보다는 차라리 ‘비어 있는 반장 자리’가 봉암사의 수행 가풍을 더 철저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만약 조계종단에 ‘깨달음을 이룬 큰 스승’이 없다면 종정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둘 수 있을까. 그런 ‘빈자리’를 되새기며 모든 수행자가 절치부심하면서 수행할 수 있을까. 조계종단에 과연 그만큼의 ‘큰 용기’가 있을까. 아니면 법에 대한 안목보다 원로 스님들의 ‘투표’와 ‘밀어주기’로 수장의 자리를 뽑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적명 스님이 택한 ‘봉암사의 비어있는 조실 자리’가 불교계에 던지는 울림은 더욱 크다.
적명 스님의 입적은 급작스러웠다. 올해 80세, 법납은 60세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적명 스님은 후배 도반들과 함께 봉암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나고 있었다. 안거는 여름과 겨울 석 달씩 산문 출입을 하지 않고 선방에서 참선에만 매진하는 불교 수행을 일컫는다. 안거 중에 적명 스님은 수행자들에게 종종 짧은 법문도 했다. 지난 24일은 반결제일이었다. 90일 결제 중 꼭 반(半)이 되는 날이었다. 적명 스님은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선방에서 나와 산행에 나섰다. 봉암사를 뒤에서 받치고 있는 희양산에 올랐다.
해발 999m의 희양산은 부드러우면서도 곳곳에 암벽이 솟아있는 바위산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가로 지른다. 이쪽에서 보면 바위투성이, 저쪽에서 보면 나무가 많은 산이다. 그래서 가은 사람들은 “바위산”이라 부르고, 반대편에 사는 괴산 사람들은 “흙산”이라 부른다.
산길을 오를 때 한 스님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적명 스님은 활짝 웃고 있다. 장갑 낀 두 손으로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있다. 곁에 선 도반 스님들의 표정도 무척 밝다. 한 달 하고도 보름간 선방에서 파고들었을 각자의 화두를 잠시 내려놓고, 겨울산 속으로, 자연 속으로, 그렇게 우주 속으로 잦아드는 느긋한 시간이었다. 그때는 누가 알았을까. 이 사진이 적명 스님이 남기는 마지막 사진이 될 줄 말이다.
적명 스님은 평소 수행의 이유를 명쾌하게 말했다. “행복하자고, 영원히 행복하자고 수행한다.” 그랬다. 90일간 선방에 갇혀서 대중과 함께 50분 좌선하고 10분간 포행(걸으면서 하는 참선)하는 안거는 적명 스님에게 ‘행복을 좇아가는 행복한 일’이었다. 그것도 잠시 맛보고 사라지는 ‘소멸의 행복’이 아니라, 눈을 뜨도 서 있고 눈을 감아도 서 있는 ‘영원한 행복’말이다.
희양산에는 마애불이 있다. 흔히 ‘희양산 봉암사 마애불’이라 부른다. 암벽 계곡의 바위에 새겨진 고려 말 양식의 불상이다. 그날 적명 스님은 그 마애불 뒤에 있는 관음봉을 보고파 했다. 그래서 “천천히 가겠다. 먼저들 올라가시라” 하고선 홀로 관음봉 쪽으로 갔다. “오랜만에 가보고 싶은 곳을 간다”며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관음봉 방향은 중간중간 길이 험하다. 적명 스님은 높은 곳에서 발을 헛디뎌 실족사한 것으로 보인다. 봉암사는 점심 공양 때도 적명 스님이 오지 않자 119에 신고했다. 119 구조대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입적한 상태였다.
적명 스님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기꺼이 받아들임’을 강조했다. 그게 임제 선사가 설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를 가든지 주인이 되면 서있는 그곳이 진리가 되리라)’의 요지라고 했다. “삶이 죽도록 힘들다고 해서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그렇게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업장(業障, 우리가 지은 업으로 인한 장애) 때문에 결국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반복해야 한다.” 만약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이렇게 해보라며 처방전도 내놓았다. “상대가 지독한 악인이라 해도 소중한 인연으로 여겨보라. 따뜻한 말 한마디부터 해보라. 내가 착해지면 그도 착해진다.”
어땠을까. 적명 스님이 급작스레 닥쳐올 죽음을 알았다면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그렇게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기꺼이 주인으로 섰을까. 아쉽고, 또 안타까워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함은 뒤에 남은 우리들의 몫일까. 적명 스님의 입적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진다. 갑작스런 고통, 갑작스런 슬픔,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우리는 과연 ‘주인’으로 설 수 있을까. 만약 그 앞에서 주인으로 설 수 있다면,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상황 앞에서 우리는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주인으로 서지 못함은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런 거대한 고개 끄덕임이 없기 때문일까. 그걸 돌아보게 한다.
28일 오전 10시30분 봉암사에는 적명 스님의 영결식이 열렸다. 제방의 선승들이 이날 봉암사를 찾았다. 적명 스님의 법문 중에서 골수를 담은 대목이 소개됐다.
“중도는 사랑입니다.
깨달음은
일체가 자기 아님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남이 바로 자기자신이며
자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중생이 불행하면
자신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중도의 깨달음은 사랑.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어서 전국선원수좌회 대표 영진 스님이 ‘적명 대종사 행장’을 낭독했다. “26세에 토굴에서 보조국사 지눌의 『절요』를 읽다가 ‘수행을 하려면 모름지기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는 대목을 읽고 마음에 크게 느껴 무(無)자 화두를 들기 시작했다”는 내용과 “28세에 해인사로 가서 1967년 해인총림이 개설되자 50대 방장 성철 스님이 방장에 추대되어 선풍이 일기 시작하자 가행정진한 이래 평생 선방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 선지식인 전강, 경봉, 성철, 서옹, 향곡, 구산 스님 등 문하에서 법을 묻고 정진하였고, 능엄경 변마장의 내용이 낱낱이 사실임을 체험하고 화두선에 더욱 매진하였다”는 대목이 적명 스님 수행의 큰 줄기를 응축해서 보여주었다.
장의위원장을 맡은 대원 스님은 영결사에서 대중을 향해 이렇게 물음을 던졌다.
“부처님과 조사도 이와 같이 가셨고, 범부와 성인도 이와 같이 가셨으며
오늘 적명 대종사께서도 이와 같이 가셨습니다.
그러나 올 때도 온 바가 없고, 갈 때도 간 바가 없다고 하니
금일 대종사께서는 지금 목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삶과 죽음, 둘의 본질을 관통하면 오고 간 바가 없어진다. 그냥 그 자리일 뿐이다. 그렇게 대원 스님은 ‘적명의 자리’를 물었고, 적명을 빌어 대중에게 또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 봉암사 경내에는 바람이 불었고, 산새가 울었다. 어쩌면 거기에 ‘적명의 대답’이 있었을까.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의정 스님은 조사(弔詞)에서 “불꽃같이 치열했던 수좌 본연의 모습도 모자라, 마지막 탈신의 순간마저도 사무치게 ‘제행무상 생사대사(諸行無常 生事大事)’의 도리를 일깨워 주시니 이 경계가 경사(慶事)입니까, 조사(弔事)입니까”라며 추도했다. 그랬다. 적명 스님의 급작스러운 입적은 남아 있는 이들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화두’를 다시 한 번 품게 한다.
봉암사에서 걸어서 20분쯤 내려간 자리에서 다비식이 열렸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장작더미에 불길이 확 타올랐다. 산 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출가자와 재가자 대중은 침묵했다. 그 위로 적명 스님이 평소에 던지던 법문이 불꽃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그야말로 불꽃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이었다.
“일상과 수행이 다르지 않다!”
“철저히 각성하라. 각성이 곧 변혁이고, 변혁이 곧 기회이다!”
“중도의 깨달음은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이다!”
글=백성호 종교전문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적명 스님 떠난 봉암사···그곳엔 불자도 '수장'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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