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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창덕궁(昌德宮) 희정당(熙政堂) 벽화(壁畵)

淸潭 2018. 2. 21. 11:08


창덕궁(昌德宮) 희정당(熙政堂)


~<정 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에 있는

조선시대의 전각. 정면 11칸,

측면 4칸의 2익공식 팔작지붕 건물.

보물 제815호.

조선 후기부터 편전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조선 말기(朝鮮 末期)와 한말(韓末)에 걸친

궁궐 편전의 건축 형태가 남아 있다.

~<역사 내용>~

보물 제815호. 정면 11칸,

측면 4칸의 2익공식 팔작지붕건물.

창덕궁의 편전(便殿)은 본래 선정전이었는데,

이 건물은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 건물을 편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건물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1496년(연산군 2)에

궁내의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면서

당호를 희정당이라고 바꾸면서

창덕궁의 한 건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창덕궁이 재건될 때 다시 지어졌으며,

다시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재건되었다.

 

이 때에는 인경궁()의

건물을 철거하여 그 자재로 세웠다.

1833년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재건되었으나

1917년에 화재로 타 버리고

1920년에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이 여러 차례 불에 탔다가 재건되면서

규모도 달라지고 건물의 용도도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인조 때 재건될 때에는 15칸에 지나지 않았으나

 뒤에 편전으로 이용되면서

규모가 늘어나 현재의 큰 건물이 되었다.


희정당은 외전에 속하는

인정전·선정전의 동쪽에, 외전건물들과는

축을 약간 달리하여 놓여 있으며,

희정당의 북쪽에는 내전의 정당인 대조전이 있다.

건물 앞의 왼쪽에 연못이 있고

작은 뜰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1920년에 재건되면서

건물 남면에 자동차의 진입을 위한

돌출된 지붕이 설치되는 등 많은 개조가 이루어졌다.


장대석을 5단 쌓은 기단 위에

모난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다.

 외진주( : 바깥기둥) 위에 창방을 돌리고

 일반적인 형태의 2익공을 결구하였으며,

주칸에는 운공( :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물건)을 두어

주심도리를 받게 하였다.


익공의 내부는 보아지가 되어 퇴량을 받게 하고,

퇴량의 내부는 고주에 결구되었다.

고주 상부는 팔각()인 주두를 놓고

그 위에 사각()의 재주두를 두어 대들보를 받았으며,

대들보 상부에 붙여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지붕은 각 마루를 양성하고 용두·잡상을 두었다.

정면 9칸, 측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툇간으로 하여 통로로 사용하였는데,

이 중 정면 3칸을 통칸으로 하여 응접실로 하고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이 건물은 1920년에 재건할 때

한식을 위주로 하면서 양식을 가미하여

 응접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양식으로 꾸미고

 양식 탁자를 놓았다.


 현재 응접실 좌우에

김규진()의 <금강산도>·<해금강도>가 있다.

조선 말기와 한말에 걸친

궁궐편전의 건축형태를 남기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본관(本館)은 남평().

자(子)는 용삼(),

호(號)는 해강()

·만이천봉주인(

무기옹() 등 많은 별호를 썼다.


 평안남도 중화()의 농가에서 태어나

외숙인 이희수()로부터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공부하다가,

 18세 되던 1885년(고종 22년)에

중국에 건너가 8년간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청나라에 유학을 간 김규진은

북경, 양주, 상해지역을 돌아다니며

오창석(), 서신주(),

오대징(), 민영익() 등의

서화가들과 교유하였고

당시 청에서 유행하는 화풍을 연구하였다.

1894년에 귀국하여 평양에서

「조선국평양성도()」(1895년)를 그렸다.


1896년에는

궁내부() 외사과() 주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내장원 주사, 예식원 주사 및 문서과장,

 제도국 참서관, 시종원 시종(),

경리원 기사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영친왕의 서법()을 지도하는

서사()에 임명되었다.


1907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 천연당()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하였고,

1913년 천연당사진관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을 병설하였다.

 

자신의 서화 작품과

다른 여러 명가()의 작품을 진열하고

판매 및 주문에 응했으며

고서화()도 취급하였다.

김규진이 1915년에 발족한

 ‘서화연구회’는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에 이어

두 번째 출현한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으로서

3년의 수업과정이었다.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조석진(), 안중식(),

오세창()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타계한

안중식의 뒤를 이어

조석진이 회장이 되자 서화협회를 탈퇴하였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자

서예와 사군자부의 심사 위원이 되었다.

청나라 유학으로 연마한

대륙적 필력과

호방한 의기()를 폭넓게 발휘하여,

글씨에서는

전()·예()·해()·행()·초()의

모든 서법에 자유로웠다.


특히 대필서()는

당대의 독보적 존재였다.

그림으로는 글씨에서의 필력이

그대로 반영된 묵죽()과

묵란() 등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창덕궁 희정당()의 벽화

「내금강만물초승경()」과

「해금강총석정절경()」

(1920년) 같은 본격적인 채색화도 그렸으며,

산수화·화조 등 여러 화제를 두루 다루었다.


또한 영친왕의 서사()를 맡으며

서화교본으로 제작한

『김규진 화첩』을 비롯하여,

서화연구회에서의 서화교육을 위한 교재로서

『서법진결()』(1915),

『육체필론()』(1915),

해강난죽보()』(1916) 등을

만들기도 했다.


 

 

  

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

(昌圖)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와룡동(臥龍洞)

창덕궁 경내에 있는 궁중 벽화이다.

 2006년 3월 2일

등록문화재 제241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소유이며 창덕궁관리소에서 관리한다. 



창덕궁 희정당 총석정절경도

(昌圖)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와룡동(臥龍洞)

창덕궁 경내에 있는 궁중 벽화이다.

2006년 3월 2일

등록문화재 제240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소유이며 창덕궁관리소에서 관리한다.

 


1920년경 당대 최고의 서화가

해강() 김규진(:1868~1933)이

52세에 그린 195cm×880cm 크기의

산수화 대작으로 희정당 서쪽 벽의

《금강산만물초승경도()》와 함께

동쪽 벽을 장식하고 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와

해금강을 바라본 광경을 그린 것으로,

화폭 중앙의 산억덕 위에

여러 그루의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총석정 모습이 실로 장관을 이룬다. 

뒤로는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바다에 솟아 있는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도안화된 방식으로 물결을 표현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

창덕궁 경내에 있다.


~ 자료제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화중앙연구원 http://www.aks.ac.kr     


 


2    0    1    8.   2.   1    9.     시    곡(枾    谷).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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