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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그 사람이여! 아깝다, 그 재주여!|

淸潭 2017. 2. 6. 11:17

공자(公子)의 꿈과 윤결의 죽음(어우야담)


한 공자(公子)가 있었는데, 왕실의 후예로 풍류를 즐겼으며 손님 접대하기를 좋아했다.

거처에는 정원과 정자가 아름답고 화려했는데, 매양 술자리를 마련하여 빈객을 맞이했다.

시인 윤결(尹潔)은 늘 빈객으로 참여하면서 자리가 끝날 때까지 마음껏 즐겼다.

하루는 공자가 윤결을 청해 집에 있는 향기로운 술을 종일토록 거나하게 마시고 취한 뒤 더불어 함께 잠을 잤다.

공자가 꿈에 마을을 지나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갔는데, 길이 끝난 외진 곳에 낮은 담이 둘러쳐져 있었다.

담장 안의 네모진 연못은 물이 맑게 푸르렀으며, 못 가운데에는 연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주렴을 드리운 화란(畫欄) 사이에 서너 명의 미인이 짙게 단장하고 서 있다가, 공자를 맞이했다.

공자가 자리에 앉자 미인들은 맛있는 안주에 향기로운 술을 올렸다. 나른하게 취해 미인을 끼고 잠을 잤는데, 새벽녘이 되어 깨어 보니 곧 꿈이었다.

이에 윤결에게 말했다.

"지난 밤 꿈에 참으로 선계를 유람하였소."

날이 저물 무렵 공자가 시험삼아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묵사동(墨寺洞)을 지나 산길을 따라 들어가니, 과연 화려한 정자와 연꽃이 핀 못이 있었고 곱게 단장한 미녀 서너 명이 그를 맞이하는데, 꿈과 모두 똑같았다.

밤새도록 노래하며 술을 마시는데, 미인은 공자의 빈객 윤결의 사람됨을 극구 칭찬했다. 공자가 말했다.

"윤결의 재주는 짝할 자가 없으니 당대 제일가는 명류지."

미인들은 윤결을 칭찬하는 말을 그치지 않으며 말했다.

"슬프다, 그 사람이여! 아깝다, 그 재주여!"

라고 말하고는 혀를 끌끌 차는 것이었다.

공자가 깨어 집에 돌아와 보니 윤결이 이미 구금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윤결이 궁전 뜰에서 죽게 되자, 공자는 미인들의 말을 떠올리며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미인들을 다시 찾아가 물어 보고자 그곳에 이르러 보니 연못과 정자는 간곳이 없고, 다만 텅 빈 산, 돌길에 풀들만이 바람결에 휘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윤결(尹潔)1517(중종 12)∼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 자는 장원(), 호는 취부()·성부(). 지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언()이고, 아버지는 정랑 시걸()이며, 어머니는 남순종()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에 진사가 되고, 154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를 하고, 1546년(명종 1)에는 유구()에 표류하였던 박손()의 경험담을 토대로 『유구풍속기()』를 저술하였다.

1548년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나, 시정기() 필화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의 정당함을 술자리에서 발설한 것이 빌미가 되어 진복창(), 능성군()구사안() 등의 밀고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형()의 세력확장을 비판하였다고 하여 국문을 받던 중 옥사하였다.

동생 준()도 윤원로()의 죽음이 윤원형 형제의 싸움 때문이라고 말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1567년(선조 즉위년)에 복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결 [尹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