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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癖)- 3

淸潭 2017. 2. 4. 10:46

()- 3

 

주벽, 단벽, 다벽, 마벽, 석벽, 결벽

죽림칠현의 중심인물인 혜강(232~262)단벽(鍛癖)’으로 유명했다.

풀무질을 유독 좋아해서 벗인 향수와 마주앉아 풀무질 하며 방약무인했다고 한다(康居貧嘗與向秀共鍛於大樹之下以自贍給).

단류객(鍛柳客)은 진()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을 가리키는데, 그가 대장일[鍛冶]을 좋아하여 자기 집 버드나무 아래서 대장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종회(鍾會)가 혜강의 집을 찾아왔는데, 혜강은 그를 잘 대우하지 않고(康不為之禮而鍛不輟) 그가 가려 할 때 묻기를

무엇을 들으러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느냐(何所聞而來何所見而去).”

하자, 종회가

들을 것을 들으러 왔다가 볼 것을 보고 간다(聞所聞而來見所見而去).” 하고 떠났다.

그 후 이로 인해 종회는 혜강에게 감정을 품고 문제(文帝)에게 참소하기를

혜강은 와룡(臥龍: 흔히 때를 만나지 못한 영웅을 지칭한 말이나 여기서는 잠복해 있는 간웅(奸雄)이라는 뜻)입니다(嵇康臥龍也).” 하여, 결국 혜강은 죽임을 당하였다.

晉書 卷49 嵇康傳

 

당나라 때 은둔의 선비라는 육우(陸羽·733~804)는 당()의 경릉(竟陵) 사람이다. 차를 즐겨 다경(茶經) 세 편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온 세상이 다 함께 차를 즐기는 풍속을 이루었고, 후세에는 그를 다신(茶神)이라하여 제사까지 지냈음. 羽嗜茶著經三篇言茶之原之法之具尤備天下益知飲茶矣時鬻茶者至陶羽形置煬突間祀為茶神。《唐書 卷196

 

북송의 서·화가인 미전(米顚;1051~1107=미불.米芾의 별호)석벽(石癖)’, 즉 돌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기암괴석을 매우 좋아하여 길을 가다가 이상한 돌을 보게 되면 하인에게 도포(道袍)와 홀()을 가져오게 하여 의관을 갖춰 절을 하면서米顚拜石()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宋史 卷203 文苑列傳 米芾

 

그가 예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미전(米顚)이라고 불렀다. ()은 광()과 통한다. 미불이 기암괴석을 좋아하였는데, 언젠가 보기 드문 기이한 돌을 대하고는 뜰 아래로 내려와서 절을 하며 내가 석 형님 보기를 소원한 지가 20년이나 되었소.吾欲見石兄二十年矣라고 했다는 일화가 송()나라 비연(費兗)이 지은 양계만지(梁溪漫志)》 〈미원장 배석(米元章拜石)에 나온다. 원장은 미불의 자()이다.

 

또 원나라 화가인 예찬(倪瓚·1301~1374)결벽(潔癖)’으로 역사에 이름을 알렸다. 예찬의 자는 원진(元鎭), 운림거사(雲林居士)라 자호(自號)하였다.

극단적으로 먼지를 싫어한 예찬은 틈나는 대로 손을 씻었는데, 물과 수건을 든 시녀가 늘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가 거처하는 청비각(淸閟閣)에는 수천 권의 장서(藏書)가 있었고, 고정법서(古鼎法書), 명금 기화(名琴奇畫) 등을 좌우에 진열하였으며, 주위에는 고목 수죽(高木脩竹),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무성하였다. 그는 결벽증이 있어 마냥 씻는 게 일이었고, 속객(俗客)이 다녀간 뒤에는 반드시 그가 앉았던 곳을 씻어 내고야 말았다고 한다. 그는 본래 가산(家産)이 많았으나 친구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삿갓 차림에 일엽편주(一葉片舟)로 진택(震澤), 삼묘(三泖) 사이를 왕래하면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明史 卷298 隱逸列傳 倪瓚

 

심지어는 정원의 오동나무도 깨끗이 씻었다고 한다. 오동나무까지 씻을 정도의 결벽을 바탕으로 한 세동고사(洗桐故事)’는 명나라 시대 이후 수많은 화가들의 그림소재가 되었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210~263)가슴에 불덩어리가 있어서 술을 부어야 한다.’주벽(酒癖)’이다.

세설신어임탄(世說新語任誕)을 보면, 왕효백(王孝伯)이 일찍이 왕대(王大)에게

완적은 사마상여(司馬相如)와 비교하여 주량이 어떤가?”라고 물으니, 왕대가 완적의 가슴 속에는 큰 돌무더기 있기 때문에 반드시 술로써 이것을 씻어내었다.(王孝伯問王大:「阮籍何如司馬相如?」王大曰:「阮籍胸中壘塊故須酒澆之。」)”고 대답했다

 

진서완적전(晉書/049)에서 위진 간에 천하는 변고가 많아서, 명사가 목숨을 온전히 한 사람은 적었다. 완적은 이로써 세상사에 간여하지 않고 마침내 술에 실컷 취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籍本有濟世志屬魏晉之際天下多故名士少有全者籍由是不與世事遂酣飲為常)”고 설명한다.

 

좌전벽이란?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벽()을 못내 자랑하는 이들도 많았다.

특히나 책을 좋아하고 시 읊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서음(書淫), 혹은 전벽(傳癖), 시마(詩魔) 등으로 칭하며 은근히 자랑했다.

 

예컨대 진나라 시대 두예(杜預·222~284)<춘추좌전>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무제(武帝) 때 대장군이 되어 오나라를 정벌하는 무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말을 탄 적도 없고 화살이 과녁을 뚫지 못할 정도로 문약(文弱)이었다(預身不跨馬射不穿劄而每任大事輒居將率之列).

 

두예(杜預)가 항상 왕제(王濟)는 말을 좋아하는 벽馬癖이 있고, 화교(和嶠)는 돈을 좋아하는 벽錢癖이 있다고 하자, 진 무제(晉武帝)가 그 말을 듣고 두예에겐 무슨 벽이 있는지 묻자, 두예는 좌씨전에 벽左傳癖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時王濟解相馬又甚愛之而和嶠頗聚斂預常稱濟有馬癖嶠有錢癖」。武帝聞之謂預曰卿有何癖對曰臣有左傳). 晉書 卷34 杜預列傳

<춘추좌전>은 공자의 역사서 <춘추>를 두고 노나라 좌구명이 해설한 책이다. 두예는 이 <춘추좌전>에 빠져 <좌전집해>라는 주석서를 저술했다. 이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좌전> 주해이다. 두예는 <좌전벽>은 글깨나 읽는다는 이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의 모범사례이다.

 

또 술과 거문고. 시를 세 친구(三友)’로 삼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772 ~ 846)<취음(吹吟)>에서 술과 시에 빠진 성벽(性癖)’을 읊었다.

 

취한 술기운이 또 시마(詩魔)를 일으켜 정오부터 슬피 읊은 것이 저녁에 이르렀다.(酒狂又引詩魔發 日午悲吟到日西)”

 

두보(杜甫·712~770)가구(佳句·좋은 싯구)를 탐하는 벽()’을 앓았다. 그는 강위에서 바다 같은 물살의 기세에 힘입어 간단히 짓노라.(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나의 성격은 좋은 싯구를 몸시 탐내어 시어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 두지 않겠노라.(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

 

죽을 때까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싯구를 지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뜻이니 얼마나 지독한 시벽(詩癖)인지 모르겠다.  

 

이 글은 경향신문 이기환의 [고려 조선의 '덕후', 그 기묘한 '덕질']에 첨삭하여 재구성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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