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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話] 서동 설화(薯童說話)

淸潭 2016. 1. 15. 10:53

서동 설화(薯童說話)

 

 제 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곳의 용(龍)과 교통(交通)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度量)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서예 ; 薯예]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국인(國人)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서동의 출생담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공주 선화(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갔다.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童謠)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라 하였다. 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알려지니, 백관(百官)이 임금에게 극간(極諫)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왕후(王后)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侍衛)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지는 모르나, 믿고 기뻐하여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내용이 그대로 맞은 것을 알았다.-서동의 결연담

 백제로 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의 부(富)를 이룰 것이다."하니, 서동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니, 지금 그 소재(所在)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宮殿)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여 금을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지명 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法師)는 "내가 신력(神力)으로써 보낼 터이니 금을 가져오라."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서동의 등극담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敬禮)하였다. 이를 보고 부인은 그 곳에 큰 절을 세우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知命)에게 가서 못을 메울 것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彌勒)삼상과 회전(會殿), 탑(塔), 낭무(廊 )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액호(額號)를 미륵사(彌勒寺)라 하니, 진평왕은 백공(百工)을 보내서 도왔다. 지금까지 절이 남아 있다.- 미륵사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