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서천령(西川令)은 왕실의 친척인데 장기를 잘 두어 우리나라 최고수로 당대에 대적할 만한 적수가 없었다. 한 늙은 병사가 번(番)을 들기 위해 남도로부터 올라오면서 준마를 끌고 와 뵙고는 말하였다. “공자께서 장기를 잘 두신다고 들었습니다. 한번 겨뤄보고 싶습니다. 제가 이기지 못하면 이 말을 드리지요.”
세 판을 두어 두 판을 지자 늙은 병사가 마침내 그 말을 바치고 떠나면서 말하였다. “공자께서는 이 말을 잘 먹이십시오. 다음에 꼭 다시 한 번 두어서 말을 되찾아갈 것입니다.” 서천령이 웃으며 말하였다. “좋소이다.”
장기의 당대 최고수인 서천령에게 촌구석의 하급 병사에 불과한 늙은이가 감히 장기 두기를 제안합니다. 좋은 말까지 내기에 걸었으니 이건 아예 거저 바치겠다는 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장기에 져서 마침내 말을 빼앗기게 되었죠. 그래도 군인이라고 오기는 남았던지 다음에 다시 두어서 되찾아가겠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서천령은 준마를 얻은지라 이때부터 다른 말보다 갑절이나 먹여 키우며 매우 튼튼하게 잘 길렀다. 뒷날 그 늙은 병사가 임기가 다하자 과연 다시 와서 장기를 두자고 청하였다. 그런데 서천령이 세 판을 두어 세 판을 다 지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새 서천령의 실력이 확 줄었나요? 아니면 병사가 근무는 안 서고 장기만 연습했나요? 늙은 병사가 말을 끌고 돌아가면서 말합니다.
“제가 이 말을 사랑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번을 서게 되었는지라, 객지에서는 말을 잘 먹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잠시 공자님 댁에 맡겨 두었던 것입니다(小人愛此馬, 自知上番京師, 客中難得善3, 姑托公子家矣). 이제 공자께서 잘 길러주신 덕에 비루먹은 말이 이토록 튼튼해졌으니 감격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 선생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웃자고 만든 책인데 웃고 말 일이 아닌 듯합니다. 새해 다짐. 아, 세상에는 숨은 고수가 많구나, 언제 어디에서 어떤 고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잘난 척 함부로 까불지 말아야겠구나.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내금강에 백전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이곳에는 지엄(智嚴)이라는 스님이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불도도 높을 뿐 아니라 장기를 잘 두기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하루는 조선 왕실의 종친으로서 서천현령(西川縣令)을 지낸 바 있는 서천령(西川令)이 금강산 구경을 왔다가 백전암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조선 팔도에서 장기 두는 것으로 자기를 당할 자 없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인물이었고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의 장기 실력이 가히 국수(國手)일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서천령이 백전암을 들렀는데, 늙은 스님 한 분이 있는 방안은 깨끗하게 치워져서 아무런 가재도구도 없는데, 벽에 다만 장기를 넣어 두는 주머니만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서천령은 스님에게 물었다.
“아무런 가재도구가 방안에 오직 장기 주머니만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스님은 장기를 잘 두시는가 보구려. 나도 장기 꽤나 두는 사람이니 한 번 장기를 두어 봅시다.”
30년 전에 장기를 둔 이후 한 번도 두지 못했다며 여러 번 거절하는 스님을 몰아서 드디어 두 사람은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되었다.
장기 주머니를 열어서 꺼내 보니 서천령의 장기는 모든 말들이 다 있는데, 스님의 장기말 중에는 포(包)가 한 쪽이 없었다.
서천령은 스님의 장기에 포가 없으니 다른 돌멩이나 나무 조각으로 대신하여 짝을 맞추자고 하였으나, 스님은 장기도 일종의 도(道)인데 아이들 장난처럼 돌멩이나 나무 조각을 올려놓을 수 없다며 그냥 하자고 하였다.
조선팔도에서 국수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서천령은 속으로 몇 수만에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두기 시작했다.
그런데 열수도 채 되지 않아서 자신이 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화가 난 서천령은 여러 번을 계속 두었으니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결국 장기주머니를 걷고 금강산을 내려오면서 장기도 도속(道俗 : 도인과 속인, 불가와 속가)이 다르다며 한탄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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