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품이 고결하고 학자로서 유명했으며, 동시에 시문과 글씨,죽화(竹畵)에 특히 뛰어났으며, 사마광(司馬光),소식(蘇軾) 등은 문동을 매우 존경하였다고 한다.
문동은 후세에 묵죽(墨竹)의 개조(開祖)로 추앙받았다.
그의 집은 앞뒤가 대[竹]로 우거져 있어 제법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대를 몹시 사랑하여 직접 심어서 돌보기도 하였다.
시간만 나면 죽림에 들어가서 대가 자라는 모습,가지 치는 상태, 잎이 우거지는 모습, 그리고 죽순이 나오는 모양과 자라는 모습 등을 정성들여 꼼꼼히 관찰하여 대에 대한 모든 것을 터득하였다.
그후로, 그는 대를 완상(玩賞)하다가 흥에 겨우면 집으로 들어가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갈아 그림을 그렸다.
대에 대해 충분히 연구 관찰하였으므로, 그가 그리는 묵죽화는 박진감이 있다고 평판이 높았다.
그 자신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대를 그릴 뿐이었으나, 세간에서는 높이 평가하여 귀하게 취급하게 되었다.
그의 묵죽화가 천하일품이라고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화포용의 무늬없는 흰 명주를 손에 들고, 그림을 그려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문전약시(門前若市:문앞이 시장과 같다)를 이루었다.
문학자로 시인인 조보지(晁補之)는 문동의 절친한 친구였다.
문동은 그가 찾아오면 반가이 맞아 죽림으로 가서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는데, 조보지는 문동이 즉석에서 대를 그리는 모습을 지켜 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날 문동에게 그림을 배우고 싶어하는 청년이 조보지를 찾아와 문동의 그림에 대해 물었다. 조보지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여가가 대를 그리고자 할 때, 흉중에는 이미 성죽이 있다[與可畵竹時 胸中有成竹]."
여기서 "여가"는 문동의 자(字)이다.
조보지는 문동의 그림이 어느 만큼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인가를 이 말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비롯하여 "흉유성죽"이란 말이 나왔으며, 어떤 일을 착수하기 전에 이미 충분한 복안이 서 있음을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