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는 행차를 할 때면 항상 그를 수레에 태우고 다니며 그와 떨어지지 않았다.
동현의 가족들은 동현 덕분에 조정에서 모두 크고 작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애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으며, 일부 황족들은 제위(帝位)찬탈을 노리고 있었다.
동평왕(東平王)유운(劉雲)은 무당을 불러 황제를 저주하는 굿을 하며, 황제가 일찍 죽기를 빈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이 간신 식부궁(息夫躬)과 손총(孫寵)등에게 알려졌다. 식부궁과 손총은 내시를 통하여 황제에게 이 사실을 고변하였다.
황제는 즉각 하명하여 관련자들을 전원 죽였다.
사건이 종결된 몇 달후, 황제는 많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현을 고안후(高安侯)에 봉하였다.
왕가가 이를 알고 맹렬히 반대하자, 애제는 기분이 상하여 왕가를 가까히 하지 않았다.
기원전 2년, 애제는 할머니인 부태후의 유명(遺命)을 구실로 동현에게 2천호를 하사하였다. 그러자 왕가는 다시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동현은 폐하의 은총만을 믿고 밖에서 멋대로 행동하여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있습니다. 속담에 말하길 '천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으면 병이 없어도 죽는다[千人所指 無病而死].' 했습니다. 그의 종말은 좋을 리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하시여, 다시는 이런 일을 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애제는 왕가의 비핀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품고, 그에게 황제를 속인 죄를 씌워, 스스로 독을 마시고 자살하게 하였으나, 왕가는 끝내 거부하였다. 왕가는 감옥에 갇혀, 2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왕가가 죽은 후, 동현의 권력은 갈수록 커져 황제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되었다.
그러나 일년후 애제가 죽자 동현의 권세도 곧 무너졌으며,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