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제주 돌하르방 조각 名匠 장공익 옹
고희가 넘었지만 망치를 잡으면 눈빛이 변한다. 힘에 부치고 질릴 만도 하지만 돌하르방을 대하는 그의 표정은 늘 밝다. 40여 년 세월을 돌하르방과 함께 살아온 장공익 옹. 돌을 다듬느라 하루에 수백, 수천 번의 망치질을 해서 그런지 뼈에 살이 붙을 시간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제주=임재영 기자 |
《쨍, 쨍, 쨍…. 돌 다듬는 파열음이 한여름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갈랐다. 제주 북제주군 한림읍 금릉리의 돌조각상 공원인 금릉석물원. ‘섬나라 수호신’인 돌하르방을 깎고 다듬는 데 평생을 바친 장공익(張公益·74) 옹의 손에는 여전히 망치와 끌이 있었다. 다음 달 말 서울 청계천 복원지로 보낼 돌하르방을 만들기 위해서다. “돌 만지는 일이 재미있어. 거대한 돌과 씨름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 돌하르방이 완성된 때는 마치 자식을 얻은 느낌이야.” 27세부터 시작한 돌하르방 조각이 40여 년을 넘기면서 이제 힘에 부치고 질릴 만도 하지만 그의 표정은 희열로 가득 찼다.》
지금까지 그가 만든 돌하르방은 10만 개가 넘는다. 그래도 또 만들고 싶어 한다. 하루라도 쉬면 손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단다.
돌하르방은 제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 장 옹은 그 돌하르방을 만드는 명장이다. 1993년 노동부가 지정한 ‘석공예 명장’. 같은 해 ‘신한국인’으로 지정됐다.
제주를 방문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소련 대통령, 주룽지(朱鎔基) 전 중국 총리가 장공익 옹의 돌하르방을 선물 받았다. 벨기에 국왕,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몽골 대통령, 말레이시아 총리의 여행가방에도 그가 빚은 돌하르방이 담겼다.
미국 샌타로사 시, 캐나다 밴쿠버 시, 중국 라이저우(萊州) 시에는 장 옹이 심혈을 기울인 높이 2.5m의 대형 돌하르방 조각상이 자리 잡고 있다.
155cm, 48kg의 단구(短軀)에 깡마른 몸이다. 돌덩이를 상대하며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 망치질을 하다 보면 뼈에 살이 붙을 시간이 없다. 작은 체구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금릉석물원에는 유난히 큰 돌하르방이 많다. 자기 몸무게의 310배에 달하는 높이 5m, 무게 15t의 돌하르방을 만들기도 했다.
장 옹은 심방(무당)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12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10세를 전후해 10명이 숨졌다. 심방의 자식으로 만들어야 화를 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친은 용하다는 심방에게 장 옹을 보냈다.
“너무나 어려웠어. 굶어 죽기도 하고, 병들어 죽기도 했어. 가족 내력인지 뭔지 모르지만 자식들이 어릴 때 숨지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 마음은 멍들다 못해 갈래갈래 찢어졌어.”
눈시울이 어느새 붉어졌다. 장 옹도 10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5명을 어릴 때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업보인지, 굴레인지…. 그때는 가난이 죄라고 생각했어. 일단 배불리 먹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했어.”
6·25전쟁 중이던 1952년에 해병대 22기로 입대했다가 5년 만에 제대했다. 당시 높은 가격을 받고 있는 기념품에 눈을 돌렸다. 처음으로 해녀 석고상을 만들었다.
목돈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할 마음도 없었다. 결국 돌을 잡고 돌하르방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20∼30cm의 돌하르방에 손을 댔다. 점점 자신이 붙자 1m 이상에 도전했다.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1971년 제1회 민예품경진대회에서 돌하르방 조각으로 제주도지사상을 수상했다. 기념품으로 판매되는 돌하르방 제작에 많은 시간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하르방이 완성되는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제주시 관덕정 앞에 있는 돌하르방의 크기와 표정을 보면서 석고상을 만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 석고상을 보면서 돌하르방을 제작했다.
죽음의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교통사고로 두 차례 뇌수술을 받았다. 10년 전에는 위암 판정을 받아 위를 잘라냈고 폐에도 암세포가 전이됐다.
위에 종양이 생긴 것을 보고 ‘돌가루를 너무 먹어서 그게 뭉쳤구나’라고 생각했단다. 다시 건강을 되찾은 것은 쉬지 않고 ‘즐겁게’ 망치를 들었기 때문으로 여기고 있다.
그의 두 아들 가운데 둘째인 운봉(39) 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 아들의 예술적 감성이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대견해 하는 눈치다.
“3년 전 그동안 있던 돌하르방 도면과 사진 수천 장을 태워 버렸어. 도면을 따라 만들면 예술성을 찾을 수 없어. 돌하르방이 주는 투박함과 절제의 미학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으로 느껴야 하지.”
장 옹은 요즘 설화와 전설을 소재로 돌 조각을 만드는 일에 빠져 있다. 책에 나온 설화나 전설이 아니라 유년 시절 모친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소재다. 6·25전쟁을 전후한 제주의 모습도 돌 조각으로 재현하는 중이다.
“원래 일 욕심이 많아. 염라대왕 앞에 가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따뜻하면서 해학적인 제주의 옛 모습을 돌로 살려놓을 거야.”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장 옹의 돌하르방 제작비결▼
돌하르방의 하르방은 할아버지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조선시대에는 우석목, 벅수머리, 옹중석 등으로 불리다 1971년 제주도 문화재위원회에서 문화재(민속자료 제2호) 명칭으로 ‘돌하르방’을 채택한 이후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마을 어귀에 세워진 돌하르방은 수호신, 주술종교, 위치표지 등의 기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토속적 냄새가 물씬 풍겨 한국을 찾는 외국 정상에게는 선물로 제격이다.
“외국으로 가는 돌하르방을 만들 때는 더 신경이 쓰여. 돌하르방 때문에 한국과 제주를 기억할 수 있기에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도 정성을 들였어. 그 돌하르방을 보고 예술적 영감을 얻는 외국인도 있을 수 있잖아.”(웃음)
장공익 옹은 제주 북제주군 조천읍에서 나는 돌만 고집한다.
“제주 현무암은 겉으로는 구멍이 송송 뚫려 부드럽게 보이지만 속은 달라. 육지 현무암이 강하다면 제주 현무암은 질겨. 돌의 결을 따라 돌하르방 윤곽을 잡는 것이 중요하지.”
장 옹은 “돌하르방 마무리는 망치와 끌로 해야 멋이 있다”며 “근엄하면서도 투박하고 정겨운 모습을 가져야 제대로 된 돌하르방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돌을 깨고 다듬다 보면 온몸에 상처가 아물 날이 없다. 10cm 이상 찢기는 상처가 나도 장 옹은 병원에 가지 않는다. 팔과 손, 입에는 돌하르방 명장의 ‘훈장’처럼 수십 군데 상처가 생겼다.
현무암을 나무처럼 깎고 다듬으려면 수천, 수만 번의 망치질을 해야 한다. 장 옹은 도면에 의존해 돌하르방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머릿속 이미지를 따라 손을 움직인다.
현재 남아 있는 옛 돌하르방은 제주시 21기, 남제주군 25기(미완성 1기 포함), 서울국립민속박물관 2기 등 모두 48기에 불과하다.
▼장공익 명장은▼
△1931년 제주 북제주군 한림읍 출생
△1971년 제1회 민예품경진대회 제주 도 지사상 수상
△1973∼79년 민예품경진대회 9회 입상
△1980년 물허벅 여인상 의장등록
△1982년 배령이민예사 등록
△1991년 돌하르방부업단지 지정 및 금릉석물원 본격 조성
△1991년 한소 정상회담 미하일 고르바초 프 소련 대통령에게 돌하르방 증정
△1993년 자랑스러운 제주인 으뜸상 수상
△1993년 노동부 지정 석공예 명장
△1993년 신한국인 지정
△2000년 주룽지 중국 총리에게 기념 품 증정
△2001년 나차긴 바가반디 몽골 대 통령에게 기념품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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