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조계종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30. 우바이(優婆夷)

淸潭 2009. 2. 8. 13:04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30. 우바이(優婆夷)
48년 가락국에 온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기사등록일 [2009년 02월 02일 11:49 월요일]
 
 
현존하는 기록상 한국불교 최초의 우바이인 가락국 수로왕비 허황옥의 능.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올때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 파사석탑은 현재 허황옥 능 한쪽에 설치한 보호각 안에 보존돼 있다.

16살의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은 하늘이 내린 가락국 왕을 찾아가 배필이 되라는 부모님의 명을 받들어 서기 48년에 2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배를 타고 장장 2만 5000리 길에 달하는 긴긴 항해 끝에 남해의 별포 나룻목에 도착했다.

그녀는 가락국 수로왕의 명을 받아 나룻목에서 대기 중이던 가락국 대신들의 영접을 받으며 낯선 땅에 발을 디딘 후 가장 먼저 비달치 고개에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장유사 고개를 넘어 드디어 성밖 임시 궁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로왕을 만났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등장한 허황옥 관련 내용이다. 『삼국유사』가 1280년을 전후해 쓰여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무려 120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후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사실감을 높이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허황옥의 고향 아유타국(아요디야)은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던 불교국가였고, 그녀는 그 나라의 공주였다. 따라서 그녀가 계(戒)를 받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는 그녀가 가야에 온 이후 수로왕과 함께 곳곳에 사찰을 짓는 등 적지 않은 불사를 진행한데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아도의 모친이 고구려 최초

이 허황옥이 바로 우리의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첫 번째 여성불자, 즉 한국불교 최초의 우바이(優婆夷)라고 할 수 있다.

허황옥은 또 배를 타고 올 때 바다신의 노여움을 막고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배에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 높이가 120cm에 불과한 작은 석탑이지만 그녀의 고향 아유타국은 물론 그녀 역시 신심 돈독한 불자였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석탑은 고려 중엽까지 김해의 호계사에 보존돼 있다가 현재는 허황옥릉 옆에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한국불교 최초의 우바이로서 가야불교의 초전을 굳건하게 다진 허황옥. 그러나 그녀의 실존 여부는 물론,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이견이 분분한 게 현실이다.
가야의 불교 도래설을 입증할 만한 문헌이 『삼국유사』 이외에는 없기도 하거니와 당시 지었다고 하는 사찰들의 실제 건축연대 등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아직까지 비공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는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적 요소가 없는 만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가야불교와 허황옥, 그리고 허황옥의 오빠로 알려진 장유화상 등에 대한 연구가 보다 깊이 있게 진행돼 그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한국불교의 역사는 많은 부분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부처님 앞에서 열 가지 서원을 세우는 설법을 펼쳐 보인 후 부처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승만부인의 이야기를 다룬 『승만경』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알려진 야유타국에서 온 허황옥. 그녀가 이 땅에 불교를 전하고 불법의 융성을 서원한 승만부인의 화신이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앞으로도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전면적으로 부인할 근거도 뚜렷하지 않은 만큼, 허황옥의 실존은 물론 그녀가 한국불교 최초의 여성불자였음은 아직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허황옥 이후 역사적 기록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여성불자로는 아도의 어머니를 들 수 있다. 『수이전』과 『삼국유사』에는 기록상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아도의 부모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위나라 사신이었던 굴마(堀摩)와 고구려 여인 고도령(高道寧)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도는 16세에 중국에 건너가 아버지를 만나고 현장 화상의 제자가 되어 불법을 공부한 다음 어머니에게 돌아왔다. 이때 그의 어머니는 신라에 불법을 전파할 것을 권했고, 그로 인해 아도가 신라로 가게 됐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에 근거할 때 아도의 어머니 역시 우바이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고구려에서는 첫 번째 우바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 다른 여성, 모례의 누이동생 사 씨가 등장한다.

아도는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신라 미추왕 2년(263)에 계림에 왔으나 불교를 모르던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 하기 때문에 모례의 집에 숨어살다가 성국 공주의 병을 고친 인연으로 천경림에 조그만 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7년이 흐른 뒤 모록의 누이동생 사씨가 귀의해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나 모록의 누이동생 사 씨는 수계 등의 문제 때문에 오늘날 최초의 비구니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불교에 귀의했던 것만큼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녀는 신라 최초의 우바이가 되는 셈이다.

이후 신라에서는 법흥왕비와 진흥왕비가 잇달아 출가함으로써 왕실은 물론 귀족사회나 서민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출가하지 않은 재가불자들의 신앙도 깊어질 수 있었다. 재가불자들의 신앙심은 주로 재산의 헌납이나 헌공 등으로 나타나며, 대표적인 예가 원광이 점찰보를 시행할 때 어느 재가 여신도가 100결의 전답을 내놓은 일이다.

우바이들의 보시 사례는 사원건축은 물론 불상이나 범종의 조성에서도 엿보인다. 상원사 범종의 시납자로 기록된 체도리는 상류계급의 여성이었고, 황룡사종 시주자는 경덕왕의 왕비였다가 아이를 낳지 못해 폐비가 된 효정이왕 삼모부인이었다.

또 『삼국유사』 탑상편 ‘무장사미타전’조에서는 소성왕비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상을 조성한 내용이 남아 있고, 경문왕의 누이인 의장옹주는 경문왕 7년에 원찰인 현계산 안락사에 토지와 노비문서를 보시하기도 했다.

신라 첫 여성 불자는 사 씨

신라시대에는 귀족 출신이 아닌 가난한 서민 중에서도 불법을 따르며 신봉하는 우바이도 적지 않았다. 집안에 가장 귀한 것이라고는 노구솥(놋쇠나 구리로 만든 솥)밖에 없었음에도 이를 스님의 철물 시주 때 헌납한 진정모자가 있었고, 김대성의 어머니인 경조부인은 끼니를 잇기가 어려워 부잣집 부엌일을 하면서 받은 품삯으로 얻은 땅을 절에 시주하기도 했다.

신라시대에는 또 『승만경』이 전래되면서 상류층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여왕들의 이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 민성효 교무는 「한국여성불자의 위상과 역할」이라는 글을 통해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이며 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성여왕의 이름은 만(曼)”이라며 “만의 한자표기가 다르기는 하나 이는 승만()부인을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시대 우바이 신앙의 결정판은 욱면(郁面)이라고 할 수 있다. 욱면은 신라 경덕왕 재위(742∼765) 당시 강주(현재의 진주) 귀진(貴珍) 아간의 집에 살던 종이었다.
그녀는 주인을 모시고 절에 갔을 때 마당에 서서 염불을 했으나, 주인은 그녀가 직분에 어긋남을 미워해 늘 곡식 두 섬을 주어 하루저녁에 다 찧게 했다. 하지만 욱면은 항상 초저녁에 다 찧어놓고 절에 가서 염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뜰의 좌우에 긴 말뚝을 세워놓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매 놓고는 합장하며 좌우로 이를 흔들어 스스로를 경책하기까지 했다.

그때 하늘에서 ‘욱면 낭자는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라’는 소리가 들렸고, 스님들이 이 소리에 욱면을 법당에 들어가 예에 따라 정진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의 음악이 서쪽으로부터 들려오는가 싶더니 욱면이 몸을 솟구쳐 집 들보를 뚫고 나갔다. 이어 서쪽 교외로 가더니 해골을 버리고 부처의 몸으로 변해 연화대에 앉은 채 큰 광명을 내쏘면서 천천히 가버렸는데 음악소리는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삼국유사』「감통편」에 나타나는 욱면의 이야기는 노비신분 우바이의 염불수행을 통한 성불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채롭기까지 하다.

고려시대에도 시주 등과 관련한 우바이 기록이 남아 있다. 염경애(1100∼1146)는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위한 재를 올리러 절에 갈 때마다 많은 버선을 스님들에게 시주했고, 김칭의 처 양씨는 남편과 함께 인종 9년(1131) 천신사에 별전을 창건해 대장경 5천여 권을 만들어 봉안하고 미곡을 희사했으며 훗날 금탑사에서 사망했다.

노비 욱면은 염불로 성불

그리고 이보여의 처 이씨(1099∼1157)는 불경을 암송했으며 병이 들어 죽을 때는 몸을 씻어 정갈히 하고 부처의 이름을 불렀다. 이외에도 고려시대 여성불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기록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와 관련 학자들은 당시 인과응보설이나 삼세윤회설 등의 가르침이 널리 전해졌고, 이 때문에 스님들이 보시와 지계 등의 선업을 닦도록 권하면서 여성들 사이에 불교가 널리 전파될 수 있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왕실 여인들의 불교에 대한 열정으로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인수대비다. 인수대비는 성종 당시 불교를 옹호하는 언문교지를 내리면서 “역대 제왕이 불교를 배척하고 싶어도 끊지 못하는 것은 인심이 동요할 것을 걱정해서”라는 내용을 포함함으로써 비공식적으로나마 불교를 묵인하는 효과를 갖게 했다.

또 명종 때 문정대비는 불교를 정책적으로 중흥시키기 위해 승과를 부활하고 쇠퇴한 사찰을 복원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서산대사가 승과에 급제해 산중불교의 법맥을 이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 공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사료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 몇몇에 한정돼 있고, 이들 자료에서 여성에 관한 기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다. 그리고 그나마 여성들에 대한 기록도 왕실이나 귀족들 중심이이서, 평민이나 천민 출신의 우바이 관련 자료에 뚜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984호 [2009년 02월 02일 1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