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조계종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31. 불교가사(佛敎歌辭)

淸潭 2009. 2. 12. 10:35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31. 불교가사(佛敎歌辭)
고려 나옹화상이 지은 ‘서왕가’가 효시
기사등록일 [2009년 02월 10일 13:07 화요일]
 
사진 왼쪽 부터 서왕가 목판본, 서왕가 필사본, 해인사판 보권염불문본 서왕가 목판본, 회심가 필사본.

나도비록 이럴망정 이세상의 인재인데
무상함을 생각하니 모두가다 거짓일세
부모님이 끼친얼굴 죽은후에 속절없다
다시깊이 생각하야 세간사를 뿌리치고

부모님께 하직하고 바랑하나 짊어지고
청려장을 비껴들고 도량명산 찾아들어
선지식을 친견하고 천경만논 탐구하여
한마음을 밝힌뒤에 여섯도적 잡으리라.
(중략)
청학백학 앵무공작 금봉이며 청봉들은
하는것이 염불이고 맑은바람 건듯부니
염불소리 요요해라 슬프도다 우리들도
인간세상 나왔으니 염불말고 무얼하리.

고려시대 나옹화상(懶翁和尙·1320∼1376)이 지은 가사(歌辭) 서왕가(西往歌)의 시작과 끝 부분이다. 가사라고 하면 보통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송강 정철(1536∼1593)이 지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훈민가 정도를 떠올리게 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가사의 연원이 불교의 발원문에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사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이 바로 서왕가다. 서왕가가 발견되기 이전까지는 정극인의 상춘곡이 가사의 효시 작품으로 인정되었으나, 고려말 나옹이 지은 서왕가가 발견되면서 이 작품이 곧 가사의 효시가 되었고 현재 학계에서는 대부분 이를 인정하고 있다. 서왕가의 발견은 또한 가사의 발생이 불교의 발원문, 그리고 포교에서 왔을 것이라는 학설이 더욱 설득력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가사문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나옹화상 서왕가 필사본.

서왕가는 세상만사가 꿈과 같으니 세상의 즐거움만 탐해 거기에 빠져들지 말고 선지식을 친견해서 일심으로 염불하여 왕생하도록 노력하자고 권유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불교가사 연구 분야의 권위자인 임기중 동국대 명예교수는 『불교가사 원전연구』에서 “서왕가는 『보권염불문』에 「나옹화샹셔왕가」 및 「나옹화샹셔왕가라」라는 제목으로 전하고 있으며, 나옹화상의 명성에 의지해 널리 유통됐다”고 설명했다. 서왕가는 또 목판본인 『신편보권문』과 『권왕문』, 필사본인 『보권념불문』, 『감응편』, 『악부』에 수록돼 있다. 서왕가는 전해지는 유형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보권염불문』에는 95구, 『신편보권문』에는 74구, 『조선가요집성』에는 147구가 전해지고 있다.

가사는 불교 발원문에서 유래

불교의 진리를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지은 노래가 불교가사인 만큼, 서왕가 역시 불교사상을 가득 담고 있다. 정토사상을 담고 있는 서왕가의 첫 도입부분은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면서 입산수도의 뜻을 보이는 내용이다. 이어 정욕과 탐욕의 어리석음, 염불의 공덕, 극락세계의 즐거움을 차례로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염불을 권장하고 있다.
서왕가는 그 내용 중

부처님과 중생들은 그무엇이 다르던고
삼세제불 여래께선 이마음을 깨치시고
육도윤회 중생들은 이마음을 저버릴새
삼계내에 가고옴이 끊임없이 이어지네.

라는 대목에서 볼 수 있듯,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 불교의 교리나 수행에 관한 이야기를 쉬운 말로 풀이해서 상류층 신도뿐만 아니라 하층민들도 어렵지 않게 익히고 따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불교가사는 대부분 스님들이 지었다. 따라서 부처님의 덕을 기리고 불교 수행에 힘쓰도록 권장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주로 사찰에서 판각한 목판본과 세간에 전하는 필사본 및 포교용 책자 속에 들어 있는 게 일반적이다.
최초의 불교가사인 나옹화상의 서왕가 역시 구전되어 오다가 숙종 30년(1704)에 판각된 『보권염불문(普勸念佛文)』이라는 문헌에 처음 정착했다.

스님들이 자신들의 수행보다는 대중들이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고 귀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지었다고 할 수 있는 불교가사는 이후 조선전기에 별다른 발전을 보이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인 발전상을 보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산대사의 회심곡을 비롯해 침굉의 귀산곡, 태평곡, 청학동가 등이 꼽히고 있다. 또한 많은 작품들이 『시용향악보』,『악학궤범』,『악장가사』 등에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서산대사(1520∼1604)의 회심곡(回心曲)은 유교적 사상이 불교 사상과 융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참상이 생각나는 대목도 서술되었다. 회심곡은 특히 전란 후유증을 앓고 있던 신도들의 신앙심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널리 애송되었다.

이어 귀산곡(歸山曲), 태평곡(太平曲), 청학동가(靑鶴洞歌)를 남긴 침굉화상(1616∼1684)은 윤선도와 친분이 있었던 인물로 자신의 주관적 심정을 작품에 담아 냈다. 불교가사를 지은 작자들 중에는 드물게 유학자도 있었으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김창흡(1653∼1722)이다. 김창흡은 22구의 짧은 염불가(念佛歌)를 지었으며, 매 2구마다 ‘나무아미타불’후렴을 붙이기도 했다.

이후 조선 정조 19년(1795)에는 지형(智瑩) 스님이 지은 전설인과곡(奠設因果曲)과 수선곡(修善曲) 등이 목판본으로 간행되었고, 19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동화화상(東化和尙)이 1200구에 달하는 장편가사 권왕가(勸往歌)를 짓기도 했다. 불교가사는 근현대에 이르러 일제시대 초기까지도 활발하게 만들어졌으며 대표적으로 성우선사의 참선곡, 학명선사의 원적가, 이응섭의 석존일대가, 권상로의 열반가 등이 있다.

불교가사를 새긴 목판.

사찰에서 판각해 널리 유통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불교가사는 사찰에서 필사하거나 판각해 유통시킴으로서 사찰이 그 유통의 핵심 역할을 했다. 현재 전해지는 목판본 등을 근거로 선암사, 해인사, 동화사, 범어사, 선운사, 예천 용문사, 수도사, 불암사 등이 불교가사를 판각해 유통시킨 주요 사찰이다.

시기별로는 선암사에서 1695년 귀산곡, 태평곡, 청학동가를 판각한 것을 비롯해 예천 용문사에서 1704년 나옹화샹셔왕가라와 인과문을 판각했고, 수도사에서는 1741년 나옹화상셔왕가와 인과문을, 동화사에서는 1764년 나옹화샹셔왕가라, 인과문, 회심가고를 각각 판각했다. 또 묘향산 용문사는 1765년 나옹화샹셔왕가라와 회심가고를, 해인사는 1776년 나옹화샹셔왕가라, 강월존자서왕가, 청허존자회심가, 인과문, 회심가고를 판각했으며 선운사는 1787년 나옹화샹셔왕가라, 인과문, 회심가고를 판각했다. 이어 불암사는 1795년 수선곡, 전설인과곡, 권선곡, 참선곡 등을 판각했다. 그리고 근현대 들어 범어사가 1908년에 서왕가, 자책가, 권왕가를 판각해 널리 유통시켰다.
사찰에서의 판각활동은 불교가사의 대중성 확보에 크게 기여하면서 결국 불교 대중포교의 중요한 한 방편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나옹화상의 서왕가가 최초의 불교가사로 인정받고 있다고 해서 서왕가 이전에 불교가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원효대사발심수행가, 보조국사계초심학인가, 야운당자경가 등도 가사체 형식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콕 집어서 ‘이것이 최초의 가사작품’이라고 하기에 부족한 점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 관련해 임기중 교수는 “불교가사는 불교전래시기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서왕가는 그 이전의 가사체가 이어지고 발전되면서 가사의 형식을 띈 새 작품이지, 꼭 서왕가가 최초의 가사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면서 “그렇다고 해서 서왕가가 최초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기는 쉽지 않으나, (서왕가)전후의 이야기가 연결되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실제 『삼국유사』「의해편」에서는 원효 스님과 관련해 “광대들이 갖고 노는 큰 박을 얻은 성사는 『화엄경』의 ‘일체 무애인은 한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란 문구에서 따서 이름지어 무애라 하며 이내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는 컸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사체 발생은 원효시대 주장도

그리고 원효 스님이 지은 발심수행장을 가사화한 노래가 전국 여러 사찰에서 오랫동안 발심수행가로 구전되다가 문헌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작품에서도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시방삼세 부처님이 적멸궁에 장엄하신
오랜세월 욕심버려 고생하신 까닭이요
모든세상 중생들이 화택문에 윤회함은
옛날부터 욕심조차 쾌락즐긴 탓이로다.

이는 시적으로 다듬어져 전승되고 있는 발심수행가의 한 부분이며, 의상대사의 일승발원문을 가사화한 의상화상일승발원가와 고려 보조국사의 계초심학인문을 가사화한 보조국사계초심학인가, 야운선사의 자경문을 가사화한 야운당자경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다만 이것이 어느 때에 불교가사로 바뀌었는가가 과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확실한 것 한가지는 가사화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그 이전에도 분명하게 가사체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 구체적 단서를 찾을 경우 불교가사의 공인 역사 역시 서왕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며, 가사체의 발생은 신라의 원효 스님이나 의상 스님의 발원문이 나타나는 7세기경으로 봐야 할 것이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85호 [2009년 02월 10일 1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