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조계종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27. 율원(律院)

淸潭 2009. 1. 17. 17:55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27. 율원(律院)
자장 율사가 646년 세운 통도사 금강계단이 기원
기사등록일 [2009년 01월 05일 18:32 월요일]
 
<율전을 연구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강설하고 실천하는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율원이라고 한다. 사진은 현존 율원중 가장 오래된 해인사 율원. >

불자들은 보통 계율(戒律)을 스님들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이자 해서는 안될 일을 규정한 금지조항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볼 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불교는 자각의 종교, 즉 스스로 깨닫는 종교이기 때문에 자각을 추구하면서 거기에 맞는 행위를 하고자 하는 주체적 생활방식을 바로 계(戒)라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성격을 지닌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 또는 교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으로 정한 것이 율(律)이라고 할 수 있다. 계와 율은 이렇게 각각 자율과 타율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계를 계율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는 자율적인 것이기에 지키지 않아도 그에 따른 벌칙이 없으나, 율은 타율적 요소가 들어 있어서 위반할 때는 벌칙이 가해지게 된다.

하지만 결국은 율이 계의 세부조항과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므로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계율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성격이 구별되는 계와 율은 과거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 공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공동체 생활에서 서로 지켜야 할 규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계율의 어원적 의미를 보면 계(戒)는 실라(sila)라는 원어를 번역했고, 율은 비나야(vinaya)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율은 한역하면서 조복(調伏)으로 옮기기도 했고, 원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서 비나야(毘奈耶)라고도 쓴다. 그리고 이후에 율이나 비나야는 경·율·론 삼장에서 율장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율장은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흔히 계율이라고 부르는 계의 조목들을 해석하고 설명한 것을 포함해 교단 운영규정까지를 모두 포함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율장이 언제부터 성립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대를 유추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결집을 통해 율장이 성립됐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부처님 입멸 후 왕사성 칠엽굴에서 승단의 대표를 소집해 열었던 첫 결집에서 골격을 갖춘 율장이 근간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율장에 적시된 율전을 연구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강설하고 실천하는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이 시대에 율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국불교에서 율원은 율사를 양성하는 불교 전문교육기관이며 일반적으로 총림의 사격을 갖춘 큰 사찰에 설치된다. 또 율원의 책임자를 율주라 부르고 있고, 보통은 강원에서 대교과를 마친 비구승 중에 특별히 계율연구에 뜻을 둔 스님들이 입학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사미율의요로(沙彌律儀要露)』, 『범망경』, 『사분율』 등을 배우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의 자장율사가 통도사에 세운 금강계단이 우리나라 최초의 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승려들의 기강을 세우고 올바른 율법을 가르쳐 구족계를 받게 하려는 목적에서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율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이를 최초의 율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율원의 변천과 관련해 특별히 전하는 문헌이 없는 점은 율원의 형성과정이나 역사를 추적하기에 한계로 남는다.

문헌상 율원 변천사 추적 한계

우리나라에서 율원에 대한 표기를 언제 어디서 누가 쓰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계율과 관련한 기록을 통해 일정정도의 추정이 가능하다.

우선 기록을 통해 한국불교에 가장 먼저 전해진 경전 중에 율장이 포함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동진 효무제 태원 9년(384) 말에 담시가 경장(經藏)과 율장(律藏)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고구려 땅)에 들어와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다.

이는 곧 계율과 승가 운영규정 등을 망라한 율장이 고구려에 전해졌음을 증명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곳에선가는 이 율장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스님들이 있었을 것이므로, 오늘날 표현에 따른 율원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어 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백제 관련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비구니들이 584년에 정식으로 계를 받기 위해 백제로 유학을 왔다는 기록이나, 관륵이 일본에서 승단의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초대 승정에 임명됐다는 대목은 백제의 계율이 성성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특히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에서 언급한 겸익에 대한 기록은 백제에서 계율이 존중됐고, 이에 따라 율원이 존재했을 것으로 유추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능화가 밝힌 「미륵불광사사적기」에 따르면 겸익은 백제 성왕대인 526년에 바닷길을 통해 중인도로 들어가 그곳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에서 5년 동안 불교학을 배운 후 율장의 범어 원본을 갖고 귀국했다.

그리고 나라 안 고승 28명을 초청해 함께 온 인도 승려 배달다 삼장과 더불어 흥륜사에서 율장을 번역했다. 율장을 번역한 이외에 더 이상의 서술이 없어 이른바 율원의 기능을 했는가 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륵불광사사적기」의 출처는 물론 겸익의 행적을 역사적 사실로 확고하게 증명할 수 있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될 경우 한국불교사의 일면이 바뀔 수 있는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율과 관련한 기록은 역시 신라 자장율사에 이르러 풍성해진다.

자장은 중국 유학 중 꿈속에서 문수보살로부터 게송을 들었으나 뜻을 알지 못하다가 다음날 한 인도 스님의 뜻풀이를 듣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친다. 자장이 “일체의 법이 자성이 없는 줄 알라. 이와 같이 법성을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는 게송의 뜻을 듣고 바로 깨치자 인도 스님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하면서 “경주의 서남쪽 백여리에 있는 늪을 메우고 절을 지어 금강계단을 세워,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승니를 여법하게 득도시키면 불법이 크게 흥하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역사적 사실관계에 다소의 허구가 가미됐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이로 인해 자장은 문수보살로부터 부처님의 심지법문을 듣고 도를 깨친 후 그 계법을 전수한 셈이 된다. 이에 자장은 643년 귀국한 후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강의한 한편 646년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설립해 대국통의 자격으로 승려가 되는 모든 사람은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수계하도록 했다.

당나라 도선율사가 지은 『속고승전』에서는 이 대목을 “자장이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강의하니 7일 7야에 하늘에서 감로를 내리고 상서로운 구름이 강당을 덮으니(…) 회향하는 날 계를 받으려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렸다. 이로 인해 생활을 혁신하는 사람이 열 집에 아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겸익 - 백제 흥륜사 연구 필요

이때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워 승려가 되는 모든 사람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수계하도록 한 것을 놓고 율원의 성립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 않다. 한국불교 율맥이 자장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에 있어서는 별다른 이론이 없으나, 율원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큼은 견해차이가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율장연구소’를 개원한 파계사 영산율원 율주 철우 스님은 통도사 금강계단의 역사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통도사 금강계단 설립을 율원의 성립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철우 스님은 또 “역사 속에 등장하는 율원에 대한 기록을 찾고 있으나, 아직 찾지 못했다”며 율원에 대한 기록을 찾는데 한계가 있음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자장이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세운 사실에 근거해 한국불교 율원의 발원지를 통도사로 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율원, 아니 율맥에 대한 기록은 자장 이후 단절되었다가 조선 중기 이후에 이어지는 율맥이 통도사를 비롯해 해인사, 백양사, 범어사 등을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어 이들 사찰에 율원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근대 들어 본격적으로 율원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 것은 6·25 전쟁 직후다. 이전에 율사들에 대한 기록을 포함해 율장을 연구하고 실천했던 내용이 있기는 하나, 율원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쓰인 것은 6·25전쟁 직후 자운 스님이 통도사에서 율장을 공부하면서부터다.
이때 지관, 일우, 석암, 일타 스님 등 5∼6명이 함께 공부하면서 천화율원(天華律院)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천화율원은 이후 자운 스님이 수행처를 옮기는 과정에서 곳곳에 붙여졌고, 해인사에도 천화율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천화율원은 계율 전문교육기관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천화율원 이후 현재 존재하는 율원 중 가장 먼저 생긴 곳은 해인사 율원이다. 해인사 율원은 1977년 당시 방장 성철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의 후원으로 일타 스님을 율주로해서 총림 내에 공식적으로 설립한 최초의 율원이다. 해인율원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율원 설립 이전인 1962년부터 자자와 포살을 발의하고 진행해왔다는 점이 꼽힌다.

그리고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 율원인 봉녕사 금강율원이 1999년 문을 열었다. 이는 한국 비구니계의 위상을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된 동시에 세계에서도 처음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기록으로 남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존 최고는 해인사 율원

출가를 위해서는 율사로부터 계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자장율사 이후 계맥이 전해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조선 중기 이전까지의 계맥이나 율원에 대한 역사적 실체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편 부처님은 열반에 이르러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고 했다. 따라서 계는 불법의 근원이 되고 있으며, 한국불교 계맥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자장율사는 “하루를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계를 어기고 부귀영화를 따르지 않겠다”며 계율의 지중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에 비춰 볼 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며 율원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981호 [2009년 01월 05일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