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1-3 제3주제:近代 禪宗의 復興과 鏡虛의 修禪結社

淸潭 2008. 2. 20. 21:03
 

제3주제:近代 禪宗의 復興과 鏡虛의 修禪結社


 

최병헌(서울대학교 교수)

一. 1910년대 佛敎界 狀況과 近代禪의 復興

  Ⅰ. 1910년대 佛敎界 狀況과 鏡虛 評價
  李能和는 1918년 간행한 ꡔ朝鮮佛敎通史ꡕ 下編(新文館 발행)에서 당시 한국 불교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朝鮮의 僧界를 보건대 혹은 戒律로, 혹은 講授로, 혹은 禪學으로, 혹은 事功으로, 혹은 異行으로써 각각 그 所長을 제멋대로 하여 이른바 禪敎兩宗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 30본산의 주지와 기타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禪講諸僧의 行履의 대략을 열거하고 그 종지를 조사하여 본 즉 經敎가 가장 많아서 念佛이나 誦經 誦呪를 일삼고 있으며, 參禪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ꡔ朝鮮佛敎通史ꡕ 下編 p. 951)

이능화는 위와 같이 禪宗이 敎宗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열세한 상황이었음을 말하고, 이어 본산의 주지를 비롯한 당시 중요한 승려 84인의 이름을 교종과 선종별로 나열하고 있다. 이능화의 분류 방식대로 그 숫자만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敎宗
(1) 以敎爲宗 戒律爲最        ;        5人
(2) 以敎爲宗 講學爲主        ;        25人
(3) 以敎爲宗 事功爲主        ;        3人
(4) 以敎爲宗        ;        19인
(5) 以敎爲宗 改革爲主        ;        2人
(6) 以敎爲宗 講說爲主        ;        14人       合計 ; 68人 ꡔ朝鮮佛敎通史ꡕ에서 敎宗으로 분류된 승려들의 명단을 李能和의 분류 방식대로 구분하여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以敎爲宗 戒律爲主 ; 金幻應(白羊寺前住持), 徐海曇(通度寺), 金瑞龍(玉果觀音寺), 李龍虛(安城靑龍寺), 朴虎隱(海印寺) 등 5인
  (2) 以敎爲宗 講學爲主 ; 徐震河(法住寺前住持), 崔震虛(長安寺, 特長於講涅槃經), 李震河(寶石寺), 李萬愚(孤雲寺住持), 金萬愚(麻谷寺住持), 金東宣(楡岾寺住持), 金錦溟(松廣寺), 金淸昊(仙巖寺住持), 金擎雲(仙巖寺, 臨濟宗管長), 金觀虛(表訓寺), 李雪翁(大乘寺), 李東隱(東鶴寺), 徐月華(釋王寺), 陳震應(華嚴寺), 朴漢永(龜巖寺, 改良佛敎以爲己任), 宋宗憲(白羊寺住持), 李雲坡(乾鳳寺住持), 羅晴湖(奉恩寺住持), 趙朗應(威鳳寺前住持), 郭法鏡(威鳳寺今住持), 金慧翁(金龍寺住持), 金萬應(祇林寺前住持), 金景雲(祇林寺今住持), 白翠雲(大興寺住持), 洪莆龍(月精寺住持) 등 25인
  (3) 以敎爲宗 事功爲主 ; 李晦光(海印寺住持), 姜大蓮(龍珠寺住持), 金九河(通度寺住持) 등 3인
  (4) 以敎爲宗 ; 金南坡(桐華寺住持), 朴晦應(銀海寺前住持), 池石潭(銀海寺今住持), 李雪月(松廣寺住持), 朴徹虛(寶石寺前住持), 李徹虛(寶石寺今住持), 洪月初(奉先寺住持), 鞠蓮月(傳燈寺住持), 姜九峰(貝葉寺住持), 崔香雲(永明寺前住持), 李晦明(永明寺前住持), 姜龍船(永明寺今住持), 韓漳浩(平原法興寺住持), 裵影海(普賢寺前住持), 朴普華(普賢寺今住持), 崔喚虛(釋王寺前住持), 高和應(釋王寺前住持), 姜淸月(釋王寺今住持), 田南溟(歸州寺住持) 등 19인
  (5) 以敎爲宗 改革爲主 ; 權相老(金龍寺), 韓龍雲(百潭寺) 등 2인
  (6) 以敎爲宗 講說爲主 ; 金寶雲(乾鳳寺), 張石霜(法住寺), 金鍾來(龜巖寺), 白鶴明(道甲寺), 白初月(靈源寺), 金包光(靈源寺), 金一雲(楡岾寺), 金河山(甲寺), 金玩海(乾鳳寺), 李袖鯨(大安寺), 金浩鵬(松廣寺), 尹古鏡(通度寺), 吳翠菴(松廣寺), 李雪耘(佛影寺) 등 14인
  *李能和는 30本寺住持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의 승려들의 명단을 열거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黃州 成佛寺住持 申湖山만이 누락되었다.

2. 禪宗
(1) 以禪爲宗        ;        14人
(2) 以禪爲宗 苦行爲最        ;        2人         合計 ; 16人
                                                   (ꡔ朝鮮佛敎通史ꡕ 下編 pp. 951~961)

  이능화는 승려들을 분야 별로 나열한 뒤에 교종과 선종의 승려수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 상술한 것에 말미암아 諸方의 禪敎의 승려수를 비교하여 보면 30본산의 전후 주지 50여인 가운데 선종에 속하는 자는 불과 3,4인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교종에 속한다. 만약 조선의 모든 승려 7,000인을 들어서 말하면 10중 8,9는 모두 교종에 소속되며, 禪도 아니고 敎도 아닌 사람이 실은 다수를 점하고 있다.” (ꡔ朝鮮佛敎通史ꡕ 下編 p. 962)

  우리는 이능화의 증언을 통하여 근대 선종이 쇠퇴한 상황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러한 상황은 이때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조선왕조 초기에 고려시대 이래의 여러 종파를 통합하여 禪敎兩宗이라고 칭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禪宗으로의 단일화였다. 특히 西山대사 이후에는 그 계통의 선종만이 가까스로 그 명맥을 유지하여 이어져 왔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禪的 수행의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講學이나 念佛과 혼합됨으로써 선종은 形骸만 남고 실지 내용에서는 外禪內敎의 상황이 되어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876년 개항이 되자 일본불교의 각 종파가 경쟁적으로 진출하여 와서 한국불교를 장악하려고 함으로써 또한번의 변질을 겪지않을 수 없었다. 일본불교의 침투 상황을 이능화는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묘사하였다.

“그 처음에 당하여 조선승려는 그 宗旨에 있어서 莫適所從하여 淨土宗을 칭하여도 또한 一言이 없으며, 臨濟宗에 부속되어도 또한 스스로 앉아서 보고만 있으며,  眞宗에 귀의하여도 또한 많이 그림자처럼 좇고 있으며, 曹洞宗과 締結하여도 또한 그 운동에 맡기었다. 그런즉 淨土宗이라 칭호하고, 眞宗에 귀의하고, 圓宗을 설립하고, 曹洞宗과 체결하고, 臨濟宗에 부속되어 혹은 隨聲附和하고 혹은 同事運動하니 요컨대 세력에 빌붙어 의지하려하지 않음이 없다.”(ꡔ朝鮮佛敎通史ꡕ 下編 pp. 936~938)

  이러한 불교계의 상황에 대해서는 당시 젊은 엘리트 승려로서 직접 목격하고 있던 權相老도 그 실정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先是에 國境을 開放함으로써 日本 各宗僧侶가 稍稍히 朝鮮에 渡來하여 布敎의 運動을 開始하였다. (日蓮宗, 大谷派本願寺, 本派本願寺, 淨土宗 등의 진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다음에) 일본의 각종파가 相繼而來하여 韓人 信徒를 募集하니, 於是에 國政의 壓勒과 俗尙의 擯斥을 受하여 巖穴로써 一區樂界를 삼고 潛居抱道하여 忘世逍遙하던 朝鮮僧侶는 耳目이 眩煌하고 感想이 刺戟될 뿐만 아니라 寺院의 財産을 間或學校에 移屬하는 일이 있음으로 僧侶界의 一邊은 風潮를 吸引하고, 一邊은 習慣을 固執하고, 或은 勢力을 希慕하여 外護도 依賴코자 하며, 或은 憤慨를 抱하여 自立으로 維持코자 하는 자도 있으나, 그 大部分은 內地何宗과 連絡하여 敎勢를 引上코자 하는 까닭으로 淨土宗 井上玄眞과 互相締結하여 硏究會를 설립하고 京鄕 寺院이 一時紛囂하더니 丁未政變을 因하여 廢止되니라.”(ꡔ朝鮮佛敎略史ꡕ, 1917, 新文館, pp.249~251)

  그런데 日帝의 韓國 倂合 뒤인 1911년 朝鮮總督府에 의한 寺刹令 頒布와 三十本山制의 시행으로 일본의 각 불교종파에 의한 한국 불교의 장악 기도는 좌절됨으로써 더 이상의 일본의 특정 불교종파에 예속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朝鮮總督府의 불교정책은 또다른 차원에서 한국 불교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불교 전통의 단절을 가져옴으로써 활구참선하는 禪 수행의 풍토는 매우 미약해져서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 우리나라 禪宗의 맥이 거의 끊어져가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앞에서 이능화가 지적한 바와 같이 禪宗의 절대적인 열세 상태에서 30본산의 주지들은 3,4인을 제외하고는 전부 교종에 속하는 승려들이었다. 그런데 교종에 속하는 승려들도 교학 연구보다는 일제에 영합함으로써 세속적인 이익 추구에 몰두하는 事判僧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불행한 불교계 풍토 속에서 禪風을 진작시키고 전통적인 禪宗을 부흥시키는데 온몸을 내던져서 일생을 살다간 鏡虛가 좋게 평가될 리가 없었다. 이능화는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禪宗의 劣勢를 언급한 부분에 이어 鏡虛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었다.

“近世 禪界에 鏡虛和尙이란 자가 있었는데, 처음에 洪州의 天藏菴에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여 松廣寺, 仙巖寺, 靑巖寺, 海印寺, 通度寺, 梵魚寺 및 楓岳의 여러 사찰을 편력하면서 제법 禪風을 드날렸다. 세상에 전하는 이른바 <鏡虛悟道歌>는 장편이어서 전부를 옮길 수는 없는데, 그 맨끝 四句에 이르기를,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吾家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경허화상은 辯才가 있으며, 그가 설한 바 法은 비록 옛날의 祖師라 할지라도 이를 넘어섬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저 제멋대로일 뿐 아무런 구속을 받음이 없어 淫行과 殺生을 범하는 일까지도 개의하지 않았다. 세상의 禪流가 다투어 서로 이것을 본받아서 심지어는 飮酒와 食肉이 菩提에 장애되지 않으며, 行盜와 行淫도 般若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唱言하고, 이를 大乘禪이라고 말하며 수행이 없는 허물을 엄폐가장하고자 하는 것을 도도히 모두 옳다고 하니, 이러한 弊風은 실로 鏡虛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叢林은 이를 지목하여 魔說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 경허선사의 悟處와 見處를 감히 안다고 하지는 못하겠으나, 만약 佛經과 禪書로써 이를 논하다면 옳지 않은 것 같다. 일찍이 ꡔ指月錄ꡕ을 보았더니, 大慧宗杲선사가 眞如화상에게 말하기를, ‘般若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塵勢에 隨順함은 결정코 魔에 攝持된 것이다. 또한 順境 중을 좇음에 있어 道理를 강변하여 煩惱가 곧 菩提요, 無明이 곧 大智라고하여 步步에 有를 행하며, 口口에 空을 담론함은 스스로가 業力에 속박되었음을 자책하지 아니하는 것일 뿐 남으로 하여금 因果를 撥無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걸핏하면 飮酒 肉食이 菩提와 無礙하고 行盜 行淫이 般若와 無妨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流는 邪魔와 惡毒이 그 心腑에 들었으되, 도무지 깨달아 알지 못함이니, 塵勞를 벗어나고자 하면서 마치 기름을 뿌려 불을 구하고자 함과 같음이라. 가히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씀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鏡虛의 이른바 大乘禪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叢林에서 배척되는 것이 옳다하겠다. 또한 ꡔ楞嚴經ꡕ을 보니 이르되, ‘저 定 중의 諸善男子가 色陰이 쓰러지고 受陰이 명백함을 보고 밝게 깨달은 중에서 虛明한 성품을 그 가운데서 홀연히 永滅한 데로 들어가서 因果를 撥無하여 一向히 空에 들어가서 空한 마음이 앞에 나타나며, 내지 길이 斷滅한다는 견해를 내게 되리라. 깨달으면 허물이 없으려니와 聖證함이 아니니, 만일 聖解가 아니면 空魔가 그 心腑에 들어가서 持戒함을 훼방하여 이를 小乘이라 이름하고, 菩薩은 空을 깨달았거니 무슨 持戒와 犯戒가 있으리요 하면서 항상 信心 있는 檀越에 대하여 술먹고 고기먹고 淫穢를 행하더라도 魔力을 인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섭취하여 의심하거나 疑謗을 생하지 않게 한다.’ 라고 한 말씀도 또한 가히 鏡虛의 大乘禪을 照破할 수 있는 것이다. 汾陽善昭, 顚濟和尙 및 晛子和尙도 혹은 食肉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別論할 일이요, 이를 끌어다가 禪法을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ꡔ朝鮮佛敎通史ꡕ 下編 pp. 962~963)

  이상에서 이능화의 경허에 대한 비판 내용을 상당히 길게 인용하였는데, 이능화의 비판이 더 없이 극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능화가 다른 승려들에 대한 평가와 달리 경허에 대하여 위와 같이 특별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를 비난한 것은 역설적으로 경허의 행적과 불교에 대하여 그만큼 주목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나아가 경허의 불교에 대한 주목은 이능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문제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전 불교계에서도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고 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朝鮮總督府의 불교정책을 찬양하면서 협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文字에만 매달리는 것으로 평생 일삼고 있었던 그의 성향으로 보아 禪의 부흥을 염원하였던 경허의 불교의 의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입장에 섰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敎宗으로 분류되는 事判僧들이 本寺의 주지가 되어 주도하던 당시의 불교계 상황에서 경허의 불교가 魔說로 비난받게 된 것도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경허에 대한 비난은 이능화의 개인적인 비판임과 동시에 이능화가 ‘世人’ 또는 ‘叢林’이라 한 바와 같은 당대의 일반 사람들, 또는 불교계의 일반적인 부정적 평가였던 것이다.

  Ⅱ. 近代禪의 復興과 鏡虛의 歷史的 位置
  이능화는 앞서 제시한 바와 같이 ꡔ朝鮮佛敎通史ꡕ에서 열거한 승려들의 명단 가운데서 禪宗으로 분류된 16인의 이름을 들고 있는데, 근대 선종사에서의 경허의 역사적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禪僧으로 분류된 인물들의 역할과 성격, 그리고 그들과 경허와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능화가 거명한 선승들의 명단을 기록된 순서대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李南坡(靈源寺, 今俗離山 法住寺住持)        金應海
吳惺月(梵魚寺住持)        金南泉
張善明(麻谷寺前住持)        申慧月
尹靈峰(楡岾寺)        朴性月
方漢巖        梁混虛  
白龍城        宋滿空
金霽山        朱舞風
康道峯        田水月
(ꡔ朝鮮佛敎通史ꡕ 下編 pp. 961~962)

  위에 열거된 승려들은 1918년 당시 불교계에서 대표적인 선승으로 지목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주목되는 사실은 본산의 주지를 역임한 적이 있거나 현재 주지에 재임 중인 사람은 모두 3인뿐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3인 외에 金南泉이 1900년 전후하여 海印寺 주지를 역인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는 30본산제가 시행되기 이전이었다. 이를 통하여 당시 禪宗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다음에 주목되는 것은 鏡虛의 嗣法弟子이거나 경허와 관련된 인물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다. 方漢巖, 申慧月, 宋滿空, 田水月 등 4인은 鏡虛의 嗣法弟子들이며, 그리고 金霽山과 金南泉도 鏡虛 문하에서 禪學을 수업한 적이 있는 제자들이었으며, 그밖에 白龍城은 田水月에게 參學하고 慧月과 滿空과 함께 禪機를 硏磨한 法友였다. 이로 보아 이능화는 鏡虛의 禪을 魔說이라고 비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경허가 새로 부활시킨 선맥의 흐름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상황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梵魚寺, 海印寺와 鏡虛의 관계를 고려할 때 주목되는 인물은 吳惺月과 金南泉이다. 1900년 전후에 吳惺月은 梵魚寺의 주지였고, 金南泉은 海印寺의 주지였는데, 鏡虛의 修禪結社는 이들과의 인연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鏡虛는 見性한 이후 20여년을 湖西지방에서 머물다가 1898년에 비로소 梵魚寺의 초청을 받아 嶺南지방으로 가서 이후 1904년까지 梵魚寺와 海印寺를 중심무대로 하여 禪院을 개설하고, 修禪社를 창건하는 등의 활약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禪僧으로 분류된 吳惺月과 金南泉 등 두 사찰 주지의 협력으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에 열거한 명단 가운데 주목할 점은 이들이 뒷날 1921년 이후 일제의 불교정책과 친일화된 불교계에 반대하여 일어난 禪學院運動의 주역을 담당하였던 사실이다. 경허의 사법제자인 申慧月, 宋滿空, 方漢巖을 비롯하여 金南泉, 吳惺月, 白龍城, 康道峯 등이 그 중심인물이었다. 이로써 일제시대 禪學院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禪의 復興과 振作은 경허의 禪風에 연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2년 6월 禪學院을 중심으로 하고 전국의 선원들이 동참한 가운데 『鏡虛集』을 처음으로 발간하게 되는데, 그 발간취지서에서 경허를 추앙하여 조선 불교계의 禪宗 復興과 玄風 宣揚에 막대한 공로가 있으며, 지금 조선의 首座로서 경허의 가르침에 은혜받지 않은 사람이 없음을 언급함으로써 근대 禪의 復興과 振作이 경허에서 비롯되었음을 천명하고 있었다.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 ꡔ鏡虛集ꡕ의 발간 사업은 경허의 선사상을 禪宗 復興運動의 이념적 주축으로 삼고자 하는 취지를 나타내 주는 것이며, 동시에 근대 선종사에서의 鏡虛의 위치를 확고하게 정립시켜 준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二. 鏡虛의 悟道와 無碍行의 意味

  Ⅰ. 鏡虛의 悟道와 法統觀
  鏡虛惺牛는 한국 근대의 禪을 부흥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의외로 불명확한 점이 없지않다. 경허의 행적에 관한 자료로는 1931년 3월에 그의 사법제자인 漢巖이 찬술한 「先師鏡虛和尙行狀」과 1942년 6월 ꡔ鏡虛集ꡕ을 발간할 때에 萬海가 찬술한 ꡔ鏡虛禪師略譜ꡕ등 2종이 전하는데, 두 자료 사이에는 우선 出生年부터 차이가 난다. 즉 漢巖 찬술의 「行狀」에는 丁巳年(1857) 4월 24일 출생, 壬子年(1912) 4월 25일 입적, 세수 56, 법납 48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萬海 찬술의 「略譜」에는 己酉年(1849) 8월 24일 출생, 壬子年(1912) 4월 25일 입적, 세수 64세, 법납 56세로 되어 있어 출생년에서 8년의 차이가 난다. 金知見 교수는 鏡虛 자신이 光武 4년(1900)에 찬술한 ꡔ瑞龍和尙行狀ꡕ에서 그때 年光 55임을 스스로 밝혀있는 점에 근거하여 그의 출생년이 丙午年(1846)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金知見, 鏡虛禪師散考, 禪武學術論集 5, 1995) 그러나 「瑞龍和尙行狀」은 鏡虛가 1900년 겨울에 찬술을 부탁받았으나, 실제 탈고된 것은 1903년으로 추정됨으로써 萬海 찬술의 「略譜」에서의 출생년과 일치한다.
그런데 두 자료 가운데 萬海 찬술의 「略譜」는 ꡔ鏡虛集ꡕ의 책머리에 실린 것으로서 당시 德崇門中의 전승으로 보이므로 본고에서는 잠정적으로 이 자료에 따라 1849년 출생, 1912년 입적의 연대설을 취하기로 한다.
  鏡虛는 9세 때에 廣州 淸溪寺에서 桂虛大師 아래에서 祝髮 受戒하고, 경허의 출가 동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전해주는 자료가 없으나, 全州 子東里에서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그 아버지 宋斗玉이 사망하였고, 그의 형 한 사람도 그보다 앞서 출가하였던 사실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아버지를 일찍 여윈 형제는 차례로 가난을 견디지 못하여 집을 떠나 절로 보내어진 듯 하다. 가난 때문에 이렇게 어린 나이로 절에 맡기어 양육되어지는 경우가 조선시대 말기 출가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4세 떼에 한 士人으로부터 글을 익히었다. 그리고 얼마 아니되어 은사 계허의 추천으로 鷄龍山 東鶴寺의 李萬化講伯(법명은 普善)에게 나아가 一代時敎를 수료하고 유교와 노장사상까지도 섭렵하였다. 그리하여 23세 때에 그 곳의 講師가 되기에 이르렀다. 鏡虛가 뒷날 지은 詩文들을 보면 불교경전에 박통하였으며, 유교나 노장사상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경허가 禪에 들어오기 이전, 東鶴寺에서 講師로서 명성이 높았었다는 한암의 「행장」과 만해의 「약보」의 기록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31세 때 경전의 文字 해석(지식이나 이론)으로는 生死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捨敎入禪, 話頭의 참구에 들어가 3개월 만에 大悟하였다. 때는 高宗 16년(1879) 11월 보름께였다. 경허는 그 다음해 봄에 그의 출가한 俗家의 형 泰虛(性圓)가 주지로 있던 洪州 鷰巖山 天藏寺로 옮겨 悟後의 保任을 끝내고, 6월 주장자를 꺾어 던지며「悟道歌」를 읊은 뒤 傳燈의 淵源을 밝히었다. 漢巖의 「先師鏡虛和尙行狀」과 萬海의 「略譜」에 의하면, 경허는 24세 때부터 東鶴寺에서 開講하여 명성이 있었는데, 31세 때 여름 은사인 桂虛를 찾아가던 도중 모진 風雨를 만나 民家에 머물러 피하려 하였으나, 악성 호열자가 만연되어 屍身이 널려 있는 참혹한 상황에서 生死의 절박함을 깨닫고 비로소 發心, 東鶴寺에 되돌아와 學人을 해산하여 講院을 철폐하고 용맹정진에 들어가 靈雲志勤선사의 ‘나귀의 일도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 라는 화두를 참구하던 중 3개월 만인 11월 보름께  한 사미승의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爲牛則無穿鼻孔處)’ 라는 말에 豁然 大悟하였다고 하며, 다음 해 봄에 湖西 鷰巖山 天藏寺로 옮겨 保任에 들어가 一大事를 마치고 6월 주장자를 꺾어 던지며 「悟道歌」를 읊은 뒤 傳燈 淵源을 밝히었다고 한다.
경허는 「悟道歌」에서,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衣鉢을 누가 전하랴, 의발을 누가 전하랴.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네. 봄산에 꽃이 활짝 피고 새가 노래하며, 가을 밤에 달이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다. 정녕 이러한 때에 無生의 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일곡가를 아는 사람 없음이어, 때가 말세더냐, 나의 운명이던가, 또한 어찌하랴. (중략) 슬프다. 어이하리! 대저 의발을 누가 전하리?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가 전하리.”
(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 春山花笑鳥歌, 秋夜月白風淸. 正恁麽時, 幾唱無生一曲歌? 一曲歌, 無人識, 時耶, 命耶. 且奈何. (중략) 嗚乎, 已矣. 夫衣鉢誰傳? 四顧無人. 四顧無人, 衣鉢誰傳?)

  경허는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가 전하랴.” 라고 하는 말을 처음과 끝부분에서 거듭 거듭 외치고 있었는데, 당시의 禪門에서 師友와 淵源이 이미 끊어져서 서로 인증하여 전해 받을 사람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었다. ‘衣鉢誰傳’의 구절을 흔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로 옮기고 있다. (金眞惺 역, ꡔ鏡虛法語ꡕ, 人物硏究所, 1981 ; 明正 편역, ꡔ鏡虛集ꡕ, 통도사 극락선원, 1990) 그런데 金浩星교수는 漢巖의 「先師鏡虛和尙行狀」에서 “四顧無人 네 구를 첫머리에서 시작하고 끝머리에서도 맺어놓은 것은 이는 師友와 淵源이 이미 끊어져서 印證하여 서로 받을 곳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 라고 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해받으랴’ 로 옮기었다. (김호성, 결사의 근대적 전개 양상, 보조사상 제8집, 1995) 필자도 鏡虛가 悟道 이후 고심 끝에 禪의 道統 淵源을 정리하여 밝히고 있음을 보아 그의 悟道를 인가해 줄 스승이 없음을 탄식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한다.
우리는 鏡虛의 「悟道歌」에서 깨달은 순간 그에게 밀어닦친 진한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데, 경허가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그의 悟道를 인가해 줄 스승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게 敎學을 가르쳐준 萬化강백은 講師였을 뿐이지 悟道를 인가해줄 수 있는 禪門의 祖師는 아니었다. 漢巖의 ꡔ鏡虛和尙行狀ꡕ에 의하면, 경허가 靈雲선사의 들어 보인 바,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 는 화두를 참구한지 3개월이 되는 1879년 11월 보름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 는 말을 듣고 활연 대오하였다고 하는데, 깨달음 직후의 행적에 관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드디어 方丈室에 높이 누워 사람들의 출입을 상관하지 않았다. 萬化강사가 들어와서 보아도 또한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강사가 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고?’ 하니 ‘일이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고 대답하자, 강사가 말없이 나가고 말았다.”
  위 사실을 통해 볼 때, 경허의 깨달은 경지를 보이는 행동을 萬化강사는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는 바, 그는 경허에게 敎學을 가르쳐준 講師일 뿐 깨달음을 인가해줄 수 있는 傳法師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경허는 다음해 속가의 형이 일찍이 승려가 되어 머물고 있던 洪州 天藏寺로 옮겨 悟後保任을 끝내고 고심 끝에 道統의 연원을 정리하여 밝힐 때에, 이미 입적한 龍巖장로의 법을 이은 것으로 하고 萬化강사는 受業師로 삼도록 함으로써 萬化강사를 禪의 法統에서 제외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당시 불교계의 禪門은 적막했던 것이다. 이른바 선가의 法統은 이미 단절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뒤이어 고심 끝에 자신의 道統 淵源을 정리하여 밝히고 있었는데, 한암의 「행장」에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일찍이 대중에게 이르기를, ‘대저 祖宗 문하의 心法을 전수함에 근본과 증거가 있으니, 가히 어지럽힐 수 없다. 예전에 黃蘗은 百丈이 馬祖의 喝을 하던 것을 들어 말함을 듣고 도를 깨달아 백장의 법을 이었고, 興化는 大覺의 방망이 아래서 臨濟의 방망이 맞던 소식을 깨달아 임제가 입멸한 뒤이지만 임제의 법을 이었다. 우리 동국에는 碧溪가 중국에 들어가서 總統에게 법을 얻어와서 멀리 龜谷을 계승하였고, 震黙은 부처님의 화신인 성인으로서 西山이 입멸한 뒤에 법을 이었으니, 그 스승과 제자가 서로 계승함이 이와 같이 엄밀한 것은 대개 마음으로써 마음을 인가하여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증하기 때문이다. 오호라! 성현이 오신지 오래되어 그 도가 이미 퇴폐되었으나, 간혹 本色衲子가 일어나 殺活의 화살을 쏘아서 한개나 반개의 성인을 얻기 때문에 은밀히 正宗을 부지하니, 암흑 속에서 등불을 얻음과 같고 죽음에서 다시 삶과 같도다. 내가 비록 도가 충실하지 못하고 자성을 점검하지 못하였으나, 일생동안 지향한 바는 기어이 한 도리의 진리를 분명히 밝히는데 있었다. 이제 늙었는지라, 뒷날 나의 제자는 마땅히 나로써 龍巖長老에게 법을 이어 그 道統의 淵源을 정리하고, 萬化강사로써 나의 受業師를 삼음이 옳도다.’라 하였다.”

여기에서 無師自悟한 경허가 굳이 이미 입적한 龍巖慧彦(1783~1841)의 嗣法을 자처하고 실제 교학을 배운 萬化講伯을 受業師로 삼아 禪의 法統에서 제외한 것은 이미 끊어진 宗乘의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새로이 禪燈을 밝히겠다는 禪의 부흥자로서의 사명의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德崇門中에서는 龍巖慧彦 - 永月奉律 - 萬化普善 - 鏡虛惺牛로 법맥이 이어졌다고 하는데, 永月과 萬化는 禪僧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허의 법통은 2대를 거슬러 올라가 곧바로 龍巖으로 잇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 師資의 관계가 아니면서 龍巖으로부터의 嗣法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중국선종사에서의 百丈과 黃蘗, 臨濟와 興化, 그리고 조선시대 선종사에서의 龜谷과 碧溪, 西山과 震黙 등의 직접적인 師弟 관계가 아니면서 嗣法한 것으로 전해지는 사례를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교학을 배우다가 捨敎入禪하여 無師自悟한 경허가 자신의 법맥을 龍巖을 계승한 것으로 道統의 淵源을 정리하라는 당부를 토대로 하여 그의 제자인 漢巖은 「行狀」에서 경허의 法統을 다음과 같이 들어 보이고 있다.

“이제 (화상의) 遺敎를 받들어 법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간 즉, 화상은 龍巖慧彦을 잇고, 혜언은 錦虛法沾을 잇고, 법첨은 栗峰靑杲를 잇고, 청고는 靑峰巨崖를 잇고, 거애는 虎巖體淨을 이었으며, 淸虛는 鞭羊에게 전하고, 편양은 楓潭에게 전하고, 풍담은 月潭에게 전하고, 월담은 喚醒에게 전하니, 경허화상은 청허에게 12세 손이 되고 환성에게 7세손이 된다.”
한암의 「行狀」에서 제시된 법계 내용을 정리해 보면, 淸虛 - 鞭羊 - 楓潭 - 月潭 - 喚醒 - 虎巖 - 靑峰 - 栗峰 - 錦虛 - 龍巖 - 鏡虛와 같이 되어 경허는 淸虛休靜의 11세손, 喚醒志安의 7세손이 된다. 萬海의 「略譜」에서는 “32세 때에 홍주 천장암에 머물면서 하루는 대중에게 설법할 적에 특히 전등의 연원을 밝히는데, 스승의 법은 용암화상에게 이었으니, 淸虛의 12세손이 되며, 喚醒의 7세손이 된다.”라 하여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德崇門中에서 전해지는 법계는 龍巖과 鏡虛 사이에 永月奉律과 萬化普善 2세를 더 넣음으로써 경허는 淸虛의 13세, 喚醒의 9세 법손이 되어 있다. (性陀, 鏡虛의 禪思想, 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 韓國佛敎思想史, 1975, p.1108 참조)
여기에서 「行狀」에서의 대수 계산에서 1대의 착오가 있었음이 발견되는데, 이 법계 자체의 사실성 여부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鏡虛의 法脈 系譜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
  李逢春, 「朝鮮後期 禪門의 法統考」, ꡔ韓國佛敎學ꡕ 22, 1997, pp. 68~91.
다만 이 자료에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鏡虛가 無師自悟한 직후 이미 단절된 禪의 傳統을 부활시키겠다는 강렬한 念願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러한 염원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조선시대 선의 전통을 존중하는 法系를 제시하였던 점이다. 鏡虛가 직법 찬술한 다른 사람의 행장으로는 「取隱和尙行狀」(1900년 찬술)과 「瑞龍和尙行狀」(1903년 찬술?) 등 두 편이 전하는데, 두 곳에서 모두 法脈을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즉 「取隱和尙行狀」에서는 “取隱화상(1816-1899)은 超隱義有를 이었고, 초은은 淵月以俊을 이었다. 그리고 浮休는 碧菴에 전하고, 벽암은 翠微에 전하고, 취미는 栢庵에 전하고, 백암은 無用에 전하고, 무용은 影海에 전하고, 영해는 楓巖에 전하고, 풍암은 碧潭에 전하고, 벽담은 詠月에 전하고, 영월은 樂坡에 전하고, 낙파는 淵月에게 전하였으니, 화상은 浮休의 12세손이 되고, 太古의 17세손이 된다. 부처님의 교화가 점점 쇠잔하여 正法眼藏이 땅에 묻혔는데, 화상이 능히 定慧를 오로지 닦아서 무너진 기강을 크게 정돈하였으니, 이 세상에 있어서 가히 불 속의 연꽃이라고 하겠도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瑞龍和尙行狀」에서도, “그 법맥을 더듬으면 晦菴은 寒菴에 전하고, 한암은 秋波에 전하고, 추파는 鏡菴에 전하고, 경암은 中菴에 전하고, 중암은 騎羊에게 전하였다. 그리고 晦菴은 葆光의 법을 잇고, 보광은 慕雲의 법을 잇고, 모운은 碧菴의 법을 잇고, 벽암은 浮휴의 법을 잇고, 부휴는 芙蓉의 법을 이었으니, 화상은 芙蓉의 11세손이 된다.“라고 하여 경허가 法脈을 대단히 중시하였으며, 그 법맥을 정리하는 방법도 전연 일치함을 알 수 있다. 특히 瑞龍화상(1814~1891)은 騎羊聖典의 법을 잇기 이전에 경허가 嗣法師로 내세운 龍巖에게서 수업한 적이 있기 때문에 경허와 무관한 인물이 아니었음이 주목된다.
따라서 필자는 법계 자체의 사실성 여부보다는 경허의 역사의식을 나타내 주는 자료로써 그의 法統觀의 의의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친다. 학계 일각에서는 경허가 법통을 중시한 것을 들어 그의 불교 성격이 복고적인 것으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그의 법통설의 역사적 의의는 조선시대 이전의 선으로의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師資相承의 宗乘의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이미 꺼져버린 禪燈을 새로 밝히겠다는 투철한 역사의식의 소산이었다는데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자 한다. 경허가 법통을 중시함과 함께 역대의 祖師들을 대단히 존숭하고 있었는데, 그가 海印寺와 梵魚寺에 머무는 동안에 쓴 다음의 影贊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大覺登階金峯堂尙文之眞」 「東谷堂大禪師之眞」 「錦雨和尙影贊」 「茵峯和尙影贊」 「大淵和尙影贊」 「歸庵和尙影贊」 「古庵和尙影贊」.


Ⅱ. 鏡虛의 失意의 生活과 無碍行의 意味
  鏡虛는 1879년 大悟하고, 다음해 悟後 保任을 끝내면서 「悟道歌」를 읊은 뒤 傳燈 淵源을 밝힌 다음, 이후 20년간을 湖西지방에서 보내게 되는데, 그 기간의 활동 상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자료가 없다. 다만 漢巖의 「行狀」과 萬海의 「略譜」에서 경허의 행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한 내용만을 전해줄 뿐이다.

“오랫 동안 湖西에서 20여 년을 주석하시니, 서산의 開心寺와 浮石寺, 洪州의 天藏寺는 모두 계시면서 도를 연마한 곳이시다.” (行狀)
“그 뒤로 20여년간 洪州의 天藏菴과 瑞山의 開心寺와 浮石寺 등지로 왕래하며 때로는 마음을 묵상하고, 때로는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면서 禪風을 크게 떨쳤다.” (略譜)

위 두 자료 가운데 특히 「行狀」에서는 湖西지방에서의 20년간의 행적은 간단히 언급하는데 그친 반면, 그 뒤 1899년 湖西지방을 떠나 海印寺로 옮긴 이후 5년간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어 대조된다. 이러한 서술 상의 차이가 나게 된 것은 경허의 활동상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湖西지방에서의 기간은 失意의 침체기였던 데 비하여 海印寺를 중심으로 생활한 시기는 得意의 활동기라고 평가될 수 있는 것과 관계된다. 漢巖이 「先師鏡虛和尙行狀」에서 경허의 湖西지방에서의 20년간의 행적을 간략히 언급한 이유는 그때의 자료가 부족했던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고, 경허의 파격적인 행적에 대한 평가가 주저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암은 경허의 행장을 연대순으로 기술하는 가운데서는 호서지방에서의 행적을 간략히 언급하는데 그치었으나, 「行狀」의 말미에서 경허의 無碍한 행적을 附記하면서 “대개 행장이란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고, 虛僞를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의 학인들이 화상의 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화상의 行履를 배우는 것은 불가하리니, 사람들이 믿어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상의 法化를 배움은 옳으나, 화상의 行履를 배움은 옳지 못하다 한 것이니, 이는 다만 법을 간택하는 눈을 갖추지 못하고 먼저 그 行履의 걸림없는 것만 본받는 자를 꾸짖음이며, 또한 유위의 현상에 집착하여 마음 근원을 밝게 사무치지 못하는 자를 꾸짖음이로다. 만약 법을 간택할 수 있는 바른 눈을 갖추어서 마음 근원을 밝게 사무친 즉 행리가 자연히 참되어서 行住坐臥가 항상 청정하리니, 어찌 겉모습에 현혹되어 미워하고 사랑하며 자타의 견해를 일으키겠는가?” 라고 하여 경허의 행적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한암이 염려하는 말을 거듭 남긴 것을 보아 한암의 고민을 짐작할 수 있다.
경허 자신이 1900년에 찬술한 「取隱和尙行狀」에서 “내가 湖西에 묻혀서 그렁저렁 게으르게 지낸지 어언 20여년이었다.” 고 호서지방에서의 생활을 언급한 것을 보면, 그 자신도 失意의 시기로 회고하고 있었음을 확인알 수 있는 바, 萬海의 「略譜」에서 “禪風을 크게 떨쳤다.” 고 한 평가와는 크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湖西지방에서의 경허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추적이 불가능한 형편인데, 추측컨대 그의 할동 무대는 홍주의 天藏庵과 서산의 開心寺, 浮石寺를 중심으로 한 호서지방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의 특기할 사항으로는 宋滿空과 申慧月 全水月 등의 사법제자를 얻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大悟한 직후 師資相承의 宗乘이 단절된 것을 걱정하면서 이미 끊어진 선의 전통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念願을 나타내고 있었던 경허로서는 그의 실현방법으로써 修禪結社와 같은 수행형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20여년 뒤인 1899년에 해인사에서 작성된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에서는 깨달은 직후 경허가 가졌던 의욕과, 마침내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였던 당시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내가 지나간 己卯年(1879) 겨울에 계룡산 東鶴寺 조사당에 있으면서 祖師活口를 참구하다가 홀연히 뜻을 얻은 곳이 있었다.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공부할 생각이 있었으나, 그때에 유행병이 그치지 않았고, 마음의 의지도 또한 굳세지 못하여 드디어 이럭저럭 마음 속에만 쌓아두고 어촌과 주막집에 방랑하며, 또한 그윽한 시냇물과 깊은 숲을 찾아 쉬며 마음 놓고 잊어버렸다. 그 뒤에 소요사태가 잇달아 일어났으며, 세상 일이 어지러웠으므로 몸조차 감출 겨를도 없었거니 어찌 다른 데 생각이 미쳤겠는가. 그럭저럭 20여년이 흘렀다.”

경허가 뒷날 수선결사를 하면서 자술한 위 인용문의 내용에 의하면 동지와 함께 공부할 뜻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捨敎入禪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준 호열자라고 하는 유행병이 아직 그치지 않은 상태에서 동지를 모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던 것 같다. ꡔ承政院日記ꡕ ꡔ日省錄ꡕ ꡔ高宗實錄ꡕ ꡔ增補文獻備考ꡕ 등의 사서에는 高宗 16년(1879)에 6~7월경 호열자(콜레라)가 일본으로부터 전파되어 전국적으로 크게 번져 많은 사망자를 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개항 이후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열강의 각축과 1882년의 壬午軍亂, 1884년의 甲申政變, 1894년의 東學農民蜂起와 甲午改革, 1895년의 閔妃弑害와 義兵抗爭 등 연이은 정치 사회적 혼란은 그 자신의 말대로 몸조차 감출 겨를이 없게 함으로써 結社 같은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외세의 침입과 정치적인 혼란은 불교계에도 영향을 미쳐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에 의한 개항과 함께 일본의 각 불교종파들이 경쟁적으로 진출하여 왔는데, 이들의 침투는 정치적인 침략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그들 종파 가운데 가장 앞서 진출한 淨土眞宗 大谷派는 甲申政變에 깊숙히 개입하였으며, 뒤이어 진출한 淨土眞宗 本派는 청일전쟁 중 일본군의 지원에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日蓮宗의 승려 佐野前勵는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 불교계의 친일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曹洞宗의 승려인 武田範之는 일본인에 의한 閔妃弑害의 사건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뒷날 일제의 한국병합과정에서 맹활약을 하였고, 이어 한국 병합이 달성되자 한국 불교를 총체적으로 장악하려는 책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불교의 침투에 따라 한국불교는 그 영향을 받아 변질되어 갔으며 상당수의 사찰과 승려들은 그들에게 예속되어 갔다. 이에 일제의 統監府는 1906년 朝鮮寺院管理規則을 반포하여 일본불교의 한국사찰 장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전국의 주요 사찰들이 앞을 다투어 일본 각 종파사찰의 別院이 되고자 통감부에 이른바 「加末狀」을 제출하는 말기적 증세를 보이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외세의 침입과 이로 인한 정치 사회적 혼란, 그리고 일본불교의 침투와 그로 인해 변질되는 한국 불교계의 상황에 대하여 경허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관하여는 직접적인 자료가 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함이 쓴 「행장」에는 경허의 의식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언급이 없지 않다.

“대개 행장이란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고, 虛僞로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화상의 悟道와 敎化因緣은 실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만약 그 行履를 논할 것 같으면 장신 거구에 志氣는 果强하고, 음성은 종소리와 같아 無碍辯을 갖추었고, 八風을 대함에 산과 같이 부동해서 행할 만한 때에는 행하고, 그쳐야 할 때에는 그쳐서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음식을 자유로이 하고 聲色에 구애받지 않아서 호호탕탕하게 유희하여 사람들의 의심과 비방을 초래하였으니, 이는 광대한 마음으로 不二門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초탈 방광함이 이와 같은 것은 저 李通玄장자의 宗道者 무리와 같아서인가, 아니면 시대를 만나지 못한 것을 분개하여 몸을 하열한 곳에 감추어서 낮은 것으로써 스스로를 기르고 道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삼은 까닭인가. 鴻鵠이 아니면 홍곡의 뜻을 알기 어렵나니 크게 깨달은 경지가 아니면 어찌 능히 小節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한암의 「행장」에 의하면 경허는 湖西지방에 머물던 시절에 飮酒 淫行의 無碍한 행동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의심과 비방을 초래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이러한 행적은 한암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대상과 불교계에 대한 극심한 실망감과 분노심에서 표출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으며, 나아가 그러한 모순에 찬 현실에 대하여 어쩌지 못하는 자신에게 더욱 실망하고 분노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암은 경허의 거리낌 없는 행적을 기록하면서 그 「행장」의 끝부분에서, “나중 사람들이 만일 경허의 마음을 따른다면 옳지만, 만일 경허의 행동의 자국을 따른다면 옳지않다.” 고 하여 후학들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고 있음을 보아 그러한 사실을 기록하는 문제에 고민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43년에 한암을 비롯한 경허의 문도들에 의하여 간행된 ꡔ鏡虛集ꡕ에서 한암의 「행장」 대신에 萬海의 「略譜」로 대체하였던 사정도 분명하지 않으나 경허의 행적에 대한 언급의 문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암의 「행장」에서는 위의 인용문에 이어 경허가 거리낌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을 떼에 읊은 시 1수를 인용하고 있는데, 술과 여자로 달래려고 하는 그의 괴로운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술이 빛을 발하고 여자 또한 그러해,
탐진 번뇌로 세월을 보내노라.
부처니 중생이니 내 알 바 아니니,
평생을 그저 취한 듯 미친 듯 보내려네.”
(酒或放光色復然 貪嗔煩惱送驢年 佛與衆生吾不識 平生宜作醉狂僧) 湖西지방에서 비슷한 시기에 읊은 것으로 추정되는 다음의 詩句들도 경허의 울분을 애써 달래려는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부처니 중생이니 내 알 바 아니니, 평생을 그저 취한 듯 미친 듯 보내려네.
   때로는 일 없이 한가로이 바라보니, 먼 산은 구름 밖에 층층이 푸르네.“
   (佛與衆生吾不識 年來宜作醉狂僧 有時無事閑眺望 遠山雲外碧層層)

   “사람의 마음은 맹호와 같아, 독하고 악하기가 하늘을 뚫고 난다.
   학과 함께 구름 저편을 가며, 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돌가갈거나.“
   (人心如猛虎 毒惡徹天飛 伴鶴隨雲外 此身孰與歸)


그밖에 ꡔ鏡虛集ꡕ에는 경허가 호서지방에 머물 때에 읊은 五言絶句 가운데 그의 時流에 대한 절망감과 분노의 심정을 나타내주는 작품들이 실려 있는데, 詩가 어떤 형식의 글보다 작자의 심정을 솔직하게 표현해 주는 장르라는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흰 구름아 너는 왜, 날마다 산으로 날아가니,
세상이 그리도 추하거든, 나를 따라 이 길로 들어오렴.”
(白雲因底事 日日向山飛 似嬚塵世惡 隨我箇中歸)

“시비와 명리의 길에,  정신 없이 미쳐 날뛰네.
소위 영웅이라고 잘난체 하는 놈도, 그 길엔 꼼작 없이 왔다 갔다 하네.”
(是非名利路 心識狂紛飛 所稱英雄漢 彷徨未定歸)

“인심이 사납기 맹호와 같아, 악독한 기운이 하늘까지 퍼진다.
학은 구름과 벗하여 하늘 밖으로 가는데, 이 몸은 누구와 함께 하랴.”
(人心如猛虎 毒惡徹天飛 伴鶴隨雲外 此身孰與歸)

경허가 瑞山의 浮石寺에서 읊은 다음의 五言絶句는 좁은 세계에서 허덕이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어지러이 날으는 초파리가 술독 안을 천지로 아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평생을 고집도 필연도 없이 만사를 인연에 붙였나니,
연암에 머무르는 도사가 부석에서 여름을 보낸다.
고기잡이 노래가 저문 앞산에 둥근 달이 떠오르나니,
높은 다락 집에 올라 앉아 있음에 술독에 생긴 초파리가 한쪽을 어지러이 난다.”
(平生無因必 萬事付因緣 燕頷留道士 浮石送炎天 漁歌何處晩 山月向人圓來坐高樓上 醯鷄亂一邊)
이상에서 인용한 시들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앞서 경허가 깨달은 직후에 읊은 「悟道頌」이나 悟後 保任을 끝내고 읊은 「悟道歌」의 게송에서 보여준 평화롭고 여유로운 그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눈에 흰 달빛 가득하네.
높은 산 흐르는 물 소나무 아래 여울지고,
긴긴 밤 맑은 하늘 아래서 무엇을 할꼬.”
(心外無法 滿目雪月 高岑流水 長松下 永夜淸霄 何所爲眞) 경허가 東鶴寺에서 悟道한 직후 계룡산의 봄을 노래한 다음의 五言絶句도 그의 평화로운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밝고 화창한 태평스러운 봄에, 점점 더 온갖 풀잎이 새롭다.
   계룡산 위에 비가 내려, 어젯밤 먼지를 함초롬히 적셨네.”
   (熙熙太平春 看看百草新 鷄龍山上雨 昨夜浥輕塵)


“홀연히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 듣고,
문득 삼천대천 세계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달 연암산 아랫 길에,
들 사람 일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鷰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大悟한 직후 宗乘의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禪燈을 다시 밝히겠다는 강한 의욕을 보이던 경허는 당시의 時流에 실망과 분노의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마침내 산을 내려와 길거리에 나서게 되었다. 한암의 「행장」에서는 경허가 天藏庵에 주석하던 중,

“한번 앉으면 여러 해를 찰라를 지나는 것과 같이 하더니, 어느날 아침에 一絶을 읊어 노래하기를 ‘속세와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 봄이 오니 성마다 꽃피지 않은 곳 없네. 누군가 만일 惺牛의 일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 속 劫外의 노래라고.(世與靑山何者是 春城無處不開花 傍人若問惺牛事 石女心中劫外歌)’ 라 하고, 드디어 주장자를 꺾어 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훌훌 털고 산을 나서서 형편 따라 교화를 베푸는데, 상투적인데서 벗어나고 격식을 두지 않았다. 혹은 시중에서 어슬렁 거리며 속인들과 섞여 지내며, 혹은 한가로이 松亭에 누워 초연히 풍월을 읊조리니, 그 초탈한 취향은 사람들이 능히 헤아릴 수 없었다.”

라 하여 無碍한 행적을 나타내게 된 저간의 사정을 전하여 주고 있다. 그런데 경허는 길거리에 나서 거리낌 없는 행적을 보이면서도 京城의 땅은 밟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평생 그것을 지키고 있었음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안주하시던 곳에서는 밥은 겨우 기운 차릴 수 있을 정도로 드시고, 하루종일 문을 걸어 잠그고 침묵하여 말이 적으며,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누가 큰 도시로 나아가서 교화하기를 권하면, 이르기를 ‘나에게 서원이 있는데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시었으니, 그 탁월하고 특출함이 대개 이러하였다.”

경허가 스스로 경성 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시기에 대해서는 한암의 「행장」에 분명한 언급이 없는데, 1895년의 승려의 도성출입금지의 해제조치와 무관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경허는 일본승려의 주선으로 해제된 조치를 반기지 않았으며, 나아가 도성출입 금지 조치가 해제되었다고 환호하는 당시 불교계의 時流에 대하여 실망과 분노를 느켰던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그는 평생 한번도 경성 땅을 밟은 적이 없었으며, 말년에는 마침내 불교계를 완전히 떠나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당시 불교계에 대한 극도의 실망과 분노의 감정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본다.

三. 鏡虛의 修禪結社와 그 趣旨

Ⅰ. 鏡虛의 得意의 生活과 修禪結社
  湖西 지방에서 20년간 울분과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경허에게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 준 것은 1899년 梵魚寺와 海印寺에서의 초청이었다. 이 두 사찰에는 吳惺月과 金南泉이 각각 주지직에 있었는데, 이들은 李能和의 ꡔ朝鮮佛敎通史ꡕ에서 禪僧으로 분류된 인물들로서 뒷날 李晦光의 圓宗에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또한 禪學院 운동의 주역을 담당하였던 인물들이었다. 경허는 이것을 계기로 하여 범어사와 해인사로 옮기어 1904년까지 5년간 머물게 되는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경허의 일생 가운데 가장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한 得意의 시기였다. 경허는 이 기간에 海印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사찰에 禪院을 설치하고 修禪社를 창립하는 등 그의 일생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었는데, 한암의 「행장」과 鏡虛 자신의 글들에 의하면 1899년~1904년 사이 경허가 머물렀거나, 찾았던 사찰들은 海印寺와 梵魚寺를 비롯하여 通度寺, 松廣寺, 華嚴寺, 泉隱寺, 泰安寺, 實相寺, 德裕山 松溪庵 등 嶺南 湖南 지역의 중요한 사찰들이 망라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 바, 불과 5년 미만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경허의 활동의 폭이 대단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간에 남긴 경허의 글들을 보면, 그는 1899년 가을 해인사에서 수선사를 창립하고, 이어 다음해인 1900년에는 호남 지역의 여러 사찰을 찾아 선풍을 일으키는데 진력하였으며, 그리고 1902년부터는 범어사에서 수선결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다가 1903년 해인사로 돌아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그의 행적이나 글에서는 湖西지방에서와 같은 방탕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서 새로 만나 사법제자가 된 漢巖의 「행장」에서는 경허의 이 시기의 활동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었다.

“己亥年(1899) 가을에 영남 가야산 海印寺로 옮기시니, 때는 高宗 光武 3년이라, 勅旨가 있어 藏經을 印出하고 또한 修禪社를 건립하여 마음 닦는 학자를 거주하게 하니, 대중들이 모두 화상을 추대하여 宗主로 모셨다. 법좌에 올라 擧揚함에 본분을 바로 보이고 白拈의 수단을 사용하여 살활의 기틀을 털치니, 가위 금강보검이요 사자의 위엄이라, 듣는 자가 모두 견해가 끊어지고 집착이 사라져서 말끔하기가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은 듯하였다.”

이어 「행장」에서는 해인사에서의 結制와 解制 때의 경허의 法語 내용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선의 부흥에 경허의 영향이 대단히 컸었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었다.

“靈鷲山 通度寺와 金井山의 梵魚寺, 호남의 華嚴寺, 松廣寺는 모두 화상께서 잠시 머무시던 곳이다. 이로부터 禪院을 사방에서 다투어 개설하고 발심한 납자 또한 감화를 입어 구름 일듯하니, 계시는 동안 부처님 광명을 빛내고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심이 이와 같이 융성한 때가 없었다. 임인년(1902) 가을 화상이 범어사 金剛庵에 주석할 때 읍내 동쪽에 있는 摩訶寺에 羅漢 改粉佛事가 있어서 화상을 청하여 증명법사로 모시거늘 밤이 저물어서 절 입구에 다달으니, 길이 어두워서 걷기가 어려웠다. 마침 그 절 주지스님이 잠시 앉아 조는데 어떤 노스님이 말하기를, ‘큰 스님이 오시니 급히 나가 영접하라.’ 하였다. 주지스님이 꿈을 깨고 나서 횃불을 들고 동구 아래로 내려가 보니 과연 화상이 오시는지라, 비로소 나한의 현몽인 줄 알고 대중에게 말하니 다들 놀라며 전날 비방하고 불신하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참회하였다.” 만해의 「약보」에서는 이때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전하여 주고 있다.
   “51세 때에 합천 海印寺에 가니 때마침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修禪社를 설치하는 사업이 있었는데, 대중이 사를 추대하여 법주로 모셨다. 54세 때 동래 梵魚寺의 金剛庵과 摩訶寺의 羅漢改粉佛事 때 증명법사를 하였다.”


ꡔ鏡虛集ꡕ에 수록된 작품 또한 이 시기의 것이 주종을 이루는데, 약간의 詩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글들은 이 시기 5년간에 쓰여진 것들이다. 특히 禪院의 개설과 結社에 관한 序文과 記文은 모두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海印寺에 옮겨오기 이전의 20여 년 동안과 뒷날 해인사를 떠나 은거하게 되는 8년 동안에는 주로 불우한 자신의 심정을 읊은 詩만을 남기고 있었던 것과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경허는 해인사와 범어사의 시절에 서문과 기문 외에도 「取隱和尙行狀」 , 「瑞龍和尙行狀」 등의 행장을 지어 禪의 전통을 밝히려고 하였으며, 「參禪曲」, 「可歌可吟」, 「法門曲」, 「중 노릇하는 법」 등 대중 법문 「參禪曲」 같은 대중 법문을 국한문 혼용으로 쓴 글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18세기 경부터이다. 조선후기 대중신앙의 경전으로서 유행되었던 ꡔ佛說天地八陽神呪經ꡕ을 正祖 19년(1795)에 楊州의 佛巖寺에서 간행하면서 그 부록으로 국한 혼용문의  「參禪曲」과 순한글의 「勸禪曲」을 넣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智瑩이 지은 이 「參禪曲」의 내용은 경허의 것과 전연 다르지만 선을 대중화하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점은 공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허의 「參禪曲」등은 그 앞서부터 지어져 유행되어 오던 글들의 영향을 받아 찬술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경허는 1900년경 梵魚寺에서 禪學의 지침서로서 ꡔ禪門撮要ꡕ 2권을 편찬하여, 그 상권은 1907년 청도 雲門寺, 그리고 하권은 동래 梵魚寺에서 개간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러한 종류의 禪書는 경허 이전부터 편찬되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高宗 20년(1883) 蓮舫道人이 편찬하고 葆光居士 劉雲이 甘露社에서 개간한 ꡔ法海寶伐ꡕ이 그런 예이다. 이 ꡔ법해보벌ꡕ의 목록을 들면, 觀心論, 血脈論, 信心銘, 最上乘論, 傳心法要, 宛陵錄, 眞心直說, 修心訣, 禪警語 등으로서 뒷날의 ꡔ禪門撮要ꡕ의 내용에  그대로 이어지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내용이 추가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경허의 「正法眼藏序」에 의하면 경허가 染禪和에게 부촉하여 「書集語錄」 10편과 「拈頌」 가운데서 여러 導師들의 直截法門을 추려 모아 5권의 1책을 엮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 책이 경허의 찬술로 전하는 ꡔ禪門撮要ꡕ를 가리키는지는 불명이며, 별개의 책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을 한문 한글 혼용, 또는 순한글로 지어 선의 대중화에 노력하는 등 선의 부흥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경허의 글, 특히 序文과 記文 가운데 修禪結社에 관한 것만을 연대순으로 다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陜川伽倻山海印寺修禪社創建記 (1899년 9월 하순) 이번에 새로 발굴된 자료인 漢巖의 筆寫本 ꡔ鏡虛集ꡕ에는 ‘大韓光武’ 연호를 써서 찬술 연월과 鏡虛의 이름을 명기한 곳이 아홉 군데로 밝혀졌는데, 1943년의 禪學院板 ꡔ鏡虛集ꡕ에서는 전부 누락되어 있다. 이는 일제말기의 전쟁 중에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삭제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梵魚寺總攝芳啣錄序」(大韓光武四年更子四月上澣 湖西歸禿鏡虛惺牛謹識)는 새로 발굴되었는데, 이 글도 일제말기의 검열에서 제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釋明正 譯註, ꡔ鏡虛集ꡕ참조)

2. 海印寺修禪社芳啣引 (1899년 10월)
3.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1899년 11월 11일)
4. 華嚴寺上院庵復設禪室定完規文 (1900년 12월 상순)
5. 梵魚寺鷄鳴庵修禪社芳啣淸規 (1902년 10월 15일)
6. 梵魚寺鷄鳴庵創建記 (1903년 3월 하순)
7. 東萊郡金井山梵魚寺鷄鳴庵創設禪社記 (1903년 3월 하순)
8. 梵魚寺設禪社契誼序

  이로써 경허는 해인사, 범어사, 화엄사 등에서의 수선결사를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해인사와 범어사 등에서의 활동 가운데 선의 부흥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修禪結社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 들은 경허의 수선결사 관계의 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해인사에서 이루어진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이하 稧社文으로 약칭함)이었기 때문에 다음에는 이 「계사문」의 분석을 통하여 경허의 수선결사의 취지와 그 성격을 살펴보려고 한다. 경허의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의 분석을 통한 수선결사의 과정과 그 성격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는 별고에서 시도할 계획이다.


Ⅱ. 鏡虛의 修禪結社의 趣旨와 性格
  경허는 결사과정에 대하여 그 자신이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스스로 부처님 은혜가 막대함을 생각하고, 만분의 1이라도 갚고자 하여, 바랑을 걸머지고 합천 해인사를 찾았더니라. 마침 선방을 새로 건축하여 여러 禪德과 더불어 겨울 한철을 나게 되었다. 그래서 화롯가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옛사람들이 결사하여 수도하던 일이 언급되었다. 여러 선덕들은 다 잊었던 것을 문득 생각해 낸 듯 그 志願과 信心이 샘물 솟듯 산봉우리가 우뚝하듯 하여 서로 만남의 늦음을 한탄하면서 곧 結社 同盟 하기를 의논하고, 나를 추대하여 盟主를 삼았다. 내가 옛날의 所懷를 생각건대 佛恩이 막대한지라, 그 재주의 용렬함과 성품의 단정하지 못함과 도에 충실하지 못함을 돌아보지 않고, 한마디 사양함이 없이 허락하였다.”

이 글에서 경허의 결사에 대한 의욕이 상당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이어 그 결사의 취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 동맹의 약속이란 무엇인가? 같이 定慧를 닦고 같이 兜率天에 나며, 세세생생에 道伴이 되어서 필경 함께 正覺을 이루어, 도력이 먼저 성취되는 이가 있으면 따라 오지 못한 자를 이끌어 주기로 서약하며, 이러한 맹세를 어기지 말자는 것이다.”

이러한 결사의 취지는 知訥의 定慧結社의 그것과 비교된다. 지눌의 결사 취지는 “同結正因 同修定慧 同修行願 同生佛地 同證菩提”로 요약할 수 있는데, 경허의 “結同修定慧 同生兜率 同成佛果”에 그대로 대응되는 것이다. 定慧를 닦는 것을 주지로 하는 점은 전연 일치하며, 대중과 함께 하려는 취지도 공통적이다. 경허는 지눌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점이 여러 면에서 확인된다. 지눌의 저술을 중시하여 곳곳에서 인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며, 그 자신이 편집에 관여한 것으로 전하는 ꡔ禪門撮要ꡕ에서 지눌의 저술들을 편입한 것도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경허가,

“만일 견해가 같고, 행동을 같이 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僧俗 男女 老少 賢愚 貴賤을 묻지 않으며, 또한 親疎 離合 遠近 先後를 묻지 말고, 다 동참하기를 허락하기로 하였다.”

라고 하여 참여 대상에 대하여 대단히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음도 지눌의 그것과 공통적이다. 따라서 대중에 대한 관대한 포용적인 자세과 관련하여 下根機를 위한 漸修를 주장한 것도 지눌의 영향을 받았음이 경허가 自力修行을 강조한 데 이어 지눌의 글을 인용한 다음의 언급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下根機는 대번에 이루지는 못하기 때문에 옛사람이 이르되 ‘대순이 마침내 대가 되어 가지만, 당장 떼(筏)를 만들려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였으니, 하근기는 오래도록 익혀서야 필경에 증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경허와 지눌 사이에는 결사의 내용에서 차이점도 없지 않은데, 경허는 禪宗의 定慧結社에 ‘同生兜率’이라는 彌勒信仰을 가미한 것이었다. 경허는 결사문에서 玄奘 뿐만 아니라 無着 世親 과 같은 보살까지도 兜率上生을 발원했음을 상기시키고, 이어 稧社條規 제3조와 제20조에서 다시 되새기고 있다. 경허는 彌陀淨土에의 往生보다 兜率天에의 上生이 더 쉬운 것으로 주장하였는데, 당시 조선말기의 불교계에서 미륵신앙이 유행하였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新羅佛敎에서 성하게 논란되었던 ‘淨土․兜率 往生難易論’이 조선말기에 다시 제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경허는 唐의 玄奘, 新羅의 憬興 등 唯識學僧들의 주장을 계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高翊晉, 「鏡虛堂 惺牛의 兜率易生論과 그 時代的 意義」 ꡔ韓國彌勒思想硏究ꡕ, 韓國佛敎硏究院, 1987, pp. 407~415 참조.


“제3조 예로부터 부처를 이루고 보살을 작하려면, 반드시 行業을 갖춘 뒤라야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定과 慧를 닦으면서 兜率宮에 上生하여 다 함께 佛果를 이루게 하라.
제20조 淨土에 往生하기는 어렵고 兜率에 上生하기는 쉬운 것이니, 같은 欲界 안에 있어서 소리와 기운이 相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허는 兜率上生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極樂往生도 인정하여 궁극적으로는 양자를 회통시키는 방향을 취하고 있었다. 경허의 이러한 절충적인 태도는 신라의 元曉가 ꡔ遊心安樂道ꡕ에서 양자의 설을 折衷 和會하려고 했던 점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비록 그러하나 미타정토와 도솔천이 그 수행하는 사람마다 때에 따라서 원이 따름이 있으니, 어찌 도솔에 왕생하는 자로서 미타여래 친견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미타정토에 왕생하는 자로서 미륵존불을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지 않으리오. 마치 백옥과 황금이 각기 참보배며, 봄 난초와 가을 국화가 함께 맑은 향기를 풍김과 같으니, 優劣과 어렵고 쉬움으로써 옳으니, 그르니 하여, 너니 나니 하는 견해를 내어 다투지 말지어다.”

그러면서도 경허는 내심으로 彌陀淨土보다는 彌勒兜率을 選好하여 재삼 권유하고 있었다. 앞에 인용한 稧社規則 제20조에서 往生難易論을 문답체로 다시 再論하고 있었음을 보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勸修文에는 도솔상생은 어렵고, 정토왕생은 쉽다고 되어 있는데, 왜 여기서는 그 반대로 되어 있는가?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으니, 여러 經論과 古今 語錄을 살펴 볼 때, 정토와 도솔의 難易만이 아니고, 持呪 誦經 造佛 造塔 布施 供養 등도 각각 편벽되게 讚說되고 있다. 이것은 어떤 한 법이 가하고, 다른 법이 불가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때 그때 敎化의 主가 善巧方便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정토왕생을 바래야 할까, 도솔상생을 바래야 할까? 마땅히 도솔상생을 바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허의 결사의 중심적인 취지는 결코 정토신앙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淨土이건 兜率이건 그 자신이 진정으로 뜻하고 바라던 것은 禪의 定慧雙修이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경허는 稧社規則 제4조와 제5조에서 定慧를 닦지않고 도솔상생만을 원하는 자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한 능히 定慧를 닦을 수 있는 자는 도솔상생을 바라지 않아도 결사에의 참여를 허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20조에서는 兜率上生은 定慧에 得力치 못한 자를 위해 설치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定慧結社에 兜率上生을 곁들인 것은 定慧에 得力치 못한 자를 위해 설치한 것이니, 능히 得力한 자라면 隨意自在할 것이요, 어찌 願力을 빌어 來往함이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경허의 수선결사는 고려시대의 知訥의 定慧結社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자신의 稧社文에서의 知訥의 결사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통하여서도 그 영향이 확인된다. 따라서 고려후기 知訥이 定慧結社를 통하여 禪을 부흥시켰던 점과 조선말기 경허가 修禪結社를 통하여 禪을 부흥시키려고 하였던 점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四. 修禪結社의 中斷과 鏡虛의 隱居

  지눌과 경허의 결사는 그 정신면에서나 취지면에서 공통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으나, 그 전개과정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눌은 그의 말년 끝까지 結社를 계속하였으며, 그것을 다음대에 계승시키어 당시의 불교계를 정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나아가 불교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데 비하여 경허는 5년만에 중단하였으며, 그 자신은 불교계를 아주 떠나고 말았다. 지눌의 경우 당시 최고의 執權者로서 정치개혁을 추진하고 있던 崔瑀의 후원을 받으면서 修禪社가 불교계의 주류로 등장할 수 있었던데 비하여 경허의 경우는 일제의 침략과, 그리고 일제의 지원을 받으면서 불교계를 장악한 李晦光을 비롯한 親日的인 事判僧들과의 힘겨운 싸움이 修禪結社의 중단과 경허의 은퇴로 강요되었던 것라고 본다. 경허가 수선결사를 중단하고 불교계를 떠난 지 얼마 아니되어 海印寺에는 李晦光이 주지로 취임하여 친일적인 행동에 광분하게 되었음을 보아 경허가 은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적인 분위기와 불교계의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경허는 1903년 가을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던 도중 읊은 七言絶句에서 이미 은거할 뜻을 비치고 있었다.

“아는 것은 얕고 이름만 높으니 난세에 위태로워,
어느 곳에 이 한 몸 숨겨야 할지.
어촌과 술집이 어디엔들 없으랴만,
이름을 감추려 하니 더욱 드러날까 두렵구나.”
(識淺名高世危亂 不知何處可藏身 漁村酒肆豈無處 但恐匿名名益新)

  경허는 滿空과 漢巖 등의 제자들에게 법을 부촉한 다음, 마침내 1904년 오대산과 금강산을 거쳐 안변 釋王寺에 이르러 五百羅漢 改金佛事의 증명으로 참여한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불교계를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1912년 4월 25일 甲山 지방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甲山 江界 등지를 떠돌면서 스스로 호를 朴蘭洲라 하고 선비의 생활로 일관하였다. 漢巖의 ꡔ行狀ꡕ과 萬海의 ꡔ略譜ꡕ에서는 이때의 경허의 행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개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라 가히 그 뜻이 당신의 자취를 감추는데 있는 것이나 오직 명리를 구하는 세상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해인 甲辰年(1904) 봄에 五臺山으로 들어갔다가 金剛山으로 해서 安邊郡  釋王寺에 도착하니 때마침 五百羅漢 改粉佛事를 하면서 제방의 碩德들이 법회에 와서 증명법사로 참석하였는데, 화상이 증명단에 올라가 독특하고도 능란한 변재로 법을 설하니 대중들이 합장하고 희유하다고 감탄하였다. 불사를 회향한 뒤 자취를 감추니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로부터 십년이 지난 뒤 水月화상으로부터 禮山郡 定慧禪院으로 서신이 왔는데 그 내용인즉 화상께서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차림을 하고 甲山 江界 등지로 내왕하며 혹은 시골 서당에서 훈장도 하며, 혹은 시장 거리에서 술잔도 기울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壬子年(1912) 봄 갑산 웅이방 도하동 서재에서 入寂하였다고 하여 慧月과 滿空 두 사형이 곧 그 곳에 가서 난덕산으로 운구하여 다비를 하고 臨終偈頌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니, 곧 입멸하신 그 이듬해인 癸丑年(1913) 7월 25일이었다.”(행장)

“56세 때 오대산과 금강산을 거쳐서 안변 釋王寺에 이르러 五百羅漢 改粉佛事의 증명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로 세상을 피하고 이름을 숨기고자 甲山 江界 등지로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호를 蘭洲라 하고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관을 쓰고 바라문으로 변신하여 萬行頭陀로써 진흙에도 들고 물에도 들어가서 인연 따라 교화하였다.”(약보)

경허의 1904년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 불교계나 학계에서는 ‘和光同塵’ 이니 ‘異類中行’이니 하여 불교적인 無碍行으로 해석하여 왔으나, 실제 그의 행적에서는 불교적인 모습은 전연 발견할 수 없다. 「행장」이나 「약보」에서의 서술대로 불교계를 완전히 떠나 俗人의 신분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경허가 1899년 海印寺에서 修禪結社할 때 보여주었던 禪 부흥의 강력한 의지를 버리고 5년만에 불교계를 떠나 은거한 이유는 분명히 밝혀지지 못하였는데, 경허 개인의 성향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필자로서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불교계의 형편이 경허를 용납할 수 없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시 정치계는 露日戰爭을 계기로 제국주의화한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어 경허가 은거하는 1904년에는 乙巳條約의 체결을 통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으며, 마침내 1910년에는 완전히 병합하기에 이르렀다. 불교계도 그에 상응하여 일본불교의 침투가 노골화되었다. 그러한 불교계의 변화 가운데 海印寺에는 李晦光이 새로 주지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친일 행각에 광분하여 뒷날 멀지 않아서 圓宗을 창립하여 불교계를 장악하고 韓日合邦에 앞장을 섰으며, 일제에 의한 병합 뒤에는 곧이어 한국불교를 통채로 일본 曹洞宗에 합병시키는 공작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일제 朝鮮總督府에 의한 三十本末寺制가 시행되자 그에 앞장서서 협력을 아끼지 않으므로써 親日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경허는 이러한 조류에 동조할 수도 없었으며, 또한 용납될 수도 없었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말년 甲山 江界 등 지방을 떠돌면서 읊은 시들을 보면, 당시의 세태를 한탄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또한 고향을 그리는 내용들이 대부분인데, 이것은 그의 좌절의 심정을 솔직하게 잘 나타내 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경허가 북쪽 지방에서 은거 생활할 때에 읊은 시들 가운데, 「갑산 이수동을 지나며(過甲山利水洞)」, 「고기 낚음을 보고(觀釣魚)」, 「맑은 물 흐르고(淸流)」, 「용정강(龍汀江)」, 「물건너 산 넘어(渡水登山)」, 「추억(追憶)」, 「일병(一別)」, 「한 등(一燈)」, 「진세를 잊음(忘塵)」, 「제석(除夕)」, 「초하룻날(元旦)」, 「귀뚜라미 소리(喞聲)」, 「소창(小窓)」, 「주머니 속 보물(囊中寶)」, 「박이순과 회포를 펴다(與朴利淳敍懷)」등은 한결같이 은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괴로운 심정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시들 가운데 몇 수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甲山 이수동을 지나며 (過甲山利水洞)
“이수동 앞에 급히 흐르는 강,
청청하고 암암이 우렁차기도 하여라.
崔孤雲 일찍이 가야산에서 한 구절 읊기를,
세간 시비 귀에 들릴까 영원히 끊었다 하네.”
(利水洞前江勢急 靑靑黯黯吼中輕 孤雲曾有伽倻句 永絶是非到耳聲)

한 등(一燈)
“봉두 난발 어린 시절 밤마다 놀랐건만,
늦게사 골짜기에서 밭 갈던 일 깨달았네.
몸과 마음으로 이미 청산이 귀중함을 배웠지만,
세월에 속은 백발 어찌 할 길 가히 없네.
거친 생각으로 玉食을 넘기기 어렵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藤床에 누워도 편안치 않구나.
늘그막에 이르러 감개가 하 많아서,
유연히 서로 앉아 등잔불만 돋우네.”
(簪纓每入夢中驚 晩悟當年谷口耕 身心已學靑山重 歲月偏欺白髮輕 念荒玉食呑難下 憂國藤床臥未平 衰境云云多感慨 悠然相對一燈明)

제석(除夕)
“천 갈래 이는 회포 어찌 말로 다할손가,
깊은 산 차가운 눈 글방 하나 외로워라.
지난 해 청명 때는 강계읍에서 보냈는데,
금년 섣달 그믐날은 갑산의 산촌에서 맞는구나.
홀연히 고향 생각 꿈에 먼저 들어가고,
기약 없는 나그네 길 슬픔을 잊어 볼까.
창 앞에 호롱불이 가물거릴 때,
인적은 고요한데 이웃 집 닭 소리 몇 번이나 들었던가.”
(千緖暗懷詎以言 山深雪冷一書軒 去歲淸明江界邑 今年除夕甲山村 俄忽鄕關先入夢 不期旅悒暫忘痕 窓燈耿耿喧嘩絶 佇聽隣鷄幾倚門)

박이순과 회포를 펴다(與朴利淳敍懷)
“안개 깊이 끼는 곳에 솔마다 차가웁다.
땅을 덮은 맑은 광명 자세히 보라.
구름 같은 부귀 영화 원하는 바 아니어니,
고기 낚고 나무하는 멋 세상 일 왜 못 잊으랴.
고향을 그리다가 털이 모두 희어졌고,
나라 근심하는 마음 늙을수록 붉어 가네.
신선 길 배우려고 학을 따라가자 하였더니,
그대 부모님 말씀 생각할수록 끝이 없어라.”
(煙霞深處萬松寒 匝地淸光仔細看 貴富如雲非所願 漁樵忘世有何難 懷家雙髮秋增白  憂國寸心老益丹 欲學仙方隨鶴去 念言君父太無端)

결국 경허는 지눌의 경우와는 달리 禪을 부흥시키겠다는 念願의 실현을 다음 대의 嗣法弟子들에게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 경허의 禪 復興의 念願은 정확하게 9년 뒤 그의 제자들에 의한 禪學院運動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지눌의 경우와는 다르게 경허에 의한 禪風 振作은 커다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러한 이유는 무어무어니 해도 日帝의 침입과 그로 인한 불교의 변질이라는 시대적인 상황의 어려움 때문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경허의 修禪結社를 통한 禪風의 振作 노력은 일시 중단되었고, 그 자신도 불교계를 완전히 떠나 은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나, 뒷날 그의 嗣法弟子들에게 계승시킴으로써 근대 禪 부흥의 계기를 마련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