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주제 논평:"近代 禪宗의 復興과 鏡虛의 歷史的 位置" 논평
정광호(인하대학교 교수)
필자는 꽤 오랫동안 우리나라 開化期 불교에 관한 발자취를 더듬어 본 일이 있었다. 이를테면 한국 불교 最近世史라 할지, 어쨌든 日本 침략 시기 우리나라 敎團史에 대한 역사적 탐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적 차원의 因果 관계를 더듬어 본 것일뿐, 교단사의 핵심이라 할 敎理 발전에 관한 변모를 추적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필자가 여기서 ‘근대 禪宗의 부흥과 鏡虛의....’에 대한 논평을 한다는데 대해서는 자못 외람된 느낌이 없을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에 말하는 필자의 논리 가운데 다소의 망발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점 미리 양해를 구해 두는 터이며,발표자인 崔 교수에 대해서는 더욱 그런감이 있다는 것을 말해 두는 것이다.
Ⅰ
ꡔ近代 禪宗의 부흥과....ꡕ를 읽고 난 뒤의 소감을 필자는 대개 3가지 점으로 압축해 말을 해볼까 한다. 한국 禪脈의 중흥조로서의 鏡虛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라 함이 첫째요, 다음은 ꡔ朝鮮佛敎通史ꡕ(下, p.951)에 열거해 놓고 있는 禪‧敎 승려들에 대한 통계를 그대로 믿고 논리를 전개해도 상관이 없겠느냐 하는 점,그리고 또 하나는 鏡虛에 대한 李 能和의 혹평이 부당하다는 언급을 한 대목이 있는데,그렇다면 그 평가에 대한 反證이 얼마쯤은 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인 것이다.
우선 첫째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란 무엇인가. 경허는 한국 禪宗을 부활시킨 중흥조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그런데 그가 이와 같은 中興祖로서의 추앙을 받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소위 ‘悟道’라고 하는 사건에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오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경허를 말할 때 누구나 한번씩은 언급을 하게 되는 예의 그 悟道頌일 것이다. 오도송은 곧 깨달음의 文字的 표현인 동시에 그 깨달음의 핵심 내용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悟道頌의 첫 聯,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吾家
에 나오는 ‘無鼻孔’을 사람들은 그냥 ‘콧구멍 없는 소’라고만 말을 할 뿐,그것이 어떤 소식을 전하고 있는 문자인가를 제시해 본 일이 없는 것이다. 대관절 ‘콧구멍 없는 소’가 무엇인가. 소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에게 구속을 받고 끌려 다니게 마련이 된 동물인데, 소가 이렇게 구속을 받게 되는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코뚜레’라고 하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 코뚜레 때문에 自在하게 활동을 하지 못하고 부자유 속에 얽매이게 된다는 말인 것이다.
한편 ‘깨침’이라고 하는 소식은,일체 만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안락자재한 경지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忽聞人語無鼻孔’ 다음으로 ‘頓覺三千是吾家’라는 문자를 놓음으로써 앞뒤가 서로 조응이 되도록 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無鼻孔’은 그냥 ‘콧구멍 없음’이 아니라 ‘콧뚜레를 뚫을 구멍이 없음’을 그렇게 써 놓은 것일른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한 鏡虛의 ≪略譜≫를 볼 것 같으면,경허가 그때 ‘如何是爲牛則無穿鼻孔處’― 즉 ‘어떻게 소가 될 것 같으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는 소가 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듣는 순간 홀연히 깨침을 얻은 것이라는 대목도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한번 참고를 해 봄직도 한 일일 것인데,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門外漢으로서 문제를 제기해 본 것일뿐, 제법 무슨 근거가 있어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전문가의 자문을 빌어서라도 이 부분에 대한 해석에는 일단의 재검토가 있은 뒤에라야 무슨 얘기거나를 하는 것이 논리의 순서가 아닌가 싶다.
Ⅱ
다음은 ≪佛敎通史≫, 下, pp. 951~961에 열거해 놓고 있는 禪‧敎 승려의 숫자에 대한 문제인데, 이에 따르면 당시 敎宗僧의 숫자가 68인데 대해 禪宗의 그것은 불과 16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만큼 세가 약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 하면 예의 교종승으로 분류가 된 인물 가운데에는 禪宗的인 요소를 아울러 가지고 있는 善知識도 상당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른 생각나는 인물만 들어 봐도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李 晦光:그는 물론 교종승으로서 한 때는 상당한 물망이 있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東師列傳≫에 따르면,通度‧聖德‧九曲 등 여러 곳에서 수행을 한 결과 상당히 높은 경지를 얻어서, 그가 한번만 자고 간 곳이면 마치 사향 노루가 지나간 자리에 향기가 남아 있듯이 그렇게 禪旨도 높았었다는 인물이다.
② 徐 震河:그도 역시 敎學上의 석덕인데, 그가 한번은 범어사에 가서 活句‧死句에 관한 법문을 한 일이 있었다 한다. 그런데 이 절은 원래가 禪刹로 유명하던 곳이라,수좌들이 그를 한번 시험해 볼 생각으로 이런 질문을 하였다는 것이다.
“活句니 死句니 하는 말은 들어본 일도 없는데,대관절 그게 무슨 소리 입니까?”
했더니 그는 그 중을 ‘앞으로 나오라’고 한 다음 ‘바로 이것이니라’ 하면서 주장자를 들어 한바탕 후려 갈겨 버렸는데,어찌된 셈인지 질문을 한 중은 아뭇소리도 못하고 그냥 퇴각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역시 ≪佛敎通史≫에 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또 ≪禪文再正錄≫이라고 하는 禪學上의 명저도 있지를 아니한가.
③ 韓 龍雲:한 용운은 ≪佛敎大典≫ 기타 많은 저술을 가지고 볼 때 물론 敎宗僧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는 39세 때 백담사에서 精進을 하다가 문득 ‘한소식’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韓龍雲全集≫,Ⅰ, p.172에 있고,또 그가 지은 ≪十玄譚註解≫ 같은 것을 보면,그는 禪에도 매우 높은 경지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십현담≫이란 趙明基에 따르면 禪文偈頌 가운데 아주 유명한 것으로,역대 선지식들의 주석이 꽤 많이 있는 책이라 한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한 용운의 주해가 가장 훌륭한 것이라 함이 조명기의 견해이다. 뿐만 아니라 한용운을 지칭할 때면 조박사는 으례 ‘萬海禪師’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점이라든가, 또 그가 선학원에서 修行을 할 때 너무도 야무지게 정진을 하기 때문에 ‘저울추’라는 별명까지 있었다는 이야기 등을 상기해 본다면,그 역시 순수 교학승이라고만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일 것 같다.
이 밖에 陳 震應에 대해서도 ≪通史≫에 ‘師善華嚴하고 師善拈頌하야 兩宗旨意를 一印心法이라’고 평한 것이 있음을 보아 역시 순수 교학승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朴 普峯에 대해서는 ‘臨濟宗僧’이란 단서가 있는 것을 볼 것 같으면 그에게도 禪學僧의 요소는 다분히 있는 것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요컨대 한국 승려들을 禪‧敎 간에 확연히 구별을 한다는 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Ⅲ
다음은 鏡虛의 평가에 관한 것인데, 그가 한국 선풍의 중흥조임에는 틀림이 없겠으나, 그에 대한 평가에는 아직도 유동적인 부분이 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를 보는 시각에 따라서, 아주 높거나 아주 얕거나 어쨌든 극과 극 사이의 입장이 있는 것이다. 崔 교수는 李 能和의 지극히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면서, 이는 결코 정당한 평가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능화의 견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마땅히 이에 대한 反證이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경허의 禪學上의 위대한 점이 입증된 뒤에라야 그의 ‘禪宗史上의 위상’이라는 것도 논증을 해 볼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경허는 결코 보통 수준의 범상한 승려가 아니었다. 30여년전에 필자는 修德寺 惠空 스님 방에 그의 肉筆이 걸려 있는 것을 본 일이 있었는데, 그 활달 자재한 필세로 보나, 또 혹은 ≪경허집≫에 실려 있는 글들을 가지고 보나,그는 실로 천근의 무게로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중에도 그가 만년에 關北으로 가면서 수제자 漢岩과 주고 받았다는 글을 볼 것 같으면, 그런 느낌은 더욱 실감이 나게 된다. 즉 경허가,
北海위에 높이 뜬 大鵬 날개를 접어 두고서 捲將窮髮垂天翼
부질없이 수풀속에 몇해나 있었던가. 謾向搶楡且幾時
이별은 그래도 어려운 일 아니지만, 分離尙矣非難事
이승에선 다시 볼 기약이 아득하구료. 所慮浮生渺後期.
라고 슬쩍 제자의 속을 떠보자,즉석에서 한암은 이런 답변을 하였다는 것이다.
국화‧매화 피는 시절 겨우 한철 지났는데, 霜菊雪梅才過了
어찌하여 홀연히 關北으로 가시나요, 如何承時不多時
그러나 마음 속에 만고명월 떠 있으니, 萬古光明心月在
구태여 이승에서 다시 만나 무엇하리요. 更何浮世謾留期.
‘스승을 모신 지가 1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말을 ‘霜菊雪梅才過了’라고 쓴 詩語도 놀랍거니와, 양자간의 韻字와 對句가 또한 절묘하게 조응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師弟가 모두 글자 그대로 고승들이었음이 사실인 것이다. 또 북극땅 不毛地의 大鵬과도 같은 포부를 접어 두고 잡목 수풀 속을 헤매어 왔노라는 경허의 말은 차라리 바윗덩어리와 같다고나 할지. 어쨌든 이것은 月精寺에 있던 呑虛堂께 들은 이야기니 틀림이 없는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경허의 종교적 위대성과 반드시 직결이 되는 것은 혹 아닐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정도의 문화적 토대가 있는 사람으로서 一代時敎를 거쳐 그 유명한 悟道의 체험을 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이후의 萬行이라는 것에도 결국은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와 같은 전제 아래 李 能和의 부정적 평가에 대해서도 일단 反證이 제시된 뒤라야, 本題에 대한 논리 전개도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필자 같은 문외한으로서는 도저히 본질을 알 수가 없는 일이니,이 점은 진실로 송구스럽고 미안하게 생각하는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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