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주제:鏡虛의 禪的 系譜와 話頭의 詩的 解釋
최동호(고려대학교 교수)
Ⅰ. 경허의 불교사적 의미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는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극적인 생애를 살았던 대선사이다. 지금까지 경허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분분했던 것이 사실이다. 경허는 한국근대불교의 찬연한 불꽃을 휘황하게 점화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꽃의 찬연함 이면에 부스러지는 재와 같은 기이한 행적으로 또한 사람들의 시비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경허의 일생에 대해서는 많은 저술들이 있다. 이를 두루 참고하면서 이 글에서는 한중광의 ꡔ경허, 길위의 큰스님ꡕ(한길사, 1999)을 중심으로 한다.
이러한 경허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미 그의 법제자인 방한암이 그의 「선사 경허화상 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에서 ꡔ금강경ꡕ을 인용한 다음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움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를 배움은 옳지 못하다 하노라. 이는 다만 법을 간택하는 눈을 갖추지 못하고 먼저 그 행리의 걸림 없는 것만을 본받는 자를 꾸짖음이며, 또한 유위상견(有爲相見)에 집착하여 마음 근원을 밝게 사무치지 못하는 자를 꾸짖음’이라 하여 행리를 따를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원을 밝게 사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 기이한 행리로 인해 많은 비방과 훼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수많은 분들이 그들의 저술에서 경허를 ‘한국의 달마’ 진성원담 역, ꡔ진흙소의 울음ꡕ(홍법원, 1993), 5쪽.
, ‘선의 혁명가’ 성타, 「경허의 선사상」, ꡔ한국불교사상사ꡕ 下(한국불교사상사간행위원회, 1994), 598쪽.
, ‘선종의 거장’ 권상로, 「한국선종약사」, ꡔ백성욱 박사 송수 기념 불교학논문집ꡕ(동국대학교, 1959), 292쪽.
, ‘한국 근세 선을 중흥시킨 대선장’ 고익진, 「경허당 성우의 도솔생이론과 그 시대적 의의」, ꡔ한국미륵사상연구ꡕ(동국대학교출판부, 1987), 408쪽.
, ‘당송시대 오가종풍(五家宗風)의 종장의 반열’ 석명정 역, ꡔ경허집ꡕ(극락선원, 1991), 428쪽.
등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는 경허야말로 달마가 전한 최상승선으로서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수많은 경전이나 전설적으로 신비화된 과거의 고승대덕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깨달음의 본래 면목이 무엇이고, 그 실천이란 어떤 것인가를 현실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허는 한국 불교사에서 갑자기 돌출한 것인가. 경허의 선적 깨달음의 찬연함으로 일단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경허가 남긴 행적이나 시문을 찬찬히 살펴보면, 경허야말로 한국 불교가 배출해낸 그리고 배출하고야 말 선승이었으며, 이는 불교적 계보는 물론이거니와 한국 불교가 지향하는 궁극적 깨달음을 통해서 그 정통성을 입증하는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그동안 많은 논저들이 경허 그 자체의 돌출에 주목하는 나머지 이에 대한 학문적 인식이 심화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이 연구에서 경허의 선적 계보는 무엇이고, 그가 도달한 ‘오도시’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천착하면서 앞으로 경허 연구에 조그만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대략 450여 편의 경허의 시를 통독해 보면, 솔직히 말해서 그 자체로서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이 없다. 경허의 선시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이종찬의 「기문 기시로 알려진 경허의 시」, ꡔ한국불교시문학사론ꡕ(불광출판부, 1993), 767~776쪽에 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 이전과 깨달음 이후를 일관하는 시적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깨달음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따져보는 것이 절실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허의 시세계를 깊이 헤아리기 위해서는 무조건 경허에 압도당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며, 경허의 선시를 현대적 감각으로 일방적으로 평가해버리는 것도 온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헛된 이름과 문자적 알음알이를 가장 부정한 것이 경허이며, 그런 시각에서 경허의 삶과 시에 접근해 보는 것 또한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경허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고, 이를 통해 그의 삶과 시를 관통하는 하나의 시각을 마련해 보는 것이 이 연구의 목표이다.
Ⅱ. 경허의 전등연원
한국 불교의 법맥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거의 쇠퇴해가고 있었던 것은 누구나 다 공감하는 일이다. 경허를 쇠잔해 가던 한국 근대 불교의 중흥조로 인정하는 것 또한 대체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사실인 것 같다. 한국 불교의 쇠퇴는 일차적으로 조선조 시대의 불교억압이라는 정치적 이유가 첫번째가 되겠지마는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적으로는 왕조의 몰락 그리고 세계사적으로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이라는 문명사적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어둠 속으로 사그라져가는 불교의 전통을 화산처럼 폭발시킬 대선사를 안타깝게 찾고 있었던 것이 당시 불교계의 갈망이었고, 이를 통쾌하게 그리고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이 경허였다고 할 것이다. 경허로 인해 한국 불교는 새 생명을 얻었으며, 경허로 인해 한국 불교는 중세와 근세를 잇는 불교사적 전통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깨달음을 전하는 그의 목소리는 사자의 울부짖음과 같았고, 그의 울부짖음이 몽매한 누습에 젖어있던 한국 불교계에 퍼져나가자 여우와 늑대들의 두개골이 부서져나가는 것과 같은 환골탈태의 생명력을 한국 불교계에 불어넣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경허의 불교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정한 것은 그나름의 의미가 있다.
경허(鏡虛, 1846~1912)는 한국사에 찬란히 빛나는 거성이자 지고한 영혼의 거장이며, 한국 불교사에 우뚝 솟은 비로봉이자 방(棒)․할(喝)로 근대선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대선사(大禪師)이다. 원효(元曉, 617~686)가 한국 불교의 첫새벽이라면, 지눌(知訥, 1158~1210)은 한국 간화선의 첫새벽이고, 서산(西山, 1520~1604)은 한국 중세선의 첫새벽이며, 경허는 한국근대선의 첫새벽이다. 한중광, ꡔ경허, 길위의 큰 스님ꡕ, 한길사, 1999, 20쪽.
원효로부터 지눌과 서산을 거쳐 경허로 이어지는 불교사적 파악에 그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교사 전체를 통관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여기서 경허의 중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한국 불교사의 전체상을 파악하기 힘들고, 너무 전체상에 주목하면 경허의 참면목을 놓치기 쉽다.
조계종풍의 간화선의 계보에서 보자면 지눌-서산-경허로 이어지는 법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인데, 과연 한국 불교의 법맥이 완전히 끊어진 곳에서 경허가 돌출할 수 있었던 것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경허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법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한다.
무릇 조종(祖宗) 문하의 마음법을 전수하여 줌에 뽄이 있고 증거가 있어서 가히 어지럽지 못하리라. 예전에 황벽은 백장이 마조의 할을 하던 것을 들어 말함을 듣고 도를 깨달아 백장의 법을 잇고, 흥화는 대각의 방망이 아래서 임제의 방망이 맞던 소식을 깨달아 임제가 입멸한 뒤지만 임제의 법을 이었고, 우리 동국에서는 벽계가 중국에 들어가 법을 총통에게서 얻고 와서 멀리 구곡에게 법을 잇고 진묵은 응화성(應化聖)으로 서산의 멸후(滅後)에 법을 이으니 그 사자(師資)가 서로 계승함의 엄밀함이 이와같은 것은 대개 마음으로써 마음을 인(印)하여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치기 때문이다.
오호라! 성현이 오신지 오래되어 그 도가 피폐된지라, 그러나 간혹 본색납자가 일어나 살활(殺活)의 화살을 쏴서 한 개나 반 개의 성인을 얻기 때문에 은밀스럽게 정종(正宗)은 부지하니 암흑 속에 등불이요 죽음 속에 다시 삶과 같도다.
내가 비록 도가 충실치 못하고 성(性)을 점검하지 못하였으나 일생동안 향할 바는 기어이 일착자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으니 이제 늙은지라, 뒷날 나의 제자는 마땅히 나로써 용암장로에게 법을 이어서 그 도통(道統)의 연원을 정리하고 만화강사로써 나의 수업사(受業師)를 삼음이 옳도다. 석명정 역, 앞의 책, 401쪽. 이 글에서 사용된 인용문들은 석명정 역의 ꡔ경허집ꡕ을 중심으로 하고 진성원담 역의 ꡔ진흙소의 울음ꡕ을 참고하여, 필요한 경우 필자가 약간의 윤문을 가하였다.
위의 인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음 몇 가지이다. 우선 사자의 계승은 엄밀한 것이고, 그것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인(印)하여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으로 무문인(無文印)이란 눈에 보이지는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법통의 정통성을 면밀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어느 문자보다 엄정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성현이 오신지 오래되어 도가 황폐하게 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은 서산 이후 특히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법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용암장로의 법을 잇고, 만화강사를 수업사로 삼는다는 것은 선과 교의 법맥을 아울러 밝힌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는 경허가 만화강사에게 대․소승경전과 유가․선도가 등의 가르침을 받고, 동학사에서 명성을 떨치다가, 대발심하여 선적 깨달음에 이른 자기 성숙의 과정을 말한 것이다. 교에서 시작하여 선을 통해 대해탈의 과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그것대로 한국 불교의 특징을 반영하는 예일 것이다.
방한암은 경허의 말을 위의 인물과 같이 옮겨 적고, 다음과 같이 법통을 정리했다.
화상은 용암 혜언을 잇고, 언은 금허 별첨을 잇고, 첨은 율봉 청고를 잇고, 고는 청봉 거애를 잇고, 애는 호암 체적을 잇고, 청허는 편양에게 전하고, 편양은 풍담에게 전하고, 풍담은 월담에게 전하고 월담은 환성에게 전하니, 경허화상은 청허에게는 십일세손이 되고, 환성에게 칠세손이 되나니라. 위의 책, 412쪽.
여기서 필자는 불교의 법통을 정밀하게 논란할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이는 필자에게 분외의 일이기 때문이다. 법맥의 계보에 대해서는 월운 감수, ꡔ선학사전ꡕ(불지사, 1995)의 「한국선종법계도」, 884~904쪽 참조.
다만, 경허를 고찰하는데 그 법맥의 근원을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며, 그 전등의 근원을 살핌으로써 경허의 불교사적 의미도 제대로 밝혀진다는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단박에 눈에 띄는 것은 경허는 물론 그의 법제자인 방한암도 청허를 하나의 출발로 잡고 있으며, 편양 또한 청허에서 경허로 이어지는 법맥의 중요한 징검다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청허이고 편양인가. 이들 모두 선과 교를 아울러 중시했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고 이는 거슬러 올라가 지눌로부터 이어져오는 선과 교의 회통이라는 한국 불교의 고유한 전통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경허의 깨달음이 문제가 되고, 경허의 선시가 문제가 된다. 보조로부터 청허로 이어지고 다시 경허로 이어진 조계종 계보에서는 과연 무엇을 그들의 정진에 중요한 지침으로 삼았을까. 이것이 필자에게는 오랫동안의 의문이었다. 특히 1859년 14세부터 글을 배우고 경전을 섭렵하고 1868년 23세부터 대강사로 이름을 날린 경허에게 중요한 가르침의 근원이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그 의문의 일부를 경허가 편찬하여 범어사에서 1902년에 간행했다는 ꡔ선문촬요(禪門撮要)ꡕ에서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ꡔ선문촬요ꡕ는 모두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과거의 부처나 조사는 물론 달마의 「혈맥론(血脈論)」, 「관심론(觀心論)」 등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 보조의 저술로 제13장 「수심결(修心決)」, 제14장 「진심직설(眞心直說)」, 제15장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제16장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제17장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등이, 그리고 서산의 저술로는 제20장 「선교석(禪敎釋)」, 제21장 「오가종풍(五家宗風)」 등이,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보조의 중요 저술의 대부분을 인용하고 서산의 저술은 제20장과 제21장에서만 인용하였는데, 이는 체계적인 저술로 ꡔ선가귀감ꡕ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경허가 특히 숭배한 조사는 서산대사였다고 탄허스님은 말했다. 웬만한 선배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지만, 청허당 앞에서는 “선생님 소리가 절로 나거든 ……” 경허가 오도가에서 거듭 말한 것처럼 서산대사도 ‘부처나 여래가 다른 것이 아니고 이 몸의 깨끗한 마음(淨心)과 깨끗한 행동이 바로 부처며 여래’라고 했다. 그리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흥우, ꡔ경허선사―空性피안의 길ꡕ, 민족사, 1986, 134쪽.
탄허스님의 증언으로 서산과 경허의 관계가 명백해지거니와 경허 자신의 여러 문장에서 보조와 서산의 말과 글이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경허를 경허로 만들어 준 두 한국의 조사로 보조와 서산을 내세우는 것은 크게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서산을 내세우는가. 그것은 단순히 법통의 연원만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선시 때문이다.
천 생각 만 생각이
붉은 화로의 한 점 눈이다.
진흙소가 물 위로 다니나니
대지와 허공이 다 찢어진다. 김달진 역, ꡔ한국선시ꡕ(열화당, 1989), 262쪽.
千思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서산대사의 「임종게(臨終揭)」로 전해오는 이 선시에서 필자는 도승들의 깨달음의 마지막 경지가 무엇인지를 본다. 첫 구는 흔히 선가에서 인용되는 표현이다. 서산의 서산 나름의 선적 통합은 다음 2구, 즉 ‘진흙소가 물 위로 다니나니/대지와 허공이 다 찢어진다’에 나타난다. 유(有)와 무(無)의 경계가 무너지고, 만상이 하나로 계합되면서 본지풍광이 펼쳐지는 순간을 보여주는 오도의 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진흙소는 물론 가상의 소이다. 헛것이다. 헛것이므로 물위로 걸어 다닌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헛것이 아니다. 가상의 것을 통해 가상 이상의 진실을 꿰뚫는다. 물위를 다니는 가상의 소만이 대지와 허공을 다 찢을 수 있다. 일체 유위법을 다 무너뜨리고 무위의 법에 도달한다.
서산의 진흙소는 한국 불교사에 움직일 수 없는 징표로서 마음의 도장을 남긴다. 대지와 허공이 다 찢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본지풍광을 경험한 자는 이 법맥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러나 서산의 법맥은 300여년을 그대로 건너 뛰지 못한다. 앞에서 거론한 대로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를 매개로 한다. 편양은 서산의 심법을 받는다. 그는 선과 교를 함께 아우르며 서산의 뒤를 이어 서산의 법맥을 잇는 4대파의 개조가 된다. 그 또한 다음과 같은 선시를 남긴다.
남쪽을 바라보면 중봉에 절이 있는데
조그만 암자는 그림인 듯 송림 속에 숨어 있다
생각하면 그 스님 선정에서 나왔을 때
저녁 구름에 바람을 타고 종소리 들렸으니 김달진 역, 앞의 책, 362쪽.
南望中峰有蘭若 小庵如畵隱深松
想得高僧出定後 暮雲風進數聲鍾
「내원에서 의상대를 바라보며(內院對義湘坮)」에서 편양은 의상을 생각하고,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종소리가 그에게 들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절구 또한 후반 2구에 이르러 시적 묘경을 보여준다. 서산의 제자인 편양은 법맥의 근원으로 의상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와 같은 세계를 자신도 동경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이렇게 본다면 멀리 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 불교의 전체상이 그려진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 필자가 여기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생각하면 그 스님 선정에서 나왔을 때/저녁 구름에 바람을 타고 종소리 들렸으니’에 있다.
아마도 이 종소리를 통해 위로는 의상으로부터 아래로는 경허에 이르는 깨달음의 불법의 목소리가 전해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산으로부터 이어진 법이 편양을 매개로 경허에게 전해졌을 때 그것은 ‘진흙소’라는 상징적 화두로 대변된다.
대지와 허공을 다 찢고 간 서산의 진흙소는 경허에 이르러 현묘한 도로 나아가려는 「진흙소의 울음(泥牛吼)」으로 표현된다.
대개 삼칸 초가집을 지으려 하더라도 먹줄을 치고 자귀로 깍아 내고 자로 재는 공력이 없으면 성취하지 못하니 하물며 원각대가람(圓覺大伽藍)을 조성하는데 그 조성하는 이치대로 하지 않고 어찌 성공하겠는가. 작은 일을 하는데도 잘못되어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그 이치를 모르면 누구에게 물어라. 그 사람도 분명하지 못하면 다시 지혜 있는 이에게 물어서 기어이 차질없이 성공하는 것이 조예가 아니겠는가.
깊고 오묘한 도에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거의가 경솔하거나 함부로 소홀히 하니 자세히 결택하여 공부하는 이는 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공부하여 실패하지 않는 이는 거의 드무니 슬프다 어찌 경계하지 않을까 보냐.
대개 무상함을 경계해서 큰 일을 깨달아 밝히고자 하는 이는 급히 스승을 찾지 않고 장차 어찌 그 바른 길을 찾겠는가. 석명정 역, 앞의 책, 25쪽.
깊고 오묘한 도에 나아가고자 하는 수도승들이 제대로 결택하여 공부하지 않고 있다. 제대로 공부하는 길을 가르쳐 주는 스승을 급히 찾으라. 경허는 이 글에서 태고화상의 ‘겨우 활을 들어 쏘자 화살이 돌에 박힌다(才擧箭沒石)’나 청허화상의 ‘모기가 쇠소 등어리를 뚫는 것 같아서 부리를 댈 데가 없는 곳에 온 몸이 들어간다(蚊子上鐵牛向下嘴嘴不得處和身殺人)’ 등의 경구나 규봉선사의 ‘결택을 분명히 한 뒤에 깨달은 이치를 닦아 나아간다(決擇分明悟理應修)’ 등을 인용하면서 수도자들에게 제대로의 길을 찾으라고 간곡하게 충고하고 있다. 수도자라면 너도 나도 큰 일을 깨달아 밝히겠다고 아무렇게나 용심하고 뛰어들지만 그렇다고 쉽게 성공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제대로 길을 인도하는 스승을 급히 찾으라. 서산으로부터 ‘진흙소의 울음’ 소리를 이어받은 경허가 후학들에게 전하는 진심어린 충고일 것이며, 경허야말로 자신의 갈 길을 분명히 결택하고 제대로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대원력을 성취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Ⅲ. 경허의 화두와 깨달음
방한암의 ꡔ선사 경허화상 행장ꡕ에 의하면, 일찍이 부친상을 당하고 9살에 청계사에서 계를 받고 출가한 경허는 14살이 되도록 나무하고 물을 긷고 밥을 지으며 은사 스님을 모신다. 14살이 되던 한 여름 어느 선비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경허는 놀라운 학문적 성취를 보이면서 은사인 계허스님이 환속하자 동학사 만화스님에게 가 불교의 대소경전을 두루 섭렵한다. 대중들의 요청으로 23세에 동학사에서 개강하니 수많은 학인들이 모여들어 대강사로서 명성을 드날린다.
아마도 대부분의 불교인이라면 이 지점에서 만족하고 더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허에게는 일생일대의 전기를 이루는 기회가 찾아온다. 1879년 34세 되던 여름 환속한 계허스님을 찾아가던 경허는 한밤중에 천안 부근에서 폭풍우를 만나고, 전염병이 만연한 마을에서 문전 박대를 당하여 잠잘 곳을 찾지 못한다. 시체가 널부러지고 죽음의 귀기가 휩쓰는 참혹한 현장에서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강론의 알음알이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깨닫고, 진퇴양난의 지점에서 하나의 굳센 발원을 세운다.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고 조도(祖道)를 찾아 삼계(三界)를 벗어나리라. 위의 책, 409쪽.
경허의 발원에는 이처럼 남다른 동기와 필연적 목적이 있었다. 이 극적인 계기는 단순히 외부로부터 오는 것만은 아니다. 문자를 풀이하는 강론의 알음알이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은 마지막 생사의 관문에 대한 의혹이 늘 그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전염병이 돌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판에 경전의 알음알이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 삶과 죽음에 대한 의정을 발동시키는 발원을 세우지 않는다면, 전염병으로 죽어 나자빠지는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고 그는 지나쳐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나쳐 갈 수 있는데, 도저히 지나쳐 갈 수 없었다는 데 경허의 남다른 점이 있다.
동학사에 돌아온 경허는 학인들을 해산하고, 문을 걸어 잠그고 전심으로 공안을 참구한다. 그동안 강론해 온 공안들을 들쳐 보아도 그가 막다른 길까지 뚫고 들어갈 여지가 있는 공안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조주의 무(無)자 공안은 지나치게 상투적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릴 공안은 경허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경허는 당연히 ꡔ선가귀감ꡕ의 ‘활구경절문(活口徑截門)’을 떠올렸을 것이다. 서산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대저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할 것이요, 사구를 참구하지 말라.
서산은 다시 이에 어떤 오해가 있을까 하여 친절하게 다음과 같은 평설을 가미한다.
활구에서 깨달으면 부처와 조사로 더불어 스승이 되고, 사구에서 깨달음은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심재열 강설, ꡔ선가귀감ꡕ(보성문화사, 1998), 62쪽.
경허는 자신에게 활구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면밀히 생각해 본다. 그는 전염병이 돌았던 마을에서 겪었던 처참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자기가 끊어버리고자 하는 생사의 고리를 단번에 쳐버릴 것이 무엇인지 참구한다. 경허는 ‘활구경절문’에 붙인 서산의 게송을 떠올린다.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로 뭉쳐진 자라야 한다.
要見臨濟 須是鐵漢
생사의 고뇌를 벗어던지고 조사와 더불어 스승이 되는 활구는 무엇일까. 경허는 이름난 화두는 내려두고 남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평범해 보이는 화두를 선택한다.
당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 왔다
驢事未去 馬事到來
어떤 이가 영운선사에게 불법의 대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들어보인 화두이다. 죽음의 현장에서부터 줄곧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 지금까지, 경허가 왜 이 화두를 택했는지 말한 논자는 없다. 단지 이 화두를 택하고 용맹정진에 들어갔다는 기록만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경허가 왜 이 화두를 결택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이 화두는 ‘개는 불성이 없다’나 ‘뜰앞의 측백나무’ 같은 널리 알려진 공안은 아니다. 그러나 경허에게는 대발원을 세우고, 조사관을 돌파하는 첫출발로 이 화두를 들고 있다. 과연 왜 그러했을까? 필자는 이를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경전을 해석하고 풀이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눈앞에 생사의 문제가 밀어 닥쳤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자가 지상에서 누리는 삶의 시간이 매우 짧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첫째의 경우 대강사로서 불교의 대․소경전을 강론하여 명성을 날리던 그가 생의 최종적 관문인 죽음 앞에 부딪쳤을 때 그가 겪어야 했던 무력감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경전의 말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스스로 열어야 하는 생사여탈문이다. 스스로 깨닫지 못한 자는 남은 물론 자신도 구제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나귀의 일이며, 말의 일이며, 크고 작은 일로 인생의 번거로움이 끝이 없는데 인간에게 주어진 생은 극히 짧은 것이어서 지금 바로 몰두하지 않는다면 언제 활구를 들어 용맹정진할 것인가.
경허는 「등암화상에게 주다(與藤庵和尙)」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인생의 한 세상이 마치 문틈으로 천리마가 달리는 것을 내다보는 것처럼 덧없어서 풀 끝에 맺힌 이슬 같으며 위태롭기가 바람 앞에 등불이라 백 가지 온갖 계교를 다 부려봤자 마지막 이르는 곳은 마른 뼈 한 줌 뿐이로다.
생각해 보니 이와같이 덧없음이 빠르고 생사의 일이 크고 급한 것이다. 급하기는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해야 한다.
태어났어도 온 곳을 모르며 죽어도 가는 곳을 모르며 업식이 아득하며 몸뚱어리가 무너지며 불길이 치솟아 사생(四生)과 육취(六趣)가 가슴속으로부터 잉태되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만약 참되고 바른 참선 수련이 아니면 어떻게 생사의 업력을 대적하겠는가. 석명정 역, 앞의 책, 44쪽.
세월은 덧없는 것이고, 생사의 업력은 참선 수련이 아니면 이길 수 없다. 온갖 계교를 다 부려보아도 결국 마른 뼈 한 줌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들의 세상살이가 아닌가. 말로만 죽음을 논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온 동네가 죽음의 마귀가 들끓는 아비규환의 역병을 목도한 경허에게 생사의 업력을 깨부수는 것이 다른 어떤 일보다 앞서는 것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사해탈의 문은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니다. 화두를 참구해 들어갈수록 화두에 붙잡히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가 되어야 의정을 깨부순다지만, 뜻을 찾으면 구를 잊어버리고 구를 찾으려면 뜻을 잊어버리는 모순을 되풀이하여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활구로 경절문을 확연히 열어젖히고 싶지만, 깨침의 순간은 오지 않고 세월만 덧없이 흘러가고, 그럴수록 경허는 초조감과 더불어 막다른 길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이 당시 경허의 심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된 바 없고, 방한암의 「선사 경허화상 행장」이나 만해의 「약보(略譜)」에 짤막히 몇 토막의 언급이 있다.
화두는 해석되지 않고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듯하며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하고 참구하다. [……]
문을 폐쇄하고 단정히 앉아 전심(專心)으로 참구(參究)하는데 밤으로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혹은 칼을 갈아 턱에 괴며 이와같이 삼개월을 화두를 순일 무잡하게 들었다. 석명정, 앞의 책, 409쪽.
화두에 전념하던 당시 경허의 심경을 어느 정도라도 헤아려 보기 위해 위의 인용에서 ‘은산철벽’과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등에 일단 주목해 보자. 화두를 궁구해 들어가 막다른 길에 도달한 심적 상태를 나타낸 것이 ‘은산철벽’이다.
참선자가 궁극적으로 생사번뇌를 끊어버리느냐 마느냐 하는 마지막 길목에서 부딪치는 것이 백척간두이다. 흥미로운 것은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와 ‘은산철벽’이 ꡔ선문촬요ꡕ 제20장 「선경어(禪警語)」에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ꡔ선문촬요ꡕ는 현재 여러 가지 유통본이 있다. 경허 생존 시 간행된 범어사 판본은 구독하지 못했으나, 여기서 필자는 경허 성우 편, 한길로 현토 ꡔ현토 선문촬요ꡕ(보련각, 1982)를 참고했다. 그리고 ꡔ선경어ꡕ의 번역문은 만공문인 혜암의 ꡔ선문촬요ꡕ(현문사, 1991)를 참조하였다.
만일 진정한 참선객이라면 눈은 소경 같고 귀는 귀머거리 같으며, 생각이 일어났다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치는 것 같으리니, 이와같이 공부하면 비로소 서로 응하게 되리라.
이와같은 박산무이선사(博山無異禪師)의 말은 다른 여러 곳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두 참구를 통해 진정한 의문을 일으켰다면 그는 모든 것에 눈멀고 귀먹었음과 동시 모든 사물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참구하는 마음과 은산철벽이 서로 부딪쳐 감응했을 때 깨달음의 순간이 올 것이다. 이 순간의 심적 정황을 무이선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해 놓고 있다.
만일 의문이 활짝 일어난 이라면 마치 철벽은산 속에 앉은 이가 오직 살길[活路]을 찾으려 하는 것과 같이 할지나, 만일 살길을 찾지 못했다면 어찌 편안할 수가 있으리오? 혜암 역, ꡔ선문촬요ꡕ, 273~276쪽.
은산철벽에서 살길을 찾지 못한 이는 결국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죽음의 나락에 떨어지고 마는 절대절명의 위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 마지막 공부는 간절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간절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오고 졸음이 오고 방종이 생긴다. 게으른 자는 생사의 벽을 떨쳐버리려는 마지막의 관문을 깨부수지 못한다. 무이선사는 게으른 자를 다음과 같이 경책한다.
공부를 하되 아침저녁으로 게으르지 말지니, 자명(慈明) 대사는 밤에 잠이 오면 송곳을 들어 찌르고, 또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도 도를 위하여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셨거늘 나는 어떤 사람인고,” 하셨느니라. 위의 책, 280쪽.
대개 석달 동안 계속된 것으로 알려진 경허의 용맹정진은 은산철벽을 향해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고 나아가면서 마지막 경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허가 깨달음을 맞이하는 계기는 우연한 질문으로 촉발된다. 물론 그것은 화두의 참구가 마지막 지점까지 이르지 못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경허가 증득했다는 이 순간은 쇠잔한 왕조의 마지막 몸부림과 더불어 침체와 답보를 거듭하던 한국 불교사가 대보름달과 같은 찬연한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중세의 어둠 속에서 폐사 직전의 명맥을 유지하던 한국 불교가 자기 정당성을 가지고 근세로 도약하는 순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방한암은 경허에게 깨달음을 촉발시킨 이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 사미승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데 속성은 이씨라 그의 부친이 좌선을 여러 해 동안 하여 스스로 깨달은 것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 이처사라고 부르는데, 사미의 사부가 마침 그 집에 가서 처사와 이야기를 하는데, 처사가 말하기를 “중이 필경에는 소가 된다”하니 그 스님이 말하기를 “중이 되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서 그 시주의 은혜를 갚게 된다.”고 했다. 처사가 꾸짖어 이르기를 “소위 사문의 대답이 이렇게 도리에 맞지 않습니까?” 그 스님이 이르기를 “나는 선지(禪旨)를 잘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오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하니 처사가 이르기를 “어찌 소가 되기는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이르지 않는고?” 그 스님이 묵묵히 돌아가서 사미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버지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사미가 이르기를 “지금 주실(籌室)화상이 선공부를 심히 간절히 하여 잠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잊을 지경으로 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와 같은 이치를 알지라, 사부께서는 가서 물으소서.” 석명정 역, 앞의 책, 409~410쪽.
경허는 “어찌 소가 되기는 되어도 뚫을 곳이 없다”는 말에 활연대오했다고 한다. 콧구멍이 없는 소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콧구멍이 없는 소는 소가 아니다. 은산철벽에 생각을 끊으며 좌선하던 경허에게 하나의 실바람같은 콧구멍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은산철벽의 마지막 경계란 숨막히는 긴장이었을 것이며, 경허는 이 숨막힌 순간 콧구멍 없는 소, 그것이 바로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오도의 순간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경허 자신의 말을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소가 되어도 콧구멍이 없다’라는 말을 듣고 그 말 아래 나의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니 이름도 공하고 형상도 공하였는데 공하여 텅 비고 고요한 가운데 항상 빛나더라. 이로부터 하나를 들으면 천번 깨달으니 눈앞은 외로이 밝은 적광토(寂光土)요 정수리의 뒷모습은 금강의 세계로다.
사대(四大)와 오음(五陰)이 청정 법신이요 극락세계란 화탕지옥과 한빙지옥을 겸한 곳이며 화장찰해(華藏刹海)란 검수(劍樹)와 도산(刀山)의 법성토(法性土)이며 썩은 거름 무더기와 똥무더기가 대천세계이며 개미구멍과 모기눈썹이 삼신(三身)과 사지(四智)이며 허공과 삼라만상이 눈에 부딪치는 대로 본래 현신이니 크게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석명정, 앞의 책, 341쪽.
위의 인용에서 전반부는 텅 비고 고요하고 빛나는 밝음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깨달았다는 것이고, 후반부는 더러운 육신이 청정법신이며 거름무더기 똥무더기가 대천의 세계라는 것이다. 삼라만상의 천진을 보았다는 것은 자신의 실체를 증득한 자만이 가능한 표현이다.
수많은 경전에서 본래 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이 경계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은산철벽에 단좌하고 생의 모든 기를 하나로 모아 기필코 자신의 본성을 증득하겠다는 결사의 발원이 없다면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경허가 이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인연들이 겹쳐진다. 우선 대강사로 이름을 날린 10년여의 경전 공부, 다음으로는 전염병이 창궐하던 지역에서의 죽음의 절박성에 대한 체험, 그리고 그의 화두를 마지막으로 깨뜨려 주는 콧구멍 문답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더욱 기연인 것은 콧구멍문답이 화두 참구의 첫 단계였다면 그렇게 강한 화답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원래 경허가 참구하던 화두는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부수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 짐작되는데, 이 화두로는 쉽게 콧구멍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발원의 계기를 만들어 준 참혹한 죽음의 순간들을 눈앞에 보았지만 경허에게 그 현실이 직접적으로 깨달음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오랜 절차탁마가 필요했던 것이다. 경허가 붙잡고 고투하던 화두였던 눈먼 당나귀에 숨구멍을 불어넣은 것이 콧구멍이고, 이를 통해 그는 살아 숨쉬는 자신의 육체도 청정법신으로 깨달을 수 있었고 삼라만상의 살아 있음도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눈을 얻었다고 할 것이다.
이 과정을 살피면서 마지막 한 가지 더 말할 것은 경허가 콧구멍문답을 들은 것이 동지달 보름께라는 사실이다. 그날 밤 휘황한 달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을 것이고, 은산철벽 앞에 화두에 몰두하던 경허에게도 세상의 어둠을 환하게 비추는 밝음의 순간이 번개불처럼 펼쳐졌을 것이다. 작은 소리만 들려도 화답하는 소리가 온 세상을 울렸을 것이다.
이 열림과 겹쳐짐의 순간 경허는 대중들이 시주만 축내는 중도 아니요, 콧구멍 없는 소도 아니요 눈먼 당나귀는 더욱 더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자신의 육신 또한 청정법신이 되고, 본성을 증득한 경허는 사구를 활구로 만드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와 조사와 더불어 스승이 된다는 임제의 경책을 실현한 것이다. 참선자가 조사의 관문을 꿰뚫는다고 할 때 그것은 ꡔ선가귀감ꡕ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기가 강철소의 몸뚱이를 뚫고 들어가듯이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버리고 한번에 몸뚱이째 뚫고 들어간 것이다. 마지막 경계에서 한번에 몸뚱이째 뚫고 들어가 하나가 될 때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초목과 기왓장이 화엄이고 법화가 된다는 것이 경허의 깨달음이다.
그런데, 깨달음 이후 경허의 경허다움이 나타난다. 그는 성급하게 깨달음을 선언하지 않는다. 또 경허가 누구에게 깨달음을 결택받았다는 기록도 없다. 오히려 그는 게으르게 자신을 반조한다. 이때의 일이 방한암에 의해 짧게 기록되어 있다.
드디어 방장실(方丈室)에 누워 사람들의 출입을 상관하지 않았다. 만화강사가 들어와서 보아도 또한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강사가 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고?’ 하니 ‘일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고 대답하자 강사가 말없이 나가고 말았다. 석명정 역, 앞의 책, 410쪽.
만화강사와 경허의 문답에서 우리는 일견 경허가 스승에 대하여 무례하게 행동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자신의 깨달음을 인정받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경허의 대답이 그것을 입증한다.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일 없는 사람이다. 일 없는 사람은 누구의 출입에도 상관하지 않고 드러누워 있을 수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라고도 해석된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의 문답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경허는 스승 만화강사가 자신의 깨달음을 결택하여 줄 바른 눈이 없음을 인지한다. 만화강사는 견성을 목표로 한 참선 수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화강사가 비록 교학을 통해 명성을 떨쳤다 하더라도 참선을 통해 견성(見性)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경허의 행동은 방자한 것으로만 비쳐질 수도 있다.
경허의 참 스승이었던 서산은 ꡔ선가귀감ꡕ에서 깨친 이후의 보임수행을 강조하고, 깨친 뒤에 잘못하면 독약이 될 수도 있다고 하여 크게 경계하고 있다.
한 생각을 깨친 후에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서 눈이 바른가를 결택받아야 한다. 심재열 강설, 앞의 책, 97쪽.
그러나, 경허에게는 자신을 결택해 줄 스승이 주변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듬해 봄 연암산 천장암에 가 보임장양에 들어간다. 이 일년여에 걸친 보임장양이야말로 경허를 경허로 만들어 준 일대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서산이 멸 후에 진묵이 응화성으로 법을 이은 것처럼 경허 또한 서산의 ꡔ선가귀감ꡕ의 지침대로 보임장양을 통해 깨달음의 자기 인증과정을 점검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산은 ꡔ선가귀감ꡕ에서
이치는 대번에 깨칠 수 있지만 버릇은 한번에 없어지지 않는다.
라 하여 깨우침 다음의 보임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보조 또한 ꡔ진심직설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진심이 앞에 나타났을 때 아직 습기를 버리지 못하고 전에 익히던 망(妄)의 경지를 만나면 때로는 생각을 잃는 수가 있다. 마치 소를 기를 때에 그것을 잘 다루어 이끄는 대로 따르게 되었더라도 그래도 채찍과 고삐를 놓지 않고, 마음이 부드럽고 걸음이 평온하여 곡식밭에 몰고 들어가더라도 곡식을 해치지 않게 되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손을 놓는 것과 같다. 그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목동의 채찍과 고삐를 쓰지 않더라도 자연히 곡식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도인이 진심을 얻은 뒤에는 먼저 공을 들여 지켜, 큰 힘의 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김달진 역주, ꡔ보조국사 전서ꡕ(고려원, 1987), 131쪽.
소의 콧구멍을 뚫었다 하더라도 그걸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누생의 습기를 길들이고 지켜 중생을 이롭게 하는 길을 찾는 것이 깨달은 자의 진정한 길일 것이다.
천장암에서 한벌 누더기 옷으로 일년여의 보임장양을 마친 경허는 1881년 6월 어느날 이가 들끓는 옷을 활짝 벗어 버리고 「오도가(悟道歌)」를 부른다. 무명 속에 헤매는 중생들을 위해 「무생의 일곡」을 부르며 중생을 이롭게 할 길을 찾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노래의 첫 부분은 안타깝게도 깨달음의 인증을 전해 받고 전해 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시작된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衣鉢)을 누구에게 전하랴
의발은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네 석명정 역, 앞의 책, 340쪽.
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
여기서 경허는 우선 끊어졌던 법맥을 말하고, 앞으로 이어 갈 법맥을 말한다. 끊어진 법맥을 찾는 것은 자신이 하였지만 과연 앞으로 누가 이 법맥을 이어 갈 것인가. 아니 오히려 그러함으로 인해 그가 「오도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이 부여된다. 범부들이 ‘성인의 경계는 나의 분수가 아니다’고 포기하는 것을 말리고 후학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참된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알려야 하는 것이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초목과 기왓장이 곧 화엄이며 법화라고 하는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경허는 말한다. 왜 그러한가. 자신의 자성을 환하게 꿰뚫어 보았고, 그를 통해 사문의 본래 면목을 관하였기 때문이다.
솔바람 소슬하니 사면청산이요, 가는 달이 밝으니 하늘이 물이런듯.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재잘거림이 항상 대용(大用)을 나타내지 않는 곳이 없도다. 시정의 천자(天子)를 준들 할까 보냐. 평지 위의 파도요 구천의 옥인(玉印)이로다. 석명정, 앞의 책, 341쪽.
눈에 부딪치는 대로 삼라만상의 천진을 보았다면 지옥과 천국이 따로 없는 것이다. 꾀꼬리의 노래와 제비의 재잘거림이 모두 아름다운 본지풍광의 모습들이다. 그러므로, 경허는 「오도의 노래」를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에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위의 책, 343쪽.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鷰巖山下路 野人無事泰平歌
위의 오도시에서 들사람의 태평가와 의발을 전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앞뒤가 서로 전혀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들사람의 태평가가 본지풍광의 노래 소리이며, 자연의 대용(大用)을 알려 주는 깨달음의 목소리이다.
부처나 조사라 이름하여 선이니 교이니 떠들 필요가 없다.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다. 오직 들사람의 태평가만이 본지풍광의 목소리를 전해 준다. 그것은 경허가 깨달음 이전에 듣던 무심한 노래 소리가 아니다. 들사람의 노래 소리는 예나 이제나 같지만 거기서 천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깨달음 이전의 경허가 아니라 깨달음 이후의 경허이다.
경허가 깨달았느니 그렇지 않느니 분분한 시비가 있었을 것이다. 다 들사람의 태평가를 본래 천진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이다. 경허는 「천장암(題天藏庵)」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속세와 청산 어디가 옳은가
봄 성터 어디엔들 꽃 아니 피랴
누군가 성우(惺牛)의 일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 속의 겁외의 노래라 석명정, 앞의 책, 211쪽.
世與靑山何者是 春城無處不開花
傍人若問惺牛事 石女心中劫外歌
지옥이냐 극락이냐 따지지 말라. 바로 눈 앞의 성터에 봄꽃이 피어 있지 않느냐. 경허가 이러다 저러다 말하지 말라. 구태여 시비를 가린다면 내가 하는 말은 돌계집 마음속에 담겨 있는 겁외의 노래이다. 문자가 끊어진 곳에 전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이 모두가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돌계집 마음속에 무슨 노래가 있겠는가. 그러나, 경허가 「오도의 노래」에서 ‘산빛은 문수의 눈이요, 물소리는 관음의 귀로다(山色文殊眼 水聲觀音耳)’라고 했을 때 문수의 눈과 관음의 귀로서 듣는다면 돌계집의 겁외의 노래도 별것이 아니다. 들사람의 태평가가 본지풍광의 노래 소리임을 듣지 못하는 자에게 돌계집의 노래 소리라고 엉뚱하게 말하여 들려 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끊으라 해도 끊지 못하는 자에게 노래를 들려 주는 것은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1891년 6월 「오도의 노래」를 부르고 일어난 경허는 이후 1904년경 북으로 화광동진의 무애행에 나서기까지 호서 지방은 물론 영남북을 누비면서 정법의 깃발을 휘날린다. 경허로 인해 한국 근세의 불교가 선풍을 새롭게 휘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이 개설되는 선원에서는 모두가 앞을 다투어 경허를 증명법사로 초빙하여 불법을 굳건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경허가 쓴 수많은 <법어(法語)>, <서문(序文)>, <기문(記文)>, <서간(書簡)>, <행장(行狀)>, <영찬(影贊)>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남쪽에서 자신의 할 일이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던 경허는 1904년 가을 안변 ‘석왕사’ 개분불사를 마치고 세속으로 들어가 수수입전의 무애행을 감행한다. 이는 물론 어느 날 갑자기 단행된 것은 아니다. 경허로서는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온 일이기도 하다. 1902년 범어사에서 ꡔ선문촬요ꡕ를 편찬하여 선문의 바른 길을 제시한 그는 혜월(彗月)에게 전법게를 주고, 1903년에는 한암(漢岩)에게 전별사와 더불어 게송을 전하고 1904년에는 만공(滿空)에게 무문인(無文印)을 부촉한다.
이 모두는 그가 누구에게 의발을 전하랴고 반문하던 1881년의 「오도의 노래」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예들이다. 경허가 꿰뚫어 보기에 이 세 사람이야 말로 앞으로 조선의 불교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예견했을 것이며, 이것은 그대로 적중하여 이들이 한국 근세의 불교를 이끌어 나가는 기둥이 되었던 것이다.
경허는 왜 모두가 우러르는 방장이나 조실의 자리를 박차고 떠났을까. 그 이유의 일부는 우선 한암에 준 전별사에 나타난다.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余性好和光同塵 掘淇泥而又喜乎曳其尾者也)’라고 경허는 겸손하게 고백한 바 있다. 이와 같이 기질적인 면에서 우선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나타난다.
아는 것은 얕고 이름만 높으니 난세에 위태로워
어느 곳에 이 한 몸 숨겨야 할지
어촌이나 술집이 어느 곳엔들 없으랴만
이름을 감추려하니 더욱 드러나는 것 두렵네 석명정 역, 앞의 책, 205쪽.
識淺名高世危亂 不知何處可藏身
漁村酒肆豈無處 但恐匿名益新
위의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읊음(自梵魚寺何海印寺道中口号)」에서 경허는 자신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자신을 숨기기 어려워졌음을 토로한다. 그가 정말로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삼남지방은 이미 불가할 것이고 정말로 자신을 숨기려 한다면 금강산 너머 북쪽 변방이었을 것이다. 적절한 기회를 엿보던 경허는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던 만공에게 무문인을 부촉한 다음 해인 1904년 가을 북쪽으로 올라가 안변 석왕사에서 오백나한 개분불사를 증명하고 홀연히 불문을 떠나가니, 이는 한국 불교사에 남을 또 하나의 기념비적 무애행으로 기록된다.
불가에서 그가 할 일을 다 마치고 마지막 무애행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가 한암에게 말한 대로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쉽게 결행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경허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시기와 질투가 높아 갔을 것이고, 모함과 비방도 많았을 것이다. 그가 결택한 무애행은 그가 「심우송(尋牛頌)」에서 말한 ‘이류중사(異類中事)’로서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선택된 것이다. 조사와 방장으로 추대되고 받들어지는 것은 진정 깨달은 자가 취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과 잇속을 탐하지 말라는 것은 서산이 ꡔ선가귀감ꡕ에서 수도자들에게 권한 마지막 충고 중의 하나이다.
금륜왕의 자리를 침뱉고 설산에 여러 부처님의 꼭같은 법칙이다. 말세에 염소바탕에 범의 가죽을 쓴 무리들이 염치없이 바람을 타고 세력에 쏠리어 아첨하면서 귀염받으려하니 가엾다. 정신차려야지! 마음이 명리에 때묻은 이는 권세의 문에 아부하며 풍진에 휘말리어 도리어 세속 사람의 웃음거리만 되고 마니, 이런 중을 ‘염소바탕’이라 함은 이 따위 여러 가지 행위를 증거삼아 하는 말이다. 심재열 강설, 앞의 책, 200쪽.
어느 시대에나 명리에 때묻은 사람은 참된 수도자가 아니다. 권세에 아부하고 세속 사람의 웃음거리일 뿐이다. 경허는 결코 이런 ‘염소바탕’의 수도자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도처에서 증명법사나 하고 다닌다면,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름이 높아질수록 이름을 버리기 어렵다. 차라리 세속인과 함께 화광동진하는 것이 참다운 길이다.
털을 쓰고 겸하여 뿔이 났으니
등앞에 말이 쓸쓸하다
조사의 몸 밖으로
긴 세월을 시장거리로 싸다니네 석명정 역, 앞의 책, 354쪽.
被毛兼戴角 燈木扇語啾啾
祖師今身外 長年走市頭
경허는 그가 나름대로 쓴 「심우송(尋牛頌)」의 마지막을 위의 ‘이류중사(異類中事)’로 끝맺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털을 쓰고 겸하여 뿔이 났으니’란 무엇인가. 신도들의 공양을 함부로 받았다 소로 태어난 것을 말한다. ꡔ선가귀감ꡕ에서 서산은 용수의 ꡔ대지도론(大智度論)ꡕ을 인용하면서 ‘한 도인이 다섯 알 좁쌀 때문에 소가 되어, 살아서는 힘으로 갚고 죽어서는 가죽과 살로써 갚았다’는 말을 통해 신도들의 공양이 얼마나 큰 짐이 되는가를 말하고 있다. 심재열 강설, 앞의 책, 209쪽.
경허는 이름만 헛되이 높아 신도들의 공양을 함부로 탐하기보다는 차라리 시정에 몸을 숨겨 자신의 무애행을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 판단한 것이다. 시장거리를 헤매는 자는 조사이면서 조사가 아니다. 시정잡배와 섞여 살면서 그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하면서 그들을 제도한다. 부처나 조사가 따로 없다. 돌사람이 피리 불고 초목과 기왓장이 화엄이며 법화이다. 시정의 흙탕물에 꼬리를 끌고 사는 자들이 모두 비로사나불이다. 무생곡을 어디에서 부를 것인가. 시장거리에서 그들과 함께 무생곡을 부를 때 참다운 깨달음이 실현된다.
젊은 날의 경허가 경험한 전염병이 창궐하던 그 마을이 깨달음의 토대이다. 경허가 헛된 이름을 떨쳐버렸다는 데서 그의 깨달음은 완성된다. 일 없는 들사람은 연암산 아래서 태평가를 부르고, 코구멍 뚫린 경허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북쪽 변방에서 시정인들과 무생곡을 부른다. 이처럼 극적이고, 장엄한 무애행은 한국 불교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기념비적 사건이다. 시방세계가 안팎이 없어서 대법왕인 경허의 자유자재는 시정의 천자(天子)를 준다 한들 마다할 것이다.
10년 가까이 화광동진의 세월을 평북 영변, 강계, 갑산 등지를 떠돌던 경허는 1912년 4월 학동들이 풀뽑는 것을 구경하다 홀연히 피곤하다고 하며 누웠다가 다음과 같은 반산보적(盤山寶積)의 게송을 읊고 열반한다.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석명정 역, 앞의 책, 416쪽.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경허는 이 게송 다음 붓에 먹을 듬뿍 찍어 마지막 힘을 다하며 일원상(一圓相)을 그려 놓고 천화하니, 게송의 질문에 답한 것이 오직 둥근 원 하나였던 것이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은 경지는 바로 그가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문득 깨친 바로 그날 그 순간에 보았던 텅 비고 맑고 고요한 가운데 빛나는 세계를 말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더욱 공교로운 것이 이 일원상이 ꡔ선가귀감ꡕ의 출발점이었고, 경허가 실천한 무애행을 완성하는 마지막의 응답이었다는 데 있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로 시작되는 ꡔ선가귀감ꡕ은 이 ‘일물’이 바로 부처도 나기 이전의 ‘뚜렷이 둥근 한 모양(凝然一圓相)’이라고 전하니, 그것은 한국 선불교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요, 경허가 끝내 후인들에게 전하고자 한 마지막 유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허야말로 선불교의 조사관문을 타파하는 데 있어서 정통적 옛 법을 그대로 따르면서 견성의 경지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이를 무애행의 실천을 통해 표본적으로 완성한 대선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Ⅳ. 경허, 그리고 한국 불교와 21세기
이 글에서 필자는 경허의 선시 하나하나를 해석하는 데 주력하지 않았다.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경허와 같이 독특한 방법으로 깨달음에 이른 선사들에게는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무엇인가 그의 세계를 하나로 관통하는 어떤 연속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경허는 파격적인 인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경허야말로 보조나 서산의 선맥과 화두의 참구의 방법을 그대로 준수하면서 자기 깨달음을 실천하고 완성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필자는 이 글의 논지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경허 자신의 문장은 물론 그가 편술한 ꡔ선문촬요ꡕ를 활용하면서 보조의 ꡔ수심결ꡕ이나 서산의 ꡔ선가귀감ꡕ을 중요한 해석의 전거로 활용하였다. 그것은 경허가 어디까지나 한국 불교의 조계종풍의 간화선의 대성자이며, 그 전통속에서 선의 불꽃을 찬연하게 뿜어냈음을 입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 서산의 진흙소가 허공과 대지를 찢고 간 후 19세기 후반 경허의 콧구멍 뚫린 진흙소가 뇌성벽력처럼 울부짖어 한국의 선불교는 당당하게 그 법맥의 정통성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많은 수도자들이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경허처럼 발원의 동기나 과정이 뚜렸하고 그 행동과 실천에 일관성이 정당하게 부여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경허에게는 그의 깨달음을 인증해 줄 선사가 없었다는 것이 특징인데, 그 스스로 고법을 준수하면서 무애행으로까지 나아가 본지풍광의 일원상을 실천적으로 완성했다는 것은 어쩌면 경허 이전에도 그러하고 경허 이후에도 매우 드문 일이 될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경허가 지나치게 경절문에만 치우쳐 사회 현실을 돌보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분들도 있다. 일면 정당한 지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경허는 국운이 기울던 당시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했을 것이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깨달음을 실천하고 의발을 전해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확립해 나가는 길에 있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경허로 인해 한국 불교는 그 동안의 부진과 황폐함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 받아 자기 존재의 자긍심을 얻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 오는 과정에서 경허가 짊어져야 했던 숙명의 사명이었던 것이다.
경허와 그의 법제자들인 만공, 한암, 혜월 등에 의해 선의 불꽃을 점화시킨 한국 불교는 식민지 시대의 고난을 뚫고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정신적 기둥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1942년에 간행된 ꡔ경허집ꡕ(중앙선원판)의 「서문」과 「약보」를 쓴 만해 한용운 또한 그의 직접 법제자는 아니지만 만공과 깊은 친교를 맺으면서 1910년대에 불교 유신 운동을 전개하고 기미년 독립 운동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1926년 시집 ꡔ님의 침묵ꡕ으로 만인의 심금을 울리면서 한국 현대시사를 빛나게 장식한 것은 모두가 불법의 인연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의 불교는 어떠한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다고 온세상이 야단법석이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의 전환은 그 이전의 세기적 전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된다. 기술 정보의 혁명은 이제 기존의 삶의 방식이나 사고의 패턴을 완전히 뒤바꿔 놓고 있다. 특히 생명 공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은 이제 머지않아 스스로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복제하는 기술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상 현실에서의 인간 복제를 통해 가상 인간까지도 만들어 낼 것이라고 한다.
과연 21세기에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무(無)라고 신도들을 적당히 위로하는 한편 불사나 벌이고, 스스로는 명리 추구에 급급할 것인가. 아니면, 경허와 같이 대발원을 세우고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불교적 깨달음을 증득하고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할 것인가.
대저 불법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실로 마음을 일으켜 힘을 써서 행하여 얻기를 마치 무거운 나무와 돌을 운반하는 것같이 하거나 문무의 기술을 학습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는 특별한 작용도 아니요, 다만 만상이 본래 없음을 비추어 통달하면 마음바탕이 밝고 깨끗하며 안락하여 조작이 없고 가볍고 무거움도 모자라고 남음도 거래와 생사도 없도다. 석명정 역, 앞의 책, 51쪽.
위와 같은 경허의 말을 떠올릴 때 과연 오늘의 불법은 어떠한가. 마음의 바탕을 통달하려는 노력보다는 이상하고 특별한 법으로 대중을 미혹하게 하려는 듯한 혐의가 많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마음 바탕에 뿌리내리지 못한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가상의 것들이 횡행하는 세상이 될수록 사람들은 참마음을 찾으려 할 것이고, 마음의 바탕을 밝고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는 불법을 갈구할 것이다.
경허의 참다운 가르침은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려 한 것이 아니다. 옛법을 준수하며 용맹정진하여 깨달음을 증득하고, 불법의 바른 전통을 세웠을 뿐이다. 불교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른 불법의 전통을 세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오늘의 우리에게 경허가 경허인 것은 바른 불법을 세우고 무애행을 통해 이를 실천으로 완성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컴퓨터를 사용하는 우리가 말하는 가상의 세계란 헛것들의 세계이다. 경허가 「심우송」에서 말한 대로 ‘목녀의 꿈과 석인의 노래여 이것은 육진(六塵)의 그림자로다’와 같은 것들이다. 가상 현실에 현혹되지 않는 법이 불법의 바른 법임을 ‘마음에 비추어 통달’한 것이 경허의 불법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세기 이전의 경허가 아니라 새로운 경허이다. 물론 옛 경허가 없다면 새 경허도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 근세 불교의 몽매를 타파한 것이 옛 경허라면, 오늘의 한국 불교의 몽매함을 타파할 경허는 새로운 세기의 첫새벽을 여는 새 경허여야 할 것이다. 경허의 육신은 갔지만, 경허의 정신은 거듭 우리에게 분발을 촉구한다. 경허이면서 경허 아닌 경허를 찾는 마음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경허를 진정으로 되새기며 돌이켜 보아야 할 필연적 당위성을 우리 모두에게 부여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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