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주제;鏡虛의 禪淨 思想
최현각(동국대학교 교수)
Ⅰ. 序 言
鏡虛惺牛는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鏡虛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는 內憂外患으로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시국이었다. 더욱이 조선의 배불정책 속에서 이와 같은 선승이 배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鏡虛는 조선 말기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철저하게 自心을 궁구하는데 일관하여 마침내 개인적으로는 己事究明의 大事를 이루었고, 사회적으로는 菩薩道를 실천하는 데 일생을 바친 스님이다.
그런데 鏡虛의 이러한 내면에 흐르고 있는 自利利他의 정신을 禪과 淨土의 사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곧 개인의 내면적인 참구는 禪法이었고, 중생구제의 보살도는 淨土思想의 구현을 몸소 중생과 함께 실천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鏡虛의 삶을 이와 같이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禪淨의 雙修 내지는 禪淨의 一致라는 結節點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은 鏡虛에게 있어서 그의 禪淨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상적인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선사상의 기초가 철저한 자기인식이었다면, 중생을 정토에 왕생시키려는 염불수행의 권장은 당시에 가장 널리 대중화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鏡虛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특히 ꡔ觀無量壽經ꡕ의 觀想法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우선 ꡔ觀無量壽經ꡕ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정토관 내지는 염불사상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禪과 淨土思想의 兼修 내지 一致에 대하여 중국에서의 그 원류를 살펴보고, 아울러 선정융합의 대표적 선사인 唐代의 永明延壽에 대하여도 간략하게 살펴 鏡虛의 禪淨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Ⅱ. 禪淨雙修의 源流
불교가 종교로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安心立命 혹은 安身立命이라 할 때 安心 내지 安身의 방식으로는 自心의 本源性을 禪을 통해서 추구하려 하고, 立命을 위해서는 이상세계를 겨냥한 내세의 행복으로서 淨土를 추구하고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의 차이라기보다는 상보성의 관계라 보는 것이 禪淨雙修의 수행이었다. 따라서 전자가 己事究明의 證悟를 추구하는 자기통찰의 핵심이라면, 후자는 기도와 염불 등의 행위를 통한 자기구제의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비교적 일찍부터 이 선과 정토의 둘은 내외적으로 서로간에 相補的인 관계로 修習되어 왔다.
이와 같은 禪淨雙修의 원류는 동진시대 竺僧顯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출가하여 禪定을 닦은 후 다시 정토의 업행을 닦았다. 그의 염불은 일종의 觀想念佛이었다. 한편 竺僧顯보다 약 80년 후에 禪定과 淨土를 쌍수한 사람은 廬山의 慧遠이었다. 慧遠은 般若台精舍의 無量壽佛像 앞에서 123인과 함께 西方願生의 무리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행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행한 염불은 實相의 염불은 아니었던 것 같다. 「廬山白蓮社誓文」 · 「出三藏記集」 · 「高僧傳」 등의 慧遠傳 등에서 보자면 彌陀의 身土를 용인하고 있지 않으므로 實相念佛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오히려 龍舒의 「淨土文」 속의 寄瑞의 설명에서 보면 觀想念佛에 해당하여 禪定三昧 속의 見佛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의 禪淨雙修로는 鳩滅什의 제자 僧叡를 들 수 있다. 僧叡는 「關中出禪經序」에서 羅什으로부터 禪法을 받고 ꡔ坐禪三昧經ꡕ의 禪觀을 修習하여 淨土往生을 願求하였다. 특히 ꡔ坐禪三昧經ꡕ의 내용들은 이후 선종의 성립기에 있어서 四祖 道信을 비롯하여 五祖 弘忍 등 소위 東山法門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경전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에 의해서 선종의 승려로서 염불을 의용한 사람은 제4조인 大醫道信으로서 ꡔ文殊說般若經ꡕ ꡔ文殊說般若經ꡕ 卷下, (大正藏8, p.731上~中). “文殊師利言 世尊 云何名一行三昧 佛言 法界一相 繫緣法界是名一行三昧 若善男子善女人 欲入一行三昧 當先聞般若波羅蜜 如說修學 然後能入一行三昧 如法界緣 不退不壞 不思議無礙無相 善男子善女人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捨諸亂意 不取相貌 繫念一佛 專稱名字 隨佛方所 端身正向 能於一佛念念相續 卽是念中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
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일행삼매에 들고자 하거든 마땅히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자리하여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버려 모습에 끄달리지 말고, 마음을 한 부처님에게 두어 오로지 부처님의 名字를 부르며, 부처님 계신 곳을 따라 단정한 몸으로 바로 향하여 그 一佛을 끊임없이 念하면 그 염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을 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 부처님의 공덕은 무량무변하기 때문이다. ꡔ楞伽師資記ꡕ, (大正藏85, p.1286下) “善男子善女人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 捨諸亂意 不取相貌 繫心一佛 專稱名字 隨佛方便 所端身正向 能於一佛 念念相續 卽是念中 能見過去現在未來佛 何以故 念一佛功德無量無邊”
곧 ꡔ文殊說般若經ꡕ의 一行三昧의 念佛은 곧 念心이다. 念心이란 心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直心의 體得이다. 心 그 자체를 달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心이 心으로서 본래부동의 상태임을 말한다. 따라서 道信의 ꡔ文殊說般若經ꡕ에 의한 一行三昧는 念佛임과 동시에 念心이다. 이 念心 곧 念佛心이란 다름아닌 無所念이다. 無所念이 念佛이고 念心이므로 念佛하지 않고 念心하지 않는 그것이 곧 念佛의 의미이다. 곧 卽念無念이다. 소위 禪的인 念佛로서 禪과 念佛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바로 禪淨의 兼修가 나타나 있다. 곧 道信의 사상적인 핵심은 五門의 禪要가 열거되고 있는 바, 그 가운데 第五門의 守一不移의 禪定이 강조되어 있다. ꡔ楞伽師資記ꡕ, (大正藏85, p.1288上)
이것은 一行三昧의 실천으로서 그 방편으로 念佛이 사용되고 있다. 이 一行三昧에서는 ꡔ文殊說般若經ꡕ을 敎証으로 하여 염불이 강조되고 있어 ꡔ楞伽師資記ꡕ, (大正藏85, pp.1286下~1287上) “又依文殊說般若經 一行三昧 卽念佛心是佛 妄念是凡夫 文殊說般若經云 文殊師利言 世尊云何名一行三昧 佛言 法界一相 繫緣法界 是名一行三昧 如法界緣不退不壞 不思議無礙無相 善男子善女人 欲入一行三昧 應處空閑 捨諸亂意 不就相貌 繫心一佛 專稱名字 隨佛方所 端身正向 能於一佛 念念相續 卽是念中 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
ꡔ坐禪三昧經ꡕ의 五門 가운데 第五의 等分行에서 말하는 염불과 일맥상통한다. 그리하여 도신의 一行三昧에 의하자면 염불하는 마음은 곧 부처이고 망념은 곧 범부이다. 이로써 보면 더욱이 道信의 염불은 般若思想에 근거한 ‘念佛卽是念心’ 으로서 ‘識無形 · 佛無形 · 佛無相貌’를 아는 것이 安心法門이다. 여기에서는 佛의 32相과 80種好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觀하는 것이 아니라 염불을 자기의 心識에서 주체적으로 포착하려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弘忍에게 있어서는 一字觀과 日想觀이 있어 이와 유사하기는 하나 염불 그 자체를 직접 언급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 문하에 배출된 南山念佛門과 淨土宗의 無相과 牛頭宗의 法持 등이 있다. 이들에게서 보이는 염불은 후대의 본격적인 염불수행과 같다는 점에서 ꡔ坐禪三昧經ꡕ에서 보는 선정방법으로서의 염불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 弘忍의 ꡔ修心要論ꡕ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만약 처음 좌선을 공부하는 자는 관무량수경에 의지하여 단정히 앉아 마음을 바르게 지니고 눈을 감고 입을 다물며 마음으로는 앞에 멀고 가까움을 응시하면서 일상관을 지어 진심을 지켜서 생각 생각을 머물러 두지 말라. ꡔ修心要論ꡕ, (大正藏48, p.378上~中) “若有初心學坐禪者 依觀無量壽經 端坐正念閉目合口 心前平視隨意近遠 作日想觀 守眞心 念念莫在”
곧 ꡔ觀無量壽經ꡕ에 의한 觀法을 초심자에게 권유하고 있다. 대개 좌선의 초입자는 마음이 산란하기 쉽기 때문에 그 산란한 마음을 막기 위하여 마음을 한 곳에 專注시키기 위하여 특히 ꡔ관경ꡕ의 관법을 의용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에서 아직 話頭의 참구법이 형성되기 이전의 시대에 日想觀 ꡔ觀無量壽經ꡕ, (大正藏12, p.340) “日想觀은 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을 專注하여 해가 하늘에 걸려 있는 북과 같이 둥근 모습으로 눈을 감건 뜨건 간에 명료하게 될 때까지 觀想한다. 그리고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극락정토가 서쪽에 있음을 생각한다”
을 의용하여 眞心을 지켜 나아가는 것이 꼭 염불이라고 보기에는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觀想法이라는 의미에서 정토수행으로 보고자 한다.
이것은 ꡔ觀無量壽經ꡕ에 의하여 하나의 대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통하여 소기의 목적에 이른다는 점에 있어서 정토의 염불과 통하는 것이다. 소위 觀經은 대승의 불보살과 그 국토에 대한 觀想을 경전의 종지로 삼아 경전의 명칭에 「觀」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다. 이를테면 여섯 觀經을 대표로 하는 경전군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을 「觀念經」이라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觀」의 梵語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 아직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觀」의 개념내용은 ꡔ觀佛三昧海經ꡕ에 보이는 端坐正受 · 心想明利 · 繫念一處 · 心不散亂 · 正觀과, ꡔ觀無量壽經ꡕ에 있는 正座西向 · 一心繫念 · 令心堅住 · 心不散亂 등 觀心의 방법에 대한 항목의 合意로부터 도출되어 있다. 즉 觀想對象에 대한 집중을 의미하는 繫念一處는 바로 奢摩他이며, 이 위에서 성립한 觀想은 毘婆舍那에 대응하는 것이어서 위의 두 경전이 목적으로 하는 觀佛三昧는 止觀雙運을 본질로 하고 있다. 따라서 觀經에 있어서 「觀」의 개념은 止觀의 觀과 그 雙運으로서의 三昧를 의미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하 이와 같은 禪觀思想 내지 念佛禪의 성격은 智詵-處寂-無相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無相은 南山念佛禪者이다. 無相은 無憶 · 無念 · 莫忘의 3句로써 引聲念佛을 가르쳤다. 그 방법은 高聲으로 한 호흡에 염불하여 길게 끌어 점차 작은 소리로 하여 마침내는 無聲으로 한다. 無聲이 된 후에 念을 멈추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음을 불심에 통하게 하고 소리로써 밖에 드러나게 된 佛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자기 자신이 心中에 있게 한다. 곧 소리를 勝緣으로 하여 자기의 마음에 佛心을 全現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引聲念佛이 지향하는 것은 無念이 되어 결국 三昧에 들어가는 것이다.
無相의 계통에서는 無念을 가장 중시한다. 이 無念으로 이끌어가고 그 無念을 전하는 데에 引聲念佛로써 하는 것이 특색이다. 引聲念佛은 一聲으로서 특히 無相이 강조하였다. 處寂의 제자인 承遠은 저 慈愍三藏에게서 염불삼매를 배웠다. 원래 慈愍三藏 慧日의 정토교에서는 禪과 律이 뒤섞여 있었으나 다분히 念佛禪的이다. 慈愍은 부처님이 설한 바의 바른 禪定을 가지고 마음을 한 곳에 두어 염염상속하여 惛沈과 掉擧를 여의어 평등하게 마음을 지니는 것으로 삼았다. 이것을 이행하는 도움방법으로써는 念佛 · 誦經 · 禮拜 · 行道 · 講經 · 說法 등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되돌이켜 정토왕생으로 회향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禪을 主로 하는 諸行幷修로써 그 목적을 왕생정토에 둔 것이다.
慈愍은 당시의 禪者의 태도를 배척한 것이지 선 그 자체를 배척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禪과 念佛의 一致를 허용하였다. 承遠은 慈愍의 염불선사상의 영향을 받아 염불에 중점을 두어 그의 거처를 彌陀台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念佛頭陀의 行을 닦는 것으로 道俗을 교화하였다.
그런데 承遠을 이은 念佛禪者는 法照이다. 承遠 · 法照는 모두 염불삼매의 수습자였다. 法照는 원래 慧遠의 염불행을 敬慕하여 ꡔ觀無量壽經ꡕ에서 설한 觀想을 닦았지만 靈感을 얻어 廬山으로부터 나와 承遠을 따랐다. 法照의 염불선사상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으로 「淨土五會念佛略法事儀讚」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는 五會念佛의 法事의 行儀讚文이다. 五會念佛의 五는 數이고, 會는 집회이다. 五音이 각각 집회하기 때문에 五會라고 한다. 곧 宮商角微羽의 오종의 음성을 가지고 염불하여 緩으로부터 急에 이르면서 餘念을 갖지 않는다. 五會念佛이 기초하고 있는 것은 ꡔ大無量壽經ꡕ 卷上의 「淸風時發出五音聲 微妙宮商自然相和」 에 있다. 그 五會의 제1회에서는 平聲으로 느릿하게 나무아미타불이라 염하고, 제2회에서는 平上聲으로 느릿하게 나무아미타불이라 염한다. 또 제3회에서는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나무아미타불이라 염하고, 제4회에서는 점차 급하게 나무아미타불이라 염한다. 이리하여 나아가 제5회에서는 더욱 급하게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이다. 이 5회의 염불을 닦는 데에는 그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지 않고 美音의 사람을 모아서 위의를 정제하고 端坐合掌하여 專心으로 佛을 염하고 調聲하여 염불한다. 念에 餘念이 없으면 念 곧 無念으로서 中道實相의 不二法門 第一義諦에 契當하게 된다. 이 5회염불의 공덕을 가지고 금세에 모든 번뇌와 고통을 제거하고 보리를 얻어 내세는 극락에 왕생하는 것이다.
이 있다.
이와 같이 法照의 염불은 承遠을 이어서 觀想念佛을 중심으로 한 口稱과 觀想을 병용한 염불이다. 곧 禪的인 念佛이다.
다음으로 牛頭宗 第四世인 金陵 延祚寺의 法持는 宋나라 戒珠의 ꡔ淨土往生傳ꡕ 卷中에 의하면 13才에 弘忍에 의해서 心을 얻고, 다음으로 慧方禪師에게서 참하였다. 정토에 뜻을 둔 것은 만년의 9년 정도로서 모든 것을 觀想으로 통섭하였다. 그의 염불은 觀想念佛로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 거사 백낙천의 禪淨思想도 주목된다. 그는 如滿과 同學이었던 惟覺에게 禪要를 묻고 나아가서 鳥窠道林에게 참하였다. 또한 정토에 관해서는 최초에는 兜率上昇을 원하였고, 만년에는 미타정토를 願生했다고 한다. 그가 선과 정토에 뜻을 둔 것은 아무래도 그의 만년시기와 시기를 같이 한다. 따라서 그는 선과 정토 모두를 닦았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선과 염불의 관계는 唐初에 善導系統의 指方立相念佛往生이 六祖 慧能系統의 無相看心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中唐 이후에 事理雙修의 형태로 점차 蓮社念佛로 승화되어 나아갔다. 服部英淳, ꡔ淨土敎思想論ꡕ p.119.
이것은 앞서 살펴본 선과 정토의 관계에 있어서 선이 본격적인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 것과 관계가 있다. 中唐 이후 선정의 한 특색이라 할 수 있는 혜능을 비롯한 철저한 自性 中心의 선법이 토착화되어 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禪淨의 相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선으로부터 정토교로 접근하는 것과 정토교로부터 선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선에 중점을 두면서 정토교의 신앙을 가진 것과 정토교를 선적으로 융화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4종염불의 觀像 · 觀想 · 實相의 3종염불과 염불삼매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3종의 염불은 좌선에 의한 관법이므로 廣義의 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염불삼매는 염불에 의해서 삼매를 성취하는 것이므로 결국 그것도 廣義의 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廣義의 선이긴 하지만 淨土行業과 修習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정쌍수의 영역이라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永明延壽를 들 수가 있다. 특히 延壽의 百八佛事에 의하면 禪과 淨土 이외에 華嚴 · 天台 · 眞言 · 法華 등 제종의 신앙에 입각하고 있으며, 그 숭배와 귀의의 대상은 諸佛로부터 天部에 이르고 있다. 그의 願生의 정토는 彌陀淨土 · 藥師淨土 · 兜率淨土 등 다양하다. 그리고 ꡔ萬善同歸集ꡕ에서는 卽心是佛思想 · 唯心思想 · 見性思想 혹은 一心의 証解 등이 표명되어 있다. 그리고 ꡔ自行錄ꡕ의 百八佛事에서는 自心을 깨치는 것을 宣示하고 있다. 그리고 선의 실천으로는 천태산 天柱峰에서 90일 동안 선정을 닦고 뒤에 法眼宗의 제2조인 天台德韶에게 참하여 사법하였다. 그의 淨土思想과 行業은 특히 百八佛事에 천명되어 있다. 延壽의 禪淨雙修에 대해서는 百八佛事의 다음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낮에는 안락세계의 아미타불께 귀의하여 예를 드리면서 널리 일체 법계의 중생이 문득 자심을 깨쳐 妙淨土 성취하기를 널리 이루기를 원하였다. “午時禮歸依主安樂世界阿彌陀佛 普願一切法界衆生 頓悟自心成妙淨土”(제21),
저녁에는 널리 진시방세계의 중생을 위하여 향을 사루고 아미타불을 염하며 마음으로 모두 문득 불심을 깨쳐 함께 안양국에 나기를 기원하였다. “黃昏時普爲盡十方面衆生 擎??焚香 念阿彌陀佛心眞言 悉頓証悟佛心同生安養”(제69)
延壽에게는 선과 정토의 문제가 동일한 것이었다. 곧 말할 나위도 없이 선은 此土에서 자심을 깨치는 것이고, 정토는 彼土인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왜 정토에 왕생하려 하는가에 대해서는 정토에 왕생하면 보살위에 들어가 번뇌를 끊어 윤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요컨대 불도 성취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토의 업행은 말세악시에는 자력은 난행임에 비하여 타력은 성취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정토에 가는 것에만 전념하면 될 터인데 왜 하필 선을 함께 修習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자세하고 명료한 설명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렇지만 「受菩薩戒法」에 보면 상근기의 사람에게는 受戒習禪으로 왕생하여 보살초지를 증득한다. 게다가 상근기의 사람은 習禪 뿐만 아니라 보살계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어서 延壽의 여기에서의 주장은 습선보다는 오히려 보살계를 받는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이에 상대하여 중․하근기의 사람은 佛戒를 믿지 않고 단지 염불만 하기 때문에 왕생의 得益이 상근기의 사람보다 하열한 것이다. 결국 延壽의 선정쌍수라는 것은 왕생득익에 훌륭한 것인데 淨業만 닦는 것은 득익이 하열하다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證果를 배경으로 하여 禪淨修習을 四句로 분별하고 있는 것이 「參禪念佛四料揀」의 네 게송이다. 제일구의 有禪無淨土는 십중팔구 도를 어그러친다. 제이구의 無禪有淨土는 가령 금생에 開悟하지 못했어도 모든 정토에 왕생하여 미타를 친견하고 생사를 出離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삼구의 有禪有淨土는 최상으로서 금생에는 人師가 되고 내생에는 佛祖가 된다고 찬탄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제사구의 無禪無淨土는 최하위로서 영원히 得道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곧 延壽에 의하면 선정쌍수야말로 현세와 내세의 二世를 일관하여 최상의 불교수행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Ⅲ. 鏡虛의 禪淨觀
1. 鏡虛의 禪思想
鏡虛사상의 큰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선사상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鏡虛의 선사상은 개인적으로나 한국선사상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우선 鏡虛의 선사상은 대략 세 가지 점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조선불교 속에서의 선풍의 계승과 발전이고(禪敎의 일치), 둘째는 조사선의 일상화 내지는 대중화이며(稧社의 조직과 전개), 셋째는 간화선풍의 진작(是甚麽話頭의 강조)이다.
이와 같은 선사상은 각기 나누어 볼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鏡虛의 정토와의 관계라는 점에 있어서 주로 정토와 관련된 것에만 한정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鏡虛의 선사상은 화두일념 내지 관법을 통한 내면적인 안심과 그것의 외적인 표출로서의 보살행의 실천이라는 측면에 결부시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내면적인 안심은 곧 鏡虛의 수행과 깨침으로서 그 決擇은 東鶴寺에 있을 때의 깨달음의 기연이 된 ‘소가 되어도 코구멍 뚫을 데가 없다’는 것에 있다. 곧 그의 「悟道歌」의 표출 ꡔ鏡虛集ꡕ 「悟道頌」, (ꡔ韓佛全ꡕ11, pp.628下~629中)
은 그간의 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鏡虛의 깨침의 외적인 표출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일상생활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부각되어 있는 것은 鏡虛의 無碍行을 통한 중생과의 同苦同樂이다. 鏡虛는 그의 「參禪曲」 ꡔ鏡虛集ꡕ (ꡔ韓佛全ꡕ11, pp.630下~633上)
에서 말하고 있듯이 無常의 터득과 간절한 화두의심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남에게 만이 아니라 다름아닌 자신을 겨냥하고 있기도 하다. 그 자신은 어리석은 중생임과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삼독심에 대한 질책이기도 하다. 위의 두 가지 측면은 鏡虛가 참선공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鏡虛는 참선하는 마음의 자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一切事에 無心하고 一切心에 無事하면 곧 心智가 자연히 맑고 깨끗해진다. ꡔ鏡虛集ꡕ 「泥牛吼」, (ꡔ韓佛全ꡕ11, p.590下) “最要的 無心於事 無事於心 則心智自然淸瀅”
一切事에 無心하라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집착의 철저한 脫落으로서 그의 수많은 詩와 歌에서는 劫外의 宗風으로 나타나고 있다. 곧 「威音那畔已前의 消息」이라든가 「거북이가 조짐을 나타내기 이전」이라든가 「돌사람」 등등 일체의 사려분별을 초월한 언어를 통하여 事脫落과 心脫落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굳이 一切事에 無心할 필요도 없고 一切心에 事를 지을 필요도 없이 天眞佛을 인정하고 수긍할 줄 아는 곳에서 비로소 그 가치가 現成되기 때문이다. 그 現成된 진리 속에서 鏡虛는 일생을 유희할 수 있었고 타인을 거둘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만행을 통한 숱한 일화와 몇 백수가 넘는 詩 등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또한 鏡虛는 자신의 경험을 통한 수행의 요체를 말하는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저 이 현묘한 법문을 참구하는 이는 항상 반조에 힘써 그것을 참구하고 마음이 생생하고 세밀하여 쉼없이 그것을 참구해야 한다. 이처럼 지극히 간절하게 하여 마음으로 참구할 수 없는 곳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참구한다는 마음이 없어져 근본 생명에 이르게 되고 본지풍광이 저절로 갖추어져 모자람도 남음도 없게 된다. ꡔ鏡虛集ꡕ 「泥牛吼」, (ꡔ韓佛全ꡕ11, p.590下~591上) “夫參此玄門者 常務返照究之 用心惺密無間斷究之 至切至於無用心可究之地 驀然心路忽絶 踏着本命元辰祇 這本地風光 本自具足 圓陀陀地 無缺無剩”
화두를 참구하는 방식에 대하여 鏡虛는 무엇보다 一心不亂의 상태를 유지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 항상 惺惺寂寂한 균등하게 유지하는 마음으로 祖師의 공안을 참구한다면 견성을 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 생생하게 깨어 있으면서 고요한 마음을 균등하게 유지하면 반드시 견성을 이루게 된다고 말하고, 염불을 하는데 있어서도 일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 결정코 왕생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일심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어찌 생생하게 깨어 있으면서 고요한 마음을 균등하게 유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ꡔ鏡虛集ꡕ 「與藤菴和尙」, (ꡔ韓佛全ꡕ11, p.593上) “看話門中 說惺寂等持 必能見性 念佛門中 說一心不亂 決定往生 一心不亂 豈非惺寂等持耶”
라고 말하여 一心의 不亂과 惺과 寂의 等持가 강조되고 있다.
특히 참구에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함을 여러 선지식들의 예를 들어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鏡虛 자신이 「驢事未去 馬事到來」라는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스스로가 콜레라의 전염이라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驢事未去 馬事到來」의 참구를 일관되게 결택하지 못하였던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염불수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강조되는 점이기도 하다.
한편 鏡虛는 자신의 스승에 대한 중요성과 그 가르침의 수용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인연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鏡虛에 있어서는 청계사에서 戒虛老師에게 출가한 인연, 戒虛노사의 주선으로 동학사의 萬化和尙으로부터의 가르침, 스스로 삼개월동안 순일무잡하게 참구하다가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는 말에 깨친 인연 등 韓龍雲 撰, 「鏡虛略譜」 (ꡔ韓佛全ꡕ11, pp.587下~588下)
이 모두 진정한 선지식들이었다. 이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저 무상을 경계삼아 대사를 밝히고자 하는 자는 급히 선지식을 찾지 않고 무엇으로 그 正路를 깨칠 수 있겠는가. ꡔ鏡虛集ꡕ 「泥牛吼」, (ꡔ韓佛全ꡕ11, p.591中) “夫欲誡無常悟明大事者 不急尋師 將何鎰其正路哉”
生死一大事를 해결하려는 사람에게 있어 碧眼宗師를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를 제자는 스승을 찾고 구하는 일이 깨침을 전수하고 깨침에 나아가는 급선무이기도 하다. 제아무리 총명한 사람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서는 천연외도일 뿐이다. 鏡虛에게 있어서 선지식이란 일체중생이었다. 일체중생이 선지식임을 바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有情 · 無情이 설법을 하는 선지식이었다. 無心한 일체의 牆壁瓦礫이 모두 佛向上의 眼目으로 보면 다 古佛의 心으로서 萬物에 法身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鏡虛가 和光同塵하면서 마주치는 일체의 사물과 중생은 끊임없이 鏡虛에게 無情說法과 現身說法을 하는 선지식의 現成이었다. 그래서 선지식을 통한 깨침과 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불법에서 아직 의문이 사라지지 않아서 어떤 것이 가슴 속에 막혀 있는 듯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마땅히 진정한 선지식을 참문하여 묘도를 깨쳐 곧 십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선지식을 참문하지 못하고 깨치지 못한 자는 끝내 도에서 멀어질 뿐이다. ꡔ鏡虛集ꡕ 「與藤菴和尙」, (ꡔ韓佛全ꡕ11, p.592上) “且於佛法中 疑根未斷 如有一物 碍滯於胸膈 當伊麽時 若能參眞善知識 悟得妙道 則直登十地位 未參未悟者 終成退墮”
이것은 ꡔ德異本壇經ꡕ에서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 구족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반드시 대선지식이 가르쳐 주는 견성에 의지해야 한다. 마땅히 알라. 어리석고 지혜로운 사람의 불성에는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다」 ꡔ德異本壇經ꡕ, (大正藏48, p.) “菩提般若之智 世人 本自有之 只緣心迷 不能自悟. 須假大善知識 示導見性. 當知 愚人智人 佛性 本無差別”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깨달음은 견성으로서 견성을 위해서는 대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 대선지식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佛知見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佛祖의 백천 가지 방편들이 모두 말세의 중생을 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함이지만, 그것을 잘못 아는 것은 지혜의 눈이 없는데다가 눈밝은 선지식을 참견하지 못한 까닭 ꡔ鏡虛集ꡕ, (ꡔ韓佛全ꡕ11, pp.601下~602上) 내용 발췌.
이라 말한다.
한편 鏡虛는 화두의 참구에 대하여 대부분 이전 여러 선사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가장 보편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鏡虛의 주장의 특색은 일체의 가르침은 다 방편이니 모두 定慧를 갖추어 견성법을 닦으라는 것이다. 곧 이것은 鏡虛 자신을 비롯하여 稧社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권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려니와 定慧 뿐만이 아니라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사람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라 ꡔ鏡虛集ꡕ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ꡔ韓佛全ꡕ11, pp.601中~607中)
하여 궁극적으로는 통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참구의 방식으로는 「화두를 들 때에는 물을 거슬러 닻을 내달듯이 하는데 혹은 냉담하여 재미가 없고 혹은 가슴이 미어지고 머리에 열도 나는데 이것 또한 남의 일이 아니다. 다만 화두를 드는데 가장 좋은 묘술은 정신을 집중함에 너무 급하지도 느슨하지도 말고 항상 성성적적하고 면밀하게 하며 호흡을 편안히 하고 배고프게도 배부르게도 하지 말며 눈에다 정기를 채우고 척량골을 곧추 세우는 것이다」 ꡔ鏡虛集ꡕ 「與藤菴和尙」, (ꡔ韓佛全ꡕ11, p.594中) “擧話頭時 如逆水張帆 或冷淡無滋味 或心頭熱悶 亦不是他家事 但提撕爲妙最 是蘊素精神 不麤急不惰緩 惺惺寂寂 密密綿綿 氣息如常 飢飽準平眼目自好精彩 脊梁不妨竪起”
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그 마음 자세로는 출가자가 수행함에 있어서는 혹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주력을 하든지 간에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으로 「결코 여러 가지 도리를 나누지 말고 마땅히 회광반조하는 데에 힘써 마음의 근본을 철견해야 한다. 그러나 잊지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靜淨이라는 두 글자이다. 淨이란 보리이고 靜이란 열반이다」 ꡔ鏡虛集ꡕ 「示法界堂」, (ꡔ韓佛全ꡕ11, p.595上~中) “切不得分作多般道理 當務以廻光返照 照了心源 大要不忘靜淨二字 淨是菩提 靜是涅槃也”
라고 하여 보리와 열반이라는 견성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그의 示衆法語에서는 출신대장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저 참선이라 해서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네 일상생활을 잘 반조하여 자신의 주인공을 확연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외물의 잡된 것에 끄달이지 않고 생사에 끌려다니지 않으며 홀로 훤칠하게 뛰어나 분명하고 평안하게 된다. 그리하여 얽매일 것도 없고 해탈할 것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열반도 없어 ······. ꡔ鏡虛集ꡕ 「示衆」, (ꡔ韓佛全ꡕ11, p.596下) “夫參禪者 不是特地之事 秪是返照自家屋裏 覰得自家主人公明白 不被外物參雜 不爲生死互換 孤逈逈地 明白白地 平妥妥地 非繫縛非解脫 非煩惱非涅槃”
이리하여 참선의 세계라는 것은 곧 아무것도 걸림이 없는 任運無作의 대자유인으로서 가히 깨칠 것이 달리 없어 본래 갖추고 있는 本有의 事를 누리는 것이라 말한다.
2. 鏡虛의 觀想法
ꡔ鏡虛集ꡕ에서 정토 내지 염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극히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다. 곧 「與藤菴和尙」 ꡔ韓佛全ꡕ 卷11, pp.592上~594中. 이 가운데 pp.592中~593中 부분.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ꡔ韓佛全ꡕ 卷11, pp.601中~607中.
등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위기는 그의 법어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할 수 있다. 곧 鏡虛가 참선이나 염불에 있어서 공히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의 하나로서 一心不亂을 들고 있다. 그런데 이 一心不亂은 굳이 염불 내지 기타 왕생의 방법 뿐만이 아니라 화두참구와 주력 및 반야바라밀 수행에도 여전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一心不亂은 모든 수행에 해당하는 기본 원칙으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수행이 궁극적으로는 방편으로 통한다는 鏡虛에게 있어서 염불은 특히 그렇다. 「염불은 방편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방편의 힘으로 염불법을 설해 주었으나 방편을 잘못 알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염불의 효력을 알지 못하고 있다」 ꡔ鏡虛集ꡕ 「與藤菴和尙」, (ꡔ韓佛全ꡕ11, p.592中) “佛以方便力說念佛法 引導衆生 其趣甚妙 人皆不達枉用心力而未効”
고 하였다. 이에 대한 예를 경전에서 들어 말하고 있다. 곧 ꡔ阿彌陀經ꡕ과 ꡔ十六觀經ꡕ의 예를 들어 그 속에서 上 · 中 · 下 三輩의 중생들이 모두 왕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한결같이 보리심을 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鏡虛에 의하면 바로 그 보리심이란 일상의 성품인데 그것을 잘 개발하거나 觀像三昧를 성취하거나 一心不亂의 경지에 들면 모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염불이 방편인 줄 바르게 알아 방편을 방편으로 사용할 줄 알면 왕생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鏡虛의 염불 내지 정토사상의 근간이 ꡔ觀無量壽經ꡕ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설해지고 있는 觀想法에서 그 觀想이란 곧 염불을 비롯한 일심불란의 방편으로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소위 觀經類에서 누누히 설하고 있는 것으로서 鏡虛의 정토사상은 곧 이타의 행위를 향한 鏡虛의 방편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觀經類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무엇인가. 먼저 이것을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정토왕생의 염불을 권장하는 鏡虛의 진면목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鏡虛에게 있어 염불왕생의 방법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연구성과에 있어서 정토의 觀想法과 禪觀的인 수행에 대하여 직간접적으로 그 관련성에 대하여 논할 경우 ꡔ觀無量壽經ꡕ이 단연 으뜸이다. 곧 ꡔ觀無量壽經ꡕ과 ꡔ觀藥王藥上二菩薩經ꡕ의 譯者인 畺良耶舍는 ꡔ梁高僧傳ꡕ에 의하면 西域人으로서 禪門을 專業으로 하여 항상 三昧正受로써 여러 나라를 傳道敎化하였다고 한다. 또한 ꡔ觀普賢菩薩行法經ꡕ과 ꡔ觀虛空藏菩薩經ꡕ의 譯者인 曇摩蜜多 ꡔ梁高僧傳ꡕ 卷3, (大正藏50, pp.432下~433上)
는 罽賓國 출신으로 龜玆 · 敦煌 · 涼州 등 西域北道를 거쳐 宋의 수도에 들어간 禪僧이었다. 특히 이 경전의 성립에 관한 연구 첫째, 인도에서 찬술되었다는 說로는 早島鏡正, 「淨土敎の淸淨業處觀について」(ꡔ干潟龍祥博士古稀記念論文集ꡕ 1964) · 平川彰, 「觀經の成立と淸淨業處觀」(ꡔ東洋の思想と宗敎ꡕ1. 1984) 등이고, 둘째, 중앙아시아에서 찬술되었다는 說로는 春日井眞也, 「觀無量壽經における諸問題」(ꡔ佛敎文化硏究ꡕ3. 1953) · 宮本正尊 編, 「淨土經典の形成」(ꡔ佛敎の根本眞理ꡕ. 三省堂. 1956) · 中村元, ꡔ淨土三部經ꡕ下(巖波文庫. 1964) · 藤田宏達, ꡔ觀無量壽經講究ꡕ(眞宗大谷派安居講本. 1958) 등과, 셋째, 중국에서 찬술되었다는 說로는 月輪賢隆, ꡔ佛典の批判的硏究ꡕ(百華苑. 1971) 등이 있다. 최근에는 본 경전이 일시에 성립한 것이 아니고 단계적으로 성립했다는 段階說로 Pas,J. “The Kuan- wu-liang-shou-Fo-ching ; Ist Origin and Literary Criticism” Buddhist Thought and Asian Civilization. 1977 과, 넷째, 여러 내용을 편집하여 성립했다는 編集說로 山田明爾, 「觀經巧」(ꡔ龍大論叢ꡕ408. 1976) 등이 대두되고 있다.
와 더불어 ꡔ觀無量壽經ꡕ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성립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禪觀經典의 사상 및 그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念佛 · 滅罪法 · 淸淨業處觀 등이 보이고 있는 점은 당시의 불교의 신앙과 사상적인 흐름 가운데서 ꡔ觀無量壽經ꡕ의 위치 및 그 중요성이 충분히 대두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觀經類는 선정수행에 있어 觀想의 대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業處觀에 기초한 觀佛 내지 滅罪를 설한 것이 ꡔ觀無量壽經ꡕ이다. ꡔ觀無量壽經ꡕ은 서방극락의 정토와 아미타불을 觀想하는 방법과 그 정토에 왕생하는 방법을 설한 경전으로서, ꡔ無量壽經ꡕ · ꡔ阿彌陀經ꡕ과 함께 정토삼부경의 하나로서 鏡虛에게 있어서도 모두 언급되고 있는 경전이기도 하다. 특히 ꡔ觀無量壽經ꡕ의 16觀想法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특히 이 ꡔ觀無量壽經ꡕ을 대표로 하는 여섯 觀經類는 그 제목에서 보면 ꡔ觀佛三昧海經ꡕ의 釋迦牟尼佛, ꡔ觀無量壽經ꡕ의 阿彌陀佛, ꡔ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ꡕ의 彌勒菩薩, ꡔ觀普賢菩薩行法經ꡕ의 普賢菩薩, ꡔ觀藥王藥上二菩薩經ꡕ의 藥王과 藥上의 두 보살, ꡔ觀虛空藏菩薩經ꡕ의 虛空藏菩薩 등 불보살이 觀想의 주제가 되어 있다. 이처럼 觀想의 주제가 불보살 및 대승경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을 보면 觀經類는 앞의 禪經類와 三昧經類가 주로 소승적 선관에 근거한 것과 관련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와는 달리 대승적 선관에도 바탕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觀經類로서의 ꡔ觀無量壽經ꡕ이 당시의 禪經類와 三昧經類 등과의 간접적인 관련성이 있음은 그 내용에 나타나 있다. 첫째 ꡔ觀無量壽經ꡕ이 인도에서 성립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언급되는 業處觀이 잘 나타나 있고, 둘째 念佛觀에서의 滅罪法이 ꡔ禪秘要法經ꡕ(大正藏15, pp.242~269)과 흡사하며, 그리고 셋째 滅罪法에서의 觀佛법이 ꡔ觀佛三昧海經ꡕ(大正藏15, pp.645~697)과 흡사하다.
. ꡔ觀無量壽經ꡕ의 觀想法은 業處가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 業處는 범어 karma- sthāna, 빠알리어 kamma-ƫƫhāna의 譯語로서 禪定이 止住하는 장소, 즉 선정의 토대로서 선정을 닦을 때의 대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곧 선정을 修習하여 성취할 때에 자기에게 맞는 觀想의 대상이나 방법을 선택하여 그 선정이 각각 특수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바로 그 觀想의 방법과 대상을 말한다. 특히 이 業處가 두루두루 모든 사물에 미치는 遍處에 대한 설명으로는 우선 ꡔ俱舍論ꡕ의 네 번째 게송에의 十遍處를 들 수가 있다.
遍處에는 地 · 水 · 火 · 風 · 靑 · 黃 · 赤 · 白 · 空 · 識 등 열 가지가 있다. 앞의 지 · 수 · 화 · 풍 · 청 · 황 · 적 · 백 등 여덟은 청정한 해탈과 같고, 뒤의 공 · 식의 둘은 청정한 무색으로서 지 · 수 · 화 · 풍 등 사온을 대상으로 삼는다. ꡔ俱舍論ꡕ 卷29, (大正藏29, p.151下) “遍處有十種 八如淨解脫 後二淨無色 緣自地四蘊”
그리고 이어서 「일체처에 두루 쉼없이 관찰하기 때문에 遍處라 한다」 위의 책. “於一切處 周遍觀察 無有間隙 故名遍處”.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쉼없이 두루 관찰한다」 는 觀法이 遍處의 첫째 특징으로서 鏡虛에게는 一心不亂으로 나타나 있다. 가령 十遍處 가운데 靑遍處의 경우에는 눈 앞에 작은 靑色을 想定하여 관찰하고 그 푸르다는 觀想을 확대하여 세계 전체가 모두 청색으로 가득 차 있다고 觀想한다. 遍處의 둘째 특징은 이러한 觀想은 實觀이 아니라 假觀으로서 不淨觀 · 四無量心 · 十遍處 등의 業處는 勝解作意(adhimukti-manaskāra)에 의한 觀法, 즉 觀想의 대상을 자유로이 增大 내지는 變化시키는 觀法이다. 이러한 業處觀을 근거로 한 觀想法인 ꡔ觀無量壽經ꡕ의 16觀法 大正藏12, p.340~346. 16觀法의 제목을 들어보면 (1)日想觀 (2)水想觀 (3)地想觀(4)寶樹觀 (5)寶池觀 (6)寶樓觀 (7)華座觀 (8)像想觀 (9)眞身觀 (10)觀音觀 (11)勢至觀 (12)普觀 (13)雜想觀 (14)上輩觀 (15)中輩觀 (16)下輩觀 등이다.
은 다음과 같다.
(1) 日想觀은 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을 專注하여 해가 하늘에 걸려 있는 북과 같이 둥근 모습으로 눈을 감건 뜨건간에 명료하게 될 때까지 觀想한다. 그리고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극락정토가 서쪽에 있음을 생각한다.
(2) 水想觀은 청정한 물을 보고 그 영상이 조금도 혼란스럽지 않다고 觀想한다. 나아가 얼음의 투명한 모습을 생각하는 氷想을 행하고, 靑玉과 같은 瑠璃를 觀想하여 그것이 성취되면 극락정토의 대지가 유리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음을 관상한다.
(3) 地想觀은 앞의 水想觀을 성취함으로써 瑠璃地의 觀象이 눈을 감건 뜨건간에 계속되면 분명하게 극락의 정토를 觀想할 수 있게 된다.
(4) 寶樹觀은 극락정토에 있는 不可思議한 나무를,
(5) 寶池觀은 극락정토의 연못의 八功德水를,
(6) 寶樓觀은 극락정토의 五百億의 건물을 각각 觀想한다.
(7) 華座觀은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이 앉아 있는 연화대를 觀想한다.
(8) 像想觀은 佛像을 보고 아마타불의 모습을 觀想한다.
(9) 眞身觀은 아마타불의 참된 모습을 觀想하는데 이 眞身觀을 성취하면 諸佛을 볼 수 있게 된다.
(10) 觀音觀과 (11)勢至觀은 각각 아미타불을 따르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觀想한다.
(12) 普觀은 정토의 불 · 보살 · 국토를 빠짐없이 觀想한다.
(13) 雜想觀은 앞에서와 같은 眞佛과 眞菩薩을 觀想할 수 없는 사람이 一丈六尺(4.8미터)이나 되는 아미타불의 像을 보고 여러가지 大身 · 小身 · 眞佛 · 化佛 등을 다 觀想한다.
(14) 上輩觀, (15) 中輩觀, (16) 下輩觀 등 三輩觀은 중생이 각각의 능력과 性質의 우열에 따라 각기 근기에 적당한 수행으로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觀想한다.
위와 같은 觀想法은 業處의 내용으로서 특히 不淨觀法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 즉 ꡔ解脫道論ꡕ에서 十一切入의 열 가지 一切入 · 十不淨觀의 열 가지 不淨觀 · 十念의 열 가지 念 · 四無量心의 네 가지 無量心 · 觀四大 · 食不淨想 · 無所有處 · 非非想處 등 38行處를 설하고 있는 것 ꡔ解脫道論ꡕ 卷3, (大正藏32, p.411上)
과도 무관하지 않다.
가령 (4)寶樹觀을 예로 들면 극락에 7겹으로 둘러쳐진 숲 속의 거대한 보배나무를 하나하나씩 觀想하고, 그에 딸린 무수한 7보의 꽃잎과 과일 등을 觀想한다. 그리하여 각각의 觀想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면 낱개의 꽃잎이나 과일이 무한대로 커지고 온갖 색을 구비하여 세상천지가 온통 그 꽃잎이나 과일로 가득찬다. 또한 (7)華座觀의 경우를 보아도 연꽃의 하나하나의 꽃잎에 무수한 보배의 색깔과 빛이 흘러넘치고, 그 꽃잎들 사이에 있는 보배구슬이 지상을 온통 뒤덮는 빛을 내는 모습을 觀想한다.
觀想은 바로 이러한 극락정토의 낱낱의 모습에 마음을 집중하여 무한대로 확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觀想은 가령 ꡔ禪秘要法經ꡕ의 제1회에서 서술하고 있는 18종의 不淨觀이 항상 一物을 대상으로 선택하여 이것을 차례로 遍處로 삼아 觀想하고 있는 것을 연상시켜 주고 있어서 ꡔ禪秘要法經ꡕ (大正藏15, pp.243中~244上)
, ꡔ俱舍論ꡕ에 언급된 遍處觀의 방법과도 통한다. 곧 觀法으로서의 業處觀과 ꡔ觀無量壽經ꡕ에서의 觀佛로서의 觀想法의 묘사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살아 있는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단계를 밟아가 色不淨觀에 이르고, 다시 數息觀을 거쳐 四大觀을 지나 수행자의 몸은 白玉과 같이 明澄하다고 관찰한다. 내지 다시 자기의 몸이 검은 모습으로 변하는 환각을 극복하고, 점차 수많은 연꽃잎의 금강대좌에 결가부좌하고 있는 금빛의 불상을 보고서 자신의 몸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化佛에 휩싸여 자신의 몸과 하나가 되어간다. 그러나 그 境界相도 곧 假觀임을 알아 차린다. 이러한 체험을 반복하면서 부정관도 자연스럽게 사라지면서 신체와 我相의 존재가 없음을 자각하게 되고, 신체의 苦 · 空 · 無常 · 無我를 觀하여 모두 空이 된다. 이렇게 사유하는 가운데 身을 관하면서도 身을 보지 않게 되고, 我를 관하면서도 我를 보지 않게 되며, 心을 관하면서도 心을 보지 않게 될 때 홀연히 산하대지의 일체가 無임을 터득한다 ꡔ禪秘要法經ꡕ (大正藏15, p.253下)
. 이와 같이 心의 明淨을 통하여 空觀을 심리적으로 체험한다.
이처럼 不淨觀法 및 기타 四大觀에 의해서 空三昧에 도달하는 것은 ꡔ禪秘要法經ꡕ의 遍處行法도 중시되고 있는데, 사실 선관실천의 기본으로서 觀想의 대상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禪觀도 철저한 實踐이 따라야 할 것이 중요시되고 있다. 이처럼 선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觀經類의 일반적인 경향으로서 ꡔ思惟略要法ꡕ의 觀想法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四無量心觀法 · 不淨觀法 · 白骨觀法 · 觀佛三昧法 · 生身觀法 · 法身觀法 · 十方諸佛觀法 · 觀無量壽佛法 · 諸法實相觀法 · 法華三昧觀法 등 10종의 관법 ꡔ思惟略要法ꡕ, (大正藏15, pp.297~300)
이 하나하나 단계 내지는 순차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한편 無量壽佛을 觀想함에 있어서도 ꡔ禪秘要法經ꡕ에서와 마찬가지로 근기가 낮은 사람은 특히 白骨觀法이 권장되고 있는 것은 不淨觀 내지는 白骨觀이 禪觀에 들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 觀經類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滅罪法이다. ꡔ觀無量壽經ꡕ의 (3)地想觀 속에는 「만약 이 땅을 관상하면 80억겁 생사의 죄를 없애고, 죽어서는 다음 생에 반드시 정토에 태어난다」 ꡔ觀無量壽經ꡕ, (大正藏12, p.342上) “若觀是地者 除八十億劫 生死之罪 捨身他世 必生淨國”
고 말한다. 이것은 ꡔ觀無量壽經ꡕ이 滅罪와 淨土往生을 강조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또한 ꡔ觀佛三昧海經ꡕ은 「부처님이 멸도한 후에 모든 불자가 이와 같이 관하면 正觀이라 하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邪觀이라 한다. 이처럼 正觀을 행하면 일억겁의 생사의 죄를 없애고, 임종시에는 시방의 부처님들이 나타나며, 반드시 청정한 불국토에 태어난다」 ꡔ觀佛三昧海經ꡕ, (大正藏15, p.678上) “佛滅度後 諸佛子 若如是觀 是名正觀 若異觀 名爲邪觀 作此觀者 除一億劫 生死之罪 臨命終時 見十方佛 必生他方 淨佛國土”
라고 하고, 「여래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은 부처님을 본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백천겁 생사의 죄를 없앤다. 만약 보지 못한 사람은 마땅히 탑 속에 들어가 모든 坐像을 관하라. 坐像을 보면 곧 번뇌와 죄를 참회하게 된다」 ꡔ觀佛三昧海經ꡕ, (大正藏15, p.681下) “觀如來坐者 如見佛身 等無有異 除百千劫 生死之罪 若不能見 當入塔觀 一切坐像 見坐像已 懺悔障罪”
라고 말한다.
또한 ꡔ坐禪三昧經ꡕ의 念佛觀을 설하는 부분에서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마땅히 마음을 오롯하게 하여 생각이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이미 부처님을 뵙거든 의심나는 바를 물어라. 이것을 염불삼매라 하는데, 等分 및 기타 중죄를 없애준다」 ꡔ坐禪三昧經ꡕ 卷上, (大正藏15, p.277中) “是故行者 常當專心 令意不散 旣得見佛 請質所疑是名念佛三昧 除滅等分 及餘重罪”
라고 하고, 觀佛三昧에 대해서는 「관불삼매는 부처님이 법왕이 되어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갖가지 善法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좌선을 하는 사람은 먼저 마땅히 염불해야 한다. 부처님은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무량한 죄를 가볍게 해 주고 모든 선정을 얻게 한다」 ꡔ五門禪經要用法ꡕ, (大正藏15, p.327上) “觀佛三昧 佛爲法王 能令人得 種種善法 是故坐禪之人 先當念佛 佛者能令人 無量罪微薄 得諸禪定”
라고 말한다. 또한 觀佛三昧法에 대하여 「부처님은 법왕으로서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갖가지 善法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선정을 배우는 사람은 먼저 마땅히 염불을 해야 한다. 염불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량겁 동안의 중죄를 가볍게 해 주고 선정을 얻게 해준다」 ꡔ思惟略要法ꡕ, (大正藏15, p.299上) “佛爲法王 能令人得 種種善法 是故習禪之人 先當念佛 念佛者 令無量劫 重罪微薄 得至禪定”
라고 하여 멸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좌선의 준비 및 그 자체로서 하나의 빼놓을 수 없는 수행 ꡔ禪秘要法經ꡕ 卷中, (大正藏15, p.255上~中)
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멸죄의 방법으로는 대개 염불을 하거나, 혹은 부처님의 상호를 觀하며, 佛像을 觀하는 이외에, 다시 허공에 청정수가 담긴 물병을 들고 있는 化佛을 觀想하여 그 물이 머리로부터 몸으로 흘러내리는 水想觀적인 멸죄법도 아울러 행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滅罪法의 근저에도 위 16觀想法과 같은 業處觀法이 바탕하고 있음을 본다면 觀經類의 선정수행이란 어느 경전의 특수한 수행법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는 觀佛 내지는 念佛의 심리가 具象的으로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觀想法과 滅罪法이야말로 鏡虛의 「與藤菴和尙」 부분에서 골고루 언급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鏡虛는 위의 觀想法과 滅罪法의 획득을 위하여 觀想法을 위해서는 話頭一念과 같은 一心不亂의 마음상태를 중시하고, 滅罪法을 위해서는 여러 선사들의 인용문을 들고, 아울러 ꡔ梵網經ꡕ의 10重 48輕戒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앞서 언급한 延壽에게 있어서 「受菩薩戒法」을 근거로 설명한 受戒習禪으로 왕생하여 菩薩初地를 증득한다든가, 게다가 上根機의 사람은 習禪 뿐만 아니라 菩薩戒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라는 延壽의 주장이 習禪보다는 오히려 菩薩戒를 받는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근저에 있어서도 鏡虛는 반드시 發心하여 원만한 마음으로 선지식을 따라 행하는 것이 作戒가 된다 ꡔ鏡虛集ꡕ 「與藤菴和尙」, (ꡔ韓佛全ꡕ11, p.593下) “盖初發圓心 從師聽受 名爲作戒”
고 말하고 있다.
3. 方便으로서의 禪淨
鏡虛의 염불은 여러 가지 수행의 권장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여러 가지라는 것은 곧 중생의 수만큼이나 많은 방식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로 통한다. 그 하나는 다름아닌 大道를 구하는 것, 곧 깨침에로의 향상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佛祖들의 수많은 방편이 등장하였다. 그래서 永明延壽의 말을 인용하여 「대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一乘의 妙旨를 설하였고, 작은 수행을 추구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六波羅蜜行의 방편문을 설하였다」 ꡔ鏡虛集ꡕ 「與藤菴和尙」, (ꡔ韓佛全ꡕ11, p.592中) “壽禪師云 爲求大道者 說一乘妙旨 爲求小行者 說六行權門”
고 말한다. 곧 육바라밀의 수행마저 방편설이라 하면서 염불도 방편설임을 말하고 있다. 곧 ꡔ阿彌陀經ꡕ에서 정토의 장엄을 설하여 왕생하게 하는 것과, 내지 ꡔ十六觀經ꡕ의 觀像法 등이 간절한 방편문인데도 불구하고 중생이 스스로 그것을 저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鏡虛는 이 경전의 정토장엄과 觀像을 인용하면서 그 염불의 요체는 이미 보리심을 발한 자들로서 一心不亂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一心不亂의 자세는 觀像三昧의 성취와 통하고 있다.
阿彌陀經에서는 정토장엄을 자세하게 설하고 있는데 그 곳에 왕생하는 방법에 대하여 「하루나 이틀 내지 七日 동안 일심으로 하여 흐트러지지 않으면 이 사람은 왕생할 수 있다」라고 설하고, 十六觀經에서는 觀像으로 성취하는 방법이 있는데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역력하게 관찰하여 오랫동안 명료하게 되면 觀像三昧를 성취한다」 라고 말하며, 無量壽經에서는 「세 무리의 중생이 모두 왕생하는 방법이 있는데 우선 보리심을 내라」 고 설하고 있다. 보리심을 낸다는 것은 곧 중생의 일상생활의 신령스러운 성품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만약 신령스러운 성품을 개발하면 觀像三昧를 성취하고 일심불란을 성취하게 되는데 그 왕생을 어찌 성취하지 못하겠는가. ꡔ鏡虛集ꡕ 「與藤菴和尙」, (ꡔ韓佛全ꡕ11, p.592中) “如阿彌陀經 大說淨土莊嚴 至於說往生法 一日二日乃至七日 一心不亂 是人往生 十六觀經 有觀像成就法 使之繫心一處 其觀歷歷 長時明了 成就三昧 無量壽經 三輩往生 皆先說發菩提心 菩提者何也 卽衆生日用靈覺之性也 若能開發靈覺之性 或能成就觀像三昧 或能成就一心不亂 其於往生 有何未了”
여기에서 一心不亂과 觀像三昧(觀想法 가운데 佛像 내지 어떤 像을 마음속에 떠올려 觀하는 방법)의 성취가 곧 왕생의 근본임을 말하고 있다. 鏡虛는 그 왕생이 다름아닌 話頭一念의 참구에 있어서 無念과 통하며 無字話頭를 들 때의 굳건한 마음을 시종 달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염불의 一心不亂과 觀像三昧는 무자화두의 참구에 있어서 着衣喫飯과 일상 용변보는 것과 行住坐臥의 어느 때에나 항상 廻光返照하여 의심에 의심을 더하여 화두를 드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리하여 염불하여 般舟三昧에 들면 모든 부처님이 현재 바로 앞에 현전하는데 그것을 곧 오랫동안 의심으로 화두를 들어 깨침에 이르는 것과 동일시 하고 있다. 이에 화두의 묘술이 惺惺寂寂과 綿綿密密에 있는 것처럼 一心으로 不亂하게 觀像하는 것에 통하고 있다. 이 觀像은 곧 ꡔ觀無量壽經ꡕ에서의 觀想法의 하나로서 16觀想 가운데 아미타불의 참된 모습을 觀想하는 華座觀 · 像想觀 · 眞身觀 · 觀音觀 · 普觀 · 雜想觀 등 여덟째부터 열 셋째에 해당한다.
이것은 觀像三昧을 통한 般舟三昧의 성취와 화두참구를 통한 깨침의 성취는 모두 往生과 己事究明이라는 大事에 통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鏡虛는 「만약 이와 같이 온전한 공력을 조사의 참구문에 들이붓는다면 견성성불을 하지 못할 사람이 없으니 화두의 성성적적이 견성으로 통하는 만큼 염불의 일심불란은 기필코 왕생으로 통한다. 그리하여 일심불란이 곧 성성적적으로 그리고 견성이 곧 왕생으로 대비된다. 그리하여 일심불란이 타력이라면 성성적적도 마찬가지로 타력이고 성성적적이 자력이라면 일심불란도 곧 자력이다」 ꡔ鏡虛集ꡕ 「與藤菴和尙」, (ꡔ韓佛全ꡕ11, pp.592下~593上) “若以如此 全功施於祖庭參究門中 孰不見性成佛 看話門中 說惺寂等持 必能見性 念佛門中 說一心不亂 決定往生 一心不亂 豈非惺寂等持耶 若以一心不亂 以爲他力 惺寂等持 豈非他力 若以惺寂等持 以爲自力 一心不亂豈非自力”
고 말한다. 이에서 화두일념은 곧 염불삼매에 통하며 깨침의 현전이 왕생하여 제불을 친견하는 반주삼매 바로 그것이 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觀像三昧의 觀相法은 觀想하는 나 자신이 觀像의 대상인 부처님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내가 부처님을 觀想의 객체로 삼고 있는 한 항상 부처님은 觀像으로만 남아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왕생하는 나와 來迎하는 아미타 및 현전하는 제불이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왕생이 易行門으로서의 중생구제라는 방편임이 여기에서 여실해진다. 이렇기 때문에 일심불란의 상태가 계속되는 한 항상 觀想하는 나 자신과 현전하는 부처님과의 괴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만다. 그런데도 항상 일심불란으로 염불삼매에 들라라든가 반주삼매를 성취하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염불하여 왕생하고 삼매를 성취하는 것 모두가 방편 아님이 없다는 줄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대한 止啼錢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가 진실이라고 인식해버리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손쉬운 가르침이기도 하다.
또한 아직 깨침이 성취되기 이전에는 화두 참구에 있어서 간절하게 이어지는 惺惺寂寂과 定慧等持의 상태는 언제까지나 看하는 나와 看되는 화두와의 구별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런데도 항상 보리심을 발하고 간절하게 화두를 참구하되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念念無間하게 하며, 회광반조하여 생각이 다한 근원에 사무치면 성품과 모습[性相]이 항상 머무르고 현실과 이치[事理]가 둘이 아니며 참된 부처가 여여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정녕 방편인 줄을 모르는 소치야말로 하루아침에 광명을 잃고 생사에 윤회하여 만겁토록 헤매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鏡虛에게는 어디까지나 왕생이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왕생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불조의 백천 가지 방편들이 다 단단히 타이르고 지도하여 말세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수행으로 나아가게끔 하려는 것이었다」 ꡔ鏡虛集ꡕ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ꡔ韓佛全ꡕ11, p.601下) “自餘諸佛祖百千方便 皆是諄諄叮嚀指導末葉衆生之修行正路也”
고 말하고 있는 곳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것이 방편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렇게 수승한 근기의 소유자는 곧 바로 깨침에 들어가 진리의 나룻터를 잡아 나라를 편안하게 하니 어찌 다른 것을 의용하겠는가. 그러나 하열한 근기는 단번에 다다르지 못하기 때문에 古人이 ‘죽순이 자라서 대나무가 되지만 당장 죽순을 가지고 뗏목을 만들려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곧 이것은 하열한 근기의 소유자는 오래도록 익혀야 비로소 필경에 돌아갈 곳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ꡔ鏡虛集ꡕ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稧社文」, (ꡔ韓佛全ꡕ11, p.602下) “其有機勝者 一超直入把斷要津 安邦定國 豈有他哉 然若機下者 未能頓成 故古人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則機下者久習畢竟得入”
곧 염불의 觀想法은 근기에 따른 방편임을 밝히고 있다. 결국 鏡虛에게 있어 일심불란으로 수행하라는 觀像三昧와 惺惺寂寂하고 綿綿密密하게 화두를 참구하라는 가르침은 근기에 따른 방편법문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일심불란의 염불삼매문과 定慧等持의 화두참구문이 하나로 통한다는 것은 방편이라는 점에 있어서만 같을 뿐이지 易行門의 往生의 법문과 難行門의 祖庭의 법문은 그 취의가 다름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鏡虛에게 있어서 방편의 시설은 어디까지나 선교방편의 입장이라는 것일 뿐 己事究明 자체는 아니었다. 一超直入의 己事究明은 곧 直指門으로서 그의 정혜결사에서 비로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Ⅳ. 結 語
선과 정토사상의 겸수 내지 강조는 비교적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초기선종에서 아직 선법이 구체적으로 정착되기 이전 禪經 · 觀經 · 三昧經 등에 의지하여 수행하던 전통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마음의 專注 내지 삼매에 드는 것과 佛을 친견하는 것에 있어서 다양하게 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마음을 한 곳에 모두어 깨침에 도달하려는 禪的인 수행과 觀想을 통하여 佛을 친견하려는 정토의 수행의 만남이었다. 이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가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相依相關의 관계라는 점을 중요시하여 많은 禪者들은 수행의 방편으로서 觀想法에 의지하였고 염불수행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기 선종에 있어서 달마의 선법이 純禪이었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후의 도신과 홍인 등도 守一心 내지 看心의 방법으로서 禪的인 念佛을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었다. 一行三昧와 一相三昧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이 구체적으로 雙修된 것은 아무래도 永明延壽에게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禪者로서의 延壽는 염불수행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극락에 태어나 결국에 깨침으로 도달한다는 의미에서 선과 염불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禪淨의 관계는 이후에도 禪者 뿐만이 아니라 정토사상가들에게도 나타나고 있어 송대 이후에는 선과 염불이 각각 그 특성을 상실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특히 鏡虛에게 있어서는 조선의 불교 현실과 나아가서 사회 현실을 감안할 때 自心의 깨침과 중생의 구제라는 입장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였다. 그래서 鏡虛는 모든 사람에게 화두참구 만을 주장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왕생법 만을 강조한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가 깨친 선법의 도리에 있어서는 화두참구의 방법을 제시하고 그 수행방법에 대한 설명에서는 다분히 왕생을 얻기 위한 염불방법이 곁들여져 있었다. 또한 왕생방법을 권장하는 염불 내지 주력 수행에 있어서도 一心不亂의 성취와 삼매의 성취 그리고 정혜의 균등까지도 언급하고 있는 점은 鏡虛에게서 다반사였다.
그러나 염불이 어디까지나 불조들의 방편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방편이란 다름아닌 중생의 근기에 따른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에서 鏡虛가 중요시한 것은 ꡔ觀無量壽經ꡕ에 의한 觀想法이었다. 특히 16觀想에서 말하는 부처님 相에 대한 觀想 곧 觀像念佛이 가장 널리 권장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쉽게 다다를 수 있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들어 말하고 있다. 이것은 화두참구에 있어서 惺惺寂寂 綿綿密密과 더불어 왕생법으로서의 觀想에 있어서 一心不亂의 상태를 간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요함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아직 왕생을 목적으로 하는 下根機와 깨침을 목적으로 하는 上根機와의 善巧方便의 차이는 여전히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곧 염불왕생이 어디까지나 방편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彌陀淨土에 왕생하여 十地修行을 통하여 끝내는 成佛에 이르는 것이 설정되어 있지만 一超直入如來地의 깨침으로 나아가는 禪門의 看話修行이 아울러 언급되고 있는 것은 鏡虛의 禪淨雙修가 또 하나의 方便修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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