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주제 논평:禪淨雙修에 관한 몇 가지 질문
윤원철(서울대학교 교수)
玄覺 스님이 발표논문에서 禪淨雙修의 源流를 추적하면서 언급했듯이, 禪과 淨土信行의 결합은 그 역사가 오래 되었습니다. 禪宗과 淨土宗이라는 宗派的 歸屬을 넘어 佛敎의 信行 方法으로 보자면, 禪은 워낙 애초부터 불교의 핵심 수행법이고 정토신앙도 西曆紀元을 前後한 시기에 이미 성립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마도 東晉時代 이전부터도 禪淨雙修가 시행되었으리라는 짐작도 해볼 수 있겠습니다. 禪淨雙修는 그렇게 역사가 깊으면서도 내내 논란거리가 되어 왔고 지금껏 그렇습니다. 그것은 禪과 淨土信行이 일단 양극적인 성격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흔히 쓰이는 이른바 自力信行이니 他力信行이니 하는 개념도 바로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와 같이 대조적인 것으로 보이는 禪과 淨土信行이 과연 어떻게 결합되는지, 그 사정과 논리가 자못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철저한 自力信行을 자처하는 禪宗 傳統에서 禪淨雙修가 계속되었다는 문제는 信行과 敎義의 핵심 부분과 연관되는 중요한 주제라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현각 스님은 발표논문에서 우선 禪淨雙修의 源流를 더듬어보고 다음에 鏡虛 스님의 禪淨觀을 究明하는 가운데, 바로 이 문제와 관련된 핵심적인 사항들을 짚어주며 많은 시사를 던져줍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 중 몇 가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에 대해 현각 스님께 보충 설명을 청함으로써 더욱 진전된 이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대체로 그 모두가 禪과 정토신행이 결합하는 사정과 논리, 나아가 타당성의 문제로 수렴되는 것입니다만, 몇 가지로 나누어 질문을 올리겠습니다.
질문을 올리기 전에 우선, 마침 후지요시 지카이(藤吉慈海)의 책에서 저의 문제의식을 대신 이야기하는 것 같은 대목을 본 참이라 인용이 좀 길어진다는 느낌을 무릅쓰고 그것을 여기에 옮겨 보겠습니다.
그것[禪淨雙修]을 타락이라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발전이라고 보아야 할는지에 관해서는 서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염불과 좌선을 같은 도량에서 서로 행해도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불교의 깊은 뜻에 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다. 사실 그와 같은 일면이 확실히 있기 때문에 감히 禪淨이 雙修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단지 막연히 염불이나 선이 모두 불교이기 때문에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현생에 있어서 수행에 의해 大悟徹底를 기하는 선과 미래 왕생을 원하는 염불과는 서로 그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있지 않은가?..... 만약 현세에는 선을 닦아 깨달음을 구하고 미래에는 정토에 태어나 쾌락을 얻고자 한다면....., 이는 극히 안이한 타협이며, 확실히 타락불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선을 수행하면서 염불을 함으로써 현세에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선에 의해 마음을 단련시키고 생활을 정돈하며, 미래의 왕생을 믿고 염불하는 사람도 있다.” (ꡔ禪淨雙修의 展開ꡕ, 韓普光 옮김, 民族社, 1991, 179~180쪽)
바로 그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우선 염불을 禪修行에 依用하는 이른바 念佛禪의 敎義的 論理에 관해 조금 더 여쭙고 싶습니다. 禪宗에서는 제4조 道信이 이미 염불선을 채용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一行三昧에 들고자 하거든..... 마음을 한 부처님에게 두어 오로지 부처님의 名字를 부르며....., 그 一佛을 끊임없이 念”하라고 역설했는데, 이는 일행삼매 수행의 방편으로 염불을 사용함으로써 禪과 念佛을 만나게 한 것이라 해설하셨습니다. “일행삼매의 염불은 곧 念心”이라는 데 초점을 두고 설명을 하셨는데, ‘念佛이 곧 念心이고 念心은 곧 無所念’이라는 그 연결 논리에 대해 좀 더 보충 설명을 청하고자 합니다. 염불이 禪定의 한 방법으로 타당성을 확보하는 핵심 논리가 거기에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아가 一心不亂을 기준으로 해서 참선과 염불을 나란히 수행방편의 반열에 두었다는 鏡虛 스님의 禪淨思想에서도 기본 논리가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를테면 主客不二의 疑團을 핵심으로 하는 看話와 부처님의 名字를 부르며 念하는 것이 相通 내지는 적어도 無妨이라는 것이 어떻게 설명되는가 궁금합니다.
다음으로, 淨土往生의 소원을 중심으로 하는 信行을 禪과 결합시키는 데에는 다만 觀想法으로서의 念佛을 禪에 依用하는 것보다도 더욱 강력한 변명이 요청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根機에 따른 方便的 處方이라는 설명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直入을 내세우며 “밖에서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핵심적인 宗旨로 삼는 禪宗에서, 아무리 下根機 敎化의 방편이라 해도 하필 西方淨土를 주요 신앙 대상으로 추천하느냐 하는 힐문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기왕에 하필 西方淨土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그에 往生하겠다는 信行에 一心不亂하게 專念하는 것은 곧 淨土와 阿彌陀佛을 엄연히 絶對的이고 다분히 神秘的인 外的 實在로 믿는 主客分離的인 信仰의 다짐을 전제하기가 십상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셋째로, 염불 내지 정토신행을 依用하는 의의를 중생구제의 利他的 菩薩道 實踐에서 찾고 있는데, 그게 왜 그러한가에 대해서도 보충 설명을 청하고자 합니다. 下根機 衆生이 佛道에 들기 쉽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런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下根機 衆生이 佛道에 들기 쉽게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한다면, 實相念佛이나 서방정토의 신행이라도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어느 포인트에선가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밖에서 찾지 않는다”는 禪旨의 체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라는 뜻인지 궁금합니다. 그게 아니고 정토신행이 어느 정도 익었을 때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시 禪旨를 가르쳐야 한다면(ꡔ六祖壇經ꡕ 참조), 그 포인트는 언제이며 어떤 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옳은지 궁금합니다. 만약 現生에는 정토신행에만 전념하고 본격적인 禪旨의 이해는 來生에나 기약하라는 이야기라면, 대다수의 중생에게 佛道는 그저 根機를 가다듬고 기다리는 길일 뿐이게 되니 禪旨와는 안 맞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방편은 그야말로 쓰임새가 잘 발휘되어야 가치가 있는 것인데, 禪淨雙修의 方便이 지금 우리의 불교 신행 현장에서도 좋은 방편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일각에서는 현재 우리 불교의 큰 문제점으로 祈福의 신행에 치우친 것을 꼽으면서 정토신행이 그 기복신행의 멍석이 되어왔음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야할지 견해를 여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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