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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도 지혜다

淸潭 2007. 4. 14. 12:53
속임수도 지혜다
 
컨닝, 교활함의 매혹
돈 허조그 지음|이경식 옮김|황소자리|407쪽|2만3000원
권모술수를 잘 쓰는 교활한 지배자는 무섭고 또 매혹적이다. 15세기 이탈리아에 체사레 보르지아(1475~1507)라는 훤출한 청년이 살았다. 교황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18세에 추기경이 됐다가 23세에 파계하고 칼을 잡았다. 아버지의 힘으로 발렌티노 공작이 됐고, 이를 기반으로 정복 전쟁을 일으켜 중부 이탈리아를 제압했다. 그는 레미로 데 오르코라는 잔혹한 장수에게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로마냐 땅을 다스리라는 전권을 준다. 백성들의 원성이 치솟자 보르지아는 데 오르코를 죽이고 시신을 토막 내 광장에 내걸었다. 남에게 더러운 일을 시키고, 더러운 일이 완료됐을 때 그를 처단해 자기 지지율까지 올린 셈이다. 이 고도의 술수에 피렌체의 외교관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탄복했다.

저자 돈 허조그(Don Herzog)는 미국 미시간 대학 법대 교수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크리스토퍼 말로의 ‘말타의 유태인’을 거쳐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기록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방대한 자료를 종횡무진 들추며 ‘컨닝(cunning)’의 사례를 든다.

‘컨닝’은 교활함, 간사함, 약삭빠름을 뜻하는 영어 단어다. 어원은 ‘안다’는 뜻의 고어(古語) ‘can’에서 나왔다. 16세기 전에는 ‘지식’을 뜻하는 낱말이었는데, 어느새 속임수를 뜻하게 됐다. 저자는 “교활한 게 꼭 나쁘냐?”고 묻는다.

1492년 스페인 군대가 그라나다 지방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인들을 쫓아냈다. 그 뒤 그라나다 지방의 위조범들이 “성모 마리아가 쓰던 수건과 초기 기독교 시대의 기록물을 동굴에서 찾아냈다”고 떠들었다. 이것들이 가짜라는 게 밝혀진 건 100년이 지난 뒤였다. 그 사이 이 가짜 수건과 기록물은 그라나다 지방에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104쪽).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혹은 대의를 사수하기 위해 교활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도 수없이 많다. 독일의 유태인 작가 빅터 클렘페러는 2차대전 막바지에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어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의 집에 몸을 숨겼다. 클렘페러를 숨겨준 집 주인이 정치와 종교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젊은이들은 십계명부터 배워야 하지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유태인도 십계명을 믿는다. 클렘페러는 일기에 “이런 말을 함으로써 나는 그들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신념을 표현한다”고 썼다(158쪽).

저자는 “나는 선한 것의 감동적인 환상에는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의 경계는 모호하다. 교활함과 지혜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물음표로 끝난다. 교활함이 지혜의 딸인지, 지혜가 교활함의 딸인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흥미롭다. 원제는 Cunning.

김수혜 기자 , goodluc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