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이야기
1.티베트의 자연과 역사
자연에 순응하는 티베트사람들의 삶
원래 티베트에는 티베트 족이 중심으로 약간의 한족, 회족, 몽고족이 살고 있었는데 중국의 이주정책으로 인해 지금은 한족의 수가 티베트인을 능가하고 있다. 인구는 주로 짱난 곡지에 살고 있으며 티베트의 가옥은 온돌과 흙을 겹겹이 쌓아올린 벽으로 만들어진 2∼3층의 집이다. 산업은 주로 농업과 목축이 대부분이며 주로 반농반목(半農半牧)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차고 건조한 기후 때문에 조생종 라이보리가 주요 농작물이고 봄밀, 완두콩, 원두라고 불리는 둥근 무, 유채, 누에콩, 메밀, 복숭아, 배, 사과 등을 기른다. 목축으로는 소와 비슷하게 생긴 야크와 양을 사육하는데 야크는 운송용으로 이용될 뿐 아니라 가죽, 털, 내장, 젖 등이 모두 쓰이고 그 분뇨는 연료로 쓰이므로 티베트인들의 생활과는 뗄래야 뗄수 없는 동물이다. 티베트인들의 주식은 라이보리를 볶아 가루로 빻은 참파라는 것을 먹는데 버터차로 반죽하여 먹는다. 버터차는 나무통에 끓인 찻물을 붓고 소금과 버터를 넣은 후 저어서 만든다. 옷은 모직물로 만든 옷을 입는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잘라 맹금류에게 나누어주는 조장(鳥葬)은 티베트의 독특한 장례풍습이다. 화장을 하기에는 충분한 나무가 없고 기온이 낮고 건조한 기후로 인해 매장을 하더라도 시체가 잘 썩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풍습이 생겨났지만 보시를 통한 보살행을 중요하게 여기는 티베트인들의 불교관이 잘 드러난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티베트의 역사
7세기 초 송첸 감포 왕이 티베트 족을 통합하여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당나라 태종 때
문성 공주가 송첸 감포 왕에게 시집오면서 종이 만드는 기술 등 중국문화가 전해졌고 또한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고 티베트 문자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842년 다르마 왕이 즉위한 후 봉건제후의 활거 등으로 내분이 일어나 400년 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13세기 몽고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 정치와 종교를 함께 통치하는 정교합일적인 지배체제가 형성되었다. 원나라 이후 명과 청나라 시대에는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 영국과 러시아가 티베트를 그들의 세력권을 만들기 위해 일부 티베트 상류층과 결합 중국으로부터 티베트를 분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 정부는 30년부터 중국관리를 티베트에 파견하였고 34년에는 수도 라사에 몽장(蒙藏) 위원회 주(駐) 티베트 사무소를 설치, 중국의 티베트 종주권을 유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 티베트는 독립정부를 구성했으나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중국공산군에 의해 1950년 침공을 받게 되었다. 중국 공산군의 점령이후 14대 달라이 라마는 UN의 티베트 문제 개입을 호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중국의 종주권과 티베트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17개 조항의 협정안'이 중국 당국의 강요에 의해 강제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중국군의 동부 티베트 지역 탄압과 달라이 라마의 신변문제를 계기로 1959년 수도 라사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자 달라이 라마와 그를 따르는 티베트인들이 인도로의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티베트는 중국의 자치 구역으로서 중국과 동일한 체제로 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유재산이 몰수되거나 아주 소수의 사원만을 남겨 둔 채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되었으며 대부분의 승려들은 투옥되거나 강제로 환속당했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신비의 땅, 티베트의 자연
티베트는 히말라야 산맥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4천 미터 이상의 고원인,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티베트 고원에 자리하고 있어서 공기가 희박하고 드넓은 초원과 산맥으로 유명한 티베트는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곳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자연의 나라'라는 뜻의 '포(Poe)라고 부르거나 산의 눈이 여름에도 녹지 않고 쌓여 있어 '눈 덮인 나라'라는 뜻의 캉첸이라고 부른다.티베트의 총면적은 220만 km2으로 중국 전국토의 23%에 해당될 정도로 광활하다. 티베트는 북위 27∼37。 사이의 위도에 위치해 있지만 지형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차고 건조한 기후를 나타낸다.
그래서 겨울에도 평균기온이 0도 이하이고 여름 기온도 섭씨 20。를 넘지 않으며 강풍이 불고 연평균 강수량도 200mm 이하이다. 반면 짱난 곡지는 브라마푸트라 강 골짜기로부터 불어오는 계절풍으로 연평균 기온이 10。C 안팎이고 강수량도 1,000mm가 넘는 지역이 많다.
한랭건조하기 때문에 목초지와 황무지가 대부분으로 10∼20cm의 부식토에 목초가 건조한 땅위를 덮고 있다. 이 층을 캐내면 재생이 불가능하여 사막화될 위험성이 있어서 오랜 세월동안 토지를 개발하는 것을 꺼려왔다. 반면, 동부지역에는 삼나무, 낙엽송 등의 산림이 형성되어 있다.
파괴되어가는 생태 환경
인도, 네팔, 부탄, 미얀마, 태국 등과 접해 있어서 전략적 요충지이며 티베트 고원의 광물자원은 세계 그 어느 곳보다도 풍부하다.
이런 점 때문에 중국이 티베트를 쉽게 놓아주지 않고 있다. 중국이 침략하기 전 티베트는 근대 사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환경보존 제도를 갖고 있었다. 야생생물과 넓은 대지에 걸쳐있는 티베트 자연은 불교가 티베트 사람들에게 모든 생물과 무생물의 상호연관성을 가르쳤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보존할 필요가 없었다.
불교는 사람들에게 짐승을 죽이지 말고 모든 살아있는 것과 주위 환경에 자비심을 가질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티베트 정부는 동물사냥을 금지했었다. 그래서 티베트는 생태 환경적으로 안정적이었고 환경보존이 티베트인들의 일상생활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중국의 침공은 이러한 티베트 사람들의 자연친화적인 태도를 짓밟아 버렸다.
티베트는 희귀한 식물종과 야생동물, 천연자원의 보고이며 아시아 대륙을 흐르는 강들의 발원지로서 파괴되어서는 안될 주요한 위치에 있다. 티베트에는 대부분 티베트에만 자라는 희귀한 1만 여종 이상의 고산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이중 2천 여종은 티베트, 중국과 인도의 전통 의학에서 사용되는 식물이었다. 샤프란, 칼리스데몬, 미나리 아재비, 매나무 등은 티베트에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식물들이다. 또한 황새, 야생 백조, 물총새, 바다새, 맹금류, 딱새, 상딱새, 되새, 검은 목 두루미, 지빠귀 등의 새가 있었다. 티베트의 산과 숲은 눈 표범, 시라소니, 검은 곰, 갈색곰, 야생 야크, 푸른 양, 사향노루, 금 원숭이, 야생 당나귀, 티베트 가젤, 티베트 영양, 팬더, 붉은 팬더 등과 같이 희귀하고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의 보금자리였다. 2백 5십만 헥타르에 이르는 티베트의 삼림은 가파르고 35도가 넘는 계곡의 경사지에 형성되어 있다. 가문비 나무, 전나무, 소나무, 낙엽송, 노송나무, 자작나무, 너도밤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열대 침엽수림과 아열대 침엽수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 200년 이상된 나무들이 있다.
티베트에는 개발되지 않은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금, 리튬, 우라늄, 크롬, 철, 붕산나트륨, 구리 등 126가지의 광물의 상당량이 있다. 우라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저장되어 있다. 또한 암도 지방의 유전은 매년 1백만 톤 이상의 원유를 생산한다.
티베트는 브라마푸트라, 인더스, 메콩, 양츠, 황하 등 아시아의 주요 강들의 발원지이다. 이들 강들은 중국, 인도, 파키스탄,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태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 흘러 들어가는 아시아 대륙의 생명선이다. 또한 티베트에는 1만 5천여개의 자연호수가 있다.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티베트에서 발원하는 강들은 세계 인구의 47%, 아시아 인구의 85%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티베트의 환경문제는 가치 없는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킬 만큼 중요한 지구적 문제이다. 그 어느 때보다 생태파괴로부터 티베트 고원을 지킬 필요성이 시급하다. 왜냐하면 이는 티베트인들의 생존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류의 절반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티베트는 중국에 의한 광범위한 환경파괴로 삼림파괴이 파괴되고, 야생 야크와 당나귀가 도살되며 흰색입술사슴과 티베트 표범, 푸른 티베트 양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과 석유, 석탄, 금, 철, 구리와 같은 광물이 무분별하게 채굴되고 있으며 핵무기 실험실과 핵폐기물 매립장소가 되었다. 현재 티베트에는 중국이 티베트 약 90기의 핵탄두를 배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산림파괴로 인해 티베트의 사막화가 빨라져 인도와 주변 지역에 홍수피해와 기상이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는 아무런 환경적 보완장치 없이 수많은 자연자원을 계속해서 빼가면서 티베트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2.티베트 정치
인도 북부 히말라야 기슭 다람살라에는 '작은 라사'로 일컬어지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위치하고 있다. 현재 다람살라에는 망명한 10만 여명의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으며 3만 여명의 티베트인들이 네팔과 부탄의 티베트 정착촌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다람살라에 망명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지금까지 죽음을 무릅쓴 티베트인들의 망명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중에는 중국에서는 티베트 교육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부모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 자식을 다람살라로 보낸 경우가 많다.
현재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티베트 언어, 역사, 종교, 문화 전반에 걸친 티베트 교육체계가 수립되어 있기 때문이다.티베트인들은 대부분 농업 정착촌에 살고 있다. 농업, 농산업, 수공업, 서비스 분야의 산업을 중심으로 풍요롭지는 경제가 안정되어 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현지의 티베트 전통문화가 중국인들에 의해 사라져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티베트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1959년에 티베트 공연예술기관을 설립했고 한편으로 중앙고등티베트학연구소를 설립해 인도에 있는 티베트인들을 위한 대학으로 만들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생활방식의 핵심인 티베트불교의 방대한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200여개 이상의 사원을 건립했다.
티베트 망명정부에는 14대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종교, 문화, 내무, 재정, 교육, 방위, 보건, 정보, 국제관계 등을 관할하는 행정부와 사법부로서 티베트 최고사법위원회가 있다. 또한 입법부로서 티베트 국민대표의회는 지역과 종파를 대표하는 46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다.또한 뉴델리, 뉴욕, 런던, 파리, 제네바, 부다페스트, 모스크바, 카트만두, 캔버라, 도쿄, 타이페이 등에 티베트 망명정부 대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티베트의 불교와 정치권력
고대 티베트 고원에 흩어져 살던 티베트 민족은 7세기 중반 송첸감포라는 걸출한 군주에 의해 왕국으로 탄생했다. 티베트라는 이름은 당시의 몽골어었던 ‘투베트(Thubet : 吐藩)’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눈 위의 거주지’라는 뜻이다.
송첸감포 왕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나라와 네팔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송첸감포 왕의 결혼은 공식적으로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진 계기가 되었다. 티베트에 시집을 온 두 공주는 각각 라모체 사원과 투르낭 사원을 세웠으며, 이것이 티베트 불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송첸감포 왕의 뒤를 이은 티송데첸 왕은 761년 불교를 국교로 정했으며, 이후 티베트 불교는 인도의 대석학 샨타락쉬타와 파드마삼바바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발전은 처음부터 갈등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공식적인 최초의 불교 전래는 당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후 인도 불교의 유입으로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친인도 세력과 친중국 세력으로 양분되었고, 이는 결국 파벌에 의해 티베트 불교가 유지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전통 종교인 본(Bon) 교(敎)와의 갈등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각 종파간의 다툼을 비롯해 본교와의 갈등은 한편으로는 오히려 티베트 불교 발전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티베트 불교는 특유의 씨족 교단을 형성하고,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티베트 불교는 정치세력화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활불전세(活佛轉世 : 환생)’와 ‘정교일치(政敎一致)’라는 티베트 불교만의 독특한 전통이 확립된 것이다.
이 때문에 송첸감포 왕은 달라이 라마의 등장 이전까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티베트 인들에게 추앙되었다. 또한 정교일치 제도로 인하여 티베트 불교는 종파의 형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는 ‘환생’과 함께 ‘정치·종교지도자’로서의 ‘달라이 라마’ 제도가 확립된 계기가 되었다.
9세기 중반 랑 다르마(Lang Dharma) 왕이 즉위하였다. 티송데첸 왕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국교가 된 후, 융성을 거듭하던 티베트 불교는 랑 다르마에 의해 일대 위기를 맞았다. 불교의 강력한 권력 아래 숨을 죽인 채 왕권의 회복을 노리던 그는 본교 세력과 손을 잡고 불교를 탄압했다. 그러나 강력한 권력을 누리던 불교 세력은 1년이 되지 않아 왕을 암살했고, 이는 토번 왕국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후 티베트는 몽골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1239년 오고타이 칸의 아들 쿠텐은 티베트를 점령했고, 이 과정에서 사캬파의 쿵가 겐첸 즉 사캬 판디트(Sakya Pandit)가 몽골과 손을 잡고 집권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몇 개의 불교 종파가 있었으며, 이들 종파는 몽골 제국과의 관계 정립에 의해 집권과 몰락을 거듭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지배가 약화될 무렵 쫑카파가 등장해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 정치권력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3.티베트 불교
달라이 라마도 판첸 라마도 없는 티베트 불교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1951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군하고, 59년 14대 달라이 라마가 북인도 다람살라로 옮기면서 티베트 불교는 그 구심점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재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 달라이 라마는 14대, 아미타불의 현신인 판첸 라마는 11대까지 환생했다. 이들은 입적후 환생자를 찾아내고 나이 많은 쪽이 돌아가며 스승이 된다. 태양으로 비유되는 달라이 라마에 비교해 달로 비유되는 판첸 라마는 중국 정부와 북인도 망명정부가 각각 임명해 두 명인데, 현재 각각 베이징과 북인도에 살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은 불교 지도자들이 떠나버린 사찰에서도 쉴새 없이 마니륜을 돌리며 티베트 불교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환생을 믿는 이들은 당장 먹을 버터가 없어도 불전에는 버터를 공손히 떠서 바친다.
그래서 어느 티베트 사찰에건 버터를 연료삼아 타들어가는 매캐한 초냄새가 코를 찌른다. 티베트인에게는 생활이 불교이고, 불교가 생활이기 때문이다. 다만 젊은 사람들은 순례자들 틈에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티베트 불교의 형성
해발 3,500m가 넘는 라싸의 공가 공항에 도착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통과 구토 등 고산증세에 시달린다. 이처럼 왕래가 쉽지 않은 티베트 고원에 불교가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이 지역을 통일하고 당나라까지 위협한 송첸감포왕(617~649) 시대부터였다. 그에게 시집온 네팔의 공주 티췬과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불교를 들여왔고, 이때부터 티베트 전역에 사원이 세워졌다.
특히 8세기 중반 인도의 고승 파드마 삼바바가 들여온 밀교는 당시 티베트에 널리 퍼져있던 원시종교인 뵌포교와 합해져 독특한 형태로 발전했다. 티베트의 집집마다 청·백·적·녹·황의 오색깃발인 ‘탈초’를 몇개씩 달고, 주문을 외우듯(‘뵌포’는 주문을 외운다는 뜻) 마니륜을 돌리며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는 티베트인들을 만날 수 있다.
이후 티베트 밀교에는 닝마파·카담파·카규파·사캬파·게룩파 등의 종파가 생기는데 이중 가장 늦은 14세기에 총카파 법사(1357~1419)가 창종한 게룩파가 티베트인의 98%를 수용하는 주류가 됐다. 그의 제자 8명 중 두명이 각각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로 추대되고, 제5대 달라이 라마는 몽골의 지원으로 1642년 정치와 종교를 함께 관장하는 법왕으로 등극해 오늘에 이르렀다.
◇포탈라궁과 티베트 불교의 대표적 사원
티베트의 4대사원은 수도 라싸에 있는 드레풍 사원, 세라 사원, 간덴 사원, 그리고 제2의 도시인 시가체에 있는 타쉬룽포 사원이다. 이중 간덴 사원을 제외한 세 곳과 포탈라궁에서 티베트 밀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밖에 라싸의 죠캉 사원, 갼체의 쿰붐사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순례중인 티베트인들을 풍경에서 제외한다면 호화로운 불상으로 그득한 관광지의 느낌만 들었을 것이다.
▲드레풍 사원(哲蜂寺)
아직 정비가 안된 사원은 마치 거대한 화장실처럼 악취가 진동하고 수많은 걸인들이 “원 위안, 원 위안”하면서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을 부른다. 그러면서도 걸인들은 손잡이가 달린 작은 마니륜을 쉬지 않고 돌리면서 입으로는 염불을 외우고 있다. 부디 내세에서는 부자로 환생하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 것 같다.
게룩파의 창시자 총카파 법사의 제자 장양취졔가 1416년 라싸의 서쪽에 창건한 이 사찰은 한때 티베트 최대규모를 자랑했지만 현재는 1959년 중국 합병과 문화혁명으로 상당부분이 파괴됐다. 전성기엔 1만명의 승려가, 지금은 약 500명의 승려가 절을 지킨다. 사원 옆 ‘간덴 포트랑’이라는 건물은 제2대부터 5대 달라이 라마까지 집무를 보던 곳. 법왕제를 확립한 5대 달라이 라마는 포탈라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라 사원(色拉寺)
총카파 법사의 수제자인 스쟈예스가 1419년 창건한 사원으로 스님들이 공부하는 불학원이 있다. 과거 5,500여명이 공부했던 적도 있지만 현재는 400여명만이 있다고 한다. 안내자는 “티베트력으로 6월 보름부터 두달간 안거기간이라서 요즘은 스님들이 대부분 사원안에서 꼼짝않고 수행중”이라고 했다. 우기(雨期)에 꿈틀거리며 돌아다니는 벌레들을 살생할까봐 염려한 때문이다.
▲포탈라궁
관세음보살이 있다는 동명의 보타산(普陀山) 위에 깎아지른 듯 자리잡은 이 궁전의 이름 또한 그대로 포탈라(‘보타’의 티베트식 발음), 즉 관세음보살이 사는 궁전이다.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달라이 라마이므로 어찌보면 당연하다. 원래 8세기 송첸캄포왕 때 지어졌지만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 건축물(높이 119m, 넓이 13만㎡)은 제5대 달라이 라마가 17세기에 지었다. 벽의 색에 따라 홍궁과 백궁으로 나뉘는데 역대 달라이 라마의 등신불과 법당을 모신 홍궁은 대부분 개방되어 있지만, 현재 행정동으로 사용되는 백궁은 거의 볼 수 없다.
경향신문 이무경 기자
환생의 의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라는 활불(活佛 : tulku) 제도는 티베트만이 지닌 전통이다. 물론 티베트 불교 초기부터 확립된 제도는 아니다.
강력한 군주이자 신망받는 종교지도자였던 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에 의해 17세기에 확립된 제도였다. 그러면 환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윤회의 또 다른 형태는 아닌가.
이에 대한 14대 달라이 라마의 견해는 이렇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존재는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제법(諸法)의 실상을 알게 된다. 그 때문에 고통받는 중생들이 모두 제도될 때까지 세상에 거듭 나투게 된다.” 이것이 달라이 라마가 그의 자서전에서 스스로 밝힌 환생의 의미이다.
좀더 논리적인 설명이 있다. 1995년 뉴욕에서 칼라차크라 법회를 하면서 한 설법 가운데 일부이다.
“마음은 과거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성을 갖는다. 지금의 생에서 전생의 마음이나 의식을 찾아갈 수 있다면, 물질계가 그러한 것처럼 마음이 갖는 연속성의 시초를 무한한 차원에까지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처음은 없다. 마음의 연속성을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환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의 결과로 있는 것이며, 마음이나 의식도 그 직전 상황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과 물질은 상호 작용하지만 그 중의 어떤 하나가 서로 다른 어떤 하나의 실체가 되지는 못한다.”
불교에서는 변하지 않는 존재나 어떤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후에도 변하지 않고 ‘나’로서 존재하는 실체는 없다. 그가 말하는 환생에서 전생과 현생, 그리고 다음의 환생을 이어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어떤 존재가 아니다. 우리 의식의 미세한(오묘한) 층이다.
그 층도 실체로서의 존재는 아니다. 오랜 수행 끝에 이룬 깨달음에 바탕을 둔 그러한 미세한 층인 것이다. “의식에는 여러 차원들이 있다. 가장 깊숙한 우리 내면에 있는 미세한 의식이 지닌 특별한 에너지는 밝은 빛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달라이 라마가 설명하는 환생의 논리이다.
제도로서의 환생
달라이 라마가 설명하는 환생은 수행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무명(無明)에 이끌리는 중생의 윤회와는 차원이 다른, 깨달음에 바탕을 둔 방편으로서의 환생인 것이다. 그러나 티베트 인들이 그들의 삶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거의 절대적인 신앙을 보이는 환생은 좀더 세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환생자의 전통은 힌두교와 티베트 불교 자체에서 비롯되었다.
84명의 대성(大聖)이 그 전통의 시작인데, 그들은 수행을 통해 ‘위대하고 완전한’ 경지에 오른 성인들이다. 대성들은 중생제도를 위해 환생한다. ‘84’라는 숫자는 ‘완전’을 상징하며, 대성 가운데는 티베트 불교지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티베트 불교의 대석학 파드마삼바바도 84명의 대성 가운데 한 명이다. 이들 대성이 티베트 불교에서 환생제도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에서 환생이 실질적인 권력제도로 자리잡은 것은 불교와의 관계 속에서였다. 티베트의 전통 종교는 불교가 아니다. 본(Bon)교였다. 본교는 불교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8세기 무렵부터 불교에 흡수되고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으나 티송텐첸 왕의 강력한 불교 국교 정책의 추진으로 힘을 잃었다. 본교는 제물을 바치고 피를 올리는 제례 의식과 악마를 쫓는 주술이 발달한 토착 종교였다.
강력한 왕권을 지닌 ‘신성한 왕’들은 신의 대리자였다. 대기와 대지, 지하, 하늘을 대표하는 신들은 왕으로 나타나 그들을 돕고 다스렸다. 결국 신성한 왕들은 신들의 화신(化身)이었다. 이러한 본교의 영향은 티베트 불교에서 활불을 인정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티베트에서 환생자는 오래 전부터 그들을 다스리던 신성한 왕의 대리자로서 다시 ‘환생’하였다. 결국 치열한 논쟁과 정쟁(政爭) 끝에 자리잡은 ‘달라이 라마’는 오랜 티베트의 전통에서 자연스럽게 정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본교의 전통에서 확보한 셈이었다.
불교를 반대하는 세력은 본교를 주축으로 힘을 키웠다. 그들을 물리친 티베트 불교의 출가 승단은 정쟁의 와중에서 실종된 중앙 권력을 취할 수 있었다. 권력을 잡은 승단은 자각하기 시작했다. 청정한 모습을 지니지 못한 출가 승단은 강력한 힘을 갖지 못한다. 11세기 티베트 불교 중흥자 아티샤(Atisa, 982∼1054)는 이 점을 꿰뚫고 있었다. 계율 부흥 운동을 강력히 추진했다.
다소 해이해진 승단은 출가의 전통을 확고히 했고, 강력한 계율은 몇 백년 후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그러나 승단을 강력하게 만든 출가의 전통은 또 다른 전통을 필요로 했다. 출가자는 강력한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혈육보다 강력한 후계자는 없기 때문이다. 3대 달라이 라마는 몽골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현실 정치의 냉혹함을 보았고, 보다 강력한 후계자를 원했다.
강력한 권력이야말로 티베트를 굳건하게 지켜 줄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 자신 강력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티베트를 다스리기도 했다. 그의 뒤를 이은 강력한 군주가 바로 5대 달라이 라마였다. 그는 환생 제도를 정착시켰으며, 죽음을 감추면서까지 포탈라궁을 완성했다. 환생자로서의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궁전 포탈라(관세음보살이 계시는 곳이 보타락가산이다.)는 성스러운 장소인 동시에 강력한 정치력의 상징이 된 것.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로 대표되는 환생자, 활불의 전통은 그렇게 성립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거의 모든 티베트 인들의 가슴속에 영혼의 지도자인 동시에 세속의 지도자로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거쳐 확립된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환생에 대해 티베트 인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들에게 전생활불(轉生活佛)은 당연한 신앙의 대상이다.
환생의 법왕(法王)이 몇 세기에 걸쳐서 유지되고 지금도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본교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신을 대신해 지상에 나툰 신성한 왕은 본교에서 비롯되어 티베트 인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둘째, 그들을 다스릴 강력한 권력은 국가 제도 아래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일단 중앙 집중 권력을 확보한 출가 승단에서 후계자를 구하는 일은 법왕의 환생 이외에는 생각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셋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중생을 제도하는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의 화신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퍼졌다. 티베트 인들은 매우 종교적인 성향을 지닌 민족이다.
그들이 받아들인 불교의 이념 아래서 화신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환생이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환생제도 자체의 매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법왕 이전의 군주는 혈통에 의해 양위되어 왔다. 그러나 환생한 법왕은 빈부와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제도다.
이것은 환생제도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대성 84명의 출신성분이 모든 계층과 남녀를 가리지 않는 데서 연유한다. 따라서 티베트 인이 아닐지라도 환생자로 밝혀진다면 티베트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티베트 인들에게 ‘달라이 라마’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될 것이다. 티베트 사람은 누구나 ‘달라이 라마’를 만나야 한다. 한 번만이라도 ‘그분’을 친견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다.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는 일은 그들에게 모든 수행의 근본이 된다. ‘그분’을 만나면 고통스럽고도 긴 윤회의 여정을 마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마니륜(Mani輪)이라는 조그만 불구(佛具)를 돌리며, ‘옴 마니 반메 훔’을 염송한다.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고 관세음보살의 진언을 염송하며 깨달음의 언덕으로 나아가는 것이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에게 ‘달라이 라마’는 그저 단순한 세속의 정치 지도자가 아니다.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스승이며, 삶의 등불이다. 다람살라에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나, 북인도 지역에서 만난 어린아이들은 예외 없이 사원에 들러 커다란 마니륜을 돌리며 ‘옴 마니 반메 훔’을 염송한 후에 학교를 간다. 대부분의 티베트 사람들에게 불교는 삶 그 자체이다.
그들은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사원을 세우며, 집에는 예외 없이 형편에 맞는 불단을 설치하고, 예경을 올린다. 부처님상 옆에, 혹은 무릎 위에는 항상 달라이 라마의 사진이나 판첸 라마의 사진을 올려 놓는다. 부처님 앞에서 달라이 라마 앞에서 그들은 오체투지를 하고, ‘옴 마니 반메 훔’을 염송한다. 이국 땅에서 떠돌아도 그들은 어디에서든지 사원을 가장 먼저 세운다.
그리고 학교를 세운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민족인 동시에 나라마저 잃은 그들은 쉼 없이 배운다. 부처님과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을 배우고, 영어를 배운다. 그들이 중국이라는 대제국의 힘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원동력이 바로 이것이다.
1989년 1월 21일 제10대 판첸 라마(Panchen Lama)가 입적했다. 그리고 며칠 후 2월 초 그를 추도하는 장례 행렬은 티베트의 독립을 외치는 격렬한 시위 행렬로 바뀌었다.
그후 한 달 동안 라사에서는 6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다쳤다. 당황한 중국 정부는 3월 7일 티베트에 처음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티베트 국민들에게 또 다른 지도자였던 판첸 라마에 대해 중국은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은 1995년 5월 17일 14대 달라이 라마가 지목한 환생자인 11대 판첸 라마 ‘겐둔 최키니마(Gendhun Choekyi Nyima)’를 납치해 ‘세계에서 가장 나이 어린 정치범’으로 만들었다.
판첸 라마 제도는 5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확립된 제도이다. 5대 달라이 라마가 그 스스로 굳건한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 그의 스승을 위해 마련한 제도였다. 그의 스승 ‘롭상 최키 걀첸(Lobsang Choekyi Galtsen)’은 겔룩파의 2인자였다. 시가체 지방의 타쉬룬포 사원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그를 5대 달라이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인정하고, 제4대 판첸 라마로 임명했다.
그리고 1대 판첸 라마로는 티베트 불교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꼽히는 쫑카파의 제자를 추서했다. 2대와 3대 판첸 라마는 모두 타쉬룬포 사원의 지도자였다. 현재의 판첸 라마는 11대가 된다. 강력한 전제 군주였던 5대 달라이 라마는 판첸 라마를 정치적 동반자로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첸’은 ‘위대한 학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관세음보살의 화신 달라이 라마와 아미타불의 화신 판첸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의 정교일치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이후 오랜 동안 판첸 라마와 달라이 라마는 서로의 공백기를 메워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때로는 정치권력을 놓고 다투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판첸 라마는 티베트의 2인자로서 권력의 한 축에 서 있었지만 2인자로서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달라이 라마의 입적 후, 섭정 기간에는 정치고문 역할을 하기도 하고, 환생자 선택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위상은 실질적인 정치권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국민들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확고해진 것일 뿐이었다. 1728년 중국은 판첸 라마를 이용해 티베트를 분리시키려고 시도했다. 중국은 서부 티베트의 통치권을 5대 판첸 라마에게 부여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8대 판첸 라마(1883∼1937)대에 연출되었다. 강력한 권력 집중을 바탕으로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13대 달라이 라마는 제국의 확장을 노리던 영국이나 중국 모두에 환영받지 못했다. 그들은 판첸 라마에게 접근했다. 결국 그는 중국의 음모에 의해 중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망명지에서 입적했다. 9대 판첸 라마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일찍 입적했다.
그의 뒤를 이은 10대 판첸 라마도 결국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에서 태어나 적국의 수도인 북경에서 지내야 했다. 티베트의 문화 발전이 그가 생전에 집중한 임무의 전부였다. 이로 인해 티베트 권력의 한 축을 담당했던 ‘판첸 라마’의 존재는 미미해졌다. 그러나 판첸 라마의 정치적 위상은 1940년대 이후 급속하게 강화된다.
중국은 말을 듣지 않는 달라이 라마를 제치고, 판첸 라마를 식민정책의 동반자로 선택했다. 판첸 라마는 중국에 의해 ‘티베트 임시정부 수반’ 자리에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명목상으로는 ‘두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 판첸 라마는 말 잘 듣는 중국의 대리인으로 비쳐졌다.
후에 판첸 라마의 침묵은 티베트에 대한 충정 때문임이 밝혀졌다. 1862년 달라이 라마를 비난하라는 중국의 협박을 거절한 대가로 연금되었고, 1964년 자신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기회도 거절했다. 중국은 그에게 마지막으로 대중연설의 기회를 주었지만, 판첸 라마는 티베트 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
대중들에게 자신의 권위는 중국에 의한 것이 아니라 티베트 역사와 티베트 국민의 가슴 속에 있으며, 달라이 라마의 생존이 티베트의 희망이라고 역설했다. 이 연설로 중국에 압송된 그는 다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1999년 1월 29일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서 그의 10주기 추모 법회를 열었다.
달라이 라마는 10대 판첸 라마에 대해 “티베트의 독립을 추구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애국지사”로 평가함으로써 전대부터 내려오던 서먹서먹한 관계를 청산했다. 또 중국에 연금중인 11대 판첸 라마에 대해서도 “모든 중생을 향한 구원의 역할을 해야 할 판첸 라마를 중국이 납치해서 감금하고 있다.”고 유감을 피력했다. 달라이 라마는 그날 10대 판첸 라마의 전기를 발표함으로써 또 다른 지도자로서의 ‘판첸 라마’를 실질적으로 복권시켰다.
티베트 불교의 도입과 종파
불교를 빼고 티베트 문화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불교는 티베트인들의 생활뿐 아니라 모든 것에 영향을 주고 있다. 원래 티베트에는 본(Bonpo)교라는 샤머니즘이 있었지만 불교가 전래되면서 본교를 대신하게 되었다. 처음 불교가 도입된 것은 6세기 송첸 감포 왕 때였지만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국교로 정해진 것은 티송데첸 왕 (742-797) 때였다. 티송데첸 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나란다 사원의 대학장인 샨타라크시타를 티베트에 초청하였고 인도불교를 티베트 불교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다.왕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대사원을 건립하고 팔리어 경전을 번역하였으며 티베트인들을 인도로 보내 불교철학을 배워오게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티베트에는 대승불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11-12세기 경에는 다수의 불교종파가 형성되었는데 카규(Kagyu)파, 닝마(Nyingma)파, 사카(Sakya)파, 겔룩(Gelug)파 등이다. 이 중에서 겔룩파는 최후에 형성된 종파로서 티베트 불교학의 중심으로서 역할 뿐 아니라 후에 달라이 라마를 지도자로 하여 티베트 불교를 대표하는 최대종파이다.
티베트 불교의 특성
불교는 티베트인들에게는 단순한 신앙체계가 아니다. 그들의 문화와 문명을 포함하고 있으며 생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국민으로서 그리고 민족으로서 티베트인들을 묶어주는 것 중에서 불교가 가장 강력하다. 1950년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를 점령하기 전에는 티베트인들의 25%가 종교적인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한, 티베트 불교에서는 라마, 즉 스승이 죽으면 다시 어린아이로 환생(還生)하여 전생에서 다하지 못한 자신의 역할을 계속 수행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종교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세속적 통치권을 함께 지니는 전통이 있다. 이러한 티베트 불교의 외형적인 모습과 함께 티베트 불교의 내용적인 특징은 경전수행과 탄트라 수행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 도입 과정에서 인도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두 사상, 즉 중관 사상과 유식사상을 모두 수용하였으며 특히 당시 인도불교가 힌두교의 요가와 탄트라 수행법이 함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탄트라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2가지 길을 인정했는데 하나는 경전에 제시되어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경전 수행의 기초는 계(戒-계율) 정(定-선정), 혜(慧-지혜), 즉 삼학이다. 또 다른 길은 탄트라 수행으로 티베트 불교의 기초가 되었다
탄트라는 정신개발을 위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과 혐오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탄트라 수행법은 이러한 근원적인 충동을 부정하지 않고 이러한 충동을 건전하고 유익한 힘으로 정화한다. 티베트 탄트라(일명 바즈라야나로 알려진)에는 다양한 명상법이 있는데 기초적인 수행법은 다음과 같다. 정신적인 스승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모든 생명의 고통을 소멸시키고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명상으로 마음의 평정, 모든 생명을 어머니 같이 여기기, 모든 생명의 은혜를 생각하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자신과 타인을 동등하게 여기기, 이기심의 허물과 이타심의 이익을 생각하기, 남을 나로 바꾸어 생각하기,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모든 생명의 고통을 자신의 가슴에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복을 토해내기, 모든 생명의 괴로움을 책임지겠다는 기도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명상을 통해서 느낀 것을 실제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마음을 훈련한다. 또한 업의 번뇌를 소멸시키며 자만심을 꺾기 위한 절(拜)을 행하고 부처님의 청정함을 상징하는 금강살타를 떠올리면서 만트라를 암송한다. 자기 자신속에 있는 부처님의 성품을 상징하는 황금판을 떠올리고 귀중한 곡식이나 돌 등을 바치는 만달라 공양을 한다. 만달라 공양은 더러움과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난 분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위이다. 다음으로는 스승의 본성과 자신의 마음을 하나로 결합하는 수행인 구루 요가가 있다.
간략히 살펴본 티베트 탄트라는에는 모든 생명이 불성을 갖고 있다는 사람과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다는 공(空) 사상, 그래서 자신의 불성을 찾고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을 소멸하기 위한 기도가 전제되어 있어 대승불교의 모습이 깊이 배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티베트인들의 수행
티베트인들의 수행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승불교 정신을 큰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우리가 빚지고 있는 다른 모든 이들의 고통을 소멸해야 하는데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해탈하기 전까지 개인의 해탈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데서 출발한다.그러므로 티베트인들은 스승의 도움과 지도로 명상을 통해 떠오르는 순수한 인식을 개발시키려고 노력하면서 붓다의자비와 같은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자비를 일깨우고 증대시키려고 한다. 티베트인의 하루는 자신의 집에 차려진 불단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 그들은 탄트라 명상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성스러운 장소를 도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수행은 자신만의 깨달음과 복을 구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모든 중생의 깨달음과 복을 구하며 모든 중생들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이러한 티베트인들의 자비 정신과 이타주의는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데 길거리를 지나다닐 때도 지렁이와 같은 미물조차 밟지 않으며, 나뭇잎을 주워 그 지렁이가 밟히지 않도록 안전한 곳에 옮겨 놓는 모습 속에서 쉽게 발견된다.
티베트의 승려들
사회변동과 부의 재분배 개념으로 독립 티베트는 아시아의 대부분의 국가에 비교된다. 정신적, 그리고 세속적 정치권력의 수장으로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통치는 세습하지 않고 환생제도를 통해서 결정된다. 13대와 14대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달라이 라마는 평민, 즉 티베트의 변방지역에 있는 농촌에서 태어났다.달라이 라마 아래 있는 모든 행정직은 승려와 일반 재가관리가 동수로 이루어진다. 비록 재가 관료들이 세습적으로 직위를 유지하지만 승려들은 세습되지 않는다.승려 관리는 특권계층이 아닌 사람들이 다수를 점한다.
티베트의 사원제도는 사회변동의 기회를 제한하지 않는다. 티베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강원에 들어갈 수 있고 대다수의 승려, 특히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승려들은 대부분 천민 출신으로 캄과 암도지방등 멀리 떨어진 농촌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는 티베트의 사원들이 사람들의 학식에 따라서 어떤 높은 자리에도 오를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티베트 격언 중에는 "만약 어머니의 아들이 학식을 갖고 있다면, 가덴(티베트 불교 겔룩파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자리는 주인이 따로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4.티베트와 중국
달라이라마 10번째 訪日…中 反日감정 자극
국내 방한 여론 다시 불 지필듯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 검정 통과에 대해 중국 내에서 거센 비난 여론이 일고 있는 가운데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끄는 달라이 라마가 8일부터 일본 방문에 나서 중국의 반일 감정을 더욱 자극할 것으로 보인다고 홍콩 펑황(鳳凰)TV가 7일 보도했다.달라이 라마는 19일까지 12일간의 방일 기간 중 도쿄, 교토, 구마모토 등에서 강연, 포교 등 종교 활동을 하며 일본 정부 관계자들과는 만나지 않을 방침이다. 그의 일본 방문은 이번이 10번째다. 중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에 대한 비자 발급이 티베트 분열 세력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며 일본 정부에 이를 거부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측은 그가 일본 종교단체의 초청으로 방일하며 ‘순수 종교 목적’에 국한될 것이라며 비자 발급을 허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방문한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는 1959년 티베트 독립 봉기 46주년 기념일인 지난달 10일 “중국 정부가 티베트의 종교와 문화를 보존해 준다면 티베트는 독립을 추구하지 않고 중국의 일부분으로 남을 것”이라며 유화적 태도를 보였었다.
달라이 라마의 이번 방일은 국내에서도 반일감정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점차 무르익고 있는 그의 방한 여론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문화혁명(1966-76) 당시 파괴됐다가 한 미국 불교단체의 지원으로 새 단장됐던 중국 내몽골지역 한 사찰이 최근 공안당국에 의해 전격 폐쇄됐다고 20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전했다.
신문은 이날 베이징(北京)발 기사에서 쿠빌라이 칸 통치 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 진 내몽골 쿨룬의 800년된 티베트불교 밀교고찰(古刹) 다리 루라이 싱얀사(大日如來 寺)가 오랜 수리를 끝내고 지난 14일 다시 문을 열 예정이었으나 행사를 며칠 앞 두고 전격 폐쇄됐다고 보도했다.
중국 공안과 소방관, 사복경찰, 인민해방군 등은 이 사찰로 몰려들어 '살아있는 부처(生佛)'로 알려진 사찰의 영적 지도자 유 티엔지안(54)을 '사교(邪敎)를 조장한' 혐의로 체포하고 트럭 2대분의 귀중한 유물을 수거하는 한편, 사찰 출입을 봉쇄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쿨룬에는 중국은 물론 미국 일본, 캐나다에서 온 불교도 300여명과 사찰 방장 등이 머물고 있었다고 타임스는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쿨룬시의 한 공안원은 사찰폐쇄 조치에 대해 "우리는 상부의 지 지를 따른 하급자일 뿐"이라며 "우리는 윗 분의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말했 다.
타임스는 이와 함께 최근 바티칸 교황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최근 수 개월동안 허베이에서 몰래 활동중이던 가톨릭교회 사제 8명과 다른 교구 주교 3 명을 체포, 구금하고 있으며 이같은 조치는 중부지역에서 활동하던 개신교 선교단체 관계자 등 100명을 체포한 뒤에 나왔다고 전했다.
베이징 당국은 이밖에도 정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위구르 이슬람 교도들과 티베트불교도들에 대한 오랜 탄압을 계속하고 있다.
한편 LA 타임스는 중국은 종교를 여전히 '인민을 마취시키는 아편'으로 인식하 고 있다고 전하면서 홍콩에 기반을 둔 인권단체 '휴먼 라이츠' 니콜러스 베켈린 소 장의 말을 인용, "그들은 외국인, 특히 미국인들이 간여된 어떤 행동도 극히 민감하 게 반응한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김용운 특파원
중국의 티베트 탄압참상 온몸으로 고발
1943년 10살의 나이로 출가한 티베트 아이 노둡. 팔덴 갸초라는 법명을 받고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고자 했던 그에게 가장 먼저 닥친 시련은, 중국의 티베트 침공에 반대했던 스승을 ‘인도 정부의 스파이’로 고발하라는 중국 공산당의 협박이었다. 그는 이에 응하지 않은 대가로 30여 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가둘 수 없는 영혼>은 티베트 최장기수이자 고통 받는 티베트의 현실을 유엔에서 증언한 최초의 티베트인인 팔덴 갸초의 입을 통해 티베트 현대사의 비극을 전하고 있다.
중국당국에 체포된 그는 고문과 강제노역, 굶주림, 사상교육에 시달려야만 했다. 감옥생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 발에는 족쇄가, 손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전기봉을 입에 넣고 고문하는 바람에 이는 모두 빠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형에 처하겠다”는 협박이 이어졌고, 수감된 동료들의 비리를 고발하라는 압력은 물론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부정하라고 강요당했다. 그 과정에서 감옥 안에서의 처형과 자살은 계속됐다. 처음, 티베트 봉기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7년을 선고받았던 형기는 탈옥 시도와 종교 행위를 했다는 모함, 감옥 안에서의 시위 등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달라이 라마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티베트 독립을 포기하는 것이며 불교를 버리는 것이라는 신념에서였다. 중국 공산당은 팔덴 갸초를 감옥에 가두었지만, 그의 사상과 영혼은 결코 가둘 수 없었다. 이미 그에게는 감옥이 사원이었고, 족쇄와 수갑이 경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61살이 된 1992년 마침내 석방된 그는 곧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로 건너가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고 티베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상을 전했다. 이후 영국과 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을 돌며 티베트의 독립을 호소했으며 중국 대표단이 참석한 유엔에서 중국의 티베트 탄압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다람살라에 머물며 티베트 독립을 위한 증언을 계속하고 있다.
“부당한 침략에 저항하는 우리 모두의 의지는 꺼지지 않는 불과 같다. 티베트의 어린 소년소녀들은 지금도 ‘티베트 자유’를 외치고 있다. 우리에겐 아직도 희망이 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지난 1989년 노벨평화상수상자인 달라이 라마는 9일 스페인을 방문해 국제적인 인권상을 수상하면서 중국은 티베트에 정치적 자치를 허용하라고 재차 촉구했다.
달라이 라마는 "나는 티베트에 의미 있는 자치가 주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티베트를 위한 정치적 자치가 실제적이고 중요한 의미가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밝혔다. 달라이 라마는 유럽의회(EU)의 마드리드 사무소에서 하이메 브루네트인권상을 수상했다.
그는 많은 스페인 야당 정치인들을 만났으나 정부 고위 관리들은 수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스페인 언론들은 관리들이 중국의 압력때문에 나오지 않았다며 광범위하게 비판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들이 나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있다. 나는 그들의 문화와 인권을 보호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이 지난 1951년 티베트를 무력으로 장악한 후 1959년 봉기를 일으켜 실패하자 그해 티베트인 8만명을 이끌고 인도로 망명했다. 그는 그후 수십년간 전세계를 다니며 불교 집회를 거행하고 티베트의 정치적, 문화적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각종 활동들을 펼쳐왔다.
티베트인들은 달라이 라마가 부처의 현현(顯現)이자 그에 앞서 사망한 13명의 달라이 라마의 화신(化身)으로 믿고 있다.
(마드리드 AP=연합뉴스)
검은 색의 종이 위에 금과 은가루로 씌여진 정결하고도 아름다운 불경이 발견됐다.
칭하이(靑海)성 위수(玉樹)지방의 장족 자치구에서 발견된 이 대장경은 비록 연대가 오래되어 종이가 파손된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경문의 수려함은 전혀 손상을 받지 않았다. 오래전 부터 이 지역에 금니, 은으로 씌여진 대장경이 있다는 설이 존재하긴 했으나, 실제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대장경이 발견돼 더욱 놀라움을 주고 있다.
위수(玉樹)의 문물 관리국 소장과 부소장은 “이 대장경의 글씨는 모두 필기체이며, 금 가루와 은가루, 주사, 묵 등으로 소가죽, 화피와 흑색, 남색, 녹색의 장지(藏紙) 등에 씌여졌다”면서 “그 중 금은으로 씌여진 경문은 200여 권으로 모두 흑색의 장지에 씌여졌다”고 밝혔다.
경문의 가운데와 묶는 곳에는 조각과 도장 등 아름다운 도안과 여섯자의 진언(옴마니반메훔)이 새겨져 있는데, 장경의 내용은 방대하고 수량도 매우 많아 160여 푸대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위수(玉樹)는 칭하이(靑海)성 고원 지역에 위치한 곳으로 당나라와 번진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칭하이 민족 학원의 장학학과 학과장인 상지에(桑傑) 교수는 이 대장경을 보유하고 있던 동창(東倉)씨 가문은 당시 강대한 부족국가의 한 집안이라고 밝히면서, 대장경외에도 여의탑, 전경통(轉經筒), 격살이(格薩爾) 왕이 썼던 화살 등 많은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지에 교수는 “문자를 보면 고대 티베트의 문법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티베트학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격살이(格薩爾) 왕은 10~11세기에 생존했던 인물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 경전도 그 당시의 것으로 추측된다. 라사의 살가사(薩迦寺)에 전해오고 있는 12세기의 대장경과 비교해서 새로운 경문이 발견 된다면 그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대만=이상미 통신원
티베트(西藏)의 최장기 복역 여승인 응아왕 상드롤(25)이 중국 당국의 허용으로 28일 미국에 도착했다고 AFP 등 외신이 30일 보도했다.
지난 1992년 15세때 중국의 티베트 지배에 항의하다 투옥된 응아왕은 당초 형기기 2011년이 되야 만료되지만 미국 등이 인권문제를 제기한 덕분에 작년 10월 사면돼 집에서 요양중이었다.
티베트 불교 여승인 응아왕은 드라프치 교도소 복역중 동료들과 함께 가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해 "노래하는 여승들"로 불렸고, 이를 녹음해 외부로 반출하는 바람에 당국의 분노를 사 형기가 연장됐었다.
미국은 클러크 란트 주중 대사가 응아왕을 수 차례에 걸쳐 "얌심수 또는 중국 법체계의 희생자"로 언급하는 등 응아왕의 석방과 출국 허용을 위해 노력해왔다.
한편 티베트 망명정부는 응와왕의 출국 허용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고 "이는 중국 당국과 티베트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간의 대화로 이어질 수있는 긍정적 신호"라고 환영을 표시했다.
베이징=연합뉴스 조성대 특파원
신간 <티베트와 중국>(소나무)은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탐구한 연구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실상을 그려낸 책이다. 글쓴이 김한규 교수(부산여대)는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불교에 대한 신비함에 이끌린 관심을 넘어, 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가 아닌 인도 다람살라에 망명 정부를 세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심도 있게 파헤친다.
이 책은 토번시대의 티베트와 당대의 중국의 관계가 독립한 두 나라의 긴장 관계였음을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티베트 지역을 통일한 토번이 당의 주요한 위협세력이 되면서 두 나라는 갈등 관계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 이후 당이 사라질 무렵 티베트 역시 분열을 겪게되고 송나라와 티베트의 여러 왕조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하지만 몽고가 세계 제국을 형성하면서 티베트와 중국은 매우 주요한 전기를 맞이한다. 두 나라 사이에 단월(檀越) 관계라 불리는 공시(供施)관계가 형성되고 이를 배경으로 티베트의 대라마가 티베트 정교의 최고 권위를 장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나라로 접어들면서 티베트 지역의 정치 세력도 분열되고 명나라에 의한 책봉 조공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의 변화가 청대에도 지속되었다가 국민당 정부와 그 뒤를 이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개입과 이로 인한 14세 달라이 라마의 망명과 망명 정보 수립에 이르는 길고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논쟁을 정리한 이 책은, 달라이 라마가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이유와 신비한 종교의 땅 티베트와 중국의 오랜 갈등의 관계를 알게 해 준다.값 2만원.
김중근 기자
중국인 이주정책 / 티베트인보다 중국인의 수가 더 많은 티베트
티베트인과 문화, 환경을 가장 위협하는 것 중에 하나는 중국인들과 군인들의 티베트 유입으로 티베트가 중국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당국의 중국인 이주정책으로 1980년에 티베트에 거주하는 티베트인들이 6백만명인 반면 중국인들은 7백 5십만명에 이르렀었다. 수도 라사의 경우만 해도 1946년까지만 해도 대 사원에 있던 2만여명의 승려 수보다 적은 인구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20여 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라사 인구의 70%가 중국인이다.
티베트인들에 대한 산아제한, 낙태 강요와 불임시술이 이러한 티베트의 중국화를 가세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1984년부터 1가정에 2명의 자녀만 낳은 정책을 추진해왔다. 이러한 중국인 이주 정책과 산아제한 정책의 추진 결과 티베트인들은 경제, 교육, 정치, 사회 영역에서 소외당하고 있으며 티베트 문화와 전통은 급속한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다.
일례로 중국의 경제정책도 티베트인보다는 중국인들 우선이고 대다수의 기업들은 중국인 소유인데 캄과 암도 지방에서 계곡에 위치한 좋은 땅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에게 분배되었지만 티베트인들은 점점 황무지로 쫒겨나고 있다. 주요한 행정직은 중국인들이 차지했다. 더우기 중국인들은 티베트 사람들에 비해 삼림과 광물개발에 있어서 우선권을 부여받았다.
라사에 있는 1만 2천개의 가게들과 식당중에서 단 300개만이 티베트인들이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133개의 사업체를 소유한 반면 티베트인들은 15개의 사업을 소유하고 있다. 다른 지방에서도 비슷한 비율을 보이고 있다. 영국언론에 의하면 암도 지방의 도시 중심에서는 상황이 훨씬 좋지 않다고 한다. 중국은 티베트에서 행해지는 개발에 대한 환경영향 평가를 하지 않는다. 이 개발은 중국 이민자들에게 혜택을 주어 티베트로의 유입을 장려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티베트 문화말살 정책은 티베트어 사용 금지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학교는 티베트어대신 중국어를 가르치고 정부 문서도 중국어로 출판한다.
인권의 사각지대
티베트 망명정부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중국의 티베트 침공 이후 1979년까지 120 여만명의 티베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중국군 기밀 문서에 의하면 중국군은 52년과 58년 사이에 996건의 폭동을 진압하면서 1만명의 티베트인들을 죽였다. 비슷하게도 진압으로 인해 암도 지방의 인구는 1956년의 13만명이던 것이 63년 6만명으로 감소했다. 판첸 라마는 이에 대해서
"만약 킹하이 지방에서 일어난 모든 잔혹행위를 영화로 담는다면 이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것이다. 고록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의 시체는 언덕에서 웅덩이로 굴러갔다. 군인들은 죽은 사람들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반역자를 몰아냈기 때문에 축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체 위에서 춤을 춰야 했다. 하지만 곧 바로 그들 또한 학살당했다." 고 했다.
감옥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의 70%가 죽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티베트 고원 북부의 황무지에서 1만명 이상의 구속자들이 5개의 감옥에 갇혀 갱도를 파야 했다. 노동수용소에서는 매일 10명에서 30명의 티베트인들이 굶주림과 폭행, 과로로 숨졌다. 1년에 8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와 비슷하게 라사의 전력발전소 공사에서는 매일 3-4명의 시체가 근처 강으로 버려지거나 불태워졌다고 한다. 1960에서 62년 사이에 1만 2천여명의 수감자들이 납 채굴 광산에 숨졌다. 한때 금지되었던 외국인 관광객의 입국이 허용되고 있지만 공식 인정된 관광안내원이 따라 다니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을 만날 수 없다. 또한 라사 이외의 외곽지역은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다.
또한 티베트인들은 거주 이전과 여행의 자유가 없다. 정부당국의 허가 없이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중국당국의 명령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적법한 절차도 없이 투옥되거나 처형된다.
티베트 불교 말살정책 / 불교문화 유산의 파괴
중국의 티베트 침공 전까지만 해도 티베트 전역의 모든 마을과 도시에는 사원과 암자가 6천 여개가 있었고 여기에는 약 60만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 드레풍, 라사의 세라, 사캬 등의 거대한 사원은 수준 높은 교육의 장소였었다. 이들 사원들은 수 천여 개의 불상과 금, 은, 다른 보석이 박힌 공예품이 있었고 수십만 개의 탑이 있었다. 불교 경전 외에도 이들 사원들은 문학, 의학, 천문학, 예술, 정치학 등의 작품 등을 보관하는 중심으로서 티베트 국민들의 "보물의 집"이었다.
불교민속과 가르침은 사람들의 생활과 축제, 명절, 노동윤리, 집안 일 뿐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까지도 조절해 주었다. 티베트는 중국이 침공하기 전까지는 긍지를 가진 불교독립국가였다. 티베트에는 또한 모스크 사원을 갖는 이슬람교도의 공동체가 있었다. 더불어 아주 소수의 힌두교와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다. 예전에 그들의 종교는 묵인되었고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 또한 중국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처음에 중국정부는 티베트의 완전한 합병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종교수행에 대해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티베트의 전통적 사회체계와 종교를 허물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종교는 우리 유물론자들의 적이고 종교를 믿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지 말고 비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1950년대 중반까지 중국당국은 종교를 티베트 통치의 근본적인 장애로서 인식하였고 1956년 이후부터 소위 "민주개혁"이라는 것을 캄과 암도 지방에서 그리고 1959년 티베트 중앙까지 실시했다. 그 결과 사원과 문화기관들이 체계적으로 노략질 당해서 해체되었다.
처음에는 광물학자들이 사원건물들을 옮기고 귀중한 돌들을 뽑아갔다. 다음에는 야금학자들이 금속을 트럭에 실어갔다. 벽은 폭파되었고 목재와 나무기둥들도 빼갔다. 점토로 만들어진 불상들은 귀금속을 찾는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결국 남아있는 모든 나무와 돌들이 없어졌다. 수백 톤의 귀중한 불상, 탱화, 금속공예와 보물들을 국제골동품시장에 팔기 위해 또는 녹이기 위해 중국으로 실어갔다. 불교경전은 불태워져 밭의 거름에 섞였다.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성관계를 하도록 했고 기적을 행하라고 강요했다. 황폐해진 사원은 돼지우리로 둔갑했다. 중국 감옥에서 굶주리고 있는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중국인들은 대신 "부처에게 음식을 달라"고 말했다.
중국의 공식 주장과 달리 수많은 티베트 문화와 종교가 1955년과 1961년 사이에 파괴되었다. 1976년에는 6,259개의 사원 중에서 단 8군데만이 남았다. 60만명의 비구, 비구니, 린포체(환생한 승려)와 탄트라 수행자 중에서 11만명이 고문을 당하고 죽었으며 25만명 이상이 중국당국의 강요에 의해 환속했다. 일례로 중국의 침공 이전에 세라 사원에는 8천여명의 승려가 있었으나 지금은 300명만 허용하고 있고 1만명에 가까운 승려가 있었던 드레풍 사원도 400명으로 감소되어 있다. 또한 사원의 기능은 종교사업국, 티베트불교연합, 민주관리위원회, 정보기관등으로 편제되었다. 티베트의 종교파괴 정도에 대해 1988년 판첸 라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사원들은 100% 완전히 파괴되었다. 티베트 전역에서 99%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중에서 포탈라 궁의 상황은 가장 양호하다. 그러나 포탈라 궁 또한 훼손되고 있다."
1979년 이후부터 피상적인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던 티베트에 "자유화"가 시작되었다. 이는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사원의 복원과 절하기, 사원과 탑 주위 돌기, 만트라 암송, 향 피우기 등 일정정도의 의식을 허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파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허가된 곳에서 제한적으로 통제를 받으면서 할 수 있었다.중국당국은 티베트 승려들과 달라이 라마와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사찰 내에 공안관리를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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