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보사찰
삼보(三寶)는 세 가지 보물이라는 뜻으로서 부처님(佛), 부처님이 설하신 법(法),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스님(僧)을 말한다 이 삼보를 상징하는 우리 나라의 삼보사찰로는 경남 양산의 영취산 통도사(불보사찰), 경남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법보사찰), 전남 순천의 조계산 송광사(승보사찰)가 있다.
가. 영취산 통도사
<위치>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소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
<연혁>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자장율사(慈裝律師, 590∼658년)가 창건하고 영취산 통도사(通道寺)라 하였다.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부처님 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통도사를 창건했기
때문에 삼보사찰(三寶寺刹)중 불보사찰(佛寶寺刹)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5대적멸보궁에 속한다.
1592년 조선 선조에 이르러 임진왜란의 발발로 영남지방이 왜구의 수중에 들어가자 승병장 사명대사(유정 스님)가 통도사의
사리를 2함(函)으로 나누어 금강산에 있는 서산대사 휴정 스님에게 보냈다.
휴정 스님은 1함을 통도사로 돌려보내고 1함은 태백산 정암사에 안치하였다. 이 당시 금강계단 앞의 대웅전이 전소되었으나
인조 23년(1654년)에 우운(友雲) 스님이 중건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고 거대한 불단만이 놓여 있다. 이는 금강계단에 모신 부처님 사리를 받들고 있으므로
불상을 모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정면에 金剛戒壇(금강계단), 동쪽에 大雄殿(대웅전), 서쪽에 大方廣殿
(대방광전), 북쪽에 寂滅寶宮(적멸보궁)이라고 쓴 현판이 달려있다. 여기서 金剛戒壇이라 쓴 글씨와 일주문에 걸린
"靈鷲山通度寺"라고 쓴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건축물로는 일주문, 천왕문, 부이문, 성보박물관, 金剛戒壇범종각, 극락보전, 영산전, 약사전, 배례석, 대광명전, 만세루
(萬歲褸), 관음전, 용화전, 대광명전, 대웅전, 명부전, 응진전, 석등, 삼층석탑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74호 국장생석표, 제144호 대웅전, 제334호 은입사동제향로, 제471호 봉발탑(奉鉢塔),
제738호 문수사리보살최상승무생계경, 제757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사십육), 제1041호 영산전팔상도,
제1042호 대광명전삼신불도, 제1240호 묘법연화경(권3∼4)이 있다.
나. 가야산 해인사
<위치>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소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연혁>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800-809년)때 중국에서 돌아 온 순응(順應) 스님이 공사를 착수하고 그 뒤를 이어
이정(利貞) 스님이 완성했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 중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뜻하며,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법보사찰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또한 선원, 강원, 율원을 함께 갖추어 해인총림으로서 5대총림에 속한다.
부설기관으로는 1993년에 설립한 "장경연구소"가 있다.
문화재로는 국보 제32호 대장경판, 제52호 장경판고, 제206호 고려각판(28종). 보물 제128호 반야사 원경대사비,
제264호 석조여래입상, 제518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제734호 고려각판(26종)이 있다.
다. 조계산 송광사(松廣寺)
<위치>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면 신평리 2번지
<소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연혁> 신라 말 보조 체징(普照 體澄:804∼880년) 스님이 길상사를 창건하였으며, 후에 수선사, 송광사로 개칭되었다.
보조(普照)국사 지눌 스님이 신종3년(1200년)에 정혜사(定慧社)에서 수선사로 옮겨와 11년 동안 머물며 많은 대중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큰 수도 도량이 되었다. 그 뒤 지눌 스님을 존경하는 희종(재위 1204∼1211년)은 송광산(松廣山)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이름을 고치고 친히 글을 써서 제방(題榜)을 내렸으며, 후에 송광사라 개명하였다.
희종 6년(1210년)에 지눌스님이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의 제자 진각 혜심(眞覺 慧諶)스님이 왕명으로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다. 이 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5명의 국사가 탄생하여 우리 나라 선종을 이끌어 왔다. 따라서 송광사는 우리 나라
삼보사찰 중 승보(僧寶)사찰로 불려지게 되었다.
송광사에는 천자암, 감로암, 불일암, 인월암, 오도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건축물로는 대웅보전,설법전,수선사,상사당
(上舍堂), 하사당(下舍堂), 응진전, 국사전, 진영각, 약사전, 영산전, 관음전, 명부전, 화엄전, 청량각(淸凉閣),일주문,
척주각(滌珠閣), 세월각(洗月閣), 우화각(羽化閣), 천왕문, 해탈문, 대장전(大藏殿), 종고루(鐘鼓樓), 법왕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국보 제42호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제43호 고려고종어제서(高麗高宗御制書), 제56호 국사전. 보물 제90호
대반열반경소, 제134호 경질(經帙), 제175호 경패(經牌), 제176호 금동요령, 제204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
제205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제206호 묘법연화경찬술, 제207호 금강반야경소개현묘, 제263호 하사당, 제302호 약사전,
제303호 영산전, 제572호 고려문서(수선사형지기, 노비첩), 제1043호 십육조사진영. 천연기념물 제88호 곱향나무
전남유형문화재 제18호 자정국사 사리함, 제19호 능견난사(能見難思), 제22호 금강저(金剛杵), 제28호 고봉국사주자원불
(高峰國師廚子願佛), 제30호 팔사파문자(八思巴文字)가 있다.
2. 5대적멸보궁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말한다. 따라서 법당에 불단은 있지만 불상과 후불탱화를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며, 법당 바깥이나 뒤쪽에 사리탑을 봉안하고 계단(戒壇)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나라의 5대적멸보궁은 경남 양산의 영축산 통도사,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상원사,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 봉정암,
강원도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를 말한다.
이 중에서 태백산 정암사를 제외한 사찰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 온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곳이고 정암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곳이다.
가. 영취산 통도사
제1장 삼보사찰 참조
나. 오대산 상원사
<위 치>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
<연 혁> 자장율사에 의하여 오대산에 적멸보궁이 들어섰다.
자장 율사는 중국에서 귀국 후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을 지내며, 왕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나 문수 진신을 친견하는
꿈을 버릴 수 없어 오대산으로 들어와 모옥을 짓고 문수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한 기도를 했다.
자장율사는 이러한 믿음으로 오대산의 원녕사(元寧寺), 갈래사(葛來寺) 등 이산 저 봉우리를 다니며 기도를 했다. 오대산의
월정사와 상원사, 사자산의 흥녕사(지금의 법흥사), 태백산의 갈래사(지금의 정암사) 등은 이런 인연에 의해서 창건되었다.
특히 중대는 자장율사가 친견하고자 했던 문수 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라 하여 중국 오대산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가운데
가장 소중한 정골 사리를 이곳 적멸보궁에 모시고 기도를 했다.
중대를 일명 사자암이라고도 하는데 사자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짐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부처님이 계신
적멸보궁은 "보배궁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작으며, 적멸보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보궁과 마찬가지로 불상은
없고 부처님이 앉아 계심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방석만이 수미단 위에 놓여 있다.
문화재로는 국보 제36호 동종이 있다.
다. 설악산 봉정암
<위 치>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
<연 혁> 자료 수집중
라. 사자산 법흥사
<위 치>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
< 연 혁> 자료 수집중
문화재로는 보물 제612호 증효대사 탑비가 있다.
마. 태백산 정암사
<위 치>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고한리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
< 연 혁> 자료 수집중
문화재로는 보물 제410호 수미노탑이 있다.
3. 5대총림
총림(叢林)의 뜻은 범어 "vindhyavana"의 번역으로 단림(檀林)이라고도 한다. 큰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룬 것을 임(林)이라 하는
것과 같이 다수의 승려가 모여 수행하는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을 구비한 곳을 총림이라 한다. 선찰(禪刹)의 경우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 한다.
여기서 선원(禪院)은 선종(禪宗)의 사원으로서 선을 닦는 곳을 말하고, 강원(講院)은 경전을 연구, 교육을 하는 곳이다.
율원[律院:율사(律寺]은 율장(律藏)의 계율(戒律)을 공부하며, 연구하는 곳, 염불원(念佛院)은 부처님의 경전을 암송하고
명호(名號)를 부르며, 수행을 하는 곳을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5대총림에는 조계총림 송광사, 해인총림 해인사, 영축총림 통도사, 고불총림 백양사, 덕숭총림 수덕사가 있다.
가. 영취총림 통도사
제1장 삼보사찰 참조
나. 해인총림 해인사
제1장 삼보사찰 참조
다. 조계총림 송광사
제1장 삼보사찰 참조
라. 고불총림 백양사(白羊寺)
<위치>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번지 백암산(白巖山)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연혁> 백제 무왕 33년(632년) 여환(如幻) 스님이 창건하여 백양사라고 했다. 그 후 정토사로 하였다가 다시 백양사로
바뀌었다. 고려 덕종 3년(1034년)에 중연(中延) 스님이 절을 중창하면서 정토사(淨土寺)로 이름을 바꿨다. 그 뒤
인정(印定) 스님이 중창하고, 1350년 각진(覺眞)국사 복구(復丘) 스님이 3창을 하였다. 환양(喚羊) 스님이 머물면서
선조 7년(1574년)에 이 절을 중건하고 절 이름을 다시 백양사라고 했다.
정조 10년(1786년)에 환성(喚惺) 스님이 중건했고, 고종 1년(1864년)에 도암(道巖) 스님이 중건했다. 이어 1917년 만암
종헌(曼庵 宗憲) 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종헌 스님은 30년 가까이 이 절에 머물면서 불사에 진력하는 한편,
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이 절은 일제강점기의 31본산시대에는 본산이었으며, 현재는 말사 26개사를 관장하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약사암과
영천굴(靈泉窟), 1351년 창건한 청류암(淸流庵), 1981년 창건한 물외암(物外庵), 천진암(天眞庵) 등이 있다. 그러나
고려 때 복구스님이 창건한 운문암(雲門庵) 등 많은 암자는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탔다.
<문화재>로는 천연기념물 제153호 "비자나무"분포북한(北限)지대
전남유형문화재 제43호 대웅전, 제32호 극락보전, 제44호 사천왕문, 제56호 소요대 사부도 등이 있다.
마. 덕승총림 수덕사
<위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번지
<소속>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연혁>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 스님이 <법화경>을 강론하고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 스님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말에 경허(鏡虛) 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에 경허 스님의
제자 만공(萬空) 스님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했다. 현재 우리 나라 5대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
(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견성암(見性庵)을 비롯하여 금선대(金仙臺), 환희대(歡喜臺)등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명부전, 백련당, 청련당, 조인정사, 일주문, 범종각 등이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삼층석탑, 대웅전 내부의 고려벽화,
정헤사로 가는 도중에는 만공 스님이 건립한 25척의 석불(머리에 이중의 갓을 쓰고 있는 미륵불 입상)과 만공 스님을
추도하기 위해 세운 만공탑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국보 제49호 대웅전이 있다.
4. 3대관음성지
일반적으로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근본도량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남쪽 해안의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이며, 중국은 경치가 좋은 주산열도(舟山列島)의 보타도(補陀島) 조음동(潮音洞)이 관음성지이다.
바다가 없는 티베트에서는 키추(Kichu)강을 바다로 가정하고 강 유역에 있는 라사(Lhasa, 拉薩)를 보타낙가로 정하고 있다.
우리 나라도 대표적인 관음도량은 모두 바다에 접하여 있으며,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서해의 보문사, 남해의 보리암을
3대관음성지로 하고 있다.
가. 동해 낙산사 홍련암
<위 치>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 낙산사의 산내 암자
<연 혁> 홍련암은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대사 (625∼702년)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홍련암(紅蓮庵)은 낙산사의 산내 암자로서 의상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관음굴 위에 지었다. 의상 스님이 이곳에서
밤낮없이 7일 동안 기도를 하자 바다 위에서 한 떨기 붉은 연꽃이 솟아났고, 꽃 속에서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였기에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잡은 홍련암은 창건 당시부터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여의주를 바친 용도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홍련암에서는 조선 숙종9년(1683년)에 관음굴의 불상을 개금할 때 공중에서 한 알의 명주(明珠)가 내려 오는 기적이 있어
이를 목격한 석겸(釋謙) 스님은 곧 사리탑을 건립하고 탑의 이름을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이라 하였고 1694년에는 사리탑을
세우게 된 유래를 적은 공중사리탑비를 세웠다. 근대에 들어서는 1930년 2월 25일에 현대 고승 경봉(鏡峯) 스님이 이곳에서
관음기도를 시작했는데 13일째 되던 날 참선 중에 바다 위를 걸어 다가오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큰 정진력을 얻었다 한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79호 동종, 제499호 7층석탑이 있다.
나. 서해 낙가산 보문사
<위 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번지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1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
<연 혁> 신라 선덕여왕 4년(635년)에 회정(懷正)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이곳에 와서 산세를 보고 인도의
보타낙가산과 비슷하여 절을 짓고 관세음보살의 성적(聖蹟)에 의하여 산 이름을 낙가산, 절 이름을 보문사라고 하였다.
강화도 서쪽에 있는 석모도의 낙가산에 위치하는 보문사는 우리 나라 3대 해상 관음 기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여기서 낙가는 관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이름이고, 보문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수 없이 몸을 나투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산이름과 절 이름이 모두 관세음보살을 상징하는 보문사는 관음도량으로 조선시대에 들어 한때
쇠퇴의 길을 걷던 보문사는 순조 12년(1812년)에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대대적인 불사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종 30년(1893년)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했고, 1920년에는 대원(大圓) 스님이 화주가 되어
관음전을 중건했다. 1928년 주지 선주(善周) 스님의 원력으로 마애관음보살상 조성불사가 이루어져 보문사는 전국적인
관음기도 도량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현존하는 전각으로는 대법당, 관음전, 종각, 석실 등이 있다. 석실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돼 있다. 석실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이 설치돼 있고,
동굴 안에는 21개소의 감실이 마련돼 있다. 석실 법당 좌측 위에 있는 길이 40m, 촉 5m의 암반인 천인대는 이 절 창건 당시
인도의 한 스님이 이 바위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절에서 1km 가량 뒤쪽 산으로 올라가면 절벽에
조성된 높이 32척, 너비 11척인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보살상을 덮고 있는 기묘한 형태의 눈썹바위는 보살상을 보호하는
하늘이 주신 지붕으로서 신비감마저 들게 한다. 또한 수령(樹齡) 6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석실과 범종각 사이에 있는 큰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다. 높이가 32m, 둘레는 굵은 곳이 2.8m이며, 그 외에도 많은 나무와 성보문화재들이 있다
문화재로는 인천 유형문화제 제29호 마애관음보살상 인천 지방기념물 제17호 향나무(수령 600년)가 있다.
다. 남해 금산 보리암
<위 치>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상주리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의 말사
<연 혁> 신라 문무왕 3년(683년)에 원효 스님이 절을 짓고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로 하였으며, 후에 보리암으로 개칭되었다.
보리암은 남해를 바라보는 위치에서 1300여년의 세월을 지켜온 3대 관음성지의 하나이다. 원효 스님은 <화엄경>에 관세음보살
의 상주처(常住處)가 보광궁(普光宮)이라는 데서 착안하여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년)에 사찰 옆에 있는 "이씨기단(李氏祈壇)"에서 이성계가 기도를 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고 하여 현종이
절을 왕실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 개명하였다. 1901년에는 낙서(樂西), 신욱(信昱) 스님이, 1954년에는 동파(東波) 스님이
각각 중수하였고, 1969년에 양소황(梁素滉) 스님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리암에는 보광전, 간성각(看星閣), 산신각, 범종각, 요사 등의 전각이 있다. 관음상 왼쪽에는 남순동자, 오른쪽에는
해상용왕이 모셔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상은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모셔왔다고 한다.
보광전 맞은 편 바위 끝에 있는 해수관음상이 있고 그 옆에 있는 3층탑은 높이가 2.3m로서 신라탑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상륜부에는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원효대사가 이곳에 사찰을 세울 때 건립했다고 하나 학자들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로는 향나무 관세음보살상과 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 3층석탑이 있다.
5. 관음 나한 성지
가. 여천 금오산 향일암
<위 치> 전라남도 여천군 돌산읍 율림리 임포 산7번지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 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
<연 혁> 신라 선덕여왕 8년(659년) 원효 대사가 창건하여 원통암(圓通庵)이라 하였으며, 후에 금오암, 책육암, 영구암,
향일암 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바다에 인접한 향일암은 관음기도 도량으로서 인근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해를 향한다"는
절의 이름과 같이 아침 해돋이 절경은 마치 부처님께서 방광(放光)을 나투시는 듯 하다.
원효 대사가 창건한 원통암(圓通庵)은 고려 제4대 광종 9년(958년)에 윤필(允弼) 스님이 산의 형세를 보고 금오암(金鰲庵)이라
개명했다. 그 뒤 조선 숙종 41년 인묵(仁默) 대사가 머물면서 금불상을 조성 봉안하였다. 1849년 무렵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책육암(策六庵)이라 하였고, 근래에는 경봉(鏡峯, 1892∼1982) 스님이 영구암(靈龜庵)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그후 향일암으로
바뀌었다.향일암은 현재 대웅전, 관음전, 용궁전, 삼성각, 종각, 요사 등이 있으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1987년에 조성한 청동석가모니불과 관음,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1988년에 조성한 영산회상도와
금니(金泥)로 채색한 신중탱화, 1983에 만든 소형 범종 등도 봉안되어 있다.
관음전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찰의 가장 위쪽에 있다. 1991년에 조성한 관음보살상과 관음탱이 있고,
관음전 옆에는 석조관음보살입상과 동자상이 있다. 향일암은 일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는 절이므로 기도시간은 하고자
하는 사람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나. 성덕산 관음사
<위 치>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소 속>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
<연 혁> 백제 분서왕 때인 312(또는 308)년에 처녀 성덕(聖德)이 낙안포(樂安浦)에서 금동관세음보살상을 모셔다가 창건한
후 성공 스님이 관음보살상을 만들어 모시고 절 이름을 성덕산 관음사라 하였다. 1374년에 크게 절을 일으키고 원통전을 중건
하였으며, 선원을 중심으로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6.25사변을 겪으며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1955년
주지 박창훈이 부근의 대은암 건물을 옮겨와서 원통전을 중건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전각은 원통전, 금랑각, 산신각, 요사 등
7동이 있다. 내륙에 있는 관음성지로 명성을 날리던 관음사는 근대에 들러와서는 순조 32년(1832년)에 큰 홍수로 전각의 거의
반이 휩쓸려 무너졌고, 금랑각 같이 남아 있는 건물도 물이 차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금랑각은 오랫동안 방치돼 있다가,
1936년 청운 스님의 발원으로 중건되었다. 6.25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없어졌고, 전쟁 후에 창훈 스님이 근처에 있는 대은암의
건물을 옮겨와서 원통전을 중건하였다. 최근에는 1982년 중환 스님이 천왕문을 복원하였다. 요즘에는 만월당과 종각을 짓는 등
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다. 설악산 오세암
<위 치>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 백담사의 산내 암자
<연 혁>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관음암이라 하였으며, 그후 오세암으로 바뀌었다.
명종 3년(1548년)에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스님이 문정왕후에 의해 선종판사로 발탁된 직후 관음암을 중건하였다. 조선
인조 21년(1643년)에 설정(雪淨) 스님이 중수한 다음부터 암자 이름이 오세암으로 바뀌었는데 이 때 5세 동자와 연관된 유명한
관음 영험 설화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설정스님이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암자에서 양육하고 있었다. 겨울이 시작된 10월 어느날 스님이 월동준비로 양양 장터로
내려가게 되어 이틀간 혼자 있을 조카의 밥을 지어 놓고 조카에게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안의 관세음보살)를
관세음보살이라 부르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라고 말하고 스님은 절을 떠났다.
장을 본 뒤 다음날 돌아가려하니 눈이 엄청 많이와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다. 봄이되어 눈이 거의 녹을 무렵 스님이 암자에
올라가보니 죽은 줄 알았던 조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다.
스님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저 어머니가 항상 찾아와 밥도 주고 재워주고 같이 놀아 주었다"고 하는데 갑자기 환한 백의 여인이
관음봉으로부터 내려와 동자의 머리를 만지면서 성불의 기별을 주고는 한 마리의 푸른 새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다.
감격한 설정 스님은 다섯 살의 조카가 관음보살의 가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중건하고 오세암이
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다시 태어난 오세암은 이후 영험 있는 기도도량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고종 2년(1865년)에 남호(南湖) 스님이 해인사 대장경 2질을 인출하여 한 질은 오대산 상원사에, 한 질은 오세암에
봉안하였다. 1898년에는 인공(印空) 스님의 주도로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도량이 되어 무려 18년 동안이나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외에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사격을 일신했던 오세암은 6.25전쟁 때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1992년 지우 스님이 대웅전을 중건하여 백의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산신각, 요사 등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세암은
설잠(雪岑) 김시습과 만해 한용운 스님이 머물던 곳이기도 하며, 영험이 가득한 도량이라고 할 수 있다.
라. 동해 두타산 관음암
<위 치>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원정사의 말사
<연 혁> 고려 태조 4년(921년)에 지조암이란 이름으로 창건 되었으며, 후에 관음암이라 개명되었다.
두타산의 두타(頭陀)라는 말은 원래 범어 "dhuta"를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것으로써 의식주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행위를 말한다. 항간에는 용비대사가 절을 지었다고 하나 용비(龍飛)는 임금이 등극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는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관음암의 중건은 왕실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고려 태조 20년(934년)에 태조 왕건은 통일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삼화사(三和寺)에 노비와
사전(寺田)을 하사하였다. 삼화사는 이를 발판으로 산내에 8개의 암자를 창건하는 등 급격히 사세가 신장되었고 이 때 지조암도
중건된 것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불탄 것을 당시 삼척부사인 윤청이 주선하여 중건되어 현재 남아 있는 삼화사의
유일한 산내 암자이다. 지조암은 작은 관음상을 모시고 있으며, 1959년 이 암자를 중건하면서 이름을 관음암으로 고쳤다.
6. 지장,약사,미타 나한 기도성지
가. 철원 보개산 심원사 - 지장도량
<위 치>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1리 72번지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
<연 혁>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영주산(靈珠山, 보개산의 옛이름)에 흥림사(興林寺)를 창건
하였으며, 후에 심원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심원사는 지장도량으로 잘 알려진 사찰로서 "생지장보살 도량(生地藏菩薩 道場)"
으로 불리고 있으며, "지장영험비"가 있다. 당초에 심원사가 개창된 곳은 지금의 심원사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떨어진 경기도
연천군 보개산(寶蓋山)이다. 신라 진덕여왕때 영원조사에 의하여 창건된 흥림사는 그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왕사로 유명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주지로 있으면서 삼창(三創)을 하고 산 이름을 영주산에서 보개산으로, 절 이름은 심원사로 고쳐 불렀다.
근세에까지 금강산 유점사에 딸린 말사(末寺)로 석대암, 지장암, 남암 등의 산내암자와 250칸의 전각, 1609위의 불상, 탱화,
탑 이 있는 대찰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6.25 전쟁의 참화로 천불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천불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석대암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초 절터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부도 12기와 아미타불 입상, 사적비, 공적비 만이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부도 가운데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의승군을
이끌었던 제월당 경헌(霽月堂 敬軒) 스님의 부도는 옥개석 운룡문(雲龍紋)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옛 절터는 군부대 안에 있어
순례하려면 미리 군부대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나. 고창 도솔산 도솔암 -지장도량
<위 치>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의 산내 암자
<연 혁> 선운사는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이 창건했다는 설과 위덕왕 24년(577년)에 백제의 승려 검단(檢旦, 黔丹)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에는 모두 진흥왕이 창건하고, 검단이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운사의 산내 암자인 도솔암은 이 당시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도솔암의 마애불상은 백제 위덕왕 재위기간
(554∼598년) 사이에 검단 선사(黔丹禪師)에 의해 조성되었다. 선운사는 1354년(고려 공민왕 3) 효정(孝正)이 중수했고, 1472년
(조선 성종 3)부터 10여 년 동안 극유(克乳)가 크게 중창하였는데 산내 암자로는 현재 1693년에 천성(天性) 스님이 중창한
동운암(東雲庵), 1665년 학철(學哲) 스님이 중창한 석상암(石床庵), 참당암(懺堂庵), 도솔암(兜率庵) 등 4개가 있다.
현재의 도솔암은 조선후기에 상도솔암(上兜率庵), 하도솔암, 북도솔암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상도솔암은 조선 중종 6년(1511년)
에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하도솔암은 효종 9년(1658년), 북도솔암은 숙종 29년(1703년)에 각각 창건되었다.
미륵신앙지였던 이곳이 언제부터 지장기도 도량이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도솔암 내원궁에 지장보살상을 모신 고려후기
부터가 아닐까 짐작 될 뿐이다. 도솔암은 본래 상, 하, 동, 서, 남, 북의 6도솔이 있었으나, 상, 하, 북 세 도솔암만 남고
나머지 는 자취조차 희미해졌다.
상도솔암은 지장보살상이 모셔진 지금이 도솔천 내원궁이고, 하도솔암은 마애불상이 있는 곳이며, 북도솔암은 대웅전이 있는
자리다. 지금의 도솔암은 상, 하, 북의 도솔암을 합쳐 도솔암으로 부르고 있으며, 대웅전, 나한전, 도솔천 내원궁, 용사 등의
전각과 마애불상으로 이루어졌다. 내원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련이 없는 작은 전각으로 명부전이라 하지 않고 도솔암
내원궁이라 했음은 미륵신앙에 바탕을 둔 창건설화에서 연유된다. 또 지장보살상 좌우에는 시왕이 없고 그 뒤에 목각탱화로
시왕상을 배치하고 있다. 지장보궁이라 쓴 문을 통과하여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 볼 수 있는 지장보살은 팔찌를 두른
오른손으로 엄지와 중지를 살짝 닿을 듯 모아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며, 왼손에는 둥근 보륜(寶輪)을 들고 있다.
내원궁 입구 왼쪽 자연암벽에는 거대한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머리 위에는 기둥을 박기 위해 뚫은 직사각형의 구멍이
뚜렷하며, 낮은 돋을 새김(浮彫)으로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바위 높이 13m, 너비 3m의 우람한 규모가 고려인의
깊은 신앙심을 짐작케 해준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290호 선운사 대웅전, 제279호 선운사 금동보살좌상, 제280호 도솔암 내원궁(內院宮)의 지장보살좌상,
제803호 참당암 대웅전, 제1200호 내원궁 부근의 마애불이 있다.
다. 상왕산 개심사 -지장도량
<위 치>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1번지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의 말사
<연 혁> 백제 의자왕 14년(654년)에 혜감(慧鑑) 스님이 절을 짓고 개원사(開元寺)라 했으며, 그후 처능 스님에 의하여
개심사로 불리게 되었다. 개심사는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뜻이다. 이 절이 창건된 후 1340여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의 풍랑을
겪어 온 고찰이다. 혜감(慧鑑) 스님이 절을 짓고 개원사(開元寺)라 한 후 개심사로 불린 것은 고려 충정왕 2년(1350년)에
처능(處能) 스님이 중건하면서 부터이다. 1475년 중창, 1740년 중수하였으며, 최근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심 전각인 대웅보전과 요사로 쓰이는 심검당(心劍堂), 안양루(安養樓) 등은 작은 규모이지만 충남의 4대 사찰로 불릴 만큼
가치 있는 절이다. 절 입구 돌계단을 오르면 직사각형의 연못이 보인다. 풍수지리에서 성왕산은 코끼리의 모양이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코끼리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3단으로 쌓은 연못의 돌벽이
있다. 연못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해탈문, 안양루, 심검당, 대웅보전이 차례로 볼 수 있다. 대웅보전은 고려말의 팔작지붕
양식에서 조선시대 맞배지붕의 양식으로 넘어오는 시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심검당은 단청을 하지 않고 휘어진 목재를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로 한 것은 대범함과 소박함을 말해준다. 심검당 또한 조선
초기의 요사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라는 예서체의 현판이 달린 안양루에 오르면 절과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판의 글씨는 유명한
근세의 서화가 해강 김규진(金圭鎭)의 필체다. 명부전의 건립시기는 조선 중기로 일찍이 이곳이 지장신앙의 도량임을 알려주며,
그 안에 있는 지장보살의 단정한 모습이 근엄한 표정의 장군상과 매우 대조적이다.
개심사는 참선도량으로 이름이 높다. 근대 한국불교 선종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鏡虛) 스님(1849∼1912년)이 한동안 머물며
두문불출 정진하던 곳이 바로 개심사이다. 붉게 녹이 슨 함석지붕의 요연선원(了然禪院)은 일엽스님이 세워 비구니 스님들을
정진케 했던 곳이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143호 대웅전, 충남 문화재자료 제194호 명부전이 있다.
라. 대구 팔공산 갓바위 -약사도량
<위 치> 대구 동구 능성동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은해사의 말사 선본사의 산내 암자
<연 혁> 전설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 13년(491년)에 극달 화상(極達和尙)이 창건했다고 한다.
팔공산은 불교가 전래된 이후 팔만구천의 절이 있었다는 말이 전할 정도로 산 전체가 도량이었으며, 지금은 경주 남산에 비견할
만큼 산 곳곳에 불교 유적, 유물이 널려 있는 성지(聖地)이다. 이 유명한 팔공산에 있는 선본사의 산내 암자인 갓바위에는
약사여래가 모셔져 있다. 선본사는 팔공산 동남쪽 주봉인 관봉(冠峯) 아래에 있으나 이 절의 이름보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이 더 잘 알려져 있다. 갓바위에는 칠성각, 산신각, 용왕각과 요사가 있다. 칠성각 등은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다. 정명 3칸, 측면 1칸이 칠성각이고, 좌우가 산신각과 용왕각이다. 바로 아래는 수각(水閣)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위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갓바위 부처님이 있다. "갓바위"란 명칭은 머리에 갓처럼 생긴 판석(板石)이
올려져 있는 데다 관봉이 우리말로 갓바위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부처님은 몸, 대좌, 갓 등 전체가 화강암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불상 뒤에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바위가 광배(光背) 구실을 하는데, 이것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갓바위
부처님은 통일 신라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전체 높이는 4m에 이르며 보물 제431호로 지정돼 있다.
우리 나라 약사 신앙의 대표적 성지인 선본사(禪本寺)는 아쉽게도 창건이나 연혁에 관한 내용은 거의 전하지 않는다. 신라
소지왕 때 극달 화상(極達和尙)이 창건했다고 하나 창건주로 등장하는 극달화상은 역사서나 주요 문헌에 전혀 등장하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도 법흥왕 14년(527년)이므로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선본암중수기문>에 의한 절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선덕여왕 7년(638년)에 의현(義玄) 스님이 약사여래좌상(갓바위부처님)을 조성했고, 조선 인조 19년(1614년)에 수청(秀廳) 스님
이 중창했다. 1766년(영조 41) 기성(箕成)화상이 중건했다. 1802년(순조 2) 국성(國成) 스님 등이 신중탱화를 조성했고,
1820년(순조 20) 운암(雲岩) 화상이 중수했다. 1877년(고종 14) 낙허(樂虛), 원인(月印) 화상이 중수했다. 현대 이전까지의
대략적인 연혁은 이와 같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2년 한 일간지에 보도된 후 이다.
1960년대 초반 석굴암이 발견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끌던 중 군위의 제2석굴암이 발견되면서 팔공산도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했는데 그 때 발견 된 것이다. 그 후 갓바위 부처님의 영험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 월출산 무위사 - 나한도량
<위 치>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번지
<소 속>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의 말사
<연 혁> "무위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61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관음사라고 하였다하나 연대로 보아
믿기 어렵다. 갈옥사, 모옥사, 무위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무위사는 우리 나라의 유서 깊은 선종 사찰로서 헌강왕 원년(875년)
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이름을 갈옥사(葛屋寺)로 바꿨고, 고려 정종 원년(946)에 선각(先覺)국사가 3창하고 모옥사(茅屋寺)로
개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각국사는 이미 917년에 입적했으므로 사실과 거리가 있다.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태감(太甘)선사가 4창하고 절 이름을 무위사로 바꿨다. 내력은 불확실하지만 무위사는 10세기초
이전에 창건되어 도선국사가 머물던 시기에 사세(寺勢)를 확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도 화를 입지 않아 웅장함과 화려함이 전라도 사찰 중에서 으뜸이었다는 무위사는 그후 점차 퇴락하여 영조 15년
(1739)에 이르러 미타전(지금의 극락보전), 천불전, 시왕전 만이 남게 되었다.
일제시대 극락보전을 보수하면서 벽면의 벽화들을 통째로 뜯어내 벽화보존각에 따로 모셨으며, 1974년 벽화보존각과 해탈문,
분향각(焚香閣), 천불전, 미륵전 등을 중건했다.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1430년(조선 세종 12)에 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조건물이다. 성종 7년(1476년)에 극락전 안에
아미타삼존도, 아미타래영도를 비롯한 벽화가 그려졌다. 이는 당시 무위사가 수륙사(水陸寺)로 지정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극락보전 후불 벽 뒷면에는 수월관음도가 그려져 있다. 얼굴과 목, 어깨가 건강한 남성적인 인상의 관음보살이
버들가지와 정병(淨甁)을 들고 노비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관음보살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모두 보름달처럼
둥그렇다. 벽화보존각 안에는 아미타불이 8여래와 8보살을 이끌고 죽은 이들을 맞으러 나오는 광경을 그린 아미타래영도,
석가여래설법도, 해수관음상좌도, 보살좌상도, 오불도, 비천신인도 등 30여 점이 보존돼 있다.
극락보전 오른편에 있는 선각대사 형미(泂微, 864∼917년) 스님의 부도비는 946년에 건립되었는데 비신과 비신을 받친 거북,
비신머리가 모두 잘 보존되어있다.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인데 정수리에 뿔이 있고 귀 뒤에 작은 깃이 달려 있다. 코가
벌름하고 윗입술은 조금 말려 올라갔으며, 여의주를 문 입에 가지런한 이빨과 혀가 보이는 것이 특이하다.
문화재로는 국보 제13호 극락보전, 보물 제507호 선각대사편광탑비가 있다.
바. 청도 운문사 사리암 - 나한도량
<위 치>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
<연 혁>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후삼국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국사가 고려 태조 20년(937년)에 절을 지었다
나반존자(那畔尊者)의 기도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사리암은 산중 암자로 1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조선 헌종 11년(1845년)에
효원대사가 중건하고 신파스님이 천태각(天台覺)을 건립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철종 2년(1851년)에 현재의
나반존자상을 봉안한 후 사리암은 영험있는 나반존자 기도도량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사리암은 절 이름 그대로 삿된 마음을
용납하지 않는 도량이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193호 석등, 제208호 동곤(銅곤), 제316호 원응국사비, 제317호 석조여래좌상,
제318호 사천왕석주, 제678호 3층석탑, 제835호 비로전, 천연기념물 제180호 처진소나무가 있다.
사. 과천 관악산 연주암(戀主庵) - 나한도량
<위 치>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85-1번지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 용주사의 말사
<연 혁> <연주암중건기>등 사찰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 17년(677년)에 해동 화엄 초조(初祖) 의상스님이 관악산에
의상대(연주대)를 세우고 그 아래에 관악사(연주암)를 창건했다.
연주암은 해발 629m의 기암절벽 정상에 위치한 연주대(戀主臺)와 함께 관악산의 명소로 손 꼽히고 있다. 몇 해 전 상당한
규모의 선불전을 건립하는 불사가 진행되었으며, 높은 산정에 자리한 산사답게 기도도량뿐만 아니라 선찰(禪刹)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의상 스님이 연주암을 창건한 이유나 스님이 이곳에서 어떻게 수행 정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의상 스님이
연주암을 창건했다는 기록을 <중건기> 외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경내에도 의상 스님의 창건과 관련된 유물이 전혀 전하지
않는다. 관악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 "연주암"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그 동기와 관련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고려가 망하자 강득룡(姜得龍),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등 유신들이 관악산에 은신하며 의상대에서 고려 왕조를
그리워 한데서 유래한다는 것으로 이들이 고려 왕조 고려의 임금을 그리워했으므로 임금을 뜻하는 "주(主)"를 써서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연주(戀主)"를 관악사의 새로운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는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과 관련된 것으로 태종이 왕위를 셋째인 충녕대군(세종)
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유랑 길에 나선 이들은 관악사에 머물며 왕위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자 했다고 한다.
이 때 지은 건물이 40여 칸에 이르렀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들 대군의 심정을 기리기 위해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효령대군은 숭유억불로 침체되어 있던 불교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서
연주암을 중건했고, 조선의 역대 왕비나 빈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도 효령대군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효령대군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각종 법회 개최나 사찰 중건, 경전 간행 등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연주암에는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 효령각이 있다. 조선 태조는 즉위 원년(1392년)에 연주암을 신축하였고 약사여래와 미륵불, 5층탑을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조성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연주암의 역사는 거의 알려진 바 없고
성보문화재도 없다. 가장 오래된 것은 3층석탑인데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각 부분이 균형 잡혀 있고, 그 기법이 매우 정교한 우수한 석탑이다. 연주암에서 4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영험 있는 나한기도처로 유명한 연주대가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나한을 모셨음을 나타내는 응진전(應眞殿)
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약사여래불이 있다.
아. 영천 팔공산 거조암 - 나한도량
<위 치>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팔공산 동쪽 기슭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산내 암자
<연 혁> 미상
나한 기도성지로 유명한 거조암(居祖庵)은 은해사의 산내 암자로서 기도도량으로서의 명성과는 달리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 없다. 신라 효소왕 2년(69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경덕왕 때(742∼765년) 왕명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전해올 뿐이다. 그러나 원효스님은 신문왕 6년(686년)에 입적했으므로 신빙성에 문제가 있고, 경덕왕이 창건했다는 설 또한
정확한 근거가 없다. 거조암이 우리 나라 불교사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1158∼1210년) 스님이 이곳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명종 18년(1188년) 봄 거조암 주지 득재(得才) 스님의 청으로 거처를 옮긴 스님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을 규합하여 본격적인
수행 결사에 나섰으며, 그 이후 송광사로 결사 도량이 옮겨갔다.
거조의 조(祖)는 조사(祖師)로서 일대사를 해결한 수행의 종장(宗匠)을 가리키는 말로서 바로 나한이라고 한다. 나한은
응진(應眞)이라 하며, 공양을 받을 만한 존재이므로 응공(應供)이라 한다.
충렬왕 24년(1298년) 정월에 원참 스님이 밤중에 낙서(樂西)라는 도임을 만나 본심미묘진언(本心微妙眞言)과 극락왕생의
참법(懺法)을 전수 받아 기도도량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거조암은 나한 기도성지로서 절의 중심을 이루는 오백나한전인 영산전은 건축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후불탱화인
영산탱은 색조나 화풍이 이채로운 불화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불화는 녹색이나 청색 또는 적색이 화면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탱화는 적색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붉은 색이 그다지 전면에 나서지 않는 느낌이다.
영산전에는 오백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모두 5백 26위의 나한이 봉안돼 있다. 학계에서는 영산전이
건립될 당시 오백나한이 조성됐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문화재로는 국보 제14호 영산전이 있다.
자. 와룡산 고산사 - 나한도량
<위 치> 충북 제천시 덕산면 신현리
<소 속>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
<연 혁> 신라 헌강왕 5년(875년)에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다.
고산사 창건 이후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곳에서 8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절의 모습은 1100여 년 무심한 세월 속에서 망국의 왕일 망정 한 나라의 국왕이
머물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다.
10평이 채 안되는 응진전(應眞殿), 슬레이트 지붕의 요사, 흙벽돌로 지은 선방(禪房)및 해우소가 도량의 전부이다. 응진전은
함현(含玄) 스님이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전에는 다 쓰러져 가는 듯한 법당 위에 비닐 한 장을 덮어 비바람만 겨우 막을
정도이었으나 지금은 새로 단장하였다.
응진전의 주존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지만 이곳은 관세음보살이 양옆에 각각 세 분 나한의 협시를 받고 있다. 화관을 쓰고
흰색 가사를 걸치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충청북도에서 유일한 석조관음상이다. 여섯 분의 나한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다. 옛날에는 일곱 나한을 모셨는데 지금은 여섯 분만이 자리를 지키고 나머지 한 분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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