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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淸潭 2020. 4. 23. 14:51

임하필기 제36권 / 부상개황고(扶桑開荒攷)

고려(高麗)

      
왕륭(王隆)은 한주(漢州) 송악군(松岳郡) 사람인데, 기개와 도량이 컸다. 한씨(韓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짓고 살았다. 당(唐)나라 건부(乾符) 4년 정유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은 건(建)이고 자는 약천(若天)이다. 왕건이 태어날 때 신광 자기(神光紫氣)가 집을 에워쌌고, 출생하자 용안(龍顔)처럼 미골(眉骨)이 튀어나온 데다 턱은 네모지고 이마는 넓었다.
왕건이 17세 때에 신승(神僧) 도선(道詵)이 왕건에게 출군(出軍)시키고 진치는 요령과 요새지를 점거하고 시일을 선택하는 방법 등을 알려 주었다. 왕건은 궁예(弓裔)를 섬겨 시중(侍中)이 되었고, 잇따라 송악 성주(松岳城主)가 되었다. 궁예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군사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래서 후량(後梁) 정명(貞明) 4년 무인(918)에 철원(鐵圓)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쳤다.
2년에는 송악에 도읍을 세우고 5부(府), 6위(衛), 3성(省), 6상서궁(尙書宮), 9시(寺)를 설치하였다. 3년에는 도성 안에 10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18년에는 신라 왕 김부(金傅)가 나라를 바치며 항복하였고, 19년에는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이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지어 후사(後嗣)를 훈계하였고, 26년 계묘에 훙거하였다.
적자(嫡子) 무(武)가 서니 이가 바로 혜종(惠宗)인데, 2년에 훙거하였다. 혜종의 아우 요(堯)가 서니 이가 바로 정종(定宗)인데, 2년에 훙거하였다. 정종의 아우 소(昭)가 서니 이가 바로 광종(光宗)인데, 9년에 비로소 과거 제도를 설치하고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로 지공거(知貢擧)를 삼았으며, 26년에 훙거하였다. 태자 주(伷)가 서니 이가 바로 경종(景宗)인데, 6년에 훙거하였다. 그리고 경종의 종제 치(治)가 서니 이가 바로 성종(成宗)인데, 12년에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침범하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와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를 보내어 격파하였으며, 16년에 훙거하였다. 아들 송(誦)이 서니 이가 바로 목종(穆宗)인데, 12년에 강조(康兆)에게 시해되었다. 대량군(大良君) 순(詢)이 서니 이가 바로 현종(顯宗)인데, 9년에 소손녕이 또 와서 침범하자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上元帥)로 삼아서 크게 무찔렀으며, 22년에 훙거하였다. 태자 흠(欽)이 서니 이가 바로 덕종(德宗)인데, 3년에 훙거하였다. 아우 형(亨)이 서니 이가 바로 정종(靖宗)인데, 12년에 훙거하였다. 아우 휘(徽)가 서니 이가 바로 문종(文宗)인데, 37년에 훙거하였다. 태자 훈(勳)이 서니 이가 바로 선종(宣宗)인데, 11년에 훙거하였다. 아들 욱(昱)이 섰는데, 계림공(鷄林公) 희(煕)가 왕을 폐하고 스스로 서니 이가 바로 숙종(肅宗)이며 10년에 훙거하였다.
숙종의 태자 영(瑛)이 바로 예종(睿宗)인데, 2년에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을 보내 여진(女眞)을 쳐서 복주(福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吉州)를 설치하였으며, 17년에 훙거하였다. 태자 해(楷)가 서니 이가 바로 인종(仁宗)인데, 4년에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拓俊京)이 반역하자 모두 귀양 보냈고, 13년에 묘청(妙淸)이 서경(西京)에 의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金富軾)이 쳐서 평정하였으며 24년에 훙거하였다. 인종의 태자 현(晛)이 서니 이가 바로 의종(毅宗)이다. 24년에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 등이 문신(文臣)을 크게 죽이고는 마침내 왕을 폐하고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세우니 이가 바로 명종(明宗)인데, 27년에 최충헌(崔忠獻)에게 폐위당하였다. 평량공(平涼公) 민(旼)을 세우니 이가 바로 신종(神宗)인데, 7년에 훙거하였다. 태자 덕(德)이 서니 이가 바로 희종(煕宗)이다. 7년에 최충헌이 희종을 폐하고 한남공(漢南公) 오()를 세우니 이가 강종(康宗)인데, 2년에 훙거하였다. 강종의 태자 진(瞋)이 서니 이가 바로 고종(高宗)인데, 그 당시 몽고(蒙古) 군사가 여러 번 쳐들어오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하였으며, 47년에 훙거하였다. 태자 전(倎)이 몽고로부터 돌아와서 서니 이가 바로 원종(元宗)인데, 15년에 훙거하였다. 세자 심(諶)이 원(元)나라로부터 돌아와서 서니 이가 바로 충렬왕(忠烈王)인데, 24년에 원나라가 세자 원(謜)을 책봉하여 왕을 삼자, 원(謜)이 즉위하여 충렬왕을 태상왕(太上王)으로 높였으며, 34년에 충렬왕이 훙거하였다. 세자 원(謜)이 원나라로부터 돌아와서 서니 이가 바로 충선왕(忠宣王)이다. 5년에 아들 강릉군(江陵君) 도(燾)에게 왕위를 전하였으니 이가 바로 충숙왕(忠肅王)이다.
충숙왕 17년에 원나라가 세자 정(禎)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2년 뒤에 충숙왕이 복위하였다가 8년에 훙거하였다. 세자 정(禎)이 왕위를 이어받으니 이가 바로 충혜왕(忠惠王)인데, 5년에 원나라가 충혜왕을 잡아들여 게양도(揭陽道)에 유배시키자 악양현(岳陽縣)에서 훙거하였다. 세자 흔(昕)이 서니 이가 바로 충목왕(忠穆王)인데, 4년에 훙거하였다. 아우 저(㫝)가 서니 이가 충정왕(忠定王)이다.
충정왕 3년에 원나라가 충정왕을 폐하고 강릉군(江陵君) 기(祺)를 세우니 이가 바로 공민왕(恭愍王)이다. 이때 홍건적(紅巾賊)이 자주 침입하였는데, 안우(安祐)에게 명하여 물리쳤다. 14년에 중 신돈(辛旽)을 사부(師傅)로 삼아 궁중에 거처하게 하였다. 18년 기유에 명(明)나라 태조(太祖)가 사신을 보내어 천하를 평정하였음을 알렸다. 23년에 훙거하였고, 우(禑)가 왕위에 섰다. 당시 최영(崔瑩)이 국사를 담당하여 원나라를 섬기자는 논의를 제창하고 우왕(禑王)에게 요동 정벌을 권하였다. 그러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우리 조선(朝鮮)의 태조대왕을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았다. 그래서 진군하여 위화도(威化島)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장맛비가 연일 내렸다. 이에 우리 태조가 회군(回軍)하여 최영을 잡아 죽이고 우왕을 강화(江華)로 내쫓았으며, 우왕의 아들 창(昌)을 세웠다. 그런데 심덕부(沈德符)와 정도전(鄭道傳) 등이 우와 창은 왕씨(王氏)가 아니라고 하여 정창군(定昌君) 요(瑤)를 맞아 세우니, 이가 바로 공양왕(恭讓王)이다.
고려는 태조 무인년으로부터 공양왕 임신년(1392)에 이르기까지 모두 32대, 475년이었다. 홍무(洪武) 임신년에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송경(松京)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니, 이때가 7월 16일 임신이었다.

나 유원(裕元)은 다음과 같이 찬(贊)한다.

동국통감은 방대해서 / 東國通鑑
읽을 만한 사람이 없기에 / 無人可讀
여러 책들을 망라하여 / 蒐羅群書
산창에서 무딘 붓으로 / 山窓筆禿
한 권의 책을 이루어 / 乃成一部
크고 작은 일들을 한데 기록하였노라 / 大小合錄
무진년에 단군께서 신단수(神壇樹) 아래 하강하시니 / 黃龍降神
세상이 잘 다스려져 해와 달처럼 밝았다네 / 日月萬斛
산하는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답고 / 繡錯山河
수레가 폭주할 정도로 인구가 많았었네 / 車湊輪輻
영웅들은 땅을 나누어 일곱 개가 잇닿았고 / 雄分連七
크고 작은 나라들이 부질없이 사라졌네 / 鳥啼夢六
누가 말과 일을 기록하였는가 / 疇記言事
역사책이 영락하였어라 / 零落汗竹
내가 뜻을 가지고 탄식하면서 / 有志發歎
이에 조목을 세웠노라 / 爰立條目
스물한 개 도읍이 / 二十一都
몇이나 목에 처하였는가 / 幾處于牧
백 개나 되는 부용국이 / 附庸百國
각각 경계를 이루어 영토를 확보하였는데 / 迺壃迺築
고려가 통합할 때에 와서는 / 迄麗統合
복종하지 않는 부용국이 없었다네 / 罔不率服
운이 다하여 막히매 / 運極而否
포악한 불꽃이 기염을 토했는데 / 虐焰熇熇
우리 태조께서 화염을 진압하시자 / 我祖廓揮
하늘이 복을 내리셨네 / 皇天降福
이에 왕위에 오르시니 / 誕垂衣裳
그 자태가 의젓하고 덕이 있으셨도다 / 有儼穆穆
그리하여 천년만년 누릴 / 千斯萬斯
나라의 기반을 닦으셨도다 / 年卜世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