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명법문 명강의

여실지견(如實知見)

淸潭 2018. 3. 27. 09:21

여실지견(如實知見)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 그대로 영원히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바로 

불심(佛心)이란 말입니다. 불심(佛心) 이것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뭣인가? 몸뚱이 이것도 역시 무시무종, 불생불멸, 상주불멸,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마음

위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형상(形象)입니다. 풀 위에 맺혀있는 이슬 같이 아침에 낀 안개 같은 것입니다.

또는 봄날에 저 멀리 끼어있는 아지랑이 같이 이렇게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끼어 있는 이것이 우리 몸이란 

말입니다. 산골짜기에서 메아리가 울리지마는 메아리 소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듯이우리 몸은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병 때문에, 병을 앓고 있는 우리의 눈으로 잘못보기 때문에 내 몸은 이것이다, 네 몸은 이것이다,

저 사람은 미운 사람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지 이런 것은 아지랑이나 또는 산골짜기에서 울려퍼지는 메

아리 소리와 똑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몸이나 메아리를 실체로 본단 말입니다. 허상(虛像)을 

사실로 봅니다.


사람들의 불행은 딴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른 철학을 바른 가치관을 갖지 못한데 있다는 말입니다.

허상(虛像)을 사실(事實)로 영원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로 보는 것이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그래서 사랑스러운 누군가가 특별히 어디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가 밉다고 그래서 

미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런 실체가 아닌 허상(虛像)을 자꾸 부풀

려서 미운사람은 더욱 더 밉게 보이는 겁니다. 좋은 사람은 더욱 좋게 보인단 말입니다. 이런데서 우리 

불행이 있습니다.


지위, 권력, 명예, 사회적 영향력 등 이 감투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감투 이것도 역시 허상(虛像)

이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공연한 감투 때문에 성불(成佛)해야 할 우리 생명(生命)을 헛되이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생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우리가 본래 부처(本來佛)이기 때문에 꼭 부처가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부처의 길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해야 쓰는 것인데 그러지 않고서 사실 있지도 않은 행복, 

되지도 않는 감투에만 헛되게 시간과 생명을 허비하니 말입니다.


물질(物質)이 절대로 사람들 한테 행복(幸福)을 주는 게 아닙니다. 물질이나 재물은 어느 한 때 사람들에

게 충분한도도 못되고 최소한도의 행복(幸福)만을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재물, 물질 이것은 본래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있지가 않은 물질, 재물이기에 사람들에게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는 겁니다. 산도 냇물도 

또는 황금도 다이아몬드도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황금 같은 나이아몬드 같은 모양을 지금 냅니다.

돌 같은 모양을 냅니다. 그런 것이지 그것이 실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영원성의 무시무종, 불생불멸, 상주불멸, 영원불멸하기에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늙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시무종으로 영원히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있는 불성(佛性)이 그때 그때 전자(電子)도 되고

불성(佛性)이 그때그때 진동(振動)해서 전자같이 보이고 양자(陽子) 같이 보이고 한단 말입니다. 불성이

그때그때 진동해서 산소같이 보이고 금(金)의 원소가 모이면 금 같이 보이는 것이고 또는 탄소가 모이면 

탄소가 결정되면 다이아몬드 같이 보이는 것일 뿐이지 이런 물질이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소는 현미경으로 보기 전에는 못 보는 것이고 육안으로 봐서 빛나면 금이다 뭣이다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허상(虛像) 때문에 사람들이 공연스레 고통을 받는단 말입니다. 금배지가 없

어도 우리가 절대로 불행하지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본질적(本質的)으로 살 시대입니다. 허망하게 허상(虛像)에 붙잡혀서 살 시대가 아니란 말

입니다. 허상(虛像) 때문에 자신도 괴로워하고 사람 사람끼리 싸운단 말입니다. 지금 인류는 지금 현대

문명은 정말로 예수가 간 길, 석가모니가 간 길, 공자가 간 길 그런 길 쪽으로 궤도(軌道)를 수정(修正)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인류의 불행은 절대로 면치 못 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선택을 할 때입니다. 인류가 불행해 하다가 같이 멸망당해야 쓸 것인가 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보십시오. 대권(大權)은 하나인데 대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낭비를 합니까?

대권 그것은 뭣인가? 그것도 하나의 허상(虛像)이란 말입니다. 꼭 예수나 석가모니나 공자나 그분들만이 

인생을 바로 본 분들이라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진리(眞理) 그대로 사실

대로 인생을 바르개 보신 분들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알아 생활해야 될 시기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정도의 차이 뿐이지 다 사람들 누구나 불행합니다. 항상 불안하고 불행하고 

남한테 존경은 커년 배려도 못 받습니다.


옛날엔 수승한 것을 잘 몰랐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행동도 비판도 잘 못했지마는 이 정보화시대가 되어

그냥 다 알아버린단 말입니다. 지금은 어디가  숨을래야 숨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 가만히 비밀스럽게 

뭘 할 수도 없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성자(聖者)같이 행동해야 남한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 하면 누구한테나 존경을 못 받습니다. 부처(佛)이란 이치가 아니라 한 생명입니다. 한

생명이니까 생명은 생명으로 구해야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생명으로 알아서 생명으로 구해야지 그냥 

하나의 이치로 구해서 끙끙 앓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보면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 염불(念佛)이란 뜻은 뭣인가? 그 분별 시비 

좋아하는 사람들,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漢文)만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염불 

공부는 저 밑에 하근기 중생(下根機 衆生)이나 할 것이지 똑똑한 사람들이나 상근기(上根機) 사람은 할 

필요가 없다고 염불(念佛)을 멸시합니다. 염불은 생각 염(念)자, 부처 불(佛)자의 염불(念佛)입니다. 부처

란 뭣인가? 부처(佛)란 내 생명(生命)의 본질(本質)인 동시에 우주(宇宙)의 본질(本質)을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천지우주가 곧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천지우주, 우주만물이 바로 부처

입니다. 그런 부처(佛)를 생각(念)하는 것이 염불(念佛)입니다.


우리 중생이 부처(佛) 그 자리를 잘 납득을 못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방편(方便)으로 부처는 저 

하늘 어디엔가 있다고 하듯이 부처는 저 하늘에 있다가 사람들이 애쓰고 부르고 외우고 생각을 하면은

사람들을 돕는다 이렇게 방편으로 말을 하는 것이지, 염불(念佛)의 본뜻은 바로 내 생명을 내가 생각하

는 것이고 내가 바로 우주의 본질을 생각하는 거라는 말입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것을 생각하는 

그것이 염불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나 주문(呪文)이나 경(經)을 읽는 것이나 또는 화두(話頭)

나 어떤 것이나 따지고 보면 다 염불입니다. 또는 동시에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이나 주문을 외우는 

것이나 경을 보는 것이나 모두가 다 염불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화두나 부처가 뭣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뭣인가? 그렇게 아니 된 화두가 있습니까? 달마

(達磨)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은 뭣입니까? 이것도 역시 내내야 우리가 부처를 얻기 위해서 하는 말입

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을 열어 버리면 결국은 부처 하나란 말입니다. 그런데 부질없이 자꾸만 필요 

없는 에너지를 소모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방(禪房)에서도 부질없는 분별 번뇌 망상(妄想)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부처라고 하나 이뭣고 라고 하나 또는 무(無)자라고 하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부르나 결국은 다른 것이 아닌 염불(念佛)란 말입니다. 그렇게 부질없는 소모를 하지 않기 위해서 아까 

제가 모두에 말씀드린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여실하게 모든 것은, 우리 현상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봐서 나요 너요 또는 금이요 은이요 라고 분별을 하는 것이지 성인(聖人)

이 본다고 할 때는 지금 여기 드러나 있는 현상(現象) 이대로가 곧바로 불성(佛性)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 어떠한 것이나, 우주삼라만상만물 모두가 부처가 드러난 장엄(莊嚴)한 모습입니다. 강도나 징그

러운 독사나 부처가 드러난 장엄한 모습입니다. 강도나 독사 이것도 역시 상(相, 모습, 모양, 형체)만 

그런 것이지 본바탕인 부처는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장엄스런 모습이란 말

입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서 화장세계(華藏世界)라고 해서, 천지우주가 우리가 다시 만들어서가 아니라

생긴 이대로 벌써 장엄스러운 찬란스러운 부처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공부를 이렇게 해서 부처를 알아

버리고 마음으로 안심(安心)을 딱 해버려야 쓴단 말입니다. 내가 지금 당장에 죽어도 그림자 같은 본래 

없었던 메아리 같은 형상만 바뀌는 것이지 죽음은 없다, 죽을 때에 아프기도 하고 하겠지요. 그러나 이

치는 그런 겁니다. 우주의 도리(道理)는 그런 것이니까 도리가 사실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도리를 저 같은 시원찮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나 달마스님이나 가장 거짓말 

않는 공자나 또는 예수나 그런 분들이 했단 말입니다. 그분들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거짓말 하겠습니까.


따라서 그분들 말씀을 믿는 것이 우리 신심입니다. 그분들 말씀을 딱 믿어버린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불안한 의식 때문에, 불안한 마음 때문에 이 더위에 더욱 더워지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고해

(人生苦海)인데 그렇지 안 해도 실패도 많이 하고 여의치 않은 일이 많이 있는데 더욱더 고생이 심각하니 

더 고생스럽게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정말로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는 불행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행복하게 되는 것은 가장 쉬운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우주 도리에 따른단 말입니다.


우주(宇宙)의 도리(道理)란 뭣인가?

우주의 도리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이, 우리가 보고 안 보고 상관없이 천지만물(天地萬物)은 오직 영원

한 부처님의 불성(佛性), 즉 자비 지혜 행복 능력을 다 갖추고 있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실생명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완전하고 진실한 생명은 온전히 모든 것을 전부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사람뿐

만이 아니라 나무도 풀도 돌도 모래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은 깨달은 그 

순간 책상머리에서도 금색광명(金色光明)이 빛나고 말입니다. 또는 간시궐(幹屎厥)이라, 똥 마른, 똥 묻은 

마른 막대기에서도 금색광명이 빛난단 말입니다.


우주의 도리, 부처(佛) 란 그와 같이 완벽하고 진실한 생명인지라 귀머거리도 아니고 소경도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행동을 바르게 하면 진실생명 자체인 부처님은 우리를 훤히 보신단 말입니다. 우리가 

행동을 잘 못하는 것도 훤히 보십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부르면 오, 주여! 하고 부르거나 또는 알라를 부

르거나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거나 이 뭣고 화두(話頭)를 하거나 우주의 진실생명인 동

에 내 생명인 우주의 도리, 부처는 모든 걸 다 아신단 말입니다.


또한 부처님은 무량의 신비로운,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하고 절대적으로 가능한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모든 능력을 다 갖춘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을 꼭 내가 봐야 쓰겠다, 내가 부처를 못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부처님이시여 저한테 신심(信心)을 좀 돋우기 위해서 꼭 모양 좀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빈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날 불현듯이 부처님 광명(光明)이라든가 훤한 빛이 분명히 옵니다.

부처님이 소경이 아니고 바보가 아니거니 우리 정성에 안 통할 수가 있겠습니까. 안 통하면 그때는 바보

부처이겠지요. 꼭 우리가 부처를 정말로 구한 만치, 구한 만치 거기에 대한 부처의 응답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성경, 바이블을 보십시오. 바이블도 그야말로 참으로 두드리면 문이 열리고 맙니다. 그마만치 

간절하게 구하면은 꼭 응답이 꼭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마태복음에 제가 좋아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서 62절인가 63절인가 합니다마는 그대의 손과 그대의 발이 죄를 범하면은 바로 찍어 내어라.

찍어 내라는 말입니다. 도끼나 칼이나 톱이나 그런 걸로 바로 찍어 내란 말입니다. 그대의 눈이 죄를 범

하면 그대의 눈을 떼 내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대가 병신인 채로 천국에 가는 것보다도 그대가 죄를 범한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훨썩 더 불행하니라. 종교나 또는 철학이나 무슨 신앙이나 모두가 다 

무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 너무나 나쁜 습관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은 없는 것보고 

분명히 있다 한단 말입니다. 미운 것도 없는 것이니까 하고 말입니다. 너무 좋다고 그래서 좋아 하는 그

것도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런단 말입니다. 자기 권속(眷屬)만 좋은 것도 아닌데 우리가 좋다 한단 말

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본래로 없는 것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죄를 범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이 잘 못보고 우리 손이 지금 잘못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그 잘못 

본 자기 눈깔을 그냥 떼내버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결단, 그런 정도의 결단이 있어야 씁니다.


아무튼 나라는 환상(幻想), 허망한 자기(自己)라는 고정관념(固定觀念), 분별 번뇌 망상(妄想)이 가시지 

않고서는 우주의 대도(大道), 부처, 깨달음을 터득하지 못 합니다. 부처는 귀머거리가 아니고 소경이 아닙

니다. 사람들이 구하면 구한 만치 부처가 얻어집니다. 행복하기는 참 쉽습니다. 천지우주의 도리를 따르

면 행복하게 됩니다.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느끼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事實)이란 무엇인가? 사실이란 이 세상에 우주만물 중에 부처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참선도 염불도 그렇게 해야지 화두를 애쓰고 의심한다고 하면서 옆에 사람이 부스럭거려도 기분 나빠서 

시비하고 그러면 그거 참선 태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라는 교만심(驕慢心)이라든가 분별시비를 버려

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순(矛盾)을 버려버려야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애쓰고 공부하면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모서리가 떨어진단 말입니다.


아까 영운스님도 30년 동안이나 분별 시비도 많이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모두 했겠지요. 

그러나 공덕(功德)이 쌓이고 쌓여서 그 쌓인 공덕이 성숙되니까 어느 날 30번이나 보고 느끼고 했던 

그런 복숭아꽃 봄으로 인해서 퍼뜩 깨달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공덕만 쌓아두면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만 배불리 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자기만 

배불리 먹고 이웃사람이 굶는 것을 보는 것은 이것도 역시 잘 못 보는 것이고 잘 못 행동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의 도리는 조금도 사(私)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 옷을 잘 입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

서 바르게 산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스웨덴보리나 또는 헬렌 켈러가 다 본 바와 같이 우리도 사(私)만 떠

나면은 천사가 보이는 것입니다. 호법선신(護法善神)도 보이고 귀신도 우리한테 와서 꾸벅꾸벅 절하고 

우릴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천지신명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생명인 부처님께서는 오죽 

하겠습니까.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즉 념불(念佛)을 하면 부처는 언제나 곧바로 우리를 보고 우리를 돕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우선 꼭 여실지견(如實知見), 바른 견해(見解), 바른 철학(哲學)이 지금 꼭 필요한 때입니다.

바른 철학이 없으면 어느 분야에서나 바르게 하지 못 합니다. 공장도 바르게 운영하지 못 하고 기업도 

바르게 경영하지 못 하고 맙니다. 다 바르게 하지를 못 합니다.


바른 스승, 바른 부모, 바른 친구, 바른 남편, 바른 아내, 바른 어버이, 바른 자식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실지견(如實知見), 진리(眞理)에 맞게끔, 우주의 도리(宇宙의 道理)에 맞게끔 바른 지혜(智慧)를 가지

셔야 됩니다. 이렇게 하셔서 금생에 꼭 본래(本來) 갖추고 있는 그 자리, 꾸어온 것도 아닌 것이고 값 주

고 사온 것도 아닌 것인 본래 그 자리, 부처, 본래의 나, 텅~빈 바탕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청화스님- / 장백산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