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명법문 명강의

불교, 라는 종교는?

淸潭 2018. 2. 21. 10:23

불교는 / 현웅스님

불교, 라는 종교는?

이 세상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한법을 믿으면 많은 사람이 그 방향이 같다.
방향이 같으면 우리는 서로 낯 설지 않다.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된다.

그러나 한법을 믿지 않으면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법이 많다.
법이 많으면 많을 수록 사는 것이 복잡하고 어렵다.

한 법이 무엇이냐? 가 중요하다.

사람 마다 품고 있는 성품이 그것이다. 이 성품엔 많고 적음이 없다.
심지어는 그 하나라고 하는 것도 없다.
우리가 이걸 알면 서로 낯설지 않다. 서로 저절로 형제가 된다.
불법을 바로 믿어야한다. 법이 많은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만들어서 많아 진 것이다.
일체 법이 ㅡ없어지면 무 아상이 된다.
나가 없는 데 법이 있겠는가! 이다. 세존은 그 것을 보여주고 가신 분이다.

불교!
그것은 전혀 복잡한 것이 없는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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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많이 아는 者 일수록 自己를 안 믿어

 

불교는 많이 아는 자일 수록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알고 있는 동안 그것이 불교라고 착각이 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기를 믿어 다시 태어나야 바로 아는 것 됩니다.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둘이 아닙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닙니다.

 이 맘을 알면 지식은 독약입니다.

마음에는 지식이 붙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교를 쉽게 풀어 전하려고 많은 지식을 동원합니다.

언뜻 보기에 맞는 것 같지만 독약을 풀어 놓는 불교 공해입니다.

오직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마음을 경험 하도록

먼저 믿음 키우는 일을 내 놔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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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하는 것 또한 道가 아니고 -


우리는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道가 너무 많다.

그러나 道는 기억 할 수 없는 것이다.

기억되어진 道는 망상이든지 가짜 道 일뿐!

 

道의 다른 이름들.

옳은 것, 또는 바른 것, 眞我, 부처, 진리, 禪, 영원하다는 것 등이다.


작고 큼을 법다히 대하며 산란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나무뿌리는 땅 속에서 “神 ”을 만나고.

나무뿌리가 만나는 땅을 보면 흙이다.

그러나 이 흙 속에는 나무로 보이는 형상은 찾아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흙만 있다. 흙에는 나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흙에 뿌리를 둔 나무는 푸른 잎도 나오고 꽃도 피어낸다.

나무가 의지하고 있는 땅속에 흙은

밤나무도 안 가지고 있고 무화과 나무도 안가지고 있다. 

어떤 나무의 형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데

감나무는 감을 열고 나오고 배나무는 배 열고 나온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열고 나와 그 열매를 우리 눈에 보여준다,

 

땅은 길러 주는 성질만 품고 있다.

깨달은 사람은 우리 사람 속에서 이것을 보고 말을 하신 분들이다.

성인은 그런 눈을 갖고 있다.

감나무가 있는데 감나무를 안 가지고 있고

배나무가 있는데 배나무를 안 가지고 있고

그 안가지고 있는 것을 無 我相이라고 한다.

我相, 人相, 衆生相이 없다는 다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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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놓는 글 


번뇌를 끊는다니,   말이나 되는가!

왜냐하면

번뇌를 끊으려는 그것이 또한 번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번뇌를 끊는다. 라고 말하고 나와야 한다.


사람 성품 바탕엔 번뇌가 없지만

그 바탕을 보지 못한 사람은 번뇌를 날마다 보듬고 산다. 

그러나  알고보면 번뇌는 살아있는 삶의 표현이다.

 죽어 있는 사람에게는 번뇌도 없다. 

 우리는  이제 번뇌와 가까워져도 좋다.

 내가 번뇌를 가까이 하면  번뇌는 되러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이 삶은 푸른 잎이 달린 하나의 영롱한 꽃 덩어리이다.

 눈은 부처의 미소로 나타나고 귀는 날마다 천상의 소리를 찾아 듣는다. 

 번뇌를 버릴려는 노력은 어리석음이다.

 살아있다는 생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번뇌의 실상을 모르면  가는 곳마다  번뇌가 나를 괴롭힌다.


누가 번뇌를  보듬고 있는가 ? 

이 일때문에 옛 사람들은  喝을 하고 몽둥질을 한다.

 눈앞에 보듬고 와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없는 것을 있다고 고집하고  있다.  이젠 나는 시원하다.

 나에게는 옛 사람의   은혜가 크다.  이 책을 쓴 이유이다.


 이 책을 만나고 번뇌가 놔진다면   나는 다시 한번 더 시원할 것이다.

 형상은 이제 물러가고 없다.

 세존의 뜻이 나 안에서 살아 나고 너 안에서 살아난다.

 어둠의 밤이 지?ぐ“?  아침이 온다. 서로의 얼굴이 바로 보인다. 

 세존이 옆에와 계신다.

 볼 수 있겠는가?

 눈알 꿈틀 거린자가 있다면 곧장 방방이를 부를 것인저.  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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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부처를 섬기라고 하지만 난 거꾸로 생각합니다.

오히려 중생 중생을 섬길 뿐 !

부처를 섬기다 보면 삿 되든지, 사교주가 되기 십상입니다.

말은 그럴 듯 해 뵈지만 중생의 속성이 그러는 걸요.

그러나 중생을 섬기면 부처를 섬기는 것이되

불법이 이 세상에 다시 살아납니다.

석가 세존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당부하고 가셨습니다.

중생 안에 부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 안에 있는 부처가 살아 나야 부처가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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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은 사람 속에 있는 슬기로움이 숨 쉬는곳에 있다.

 "그것이 종교"

맘이 일어나면 부딪치고 안 일어나면 부딪칠 일이 없다.
그러나 맘이 일어나지만 일어난 것을 놔두고 볼 줄 아는 사람은

그 마음이 부딧칠 것을 알아 안 부딧친다.,
그것이 다르다.
너무 자기 생각을 믿으면 그 생각 속에서 나오지 못한다.
이는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는 마음을 떠나 본적이 없다

그래서 마음을 알면 종교를 알아 지혜를 만난다.
지혜는 생각이 아니다.
알고 모름을 놔두고 보는 눈이 지혜이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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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받아 나온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 가운데 공기 물 음식등이있다. 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하늘땅의 은혜를 알아야한다고 들 한다.
알면 사람이 겸손해지고 사람의 생명이 각각 귀한 줄 안다.

알면 서로 싸우고 다투는 일이 줄어든다.
나는 나 속에 스스로 있는 존재 !  神을 만난다.
신은 서로 나눌 줄 안다.
그래서 '神은 사랑이다'  라고 말한다.
알고 보면 내 것 이라곤 없다.
이 몸은 다 남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몸을 움직이고 끌고 댕기는 놈이 있다
이것은 눈에 안 뵈니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 알 수 없는 것을 神 이라고 하고 부처라고 한다. .
그것은 형상이 없어 묘하다.
내가 이 묘를 만나면 신을 만나고 부처를 만난다.
그때 나는 넓은 나로 변해져 나온다.

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일어난다.
깨닮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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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 주는 詩


열정이 넘칠 때 나는 그친다.
그치고 나면 서있는 발아래 안온한 곳에 닿는다.
내가 살던 고향이다.


 산 아래 동네
 나 사는 빈 초가집 햇빛만 가득하다.
   
 
- 긁으면 부스럼 나네! 
 

이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완전을 기약하니 어려울 수 밖에요.
아예 불완전 한 것이 삶이라고 인정한다면 더 겸허해질 것입니다.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편안한 것이 없어요.
생하면 멸하고 마음이 일어나면 없어진 대로 갑니다.
누구에게 덜하고 더하고가 없이 그렇습니다.
다만 인정하고 사느냐 않고 사느냐가 다를 뿐!
않고 사는 자는 욕심 속에 있고 인정하고 사는 자는 허욕을 즐거워 하지 않는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큰 것에 우쭐대는 법이 없다.
작고 큼을 법다히 대하며 산란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시원한 샘물이 나오듯


새로운 탄생이 없는 삶은 지루하고 고루하다.

탄생은 새로운 삶이 시작될 뿐 옛 삶에 붙들려 있지 않다.

삶 전반에 걸쳐 변화가 온다. 인연들이 바뀐다.

새로운 인연들이 줄을 서 있다.

사람은 누구나 새롭게 만나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새로 탄생 된 이는 날마다 새로움을 만나며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날마다! 날마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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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아침

 

구름이 오고가도 내 일이 아니니

이 몸이 나인 것 같으나 나가 아니고

마음을 보나 마음 또한 형상이 없어 볼 수가 없구나.

 

먼 기러기 울음소리 지나가는 데

의젓한 靑山만 드러나 눈앞에 있네!


* 선문답이나 게송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기와

남을 속이는 일이 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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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이 아니겠는가!

미운 사람이 옆에 있을 때는 미워할 수 있다.

하지만 미운 사람이 옆에 없는데도

미운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그것은

미운 생각이 망상으로 남아있어 그렇다.

그러므로 망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있지도 않은데 혼자 만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 망상이 아니겠는가!


* 번뇌 망상에 손대지 마라.

원래 뿌리가 없어서 그냥 두면 사라진다.

만지면 덧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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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퉁이 지나니 넓은 들이 보이다

 

깨달음은 산모퉁이를 지나자 넓은 벌판이 한 번에 뵈듯이 온다.

점점 더듬어 들어가는 게 아니다.

부처말을 기억해서 가지고 들어가면 더 더욱 아니다.

우리 맘엔 두 부처가 없다.

부처님 말, 禪句 등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

망상을 바탕으로 이해하여 말이 귀중하다고 지키고 있으면 그것이 선의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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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하는 마음이 곧, 苦통이다 -

 

곰곰이 돌아봐 생각해 보십시요.

스스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 마음을 아는 데도 스스로 가장 정직하고 잡심이 없어야

돌아 봐 질 것입니다.

 

그 구하는 맘이 곧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공부를 장애 하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이것만 자각이 되면 공부는 쉽습니다.

이 간단하고 명료하지만

그게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해 자각이 안 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늘 구하고 있으니

우리는 업을 짓는 줄 모르고 짓고 또 받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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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이 놔지는 곳

집착은 자기 마음을 봐 버리면 저절로 놔 진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애써 보는 노력은 공무소득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본시 집착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연히 불교 배워 놔 버려라, 집착하지 말라. 

그건 불교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먼저 자신을 믿는 것부터 배워야한다.


그러면 마음을 알게 되고 알면 스승을 찾아 나선다.

스승의 믿음아래 있다가 단 한 마디에 일체 것이 놔져 버린다.

그 때서야

"놔 버려라.

집착하지 말라." 라는 말들이 피부에 와 닿고 실감이 날 것이다,

대상이니 무아니 그런 것은 그림에 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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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법은 알고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다.

듣고 믿어 들어가는 공부이다.

나에게 깨달음이 오는 공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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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에 푸른 소나무가 다 부처

 

스스로 있는 부처의 눈!

뉘 가려 버렸는가!

공연히 밖을 향하여 몸과 마음 바빴었네.

한 가닥 돌이키니 옛 부터 있었던 것을!

놀랄 일도 아니고 ,

그렇다고 기뻐서 요란 떨 일도 아니네.

 

두두 물물이 또렷하여 버리고 또한 취할 것이 따로 없네.

북악산, 벚나무 꽃, 개나리꽃, 푸른 소나무

흥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르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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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스님은 나이 20에 송광사 九山스님 문하로 출가했다.

수행의 기초를 은사이신 九山선사로부터 익히고 여러 해를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인천 용화사 선원을 거쳐 대중 선방생활을 뒤로하고

산중 토굴에 들어가 6년 간을 지낸 뒤

84년 스위스 제네바 불승사로부터 초청을 받고 서양인에게 한국 禪불교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86년 에 북미로 건너가 시애틀에 돈오선원과 버클리에 六祖寺를 창건하고

지금은 六祖寺 禪院에서 정진하며 외국인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