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깨라
광덕(光德) 스님이 즐겨 쓰는 말이 있다.
누가 찾아와 “형편이 이러 이러한 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면
“지금까지의 몽상(夢想)에서 깨어나야지”하신다.
한마디로 ‘꿈 깨라’다. 어찌 보면 무정하기 짝이 없다.
꿈꾸어 오던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꿈 깨라’하면 그것은 ‘되지도 않을 일에 연연하지 말고 일찍이 단념해라’
하는 말과 같다.
한가닥 희망을 갖고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무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러 이러 하니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자상하게 조언을 해도 조언을 구하는 사람으로서는
긴가 민가할 터인데 한 마디로 ‘꿈을 깨라’하면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조롱하는 말로도 들리고 업수이 여기는 말로도 들릴 수가 있다.
그래서 스님을 냉정하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프랑스의 작가이며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조언을 구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기가 바라는 조언을 해 줄 사람을 찾아가서 조언을 청하게 된다.
이 사람이면 내가 바라는 조언을 해 줄 것이다 믿고서 찾아가 조언을
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처럼 별러서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꿈 깨라’하니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좀 자상하게 대해 주면 안 되느냐 하면,
“사람마다 다 같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조언이 아니면 듣지 않는다. 설사 조언을 따른다 해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중의 조언은 처음부터 현실성이 없다.”
그러니 이렇게 하면 사업이 성공하고 저렇게 하면 영달(榮達)을 하고
하는 따위의 조언은 도리어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해가 되면 되었지
유익하기 않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실한 마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현실을 바로 보고 대처할 수 있게 하려면
지금까지 욕망을 쫓아 살아온 꿈을 깨뜨려 주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전도(顚倒)와 몽상을 멀리 벗어나 끝내 열반에 이른다고 하는 반야심경의
“원리전도몽상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究竟)”
이 바로 스님의 그러한 뜻을 설하고 있다.
스님은 술망나니에 도박꾼에서 아내를 때리는 사내에게 『반야심경』을
외우게 한 것도 그러한 뜻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몽상을 깨뜨리는 방법이 여러 가지였다.
스님이 강남의 봉은사 주지로 계실 때였다. 그 때, 봉은사에는 대학생
불교연합회의 구도부 학생들이 스님들과 같은 일종의 출가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매주 일요일에는 대학생들을 위한 법회가 열렸다.
그 때, 광덕 스님은 이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지도법사였다.대학생들이
모여서 수도를 하고 법회를 하는 봉은사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절로
인식되고 있었다. 어느덧, 이러한 인식은 대학을 지망하는 학생이나
부모가 불공을 드리면 소원을 이룬다고 하는 믿음으로 변해서
많은 사람이 불공을 드리러 왔다.
그 중, 한 부인이 스님을 찾아와 하는 말이
“스님, 저희 아들이 이번에도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였다.
그 때, 스님의 말이
“잘 생각해 보세요. 보살님의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면 다른 아이가
그 대신 합격을 못합니다. 보살님의 아들이 합격을 안해서 다른 아이가
그 대신 합격을 합니다. 보살행을 했다고 생각하십시오.”였다.
대학에 낙방한 것을 억울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군가 합격을 하면 누군가 불합격을 한다. 그래서 갈등이 생긴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다 경쟁자로 보이고 내가 물리쳐야 할 적으로 보인다.
모두가 자기본위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승은 사바세계라고 스님은 말한다.
여느 사람 같으면
“더 열심히 공부를 하라 하시오”라든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니까
단단히 각오를 하고 공부를 하면 반듯이 대학에 진학할 것입니다.”
라고 판에 박힌 조언을 할 것이지만 스님은 그렇지 않았다.
판에 박힌 충고는 그 말이 나무랄 데 없이 전적으로 옳은 말이기 때문에
판에 박이는 것이다. 그러나 1백 퍼센트 옳은 충고라고 해서 반듯이
1백 퍼센트의 성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야구의 투수코치가 타석에 나가는 타자에게 ‘홈런’을 쳐야한다고 하는
충고는 전적으로 옳은 충고이지만 그 충고 때문에 홈런을 치게 되지는 않는다.
흔히 홈런을 치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면 홈런을 치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하지만, 도리어 그 충고가 부담이 되어 홈런을 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학생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충고나 조언도 그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바른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입에 발린 바른 말 보다는 바른 말 속에 갇힌 허상(虛像)을 깨달으라는 것이
“보살행을 했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환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인 것이다.
기장포교당에서 풀을 뽑던 술망나니, 도박꾼, 아내를 때리기를 일삼는
폭군 사내는 겨우 한글을 깨친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람에게 스님은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그저 반야심경을
외우라고 했다. 반야심경을 외우면 전도와 몽상에서 벗어나 바른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식의 충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심심할 때 읽어서 외워 보라 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가량 뒤에
포교당에 갔을때, 전혀 생각지 못한 빛을 목격했다.
그 망나니 중년사내의 태도가 확연 달라져 있었다.
우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 같이 데면데면하지 않고 친절했다.
또 얼굴이 맑고 온화했다. 우리가 가자 스님이 그를 불러
“판사님이 오셨으니 나에게 한 말을 다시 판사님에게 해 보시오” 하셨다.
나의 일행 중에 초임판사가 있었다. 그 사내가 하는 말은 대강 이러했다.
그동안 그는 나이 40이 넘도록 원수 진 사람도 없는데 사람들을
까닭 없이 미워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마땅히 하는 일이 없으니 도박판을 드나들었고 돈을 잃으면 잃은 대로
억울한 생각에 술을 마시고, 몇 푼을 따면 땄으니 한잔하고,
술에 취하면 앞 뒤 없이 세상을 원망하는 감정이 솟구쳐 행패를 부리고
아내를 때리고 자식들을 못살게 굴었다는 것이다.
지서주임이 감옥에 가겠느냐 아니면 다시는 나쁜 짓을 않겠다는 보증을
절에 가서 스님에게서 받아오겠느냐 했을 때, 자기 생각에는 지서주임도
뇌물 먹는 도둑이고 면서기도 부정하는 탐관오리, 지체가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온통 도둑천지인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감옥에 가는 것은 싫어서 스님에게 왔더니
“내가 지은 죄가 큰 죄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 큰 죄라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까지 세상을 거꾸로 살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젊은 검사가 지은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피의자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했다는 말을 들었다.
피의자가 자기 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의 아닐 것이다.
일단은 피하고 보자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중략~
도둑은 훔친 재물을 줄여 죄를 가볍게 하려는 것이 보통이고 도둑맞은
사람은 일은 것을 줄이지 않는 것이 상식인데 도둑맞은 어느 도지사는
한사코 도둑맞은 돈을 줄이고 도둑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세상.
큰 도둑일수록 영웅시되고 동정 받는 사회병리현상.
이것이 전도(顚倒)된 세상이 아니겠는가.
이 전도된 세상에서 자기만은 어떤 죄를 지어도 길이 잘 살리라 꿈을
꾸는 사람들은 광덕스님이 “꿈 깨라”하신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3권 중, 도피안사, 글 송암 지원
광덕(光德) 스님이 즐겨 쓰는 말이 있다.
누가 찾아와 “형편이 이러 이러한 데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면
“지금까지의 몽상(夢想)에서 깨어나야지”하신다.
한마디로 ‘꿈 깨라’다. 어찌 보면 무정하기 짝이 없다.
꿈꾸어 오던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꿈 깨라’하면 그것은 ‘되지도 않을 일에 연연하지 말고 일찍이 단념해라’
하는 말과 같다.
한가닥 희망을 갖고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무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러 이러 하니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자상하게 조언을 해도 조언을 구하는 사람으로서는
긴가 민가할 터인데 한 마디로 ‘꿈을 깨라’하면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조롱하는 말로도 들리고 업수이 여기는 말로도 들릴 수가 있다.
그래서 스님을 냉정하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프랑스의 작가이며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조언을 구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기가 바라는 조언을 해 줄 사람을 찾아가서 조언을 청하게 된다.
이 사람이면 내가 바라는 조언을 해 줄 것이다 믿고서 찾아가 조언을
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처럼 별러서 찾아와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꿈 깨라’하니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좀 자상하게 대해 주면 안 되느냐 하면,
“사람마다 다 같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조언이 아니면 듣지 않는다. 설사 조언을 따른다 해도 세상 물정을
모르는 중의 조언은 처음부터 현실성이 없다.”
그러니 이렇게 하면 사업이 성공하고 저렇게 하면 영달(榮達)을 하고
하는 따위의 조언은 도리어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해가 되면 되었지
유익하기 않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실한 마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현실을 바로 보고 대처할 수 있게 하려면
지금까지 욕망을 쫓아 살아온 꿈을 깨뜨려 주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전도(顚倒)와 몽상을 멀리 벗어나 끝내 열반에 이른다고 하는 반야심경의
“원리전도몽상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究竟)”
이 바로 스님의 그러한 뜻을 설하고 있다.
스님은 술망나니에 도박꾼에서 아내를 때리는 사내에게 『반야심경』을
외우게 한 것도 그러한 뜻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몽상을 깨뜨리는 방법이 여러 가지였다.
스님이 강남의 봉은사 주지로 계실 때였다. 그 때, 봉은사에는 대학생
불교연합회의 구도부 학생들이 스님들과 같은 일종의 출가생활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매주 일요일에는 대학생들을 위한 법회가 열렸다.
그 때, 광덕 스님은 이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지도법사였다.대학생들이
모여서 수도를 하고 법회를 하는 봉은사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절로
인식되고 있었다. 어느덧, 이러한 인식은 대학을 지망하는 학생이나
부모가 불공을 드리면 소원을 이룬다고 하는 믿음으로 변해서
많은 사람이 불공을 드리러 왔다.
그 중, 한 부인이 스님을 찾아와 하는 말이
“스님, 저희 아들이 이번에도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였다.
그 때, 스님의 말이
“잘 생각해 보세요. 보살님의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면 다른 아이가
그 대신 합격을 못합니다. 보살님의 아들이 합격을 안해서 다른 아이가
그 대신 합격을 합니다. 보살행을 했다고 생각하십시오.”였다.
대학에 낙방한 것을 억울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군가 합격을 하면 누군가 불합격을 한다. 그래서 갈등이 생긴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다 경쟁자로 보이고 내가 물리쳐야 할 적으로 보인다.
모두가 자기본위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승은 사바세계라고 스님은 말한다.
여느 사람 같으면
“더 열심히 공부를 하라 하시오”라든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니까
단단히 각오를 하고 공부를 하면 반듯이 대학에 진학할 것입니다.”
라고 판에 박힌 조언을 할 것이지만 스님은 그렇지 않았다.
판에 박힌 충고는 그 말이 나무랄 데 없이 전적으로 옳은 말이기 때문에
판에 박이는 것이다. 그러나 1백 퍼센트 옳은 충고라고 해서 반듯이
1백 퍼센트의 성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야구의 투수코치가 타석에 나가는 타자에게 ‘홈런’을 쳐야한다고 하는
충고는 전적으로 옳은 충고이지만 그 충고 때문에 홈런을 치게 되지는 않는다.
흔히 홈런을 치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면 홈런을 치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하지만, 도리어 그 충고가 부담이 되어 홈런을 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학생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충고나 조언도 그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바른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입에 발린 바른 말 보다는 바른 말 속에 갇힌 허상(虛像)을 깨달으라는 것이
“보살행을 했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환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인 것이다.
기장포교당에서 풀을 뽑던 술망나니, 도박꾼, 아내를 때리기를 일삼는
폭군 사내는 겨우 한글을 깨친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람에게 스님은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그저 반야심경을
외우라고 했다. 반야심경을 외우면 전도와 몽상에서 벗어나 바른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식의 충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심심할 때 읽어서 외워 보라 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 가량 뒤에
포교당에 갔을때, 전혀 생각지 못한 빛을 목격했다.
그 망나니 중년사내의 태도가 확연 달라져 있었다.
우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전과 같이 데면데면하지 않고 친절했다.
또 얼굴이 맑고 온화했다. 우리가 가자 스님이 그를 불러
“판사님이 오셨으니 나에게 한 말을 다시 판사님에게 해 보시오” 하셨다.
나의 일행 중에 초임판사가 있었다. 그 사내가 하는 말은 대강 이러했다.
그동안 그는 나이 40이 넘도록 원수 진 사람도 없는데 사람들을
까닭 없이 미워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마땅히 하는 일이 없으니 도박판을 드나들었고 돈을 잃으면 잃은 대로
억울한 생각에 술을 마시고, 몇 푼을 따면 땄으니 한잔하고,
술에 취하면 앞 뒤 없이 세상을 원망하는 감정이 솟구쳐 행패를 부리고
아내를 때리고 자식들을 못살게 굴었다는 것이다.
지서주임이 감옥에 가겠느냐 아니면 다시는 나쁜 짓을 않겠다는 보증을
절에 가서 스님에게서 받아오겠느냐 했을 때, 자기 생각에는 지서주임도
뇌물 먹는 도둑이고 면서기도 부정하는 탐관오리, 지체가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온통 도둑천지인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감옥에 가는 것은 싫어서 스님에게 왔더니
“내가 지은 죄가 큰 죄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남을 괴롭히는 것이 큰 죄라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까지 세상을 거꾸로 살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젊은 검사가 지은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피의자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했다는 말을 들었다.
피의자가 자기 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의 아닐 것이다.
일단은 피하고 보자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중략~
도둑은 훔친 재물을 줄여 죄를 가볍게 하려는 것이 보통이고 도둑맞은
사람은 일은 것을 줄이지 않는 것이 상식인데 도둑맞은 어느 도지사는
한사코 도둑맞은 돈을 줄이고 도둑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세상.
큰 도둑일수록 영웅시되고 동정 받는 사회병리현상.
이것이 전도(顚倒)된 세상이 아니겠는가.
이 전도된 세상에서 자기만은 어떤 죄를 지어도 길이 잘 살리라 꿈을
꾸는 사람들은 광덕스님이 “꿈 깨라”하신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3권 중, 도피안사, 글 송암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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