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발발
당시 일본의 총 병력이 30여 만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전 병력의 3 분의 2가 조선 침략에 투입된 셈이었다. 나머지 병력 중 약 10만여 명은 도요토미의 지휘 아래 나고야에 머물러 있었으며, 3만여 명은 교토를 수비하고 있었다. 20만 대군의 침입을 받은 조선은 불과 20일 만인 5월 2일, 수도 한양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6월에 평양을 내주고 선조는 의주성에 피난했다.
조선은 전라도 지역과 평안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을 일본군에게 내주게 된것이다. 하지만 전라도 지역의 수군만큼은 결코 일본에 밀리지 않았다.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은 해전에서 연패를 거듭해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이 완전히 차단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6월 이후부터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가 보낸 원군으로 전세는 조금씩 역전되고 있었다. 이듬해 2월 평양성을 회복하고, 행주산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4월에 마침내 한양을 탈환했다. 이 때 한성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군은 강원도와 충청도에 주둔한 병력과 함께 전군을 남하시켜 울산 위쪽의 서생포에서 진주 아래 쪽의 웅천까지 성을 쌓고 화의를 진행시켰다.
및 일본은 화의를 진행 시키는 한편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여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 진주성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 진 등이 전사하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한편 명은 일본의 화의제의를 일단 수용하고 심유경을 도요토미에게 보내 2, 3년간 교섭을 진행시켰다. 화의 진행 과정에서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을 것, 무역허가 증명서인 감합인을 복원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조선 왕자 대신 12인을 인질로 보낼 것 등 네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잡아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 보냈다. 심유경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명에 보고하여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내용의 봉공안을 내세워 명의 허락을 얻어냈다.
이에 1596년 명은 사신을 파견하여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책서와 금도장을 전하니 도요토미는 분개하면서 이를 받지 않고 사신을 돌려보낸 뒤 다시 조선 침략을 꾀하였다. 이 때문에 심유경은 명으로 돌아가 국가를 기만한 죄로 처단되고 이로써 몇 년간 지속되던 화의는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1597년 1월 15일 일본은 다시 15만 명의 병 력으로 조선을 침입해왔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이 다시 침략하자 명나라의 원군도 다시 압록강을 건너왔고 조선 땅은 또 한 번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한 때 임금이 피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일본군의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그동안 방비책을 마련한 조선군과 명군의 거센 반격으로 일본군은 충청도를 넘지 못하다가 이듬 해 8월 도요토미가 병으로 죽자 철군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후 겨우 퇴로를 열어 11월에 완전 패퇴했다. 이로써 6년 7 개월간의 조. 일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임진왜란이
삼국에 끼친영향
게다가 전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신분에 상관 없이 특전을 주거나 면천의 혜택을 주었기에 조선사회는 신분 제약이 해이해질 수 밖에 없었다. 전란을 전후해서 민간의 생활은 처참해져 심지어는 인육을 먹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전란 중에 조정에 불평을 품고 내란을 획책하는 사례도 있었다.
1594년의 송유진의 난, 1596년의 이몽학의 난이 당시에 일어났던 대표적인 반란 사건으로 일반 민중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문화재의 소실도 엄청났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고 서적, 미술품 등이 없어 지거나 약탈당했다. 또 역대 실록을 보관 하던 사고도 전주사고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하지만 전란이 꼭 악영향만 끼친것은 아니었다. 전란의 영향으로 그동안 소흘하게 다루어졌던 국방 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타민족과의 갈등을 통해 애국심이 고취되기도 했다.
또한 병제를 재편하고 무기의 개량에 착수했으며 병술을 개혁했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예비군인 속오군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고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는 종래의 주무기인 활, 창, 검 등의 무기와 총통, 완구, 화전 등의 화기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일본과의 전투에서 습득한 조총을 제조하여 실전용으로 배치하기도 했다.
또한 전란 때 명군이 지원한데 대한 결과로 숭명사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들에 의해 관우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한양을 비롯한 여러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한편 일본도 전란으로 인해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오랫동안의 무리한 전쟁으로 국민 생활을 피폐해져 있었으며,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 되어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에서 끌고 간 도공들의 도자기 제조로 도자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약탈해간 조선 활자의 영향으로 활자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거기에다 포로로 끌고간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이념을 수립 하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서적들을 가져가 일본 문화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이루기도 했다. 명나라 역시 큰 변화를 겪었다 조선의 요청으로 대규모 원군을 파병했던 명은 엄청나게 국력이 소모되었고, 그 때문에 국가 재정이 문란해져 국방에 어려움이 초래되었다.
그러한 명의 국방력 약화는 여진족의 세력 팽창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여진족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17세기 동북아 국제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조선은 비록 일본의 침략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통이 지속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힘이 커지고 양반 중심의 정부의 힘이 약화되는 현상을 낳았다. |
덕흥대원군
이초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해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시킨뒤 살해하였다. 또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으로 유폐시켰다. 대북파의 의견에 따라 저지른 광해군의 이같은 패륜 행위는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 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 최고의 어른 위치에 있으면서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훈민정음으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 후 1632년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소생으로 영창대군 외에 정명공주가 있다. 금강산 유점사에는 그녀가 친필로 쓴 '보문경' 일부가 전해지고 있으며, 인목왕후 필적의 첩이 남아 있다. 죽은 후 선조와 의인왕후가 묻혀 있는 목릉에 묻혔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 생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선조는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잘 돌봐달라는 유교를 남기는데, 이 유언은 오히려 영창대군을 궁지로 몰아넣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들은 선조의 유교를 염두에 두고 영창대군을 경계하였다. 그러던 중 1613년 소양강을 무대로 유흥을 즐기던 서양갑, 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옥에 갇힌 이른바 '7서의 옥'이 발생했다.
이 때 이이첨 등은 그 들이 역모를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김제남이 이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한 후,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배하는 한편 김제남은 사사시켰다.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유배된 후에 조야에서 끊임 없이 그를 구원해 달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러나 1614년 봄,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영창대군은 살해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관작이 복 구되었다.
그는 원래 성질이 포악한데다가 포로로 잡혔다는 굴욕감에 사로잡혀 그 정도가 날로 심해졌다. 그래서 그 분을 발산하기 위해 술로 세월을 보냈고, 툭하면 상민을 구타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한편 왜장 가토는 그가 포로로 있을 때의 친분을 이용해 여러 차례 그에게 서신을 띄워 내정을 탐사하려 하였다. 임진왜란 후 1603년 사옹원도제조가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봉작에 대한 서얼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 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었는데, 이 때문에 임해군이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 하여 대북파의 주청에 의해 유배 되었다가 이듬해 죽임을 당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작 신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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