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왕조 즉위초의 평화
|
동인과 서인으로의 붕당
|
북인과 남인
|
북방의 변란과 임진왜란 의 발발
그러나 이듬해 돌아온 두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통신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 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것은 민심만 혼란스럽게 할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 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의 주장과 달리 이듬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해 왔으니,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에 습격한 고니시부대에 의해 부산포가 함락되면서 왜군은 무서운 속도로 북상 하여 보름뒤인 4월 29일에는 충주를 장악했고, 5월 2일에는 한양을 함락시켰다.
이후 개성, 평양 등이 차례로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양(피난)을 가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왕이 피난해 있던 의주성 주위만을 남겨놓은 채 함경도 일원까지 점령당해 명나라에 원군을 청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군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 명나라의 원군에 힘입어 선조는 적의 포로가되는 신세는 면할수 있었고, 이때부터 다시 왜군을 남쪽으로 격퇴하여 1593년 4월에 한성을 수복했다. 그리고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명과 왜의 화의가 깨지면서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생했지만, 1598년 8월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
신권정치의 구현
|
붕당정치의 바른 이해
이와 같은 원리는 현대의 민주 정치 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되던 시기를 돌이켜 보아도 이것은 명백해진다. 흔히 조선 말기를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안동 김씨, 풍양조씨, 대원군 등의 외척, 인척 세력의 독재가 횡행하던 시기였다. 이사실은 조선을 망하게한 원인이 당쟁이 아니라 일당 또는 일부 세력의 독재라는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좋지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쟁, 즉 붕당 정치는 결코 식민사관에서 강요받았던 '망국적 권력다 툼'이 아니었던 것이다. |
'참고실 > 역사의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의 발발(임진 왜란) (0) | 2016.09.17 |
---|---|
한국군 촬영한 '6·25'사진 (0) | 2016.09.16 |
을사사화 (0) | 2016.09.14 |
李 昰應의 集念 (0) | 2016.09.12 |
인종의 등극 (0) | 2016.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