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선조 왕조시대

淸潭 2016. 9. 15. 10:19

선조왕조 즉위초의 평화


즉위 초년에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 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신봉자가 되었으며,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밀어 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또한 당시 성리학의 거두로 일컬어지던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으 며, 심지어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 선조는 친정을 하게 되자 가장 먼저 과거제를 개편하여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였다. 그리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증직하고 이후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림들을 신원하였다. 반면에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은 추탈하였다. 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유관 등을 죽이고 녹훈의 영전을 받았던 이기, 윤원형 등을 삭훈하였다. 이로써 민심은 안정되고 정계는 사림이 득세하여 한때 문치의 깃발 아래 조정은 평화를 되찾았다.

동인과 서인으로의 붕당


동인에는 주로 주리철학적 도학을 펼친 조식과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가, 서인에는 주기철학을 주장 했던 이이와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인물들이 참여했다. 사림의 분당 사태가 조정을 혼란시키자 이이는 이들의 중재를 맡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그 후 이이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그러던 중 1591년 세자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선조의비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조정은 별수 없이 후궁 소생 중에 세자를 책봉해야 했다. 그 때 좌의정이었던 서인의 거두 정철은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서 삭탈관직 되었다. 이사건으로 서인의 세력은 실각하게 되었는데, 정권을 잡은 동인들은 실각한 서인들에 대해 유혈 숙청을 감행하였다.

북인과 남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다 삭탈관직 당한 서인 정철의 치죄 과정에서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과격파와 귀양을 보내야 한다는 온건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과격파인 전자를 북인, 온건파인 후자를 남인이라 했다.

북방의 변란과 임진왜란 의 발발


야인들은 1583년과 1587년 두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이탕개가 주동이된 이반란으로 한때 경원부가 함락되고 부내의 관할권이 완전히 장악당하자 조정은 온성부사 신립과 첨사 신상절로 하여금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도록 했다. 한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곳 동향을 살피도록했다.

 

그러나 이듬해 돌아온 두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통신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 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것은 민심만 혼란스럽게 할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 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의 주장과 달리 이듬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해 왔으니,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에 습격한 고니시부대에 의해 부산포가 함락되면서 왜군은 무서운 속도로 북상 하여 보름뒤인 4월 29일에는 충주를 장악했고, 5월 2일에는 한양을 함락시켰다.

 

이후 개성, 평양 등이 차례로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까지 몽양(피난)을 가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왕이 피난해 있던 의주성 주위만을 남겨놓은 채 함경도 일원까지 점령당해 명나라에 원군을 청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군 이순신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 명나라의 원군에 힘입어 선조는 적의 포로가되는 신세는 면할수 있었고, 이때부터 다시 왜군을 남쪽으로 격퇴하여 1593년 4월에 한성을 수복했다. 그리고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명과 왜의 화의가 깨지면서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생했지만, 1598년 8월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신권정치의 구현


명종시대까지는 역모에 버금가는 행위로 간주되던 붕당 행위를 선조는 정치적 개념으로 적극 수용해 보다 발전적인 당파정치로 이끌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이러한 붕당 정치가 과도기적 양상을 띠고 있었기에 다분히 혼란상을 야기시켰고, 여기에다 임진왜란이 겹쳐 그의 의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어쨌든 선조가 구상했던 당파 중심의 신권정치는 근대적 정치형태인 의회정치를 이끌어낼수 있는 기반이 될수도 있었다.

붕당정치의 바른 이해


우리는 당쟁으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강요받아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요된 이같은 식민사관의 근본 문제는 바로 붕당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다는데 있다. 당쟁, 즉 붕당 정치에서는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것이 곧 상호 공존하는 방법이었다. 붕당 정치의 본질적인 취지는 바로 일당이 권력을 독점하는것을 방지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현대의 민주 정치 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되던 시기를 돌이켜 보아도 이것은 명백해진다. 흔히 조선 말기를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안동 김씨, 풍양조씨, 대원군 등의 외척, 인척 세력의 독재가 횡행하던 시기였다. 이사실은 조선을 망하게한 원인이 당쟁이 아니라 일당 또는 일부 세력의 독재라는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좋지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쟁, 즉 붕당 정치는 결코 식민사관에서 강요받았던 '망국적 권력다 툼'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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