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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昰應의 集念

淸潭 2016. 9. 12. 11:38

李 昰應의 集念  


흥선 대원군의 이름이다.李 昰應 이라는 본명보다는 흥선 대원군을 이름처름 아는데 조선 왕조에는 네분의 대원군이 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 대원군 ,인조의 아버지 정원 대원군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이중 유일하게 흥선 대원군만이 살아서 집권했는분인데,

부지기수의 역사적 인물이 많지만 이 하응 만큼 집념이 강한 인물도 유일무이하리라?

그는 아버지[南延君]묘를 명당에 모시기위해 大寺刹을 불을 질렀고 또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

안동 김씨 60년의 세도에 맞대응한 장본인으로서 결국 2代天子之地에 매장한 발복으로 2대 황제가 탄생되었고,

안동 김씨의 세도에 몸부림은 얼마나 처절했든가?

영특하고 쓸만한 왕손은 어떤구실 명분을 세워 도륙을 감행하든때이니,

 살아남기 위한 그의 파락호 생활과 더불어 그의 본체를 속이는 위장처세술은 가히 혀를 내두르고도 남을것이고 손자병법 인간처세술 [難得糊塗]를 실행한 귀재가 아니엿든가?

여기 파란만장한 그의 일대기를 기술하여 조선조 후기의 역사적 드라마를 짚어 보는것도 많은 역사지식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대원군이란 왕이 後嗣없이 죽어 종친 가운데 왕위를 계승되는경우 새로운 왕의 生父를 말한다.

李 昰應 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흥선 대원군이였다.

이름은 이 하응,자는 時伯,호는 石坡   대원위 대감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球]이며,아들이 조선 26대왕 고종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하에서 그들의 주목을피하기 위해 시정의 무뢰한들과 난행을 일삼았으며,

철종의 유고시에 대비 조대비와 가까이 지냈고 철종이 죽자 둘째아들[命福;고종의 아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흥선대원군으로 진봉하여,

 조대비의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庶政을 총괄하게되었다.

그는 서화에 능하여 난초의 그림은 불세출의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풍수관은 인간욕심의 한계를 넘어선 不可思矣 그 자체였다.

자기 아버지 묘 명당 이장을 위하여 절에 불을 질렀고 증거인멸을 위해 살인까지 감행했으니 말이다.또한 그의 위장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도가문의 잔치집에서 걸식도 마다하지않았고,식은 전 조각에 침을뱉아 내던지면 도포자락에 닦아 앙천대소하며 개걸스럽게먹었고,

 시정잡배 무뢰한들과 어울려 그의 본체를 귀신같이 위장술을 이용했든것이다.

이 모든것은 안동 김씨의 세도를 탈환하기위한 몸부림이였는데,

[鄭萬人]이라는 풍수사를 십 수년만에 공을들여 자미원국이라는 천하제일명당에 이장하여,

2대천자지지의 명당의 발복으로 2대에 걸처 皇帝를 탄생시켜 안동 김씨 세도의 종지부를 찍는 興味盡盡한 역사적 주인공의 실화다.

경기도 연천군 남송정에 있든 아버지 [남연군]묘를 당시 名風水 정만인의 2대왕지지 란 명당판정을 받고,

 遷葬한지 7년만에 후일 고종이되는 둘째아들 命福을 낳았고 손자 순종까지 2대에 걸처 황제를 탄생시켰으니 제대로 봤는 風水가아닌가? 本 敍述文은 이 하응의 정치歷程은 배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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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藏地秘를 찾아라?



통일 신라시대 당나라의 양태진이라는 풍수의 대가가있었는데

그는 道力이 매우높고 인격이 고매하여 唐의 國師로 추대된 사람이다.

楊太師는 충청도 내포 일대를 둘러보고 글을 남겼는데 동방의 백제땅에 자미원국이 있는데 ,하늘아래 둘도 없는 천하의 大地이다.

우리 중국에도 자미원이 하나있는데 그곳은 陽宅[집터]자리로 陰宅[묘터]으로 된곳은 동방의 백제땅에 하나가 있을뿐이다.

그렇다면 이天藏地秘의 산세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바로 하늘이 감추어놓은 하나밖에 없는 명당자리!!傳說과 逸話도 많은 남연군 묘?

풍수를 念頭에 둔사람이면 전국 최고의 학습장이라 전국에 地官들이 끊이질않는다.

풍수에 문외한도 와서보면 무릅을 탁치며 탄복하는명당이니 말이다.

 亥座巳向이면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보는것이며,일본인들은 남연군묘의 王氣가 너무세어 後龍脈을 일부 끊어 놓았다.

일본인들이 끊어놓은 龍脈을 500미터 더올라가면 유명풍수로 當代를 풍미한 육관도사[손석우]의 묘가 있는데 戌座辰向의 伏雉穴로서 꿩이 엎드려다가 날아 오르는 형국이다.

흥선대원군은 죽어서도 순탄치 않았는데,처음은 본처 여흥민씨와 묻혔다가 파주군 대덕동으로 1908년 이장하여 다시 58년후 현위치로 遷葬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흥선군은 사주가 괴강사주팔자인데,목적달성을 위해 정말 보기싫은 사람과도 만나고 참을성이 유별한것이 天藏地秘를 찾을수있는 풍수를 찾기위해 13년을 京鄕에서 정성을 기울인데서 엿볼수 있다.

자!풍수에서 첫번째인 자미원국의 천장지비?여기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여 그발복으로 권력세도가의 안동김씨를 타도하기 위한 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즉 三吉.六秀.九星.正體가 완벽하게 갖춰진 지구상에서 하나밖에없는 명당을 찾는 작업인데 그게 어디 쉬운일인가?

첫째로 풍수에 능한 地師를 만나야 하는데 저마다 자신이 제일이라니 진짜 명사를 판단할수가 없었다.

京鄕에 있는 지사들까지 총동원했으나 성과를 거두지못해 몇년을 더 찾았는데 드디어 [鄭萬人]이라는 명사를 만났으나 전혀 알려지지않은 농사꾼이였다.

일체 말을 않고 많은 정성을 들여도 벽창호이니 실망이 클수밖에 없었다.

성질이 불같은 흥선군은 자신을 달래며 천하의 대명당이 그리 쉬운 일인가?지성이면 감천이라 믿고 자세를 더 낮춰

"정 道師님!!제가 대명당을 구하는 까닦은 이나라의 체제를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국가의 번영과 만백성의 갈길을 가고자 함이니 어찌 작은 일이라 하오리까?

이렇게 꾸준히 설득하니 정도사인들 감동하지 않겠는가?

"비록 천박한 재주지만 대감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침내 흥선군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되었고 두 사람은 대명당을 찾아 충남 덕산 가야산 으로 향하는 발길은 비장하기만 했다.  

後載:  2 代天子之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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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임금이 날자리; [二代天子之地]


덕산 가야산 아래에大 명당이 두개 있는데 첫째는 萬代 영화의 자리요?둘째는 2代에 걸처 皇帝가 날자리인대 대감께 권고하는것은 첫번째 입니다".

鄭萬人 도사의 충정어린 제안에 흥선군은 거절하면서"지금 우리가 찾는것은 국권을 마음데로 농락하는 외척의 발호를 물리치고 왕정체제로 돌아가게 하는것이 유일한 목표가 아닙니까?

萬代에 영화를 누리는것도 좋지만은 반세기를 넘어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삼감마마가 허수아비가 된지 오래되지 않습니까?"

피를 토할듯한 흥선군의 설득이 계속되었으나,정도사의 생각은 그와는 멀었으니 "이나라는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갈등으로 멀잖아 망국의 슬픔을 겪게 될탠데,.......정도사는 國運을 예언하면서 임금이 날자리보다 만대 榮華자리를 권고하는것이다.

그러나 흥선군의 신념은 확고하였고,"한달을 하더라도 반드시 왕이 날자리를 점지하여 주옵소서!"

이러한 論爭속에 십수년을 찾든 명당자리를 찾아가는데 어찌 가슴이 안뛰겠는가?"

"저기 보이는 저 산봉우리가 명당이 있다는 가야산인데 골짜기 안쪽에 있습니다".정만인의 說明을 들으면서 골짜기 입구의 수구를 살펴본즉 양쪽에 솟아있는 두 봉우리가 자웅으로 되어있어 逆水砂를 이루어 수구를 거두어 주고 있잖은가?

그는 十年을 명당을 찾으면서 산서를 탐독하여 풍수에 관한 상식이 풍부했다.

골짜기를 올라가는 계곡에 청룡과 백호의 머리가 팔장을 끼듯 相接하고 있지를 않은가?산세가 이렇게 생겼으면 필히 대명당이 응결되 있다는 학설을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더올라가니 드디어 임금이 병풍을 두르고 정좌하고 있는 산세가 시선을 끌었다.

"저 자리가 우리가 찾는 자리이지요?기세가 참 대단합니다."

그러나 명당자리 앞쪽에 절이 있으니 이일을 어쩌지요?"이러한 흥선군의 질문에 정도사는 고개만 끄덕일뿐이다.

발길은 더욱 빨라져 중앙에 있는 나즈막한 봉우리인데,이곳에서 보니 主龍 양편에 天乙,太乙등의 貴峰이 솟고,三吉.六秀.四神.八將이 저마다 정기를 뿜어 혈처를 비추고 있었다."

흥선군 대감!!이자리가 양대에 걸처 임금이 날자리입니다.그러나 穴處 앞에 옛절이 있으니,저 사찰을 없애지 않고는 이 명당이 발복이 되질않습니다."

이렇게 정도사는 위쪽에 있는 만대 영화자리에 묘를 쓰는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하나 끝내 고집을 굽히지 않고 여기에 묘를 써서 그발복으로 왕정을 회복하는것이 유일한 소망이였다.

이 앞에 고찰이 방해가 된다면 절을 없애 버리더라도 아버님의 체백을 모실것이오니 도사님께서 저를 도와 주십시요?

흥선군의 결심은 비장하였고 신라때 창건한 가야사인데 대웅전 바로뒤에 대 명당이 응결되어 영검한 사찰로 소문이 나있었다.드디어 절을 없애기로 결심한 흥선군은 노스님 주지와 친교를 맺을 요량으로 접근하는데 거사를위한 1단계 작업이였다.

사교술 또한 뛰어나 노주지스님과 의형제맺기에 이르렀고,맏아들을 대리고 와 큰아버님께  큰절을 시키니 수도에만 정진하든 노스님은 기분이 좋아 벽장속에 음식들을 새로 맞은 조카에게 다넘겨주니 흥선군의 거사가 진척되고 있었다.

목적은 십여명이 있는 절에 불을 질러야 하는데 어떻게 절을 비우게 한담?......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생각을 하든끝에 가야사 옆 수덕사에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는 [齋]유치하도록 갖은 수단을 강구했다.

王家에서 올리는 재이고 경비가 삼천양이나 든다니 음식들이 얼마나 풍족하겠는가?드디어 노주지 스님은 모두 동원하여 수덕사로 향하게 되니,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것이다.

가야사에 방화를 위한 음모가 아니였든가?서울 중형 [最應]과 다른 형제들도 오도록 했는데,흥선군 일에는 원래 반대하든 이 최응 은 절을 불태우고 선친의 묘를 모신다는 발상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법당을 창건하기위해 재물을 시주해도 묘를 쓰려고 불당에 방화를 한다는 소리는 들은즉이 없내."법당안에서 침만 밷어도 신장님의 벌을 받는다는데 대웅전에 방화를 하고 살아남기를 바라는가?"

그러나 흥선군의 集念은 흔들림이 없었고 비장하기만 했다.나 혼자 잘되려고 도모하는것이 이니라 한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는 기도가 이일이라고 역설하였다.

절이 텅빈것을 확인하자 형님과 法堂안으로 들어갔는데,그의 손에는 솜방망이에 기름이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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