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폐출거사의 불씨
박원종은 한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주로 국가의 재정 문제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 행각을 비판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는 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506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박원종이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의 누이 박씨부인 사건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누이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실이었는데 인물이 절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 그녀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던 연산군은 마침내 큰어머니인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하였는데, 이 때문에 박씨부인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 후로 박원종의 연산군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사직 되었던 것이다.
성희안은 박원종의 원한과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얻고자 했다. 그는 거사를 도모할 지략은 있었지만 군사력을 동원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박원종은 원래 무신 출신이었으므로 병력을 동원할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거사에 참여할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당시 인망이 높았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끌어들였으며,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와 무장 출신 장정, 박문영 등의 호응을 얻어냈다.
거사일은 1506년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한 날로 잡았다. 하지만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는 갑작스럽게 취소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거사 계획은 일시 유보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혹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군사를 모아 예정일에 거사를 결행했다. |
거사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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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정치의 종말
'여씨향약' 은 원래 송나라 학자 여대충의 저작이었는데 후에 주희가 첨삭하고 주석한 '주자증손 여씨향약'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는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한 일종의 민간 자치 규율이었다. 또한 과거제가 인재를 등용하는데 한계가 있다면서 사림들의 천거에 의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천거 등용제인 현량과가 실시되어 신진 사류 28명이 요직에 배치되었다.
조광조의 이같은 정책은 이른바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 이상 정치를 행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정치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의 반정 공신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로써 조광조를 통한 4년 동안의 중종의 개혁정치는 종말을 고하였다. |
여러가지 사건들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기 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신조약 후 조선은 종래 쓰시마에서 보내던 무역선인 세견선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조선 조정에서 보내던 세사미두를 반감하는 동시에, 상주하던 왜인들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변란은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에는 추자도 왜변, 동래염장 왜변 등이 있었고, 1529년에는 전라도 왜변, 1544년에는 사량진 왜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은 왜인들의 내왕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1512년 북방의 야인들은 갑산, 창성 등지를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 했는데,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4군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들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 지대에 순변사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수축하여 북방 방어벽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야인들의 4군, 6진 지역에 대한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만포첨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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