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일파의 개혁작업
현량과는 성균관을 비롯한 삼사와 육조에 천거권을 주고, 지방에서는 유향소에서 천거하여 수령과 관찰사를 거쳐 예조에 전보하도록 했다. 천거근거로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의식 등 일곱가지 항목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거된 사람은 전정에 모여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른 뒤에 선발되었다.
그래서 후보자 120명 가운데 현량과를 통해 급제한 사람은 28명인데, 그들의 천거사항을 종합해 보면 학식과 행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들 28명의 연고지를 살펴보면 경상도 5명, 강원도 1명, 그 외 1명 등 7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1명은 모두 기호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조광조의 추종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지닌 신진 사림파였다.
|
개혁의 실패와 후대의 평가
|
단경왕후 신씨
그녀는 처음에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는데, 1515년 장경왕후 윤씨가 죽었을때 한 때 그녀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이행, 권민수 등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신들의 압력에 못이겨 신씨를 폐위하긴 했지만 그녀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중종은 그녀가 보고 싶으면 자주 높은 누각에 올라가 그녀의 본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신씨의 집에서는 그 사실을 전해듣고 중종의 애틋한 그리움의 정을 달래기 위해 집 뒷동산에 있는 바위 위에다 신씨가 궁중에 있을때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 놓았다. 왕은 바위에 펼쳐진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픈 마음을 삭히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치마바위 전설을 남긴 신씨는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한 평생을 보내다가 1557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영조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녀의 능호는 온릉으로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일설에는 인종이 그녀가 건네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펼칠 때에는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수렴청정에서 손을 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해 조정을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놓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1550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이런 지나친 정권욕에 불만을 품고 한때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신진 사림 세력들 을 등용시켜 외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이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 조정을 패권 다툼의 장으로 몰아갔던 희대의 악후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소생은 명종을 비롯,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이며, 능은 태릉으로 현재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
'참고실 > 역사의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李 昰應의 集念 (0) | 2016.09.12 |
---|---|
인종의 등극 (0) | 2016.09.12 |
연산군 폐출거사의 불씨 (0) | 2016.09.11 |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 의미 (0) | 2016.09.08 |
폐비사건의 배경과 윤씨의 사약 (0) | 2016.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