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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일파의 개혁작업

淸潭 2016. 9. 11. 09:38
조광조일파의 개혁작업


향약의 실시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사회, 즉 중국의 하, 은, 주 삼대에 걸친 이상사회를 민간속에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향약은 지방의 자치를 설정한 민간 규약으로 유학적 도덕관의 실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도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현량과의 도입조광조는 종래의 과거제도가 본질적인 모순으로 인해 학업을 모두 시험 준비에만 한정하도록 하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을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품과 덕행을 판단할수 없게 한다면서 이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천거제도가 바로 현량과였다. 조광조가 신광한, 이희민, 신용개, 안당 등의 찬성을 얻어 추진한 현량과는 훈구파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현량과는 성균관을 비롯한 삼사와 육조에 천거권을 주고, 지방에서는 유향소에서 천거하여 수령과 관찰사를 거쳐 예조에 전보하도록 했다. 천거근거로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의식 등 일곱가지 항목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거된 사람은 전정에 모여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른 뒤에 선발되었다.

 

그래서 후보자 120명 가운데 현량과를 통해 급제한 사람은 28명인데, 그들의 천거사항을 종합해 보면 학식과 행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들 28명의 연고지를 살펴보면 경상도 5명, 강원도 1명, 그 외 1명 등 7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1명은 모두 기호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조광조의 추종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지닌 신진 사림파였다.


이밖에도, 전통적인 인습과 구태의연한 제도를 혁파하고 궁중여악을 폐지했으며 내수사의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 질서와 통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주자의 '가례'와 ' 삼강행실'을 보급하고 이교적 이념이 담긴 기신재, 소격서 등을 없애고 '소학' 교육을 장려하여 유교사회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이같은 일련의 개혁 정치는 너무나 과격하고 성급하게 실시된 나머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혁의 실패와 후대의 평가


그의 개혁 작업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명재상 이율곡의 '석담일기'에 잘 드러나고 있다. 율곡은 이 책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의 정치적 실패의 원인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못하였다." 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보다는 미숙한 정치력과 극단적인 개혁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은 따르되 그의 극단적인 개혁성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개혁 방향만은 옳게 평가되어 명종대를 거쳐 선조 대에는 사림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된다.

단경왕후 신씨


단경왕후 신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며, 연산군의비 신씨의 외질녀이다. 그녀는 1487년에 태어나 1499년 12세의 나이로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렸다. 1506년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반정 세력들은 신씨가 왕후가 될 경우 그녀가 죽은 아버지 신수근의 원수를 갚을것을 염려하여 중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씨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중종도 공신들의 힘에 밀려 그녀를 폐위하고 말았다.

 

그녀는 처음에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는데, 1515년 장경왕후 윤씨가 죽었을때 한 때 그녀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이행, 권민수 등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신들의 압력에 못이겨 신씨를 폐위하긴 했지만 그녀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중종은 그녀가 보고 싶으면 자주 높은 누각에 올라가 그녀의 본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신씨의 집에서는 그 사실을 전해듣고 중종의 애틋한 그리움의 정을 달래기 위해 집 뒷동산에 있는 바위 위에다 신씨가 궁중에 있을때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 놓았다. 왕은 바위에 펼쳐진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픈 마음을 삭히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치마바위 전설을 남긴 신씨는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한 평생을 보내다가 1557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영조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녀의 능호는 온릉으로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장경왕후 윤씨


장경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1491년 호방현 사제에서 태어나 고모인 원산대군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 되었다. 1506년 중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에 봉해지고 1507년 중종 비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515년 세자(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죽었다. 소생으로는 인종 이외에 효혜공주가 있다. 능호는 희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문정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지임의 딸로 1501년에 태어났다.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동생인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 하고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죽이고 윤원로를 귀양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인종 집권시에는 툭하면 인종을 찾아가 '우리 모자(그녀와 명종)을 언제쯤 죽일거냐'고 하면서 괴롭혔다고 한다.

 

일설에는 인종이 그녀가 건네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펼칠 때에는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수렴청정에서 손을 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해 조정을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놓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1550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이런 지나친 정권욕에 불만을 품고 한때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신진 사림 세력들 을 등용시켜 외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이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 조정을 패권 다툼의 장으로 몰아갔던 희대의 악후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소생은 명종을 비롯,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이며, 능은 태릉으로 현재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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