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폐비사건의 배경과 윤씨의 사약

淸潭 2016. 9. 8. 09:40
폐비사건의 배경과 윤씨의 사약


한 때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 했던 왕비 윤씨는 성종이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빈으로 강등될 지경 에 처하게 되었으나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질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 만백성의 어버이인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국모의 체통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중전으로부터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왕의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법도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던 만큼 왕의 분노도 컸지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격분은 더한 것이었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두되었다. 여기에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훈구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 세력이 가세함으로써 윤씨를 폐비시키고 말았다. 폐출된 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조정 대신들간에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윤씨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윤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말하자면 윤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바치기에 이르렀고, 이에 분개한 왕은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연산군의 성격을 나타내 는 두가지 일화


성종이 어느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때 난데 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등을 핥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융은 장난 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사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던 것이다.

연산의 폭정과 폐출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중 두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연산군의 업적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 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지역의 안정 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흥청의 내력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 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 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 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폭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 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참고실 > 역사의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산군 폐출거사의 불씨   (0) 2016.09.11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 의미  (0) 2016.09.08
이조 초기의 왕비들  (0) 2016.09.05
예종의 즉위  (0) 2016.08.29
친이계의 독주  (0) 2016.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