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실/역사의기록

이조 초기의 왕비들

淸潭 2016. 9. 5. 16:02

소혜왕후 한씨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 는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 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 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한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이 사건 으로 후에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 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공혜왕후 한씨


성종의 첫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딸이다. 한명회는 첫째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내고 둘째딸을 자산군에게 시집보냈는데, 그래서 이 두딸은 자매이자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기묘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 1467년 12세의 나이로 한살 어린 자산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 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474년 17세의 나이로 소생없이 죽자 공혜왕후에 추증되었다. 능호는 순릉이며 파주에 있다.


정현왕후 윤씨


성종의 세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친모이다. 우의정 윤호의 딸로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으며 1479년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 가 폐출되자 이듬해 11월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 후 1497년 자순대비에 봉해졌으며 1530년 68세를 일기로 죽었다. 소생으로는 중종과 신숙 공주가 있다. 능호는 선릉으로 성종의 묘와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폐비 윤씨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 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에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 했으나 성종 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이 규방 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 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인수대비와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래서 윤씨는 친정으로 쫓겨난뒤 바깥세상과 접촉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그런데 1482년 조정에서는 그 녀의 거처 문제가 새로운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즉, 왕이될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한편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윤씨를 비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폐비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녀에게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있던 터였다. 그래서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 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않는다고 허위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사사한 이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 날을 고려해 '윤씨지 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를 어기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연산군은 즉위한 지 몇달 되지 않아 윤씨의 폐비사건을 알게 되었고, 신원을 모색했다. 그래서 1497년 그녀의 묘를 개장하고, 1504년에는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제헌왕후에 추승했으며 묘도 회릉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관작도 추탈된 뒤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낳은 왕비이면서도 투기심과 부덕함으로 인해 폐비당했다가 결국 참극을 당하고 말았고, 이 폐비윤씨사건은 연산 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 조정에 엄청난 살생극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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